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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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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림(柳林, 1894년 ~ 1961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 초기에 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충군애국을 맹세하며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으며, 한족노동당, 정의부, 재만한인교육회 등을 결성하며 항일 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국무위원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독립노동당을 창당하여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이승만 정권과 대립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1961년 사망 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독립기념관에 어록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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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189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유림
한자 표기柳林
출생일1898년 5월 23일
사망일1961년 4월 1일
정당무소속
본관전주
수상건국훈장 독립장
외부 링크

2. 생애

1910년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운동에 몸바칠 것을 맹세했다.[9]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안동 임동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이후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 가담해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11]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만주 지린성에서 지청천, 김응섭 등과 한족노동당, 정의부 등을 결성하며 항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평양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9]

1931년 '원산 흑색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베이징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구성에 노력하였다.[11]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으며,[13] 1944년 아나키즘 진영을 대표해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13]

귀국 후 독립노동당을 창당해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우경화된 남한 정치권에서 혁신 노선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9] 1946년 비상국민회의 노농위원장에 선출되었다.[14]

이후 노동신문을 창간,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보호에 힘썼다.[11] 1947년 남북협상 안(案)을 발표하고, 1948년 독립정부 수립이 늦어지더라도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아나키스트대회’에 한반도 대표로 초대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15]

6.25 전쟁이승만 대통령이 피신하자, 유림은 서울을 넘겨주고 자신들만 몰래 빠져나왔다며 강하게 비난하며 3개월가량 감금당했다.[13] 1952년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신익희, 장면 등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발기했으나 실패하였다.[13]

1953년 3월 휴전협정에 대한 논의가 있자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유림과 독립노농당은 휴전협정 체결을 촉구하였다.[15] 1959년 재일동포의 북한 송환이 시작되자 ‘재일동포 강제추방’이라며 이를 강력히 비판하였다.[15] 혁신동지총연맹 후보로 1960년 7ㆍ29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9]

일본군에 복무한 외아들 유원식과 부자의 연을 끊었다.[9] 1961년 4월 1일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별세,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0]

2. 1. 생애 초기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유화종'''(柳花宗)이었으나 1919년 3월 6일 '''유화영'''(柳華永)으로 개명했다.[10]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운동에 몸바칠 것을 맹세했다.[9]

2. 2. 초기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안동 임동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이후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 독립군 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담해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11] 그는 '충군애국'을 맹세했을 때 충성의 대상이 좁은 뜻의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이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9]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만주 지린성에서 지청천, 김응섭, 여준, 이탁, 김동삼 등과 한족노동당, 정의부, 재만한인교육회 등을 결성하며 항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만주에 있는 각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노력하면서,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한중 공동 항일전선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강화에 힘썼다. 한편으로는 교육 목적으로 교과서 편찬, 교원 양성 등의 활동에도 개입했다.[12]

이때 중학생이던 북한의 김일성이 유림을 찾아와 인사한 적이 있는데, 유림은 재주는 있어 보이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12] 1929년 평양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9]

2. 3. 임시정부 활동

1931년 '원산 흑색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베이징(北京) 일대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구성에 노력하였다.[11] 1942년 10월 20일 중국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으며,[13] 1943년 5월 10일 충칭에서 무정부연맹을 대표해 ‘재중국자유한인대회’ 각주단에 피선됐다.[13] 1944년 4월 24일 아나키즘 진영을 대표해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13]

2. 4. 정치 활동

귀국한 유림은 독립노동당을 창당해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우경화한 남한 정치권에서 그가 추구하던 혁신 노선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9]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노농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4]

이후 노동신문을 창간,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보호에 힘썼다.[11] 1947년 7월 남북협상 안(案)을 가장 먼저 발표했다. 1948년 3월에는 독립정부 수립이 늦어질지라도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유림은 김구, 김규식 등 다른 남북협상파와는 달리 서울에서의 협상을 주장했다.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의 협상이 아니라 서울에서의 대화와 협상을 주장했던 것이다.[13]

194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아나키스트대회(1948년 10월1일)’에 한반도 대표로 초대되었다. 그는 당시 아나키즘의 세계운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것을 다짐하며 반드시 이 행사에 참여하려 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15]

6.25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 서울을 지킬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며 서울 수호를 약속하는 대국민 담화 방송을 했으나 피신했다. 유림은 피신한 이승만을 향해 수도 서울을 넘겨주고 자신들만 몰래 빠져나와 수많은 시민을 희생시켰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유림은 이 일로 공개 비판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3개월가량 감금당했다.[13] 1952년 7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을 다시 대통령으로 모시려는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유림은 신익희, 장면 등 야당 인사들과 재야인사들을 모아서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발기했으나, 일부는 민주국민당, 민주당 등을 형성해서 떠났으므로 실패하였다.[13]

1953년 3월 휴전협정에 대한 논의가 있자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 반대를 내세웠다. 그러자 유림과 독립노농당은 더 이상의 동족상쟁을 막기 위해서 휴전협정을 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15] 1959년 12월부터 일본에서 재일동포의 북한 송환이 시작되자 ‘재일동포 강제추방’이라며 이를 강력히 비판하였다.[15] 혁신동지총연맹의 후보로 1960년 7ㆍ29선거에 출마하였으며, 여러번 선거에서 낙선하였다.[9]

2. 5. 생애 말기

유림은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외아들 유원식과 부자의 연을 끊었다.[9] 아들에게 실망하여 아내에게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탓하며 멀리하였고, 사위가 이승만 정권의 경찰 간부로 승진하자 딸과도 인연을 끊었다.[15]

1961년 4월 1일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별세했다.[9] 1961년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0]

3.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6] 1993년 독립기념관에 유림의 어록비가 제막되었고, 2001년 4월 국가보훈처는 유림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10]

유림이 입던 양복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4년 10월 29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609호 《유림 양복》으로 지정되었다.

4. 기타

유림은 외아들 유원식이 폐병으로 위독하자,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가석방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며 "내 자식이 죽더라도 독립전선에서 죽는 것이니 내 아들도 바라던 바일 것이다"라고 말했다.[15] 외아들이 일본군 장교가 되자 아들을 만나주지 않았고, 부인에게도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멀리했다. 사위가 이승만 정권의 고위 경찰이 되자, 사위와 외동딸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15] 그러나 며느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네"라고 말했다.[15]

5. 가족

항목내용
아버지유이흠(李欽)
어머니의성 김씨(義城 金氏)
부인고성 이씨(固城 李氏)
아들유원식(柳原植)
아들야나기하라 우에키


참조

[1] 뉴스 '[오늘속으로<762>(4월1일)柳林]'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3] 뉴스 donga.com[뉴스]-보훈처, 4월 독립운동가에 유림선생 선정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4]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5]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6]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7]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8] 뉴스 '[쿠키뉴스]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http://www.kukinews.[...] 쿠키뉴스
[9] 뉴스 '[오늘속으로<762>(4월1일)柳林]'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10]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1] 뉴스 donga.com[뉴스]-보훈처, 4월 독립운동가에 유림선생 선정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2]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3]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4]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15] 뉴스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6] 뉴스 '[쿠키뉴스]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http://www.kukinews.[...] 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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