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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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영수는 1925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50년 6·25 전쟁 중 박정희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영부인으로서 사회복지 사업에 헌신했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했으며, 국민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국모'로 불리며 존경받았으나, 일부에서는 다른 평가도 존재한다. 육영수의 삶은 여러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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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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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육영수 |
한자 표기 | 陸英修 |
로마자 표기 | Yuk Yeong-su |
출생일 | 1925년 11월 29일 |
출생지 | 충청북도 옥천군 |
사망일 | 1974년 8월 15일 |
사망 장소 | 서울특별시 |
사망 원인 | 총격 암살 |
묘지 | 국립서울현충원 |
배우자 | 박정희 |
자녀 |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
학력 | 배화여자고등학교 |
종교 | 불교 |
주요 직책 | |
직책 | 대한민국 영부인 |
재임 기간 | 1962년 3월 24일 – 1974년 8월 15일 (1963년 12월 17일까지 직무 대행) |
대통령 | 박정희 |
이전 영부인 | 공덕귀 |
다음 영부인 | 박근혜 (대행)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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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육영수는 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 8월, 친척의 소개로 당시 육군 군인이었던 박정희를 만났고,[1] 같은 해 12월 12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2]
남편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육영수는 영부인으로서 국민들의 민원을 직접 챙기고 처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3] 또한 한복 차림의 소박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갔으며, 어린이 복지와 보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아원과 어린이집 방문, 육영재단 설립, 어린이대공원 건립 등을 주도했다.[4] 적십자사 활동과 자폐 아동 지원에도 참여했으며, 한센병 환자촌 방문, 파병 장병 가족 위문, 빈곤층을 위한 직업훈련 기관 설립 등 소외된 이웃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5] 이러한 활동과 국민 여론을 남편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으로 '청와대의 야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6]
그러나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육영수의 '자애로운 국모' 이미지가 실제와는 다르며, 인정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21][22]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쏜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7][8][9] 당일 저녁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11] 1974년 8월 19일 국장으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12]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그의 옆에 합장되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18] 박정희와의 사이에서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세 자녀를 두었다. 언니는 교육자이며, 오빠는 전 국회의원 육인수이다.[19] 조카사위로는 전 농수산부 장관 장덕진, 전 국무총리 한승수, 전 국회의원 윤석민 등이 있다.[19][20]
육영수 여사 서거 후, 프랑스 유학 중이던 큰딸 박근혜가 귀국하여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까지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14][15]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13]
무거운 침묵 속에
상심한 집에선
매미소리만
아, 아, 아
지금은 떠나간 그대를 그리워하는 듯
8월의 햇살 아래
라일락은 붉게 물들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듯
나의 아내는 홀로 떠나가고
나 홀로 남았네
바람에 휘어지는 외로운 목련꽃처럼
어디에 호소할까
상심한 마음의 슬픔을
2. 1. 생애 초기 및 결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지주였던 육종관이고 어머니는 이경령이다. 육영수는 1남 3녀 중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3명의 첩을 더 두었으며, 육영수는 친남매 및 이복 남매를 합쳐 총 22명(12남 10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다. 할아버지 육용필의 동생은 조선 말기의 소설가이자 개화파 사상가였던 육용정이다. 언니는 교육자 육인순이며, 오빠는 전 국회의원 육인수이다.[19] 전 농수산부 장관 장덕진, 전 국무총리 한승수, 전 국회의원 윤석민은 조카사위이다.[19][20]1938년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45년, 21세의 나이로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 부임하여 가사 과목 교사로 1년 3개월간 재직했다.[25]
1950년 8월, 친척의 소개로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만났다.[1][25]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12일, 당시 육군 중령이었던 박정희와 결혼했다.[25][1][2]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한 상태에서 육영수와 재혼한 것이었다.[25]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육영수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2]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로 내려가 하숙하며 결혼을 강행했다.[25] 당시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 역시 남편 육종관의 축첩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딸의 결혼을 지지하며[2] 충북 옥천 집을 나와 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25] 박정희와의 사이에서 근혜, 근령, 지만 1남 2녀를 두었다. 또한 박정희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박재옥을 한때 키워주기도 했다.

2. 2. 영부인 시절
1963년 남편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영부인으로서 청와대에 입주하였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부터 민원 처리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영부인이 된 후에도 이러한 활동을 이어갔다. 비서관을 통해 하루 수십 통에 달하는 민원을 직접 챙기고 처리 지침을 내렸으며, 특히 억울한 사연이 있는 민원 현장에는 비서들을 보내 직접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25][3]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남편 박정희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청와대 안의 제1야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참모들과의 자리에서 "내 옆에 지독한 야당 총재께서 앉아 계시니 알아서 조심들 합시다"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26] 실제로 1963년 박정희가 군정 연장을 선언하려 했을 때, 육영수는 이동원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연락하여 남편의 결정을 철회하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다.[25] 또한 1963년 주한 미국 대사 새뮤얼 버거와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그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긴장을 완화하려 노력하기도 했다.[6]
영부인으로서 다양한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국민들과 가까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어린이 복지와 소외 계층 지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센병 환자촌 방문, 파병 장병 가족 위문, 재해 현장 방문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을 직접 찾아다녔다.[4][5] 이러한 활동은 하위 섹션 '사회 활동'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가정에서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박정희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박재옥을 한때 돌보기도 했다. 소박하고 온화한 이미지와 적극적인 사회 활동으로 많은 국민들로부터 '국모'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육영수에게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육영수의 '자애로운 국모' 이미지가 실제와는 다르며, 인정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21] 김종필은 자신의 아내이자 육영수의 시누이인 박영옥이 출산했을 때 육영수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일화를 언급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22]
2. 2. 1. 사회 활동
정치, 외교, 국사, 영어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저명한 대학교 교수들에게 매주 강의를 들으며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25]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부터 민원 처리에 관심을 두었으며, 비서실을 통해 하루 수십 건의 민원을 처리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3]

항상 한복 차림의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갔으며,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였다고 알려져 있다.[27] 특히 어린이와 보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 여러 차례 고아원과 보육원을 방문하고 아동 복지 정책 추진에 힘썼다.[27][4] 1969년 4월에는 어린이 복지재단인 육영재단을 설립했고,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대공원과 어린이회관 건립을 주도했다.[28][4] 1970년 어린이대공원 건설을 시작하여 다음 해 개장했으며,[4] 1972년에는 부산 어린이회관 기공식을 열었다. 또한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직접 발간하여 농어촌 어린이들에게까지 보급하고, 적십자사 활동과 자폐 아동을 위한 활동에도 참여했다.[4]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도 커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촌을 직접 방문하여 환자들을 위로하고 자활 사업을 지원했다.[5] 한센병 환자들에게 돼지와 소를 키우도록 장려하며 "진정한 정신을 갖는 인간회복을 내 안에 정립시켜 생활의 자리를 여러분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숙명처럼 살아온 빈곤과 수모와 질병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25] 또한 1964년 9월부터 베트남에 파병된 장병들의 가족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28][5] 풍수해 현장에는 직접 비를 맞으며 달려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문했다.[28] 1973년에는 불우 청소년과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 기관인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했는데, 이는 직업 훈련을 통한 자립이 빈곤 퇴치의 길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5]
이 외에도 1968년 서울대학교 기숙사인 '정영사' 설치를 주관했으며,[28] 1974년에는 청와대에 초대된 어린이의 어머니가 안면마비 증세를 보이자 직접 좋은 침술원을 찾아 입원시키고 3개월간의 치료를 지원하기도 했다.[25][6] 또한 청와대 경비 경찰들에게 간식을 챙겨주거나 자녀들에게 공공 물품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등 개인적인 면모에서도 따뜻함을 보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7]
남편인 박정희에게 국민들의 여론을 전달하며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는 모습도 보였는데, 이 때문에 '청와대의 야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6] 일례로 1963년에는 주한 미국 대사 새뮤얼 D. 버거와의 관계가 경색되자 그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긴장을 완화하려 노력했다.[6]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 활동과 서민적인 행보로 인해 당시 국민들로부터 '국모'로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박정희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육영수에게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김종필은 육영수의 '자애로운 국모'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며 실제로는 인정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21][22] 김종필은 자신의 아내이자 육영수의 시누이인 박영옥이 출산했을 당시 육영수가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던 일화를 언급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22]
2. 3. 피살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저격을 시도한 문세광의 총격으로 인해 피살되었다.[23] 문세광은 재일 한국인이자 북한 추종자로 알려졌다.[8]
문세광은 본래 극장 로비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극장 뒤편에 자리 잡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사 도중 문세광은 앞으로 나아가려다 실수로 자신의 스미스&웨슨 모델 36 권총을 발사해 스스로 부상을 입었다. 경호원들에게 발각되자 그는 극장 통로를 뛰어다니며 총을 난사했다.[9] 문세광이 쏜 첫 총탄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하던 연단 왼쪽을 맞혔고, 두 번째 총탄은 불발이었다. 세 번째 총탄이 육영수의 머리에 명중하여 치명상을 입혔다.[9][23] 마지막 총알은 무대 뒤편의 태극기를 관통했다.[9] 범인 문세광이 첫 총탄을 발사한 후, 경호실장 박종규가 범인을 저격하기 위해 연단에서 뛰쳐나왔다.[23] 이 과정에서 문세광과 경호원들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당시 기념식에 참석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학생 장봉화가 경호실장 박종규가 쏜 총탄이 벽에 맞고 튕겨 나오면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도 발생했다.[29][10]
육영수는 총격 직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박사의 집도로 오전 11시부터 5시간 넘게 수술이 진행되었으나, 총알이 오른쪽 뇌의 큰 정맥을 손상시키고 뇌 속에 박혀 있어 회복하지 못하고 같은 날 오후 7시에 향년 49세로 사망했다.[29][11] 박정희 대통령은 부인 육영수가 총에 맞아 실려 나가는 상황에서도 광복절 기념사를 끝까지 마쳤으며, 연설이 끝난 후 부인의 핸드백과 신발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10]
이 사건에 대해 2005년 동아일보는 당시 경호원들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보도했으며,[30] SBS의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사격 실험 등을 통해 사건의 의혹을 다루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을 조총련의 조종에 의한 범죄로 규정하여[3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적개심과 반공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문세광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리면서 당시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32]
3. 사후
육영수는 1974년 8월 19일 국장으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2] 박정희 암살 이후 박정희 대통령도 육영수 여사 옆에 안장되었다.
박정희는 육영수 여사의 국장 다음 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13]
무거운 침묵 속에
상심한 집에선
매미소리만
아, 아, 아
지금은 떠나간 그대를 그리워하는 듯
8월의 햇살 아래
라일락은 붉게 물들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듯
나의 아내는 홀로 떠나가고
나 홀로 남았네
바람에 휘어지는 외로운 목련꽃처럼
어디에 호소할까
상심한 마음의 슬픔을
딸 박근혜는 조제프 푸리에 대학교에서의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사실상 영부인 역할을 맡았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가 암살당할 때까지 5년간 영부인직을 수행했다.[14][15] 육영수 여사 42주기를 맞아 서울에서 추모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16][17]
4. 가족 관계
충청북도 옥천의 대지주 육종관(陸鍾寬)과 이경령(李慶齡)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러 첩을 두어 이복 형제자매를 포함해 총 22명(12남 10녀)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언니는 육인순, 오빠는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육인수, 여동생은 육예수이다.[19] 작은할아버지 육용정은 구한말 소설가이자 개화사상가였다.
1950년 소개로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만났고, 6·25전쟁 중인 1950년 12월 결혼했다.[25]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한 상태였고, 육영수와의 결혼은 재혼이었다.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반대했으나, 육영수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하며 결혼을 강행했다. 어머니 이경령 역시 남편의 축첩에 반발하여 집을 나와 딸 부부와 함께 살았다. 남편 박정희와의 사이에는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1남 2녀를 두었다. 박정희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박재옥을 한때 키우기도 했다.
구분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친가 | 증조부 | 육병두(陸炳斗) | 1811~1849 | |
증조모 | 성주 이씨(星州李氏) | |||
할아버지 | 육용필(陸用弼) | 1838~? | 본명 육용점(用漸) | |
작은할아버지 | 육용정(陸用鼎) | 1843~1917 | 본명 육용관(用觀), 소설가, 개화파 사상가 | |
삼촌 | 육종윤(陸鍾允) | 1863~미상 | 작은할아버지 육용정의 양자 | |
사촌오빠 | 육정수(陸定修) | 1885~1949 | 호 초우당주인(蕉雨堂主人) | |
큰아버지 | 육종면 | 선장, 변호사 | ||
고모 | 육씨 | 기혼 및 출가 | ||
큰아버지 | 육종선 | 요절 | ||
아버지 | 육종관(陸鍾寬) | 1894. 6. 13.(음력 5. 10.)~1965. 12. 26. | 대지주, 지역 유지 | |
어머니 | 이경령(李慶齡) | 1896. 1. 25.(음력 12. 11.)~1976. 3. 25. | ||
외할아버지 | 이종림 | 1862~1933 | ||
형제자매 | 언니 | 육인순(陸寅順) | 1914~1972. 10. 30. | 서울특별시 시립부녀사업관 관장 |
오빠 | 육인수(陸寅修) | 1919. 12. 3.~2001. 6. 25. | 5선 국회의원 | |
올케 | 박심자(朴心子) | 1925~2004. 4. 24. | 육인수의 부인 | |
여동생 | 육예수(陸禮修) | 1929. 5.~ | 조태호(趙泰浩)와 결혼 | |
배우자 및 직계 | 남편 | 박정희(朴正熙) | 1917. 11. 14.(음력 9. 30.)~1979. 10. 26. | 제5~9대 대한민국 대통령 |
장녀 | 박근혜(朴槿惠) | 1952. 2. 2.~ |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 |
차녀 | 박근령(朴槿令) | 1954. 6. 3.~ | 육영재단 이사장 역임 | |
장남 | 박지만(朴志晩) | 1958. 12. 15.~ | ||
며느리 | 서향희(徐香姬) | 1974. 6. 30.~ | 박지만의 부인 | |
손자 (장남의 자녀) | 박세현(朴世現) | 2005. 9. 12.~ | ||
손자 (장남의 자녀) | 박세준(朴世俊) | 2014. 1. 31.~ | ||
계녀 | 박재옥(朴載玉) | 1937. 11. 24.~2020. 7. 8. | 박정희의 전처 김호남 소생 | |
계녀사위 | 한병기 | 박재옥의 남편 | ||
시가 | 시할아버지 | 박영규(朴永奎) | 1840~1914 | |
시할머니 | 성산 이씨(星山 李氏) | 1840~1915 | ||
시아버지 | 박성빈(朴成彬) | 1871. 6. 6.(음력 4. 19.)~1938. 9. 4. | ||
시어머니 | 백남의(白南儀) | 1872. 9. 22.(음력 8. 20.)~1949. 8. 12. | ||
시아주버니 | 박동희(朴東熙) | 1895~1972. 10. 10. | ||
동서 | 송임무 | 1911~1996 | 박동희의 부인 | |
시조카 | 박재홍(朴在鴻) | 1941. 3. 25.(음력 2. 28.)~ | ||
시조카딸 | 박재선 | 1945~ | ||
시아주버니 | 박무희(朴武熙) | 1898~1960 | ||
동서 | 연안 차씨(延安 車氏) | 1905~1998 | 박무희의 부인 | |
시조카 | 박재석(朴在錫) | 1922~? | ||
시조카 | 박재호(朴在浩) | 1930~ | ||
시조카손자 | 박용수 | 1960~2011 | ||
시누이 | 박귀희(朴貴熙) | 1902. 1. 31.(음력 12. 22.)~1974 | ||
시매부 | 은용표(殷龍杓) | 1888~1963 | 박귀희의 남편 | |
시조카딸 | 은봉남(殷鳳男) | 1917. 11. 4.(음력 9. 20.)~1995 | ||
시조카 | 은희만(殷熙萬) | 1935. 11. 27.(음력 11. 2.)~2018. 9. 5. | ||
시조카손자 | 은지원(殷志源) | 1978. 6. 8.(음력 5. 3.)~ | 가수 | |
시아주버니 | 박상희(朴相熙) | 1905. 9. 10.(음력 8. 12.)~1946. 10. 6. | ||
동서 | 조귀분(趙貴紛) | 1908. 12. 16.(음력 11. 23.)~1993. 11. 14. | 박상희의 부인 | |
시조카딸 | 박영옥(朴榮玉) | 1929. 10. 30.(음력 9. 28.)~2015. 2. 21. | 김종필의 부인 | |
시조카사위 | 김종필(金鍾泌) | 1926. 1. 7.~2018. 6. 23. | 박영옥의 남편 | |
시조카딸 | 박계옥(朴桂玉) | 1936~ | ||
시조카딸 | 박금자(朴金子) | 1942~ | ||
시조카딸 | 박설자(朴雪子) | 1945~ | ||
시조카 | 박준홍(朴埈鴻) | 1947. 1. 26.~ | ||
시아주버니 | 박한생(朴漢生) | 1910~1928 | 박한희(朴漢熙)[33] | |
시누이 | 박재희(朴在熙) | 1913~1996. 8. 30. | ||
시매부 | 한정봉 | 1892~1966. 4. 14. | 박재희의 남편 | |
시조카 | 한희승 | 1949~ |
5. 평가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복지와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고아원과 어린이집을 방문하여 아동 교육·복지에 대한 정책 확대를 추진했다. 1969년 4월에는 아동 복지재단인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어린이대공원과 어린이회관 건립을 주도했다. 그 외에도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시설을 방문하여 자활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빈곤층을 위한 직업훈련시설을 설립했으며, 베트남 전쟁 파병 장병들의 가족들을 위문하고 재해 현장을 직접 찾아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등 적극적으로 영부인으로서 활동했다. 사생활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너그러운 성품으로 존경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당시 "국모"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남편 박정희가 학생운동 등을 강압적으로 억압하여 국민적 평판이 좋지 않았던 시기에도, 육영수는 '''청와대의 야당'''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박정희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육영수에게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으며,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김종필(박정희의 조카사위)은 육영수의 "자애로운 국모" 이미지가 실제와 다르며,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육영수가 실제로는 욕심이 많고 타인의 고마움을 모르는 성격이었다고 평가했다.[21] 김종필은 자신이 미국 유학 중일 때 출산한 아내 박영옥(육영수에게는 시누이)의 식사를 육영수가 제대로 챙기지 않았던 일화를 언급하며, "나는 밥을 먹어놓고 아이를 낳아 배고픈 산모에게 그런 짓을 하느냐"고 질책하자 육영수가 아무 말도 못 했다면서, "(육영수 여사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비판했다.[22]
6.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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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구분 | 작품명 | 방송사/제작사 | 배역 |
---|---|---|---|---|
1989년 | 드라마 | 제2공화국 | MBC | 고은아 |
1993년 | 드라마 | 제3공화국 | MBC | 김미숙 |
1993년 | 드라마 | 다큐멘터리 극장 | KBS | 안해숙 |
1995년 | 드라마 | 제4공화국 | MBC | 전인화 |
1995년 | 드라마 | 코리아게이트 | SBS | 고두심 |
1998년 | 드라마 | 삼김시대 | SBS | 김미숙 |
2005년 | 드라마 | 제5공화국 | MBC | 양미경 |
2012년 | 영화 | 퍼스트레이디-그녀에게 | - | 한다감 |
2021년 | 뮤지컬 | 뮤지컬-박정희 | - | 송민경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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