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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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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방실은 고려 후기의 무장으로, 충목왕을 호종한 공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약탈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공민왕 3년 다루가치 노연상을 제거하고, 제1차 홍건적의 난 때 안우 등과 함께 철주에서 홍건적을 격퇴했으며, 제2차 홍건적의 난 때는 서북면도지휘사로 활약했다. 개경 탈환 후 정세운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김용의 모함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조선 초 문인 성현의 《용재총화》에 그의 일화가 전해지며, 경기도 가평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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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방실(李芳實)
시대고려 말기(14세기)
생애충렬왕 24년 1298년 ~ 공민왕 11년(1362년) 2월 29일 (65세)
묘소경기도 가평군 가평리 하색읍 산81
관직
봉호추성협보공신, 충렬공(忠烈公)
직책중랑장, 호군, 대호군, 추밀원부사, 서북면도지휘사, 중서평장정사
주군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가문
가문함안 이씨
배우자진양부인(晋陽夫人) 진주 강씨(晋州姜氏)
정부인(貞夫人) 영산 신씨(靈山辛氏)
자녀중문(中文)

2. 약력

연도사건
함안 출생
?충목왕 호종 공으로 중랑장, 호군, 전 100결 하사
1354년대호군으로 승진, 노연상의 난 진압
1358년서경군민만호부만호 경천흥의 편비
1359년제1차 홍건적 침입 당시 안우, 이음, 이인우 등과 철주에서 격퇴
1360년상만호로서 용강, 함종 등지에서 홍건적 격파, 연주강까지 추격
1360년 3월 26일추성협보공신, 추밀원부사
1360년 4월 3일예주에서 홍건적 격퇴
1361년제2차 홍건적 침입 당시 서북면도지휘사
1361년판사농사 조천주, 좌승 류계조, 대장군 최준 등을 박주로 보내 적을 쳐서 이기고, 다시 안우, 지휘사 김경제와 더불어 개주에서 홍건적을 쳐서 150여 명을 베었으며, 1백 기의 군사로 연주에서 20여 급을 베었다.
1362년 1월 17일안우, 김득배, 황상, 한방신, 이여경, 안우경, 이귀수, 최영, 이성계 등과 20만 군사로 개경 탈환
1362년 1월 22일김용의 계략으로 정세운 살해
1362년 2월 29일김용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


3. 김용의 모함과 죽음

공민왕 11년(1362년) 1월, 개경 탈환 작전에서 안우, 김득배 등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총병관 정세운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용의 모함에 빠졌다. 김용은 왕명을 위조하여 안우와 이방실에게 정세운을 죽이도록 사주했고, 이들은 김득배와 함께 정세운을 살해했다.

김용은 정세운을 죽인 뒤 안우를 살해하고, 이방실과 김득배를 체포하려 했다. 공민왕 11년 2월 29일, 이방실은 왕이 있는 상주 행재소로 가던 중 용궁현에서 오인택과 박춘에게 기습당했다. 이방실은 칼에 맞고 쓰러졌다가 깨어나 저항했지만, 결국 정지상에게 살해당했다.

4. 일화

조선 초 문인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이방실과 그의 누이동생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4. 1. 도적을 만난 이방실

이방실은 일찍이 서해도에 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훤칠하고 키가 큰 사내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이방실이 탄 말 앞에서 "영공(令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청했는데, 사실 사내의 정체는 도적이었다. 이방실은 그 사람이 도적임을 알아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허락했다. 10리쯤 가다가 사내가 논 한가운데 앉아있는 비둘기 한 쌍을 가리키며 "공(公)은 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이방실은 화살 한 발로 두 마리를 명중시켜 보였다. 날이 저물어 빈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방실은 잠깐 동안 말을 보고 오겠다며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도적에게 주고는 마굿간에 웅크리고 앉았다. 도적이 마굿간 안으로 활을 쏘아댔고, 이방실은 날아오는 화살들을 일일이 손으로 잡아 마구간에 끼어 두었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도적은 이방실에게 빌면서 살려 달라고 하였는데, 이방실은 옆에 있던 상수리나무 위로 몸을 솟구쳐 나뭇가지 끝을 휘어잡으며 한 손으로 도적의 머리칼을 붙잡아 나뭇가지 끝에다 매고는 칼로 머리 가죽을 벗겼다. 휘어졌던 나뭇가지가 튕겨져 솟구치면서 그 탄력으로 도적의 머리칼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뽑혀버린 채 몸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대로 이방실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세월이 흘러 지위도 높아지고 지긋한 나이가 된 이방실이 다시 예전 자신이 갔던 그곳을 지나다가 어느 농가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은 매우 큰 부잣집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이방실을 맞이한 주인 노인은 크게 술상을 차려 이방실을 대접했고, 술이 취하자 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젊었을 때는 용맹스러운 것만 믿고 도적이 되어 숱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다 한 소년을 만났는데, 비할 수 없이 용맹스러운 자였습니다. 그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내가 해를 입고 죽다가 살아났지요. 그 뒤로 개과천선하여 농업에 힘을 쏟아 다시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모자를 벗은 노인의 머리는 반질반질하여 머리칼이 하나도 없었다.

4. 2. 이방실의 누이동생

이방실에게는 누이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오빠와 마찬가지로 용감하고 맹렬한 성품이었다. 남매는 항상 작은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두고 그 위를 올라다녔는데, 이방실이 올라가면 나뭇가지가 살짝 움직였지만 누이동생이 올라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은 누이동생이 비쩍 여윈 사동(使童)을 데리고 여윈 말을 타고 강남(江南)으로 건너가는데,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다가 그만 누이동생을 들어 내렸다. 누이동생은 몹시 화가 나서 노를 들어다 배를 타려던 사람들을 마구 두들겨 팼는데, 그 굳센 모습은 마치 새매 같았다.

5. 묘소

이방실장군묘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번지에 위치하며, 정부인(貞夫人) 진주 강씨영산 신씨 두 부인을 합장한 무덤이다.

6. 이방실에 대한 평가

공민왕 8년(1359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우, 이음, 이인우 등과 함께 철주(鐵州)에서 격퇴하고, 함종(咸從)에서 홍건적의 목책을 공격하여 2만 급을 죽이고 지휘부를 사로잡았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침공했을 때 이방실은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었고, 박주에서 적을 쳐서 이기고, 안우, 김경제와 더불어 개주에서 150여 명을 베었으며, 1백 기(騎)의 군사로 연주(延州)에서 20여 급을 베었다. 그러나 안주(安州)에서 홍건적의 습격을 당해 고려군은 패하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는 전사했으며 김경제는 사로잡혔다.

1362년 1월 17일, 안우 · 이방실 · 김득배 · 황상 · 한방신 · 이여경 · 안우경 · 이귀수 · 최영 · 이성계 등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 동쪽 교외의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개경을 포위하고 총병관 정세운이 도솔원(兜率院)에서 군사를 지휘했다. 18일에 사면에서 총공격하여 개경을 탈환하였다.

노국공주가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시나이까."라고 묻자 공민왕은 "우리 종묘 사직을 폐허가 되지 않게 하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이 되지 않게 한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이다. 내가 살을 베어 줘도 이 공에 보답할 수 없는데 이러한 보물쯤이겠는가."라고 대답했다.

7. 이방실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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