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언호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61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당론에 휘말려 유배를 가기도 했으나, 정조 즉위 후 중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직제학, 이조 참판, 도승지, 홍문관 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올랐다. 이후 조덕린 복관 문제로 정조와 갈등을 겪고 사직한 뒤 사망했다. 묘는 경기도 안성시에 있으며, 박지원과 교우 관계를 맺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30년 출생 - 샤를 메시에
샤를 메시에는 프랑스의 천문학자로, 혜성 발견과 메시에 천체 목록을 만들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달의 크레이터와 소행성에 이름이 붙여졌다. - 1730년 출생 - 에티엔 베주
에티엔 베주는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베주 정리, 베주 항등식, 베주 정역 등 수학 분야에 기여했고, 《대수방정식론》을 저술하여 소거 이론과 방정식의 근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상이 세워지고 소행성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 1796년 사망 -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는 1762년부터 1796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여제로, 계몽주의 정책 추진, 영토 확장, 문화 예술 장려를 통해 러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 1796년 사망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는 군사 훈련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고 군대에 큰 관심을 가졌던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1773년-1796년)으로, 행정 및 군대 개혁과 공공 사업을 추진했으나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패배하여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등 외교적 실패를 겪었다. - 기계 유씨 - 유의동
유의동은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제19대부터 제21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경기도 평택시 을 지역구를 대표하며 다양한 정당에서 활동했지만, 2024년 제22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국회의원으로서 주요 상임위 활동과 법률 개정안 발의 및 장관 해임 건의안 제출 등 다양한 의정 활동을 펼쳤지만 여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 기계 유씨 - 유진오
유진오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대한민국 헌법 제정, 교육 및 정치 활동을 거쳤으며, 고려대학교 총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고 저서 《헌법해의》를 남겼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유언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유언호 |
출생일 | 1730년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796년 (67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본관 | 기계 |
성별 | 남자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정경부인 여흥 민씨 |
부모 | 부친 유직기, 모친 경주 김씨 |
친척 | 유언집, 유척기, 유언술 |
경력 | |
직업 | 문관 |
직책 | 문관 |
경력 | 좌의정 |
2. 생애
1761년, 문과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여 1763년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766년에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1] 그러나 1771년에 당론을 일으킨 권진응(權震應)을 옹호했다는 명목으로 남해현으로 유배를 당해야 했다.[1] 이때 영조는 “이런 종류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편당을 짓는 마음을 지녔으니, 어떻게 수죄(數罪)할 수 있겠는가?”라며 유언호와 함께 김보순(金普淳), 김재인(金載人), 김문순(金文淳)을 싸잡아 비판하였다.[1] 다음해에 흑산도(黑山島)로 이배되었고, 서인으로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호당록(湖堂錄)에서마저 이름이 지워졌다.[1]
그러나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중용되어 그해 6월에 이조 좌랑 겸 교서·교리가 되었고 두달 뒤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1] 이때 척리에 대한 입장에 대해 정조와 대체로 비슷한 견해를 보여 정조의 신임을 얻어 규장각 직제학에 제수되어 정조를 보좌하였다.[1] 이듬해 ≪명의록(明義錄)≫의 단사를 잘 찬술하여 정조에게 말안장을 하사받았으며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조 참판, 도승지, 홍문관 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1] 그러나 1783년에 형인 유언집(兪彦鏶)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1] 그러나 여전히 정조는 유언호를 신임하여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으로 삼았으며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하였으나 이후 한성판윤으로 재임하면서 정조의 명을 3일 동안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1] 그러나 다음 해에 우의정에 자리에 올랐다.[1] 유언호는 자신이 재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모두 거부하였다.[1] 같은 해에 동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다.[1] 그러나 다음 해에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정조를 비판하였고, 삼사의 탄핵을 받아 제주목에 위리안치되었으나 1년 만에 풀려났다.[1] 이후 1793년에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2년 뒤 좌의정에 이르렀다.[1] 이때 곡식 가격의 안정화 조치를 정조에게 건의하였으나 정조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1] 이후 정조가 허적을 복관 시키려 하는데에 반발하여 사직하였고 이듬 해에 사망하였다.[1] 이 때 시호를 받지 말고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으나 정조는 관례에 따라 모두 받도록 하였다.[1] 묘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생전에 연암 박지원과 교우를 맺어 박지원이 황해도 금천에서 지낼 때 개성유수를 자원하여 박지원의 생활을 돌보기도 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730-1771)
1761년, 유언호는 문과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였다.[1] 1763년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766년에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1] 그러나 1771년에 당론을 일으킨 권진응(權震應)을 옹호했다는 명목으로 남해현으로 유배를 당했다.[1] 이때 영조는 유언호와 함께 김문순등을 싸잡아 비판하였다.[1] 다음해에 흑산도로 이배되었고, 서인으로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호당록에서마저 이름이 지워졌다.[1]2. 2. 유배와 복귀 (1771-1776)
1771년 당론을 일으킨 권진응(權震應)을 옹호했다는 명목으로 남해현으로 유배를 당했다.[1] 이때 영조는 유언호와 함께 김보순(金普淳), 김재인(金載人), 김문순(金文淳)을 싸잡아 비판하였다.[1] 다음해에 흑산도(黑山島)로 이배되었고, 서인으로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호당록(湖堂錄)에서마저 이름이 지워졌다.[1]그러나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중용되어 그해 6월에 이조 좌랑 겸 교서·교리가 되었고 두달 뒤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1] 이때 척리에 대한 입장에 대해 정조와 대체로 비슷한 견해를 보여 정조의 신임을 얻어 규장각 직제학에 제수되어 정조를 보좌하였다.[1]
2. 3. 정조의 신임과 요직 역임 (1776-1783)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중용되어 그해 6월에 이조 좌랑 겸 교서·교리가 되었고 두달 뒤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1] 이때 척리에 대한 입장에 대해 정조와 대체로 비슷한 견해를 보여 정조의 신임을 얻어 규장각 직제학에 제수되어 정조를 보좌하였다.[1] 이듬해 ≪명의록(明義錄)≫의 단사를 잘 찬술하여 정조에게 말안장을 하사받았으며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조 참판, 도승지, 홍문관 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1] 그러나 1783년에 형인 유언집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1]2. 4. 가족의 사망과 관직 은퇴 (1783-1786)
2. 5. 우의정과 청나라 사행 (1786-1788)
1783년 형인 유언집(兪彦鏶)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정조는 유언호를 신임하여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으로 삼았으며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하였으나 이후 한성판윤으로 재임하면서 정조의 명을 3일 동안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1] 그러나 다음 해에 우의정에 자리에 올랐다. 유언호는 자신이 재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모두 거부하였다.[1] 같은 해에 동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다.[1] 그러나 다음 해에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정조를 비판하였고, 삼사의 탄핵을 받아 제주목에 위리안치되었으나 1년 만에 풀려났다.[1]2. 6. 조덕린 복관 문제와 유배 (1788-1789)
유언호(兪彦鎬)는 자가 사경(士京)이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족질이다.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1761년 (영종(英宗) 신사년) 등제하여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주연(胄筵)에서 지우를 받았다.[2] 정조가 즉위한 뒤 총애를 받아 몇 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쳐 정경(正卿)에 올랐고, 1787년 (정미년) 정승이 되었다.[2]1788년 (무신년) 조덕린(趙德隣)을 복관(復官)시킬 때 상의 노여움이 대단하였으나 뜻을 크게 지키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2] 이로 인해 외진 섬으로 정배되는 엄한 견책을 입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사면을 받아 다시 정승에 임명되었다.[2]
2. 7. 좌의정과 죽음 (1793-1796)
유언호는 1793년에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2년 뒤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때 곡식 가격의 안정화 조치를 정조에게 건의하였으나 정조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1] 이후 정조가 허적을 복관 시키려 하는데에 반발하여 사직하였고 이듬 해에 사망하였다. 이 때 시호를 받지 말고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으나 정조는 관례에 따라 모두 받도록 하였다.[1] 묘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에 위치하고 있다.[1]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죽자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2] 유언호는 자가 사경(士京)이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족질이다.[2]
3. 평가
4. 가족 관계
wikitext
조부는 유명건(兪命健)이고, 조모는 안동 김씨와 순흥 안씨이다. 숙부는 유최기이다. 아버지는 유직기(兪直基)이고,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로 효정공 김유경의 딸이다. 형은 유언집(兪彦鏶), 유언선(兪彦鐥), 유언횡(兪彦鋐)이다. 아내는 정경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5. 관련 문화재
- 유언호선생 묘 및 신도비 - 안성시의 향토유적 제21호
참조
[1]
간행물
정조 42권, 19년(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2월 10일(임술)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795-02-10
[2]
간행물
정조 44권, 20년(1796 병진 / 청 가경(嘉慶) 1년) 3월 19일(을축)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796-03-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