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스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베리스모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합을 지향하는 정치적, 문화적 운동을 의미한다. 두 나라는 언어, 역사,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함께 발전해 왔다. 이베리아주의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이베리아 연합 시기에 잠시 현실화되었으나, 1640년 포르투갈의 독립으로 종료되었다. 18세기 이후 자유주의, 공화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재등장했으며, 20세기에는 아나키즘 등 좌익 이념과 연관되기도 했다. 현재는 두 나라 모두 유럽 연합에 가입하여 경제적, 사회적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으며, 일부 정치 세력과 시민들 사이에서 이베리아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페인의 정치 운동 - ¡Democracia Real YA!
¡Democracia Real YA!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스페인의 경제난과 정치 부패에 대한 불만으로 2011년 5월 15일에 시작된 시민 시위 운동으로, 청년 실업, 주거 불안 등 사회 문제 해결과 정치 개혁, 시민 권리 확대를 요구하며 스페인 전역과 유럽으로 확산되어 "점령하라 월 스트리트"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스페인-포르투갈 관계 - 토르데시야스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경 46도 37분선을 기준으로 대서양을 분할하여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불명확한 경계와 교황 권위 의존, 유럽 열강의 진출로 효력을 잃고 아프리카 분할의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을 받으며, 1750년 마드리드 조약으로 대체되었음에도 유럽 중심적 세계관과 제국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국제 관계와 식민주의 연구에서 중요하게 논의된다. - 스페인-포르투갈 관계 - 사라고사 조약
사라고사 조약은 152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체결한 조약으로, 몰루카 제도의 영유권을 확정하고 동경 17도를 기준으로 양국의 활동 범위를 분할했으며, 스페인은 필리핀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포르투갈로부터 35만 두카트를 받았다. - 포르투갈의 정치 - 포르투갈 공화국 의회
포르투갈 공화국 의회는 단원제 입법부로서 법률 제정, 예산 승인, 조약 비준 등의 주요 정책 결정과 대통령 및 내각에 대한 견제 권한을 행사하며, 4년마다 선출되는 의원들로 구성된다. - 포르투갈의 정치 - 포르투갈 국가연대국민회의연합당
포르투갈 국가연대국민회의연합당은 연금 수급자 권익 보호를 위해 1990년 창당되어 사회 보장 시스템 개선과 연금 증액을 추구했지만, 199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1석을 얻은 후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2006년 해산되었다.
이베리스모 | |
---|---|
지도 정보 | |
개요 | |
명칭 | 이베리아주의 |
로마자 표기 | Iberiseuju |
분류 | 범민족주의 |
지역 | 이베리아 반도 |
관련 국가 |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
역사 | |
기원 | 19세기 |
초기 주창자 | 시노벨 데 카날레스 |
영향 받은 사상 | 프랑스 혁명 낭만주의 자유주의 |
주요 주장 | 이베리아 반도의 통합 이베리아 국가 간의 정치적, 문화적 단결 |
특징 | |
언어 |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 아스투리아스어 |
문화 | 이베리아 반도의 공통 문화 유산 강조 |
정치적 목표 | 이베리아 국가 간의 협력 및 통합 추구 |
관련 단체 및 인물 | |
주요 단체 | 이베리아 연방주의 이베리아 사회주의 이베리아 아나키즘 |
주요 인물 | 시노벨 데 카날레스 앙헬 간비트 올리베이라 마르틴스 테오필로 브라가 |
비판 | |
비판 요점 | 각 국가의 독립성과 정체성 문제 국가주의 및 지역주의와의 갈등 가능성 언어 및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한 통합의 어려움 |
기타 | |
관련 이념 | 범유럽주의 범라틴주의 |
2. 역사적 배경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라는 지리적 공간을 공유하며,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모두 로망스어에 속하는 등 언어적 유사성도 지닌다. 두 나라의 현대적 정체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콩키스타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되었으나, 포르투갈 왕국은 독립 왕국으로, 스페인은 여러 왕국이 통합된 형태로 발전하며 각자의 길을 걸었다. 대항해 시대에는 식민지 개척을 두고 경쟁하며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영향권을 나누기도 했다.
16세기 말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 이후 약 60년간(1580-1640)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형태로 두 왕국이 통합된 경험은 이후 이베리아 통합 논의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독립 전쟁을 통해 다시 독립을 회복했지만, 이러한 통합과 분리의 역사는 이베리스모의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18세기 호세 마르체나와 같은 인물에 의해 진보적이고 연방적인 공화국 형태의 이베리아 통합론이 제기된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및 공화주의 운동(자유주의 삼년, 혁명적 육년), 20세기 아나키즘 운동(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 속에서도 이베리스모는 다양한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양국의 보수 세력은 이베리스모를 체제 안정에 위협적인 급진 사상으로 간주하기도 했다.[1] 20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에스타두 노부와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이라는 유사한 권위주의 정권을 경험했지만, 양국 관계는 긴밀한 협력보다는 상호 무관심 속에 거리를 두는 양상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에 들어 유럽 연합(EU) 가입(1986년)과 솅겐 조약 체결로 국경의 의미가 퇴색하고 경제적, 사회적 교류는 활발해졌지만, 이베리스모를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주요 정당은 없으며 대중적 지지도 낮은 편이다.[6] 다만 일부 지식인, 시민 단체, 특정 정당(이키에르다 레푸블리카나[2]) 등에서 연방주의 형태의 통합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존재한다.[5] 국경 지역에서는 엘바스 주민들이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의료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3][4] 실질적인 교류와 통합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2. 1. 고대 및 중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역사적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모두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용되는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아스투리아스어, 아라곤어 등과 함께 로망스어군에 속한다.특히 포르투갈어와 갈리시아어는 중세 시대의 갈리시아-포르투갈어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는 포르투갈 백작령이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포르투갈 왕국으로 발전하면서 시작되었다. 반면, 갈리시아는 레온 왕국의 일부로 카스티야 연합왕국에 편입되면서 점차 카스티야어(스페인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가 정체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콩키스타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151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 왕국을 정복하여 오늘날 스페인을 이루는 대부분의 영토를 하나의 통치 아래 두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독립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대항해 시대에 스페인(카스티야)과 식민지 확장을 두고 경쟁했다. 양국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맺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세계를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1578년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펠리페 2세는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군사력을 동원해 다른 경쟁자들을 제압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유명 시인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는 펠리페 2세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지만, 그 역시 스페인어로 시를 쓰기도 했다. 이는 당시 양국 궁정에서 두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581년,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필리페 1세로 즉위하며 두 왕국을 하나로 묶었다. 이로써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 중 하나가 탄생했으며,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펠리페 3세 겸 포르투갈의 필리페 2세, 펠리페 4세 겸 포르투갈의 필리페 3세)는 이베리아 연합이라 불리는 동군 연합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 연합에는 포르투갈 왕국(식민지 포함), 카스티야 연합왕국(식민지 포함), 아라곤 연합왕국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1640년, 브라간사 공작은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 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성공했고, 그는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즉위하며 포르투갈의 독립을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북아프리카의 도시 세우타는 포르투갈에서 벗어나 스페인 국왕의 통치 아래 남기로 결정했다.
2. 2. 이베리아 연합 (1580년 ~ 1640년)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가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후사 없이 사망하자, 스페인의 필리페 2세는 자신의 왕조적 권리를 내세워 카스티야 군대를 동원해 다른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제압했다. 포르투갈의 국가 시인 루이스 바스 데 카몽이스는 필리페 2세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지만,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국 궁정에서는 이중 언어 사용이 흔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1581년, 필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필리페 1세로 즉위하여 두 왕국을 하나로 묶었다. 이로써 당시까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식민 제국을 아우르는 동군 연합이 탄생했다.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스페인의 필리페 3세 겸 포르투갈의 필리페 2세, 스페인의 필리페 4세 겸 포르투갈의 필리페 3세)가 이베리아 연합이라 불리게 된 이 연합 왕국들을 통치했다. 이베리아 연합은 포르투갈 왕국(식민지 포함), 카스티야 왕관(식민지 포함), 그리고 아라곤 왕관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640년, 브라간사 공작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 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성공했고, 그는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즉위하며 포르투갈은 다시 독립을 되찾았다. 한편, 북아프리카의 도시 세우타는 포르투갈 왕관에서 벗어나 스페인 국왕의 통치 아래 남기로 결정했다.
2. 3. 근대 이베리아주의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가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사망하자, 스페인의 필리페 2세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해 경쟁자들을 제압하였다. 포르투갈의 국가 시인 루이스 바스 데 카몽이스는 필리페 2세에게 반대했지만, 당시 양국 궁정에서 흔했던 이중 언어 사용의 예처럼 스페인어로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1581년, 필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필리페 1세로 즉위하여 두 왕국을 개인 동군 연합으로 묶었다. 이는 이후 이베리아 연합으로 불리게 되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포르투갈 왕국(식민지 포함), 카스티야 왕관(식민지 포함), 아라곤 왕관을 포함하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1640년, 브라간사 공작은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 귀족들의 불만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성공하여 그는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즉위했고, 이베리아 연합은 해체되었다. 다만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는 포르투갈 왕관을 떠나 스페인 국왕 아래 남기로 결정했다.
1801년에는 포르투갈 도시 올리벤사가 스페인에 점령당해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빈 회의에서는 스페인이 점령을 끝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스페인은 이를 무시했으며 포르투갈은 공식적인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도 이 지역의 국경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18세기 호세 마르체나는 이베리아 통합 사상에 진보적이고 연방적인 공화국적 성격을 부여했다. 이후 자유주의 삼년(1820-1823) 동안 비밀 자유주의 단체들은 포르투갈 내에서 이베리아주의를 확산시키려 했으며, 스페인에 5개, 포르투갈에 2개(루시타니아 울테리오르, 루시타니아 키테리오르)의 공화국을 포함하는 총 7개의 연방 공화국 창설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베리아주의 운동은 스페인의 혁명적 육년(1868-1874)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프림 장군은 양국 통합에 찬성했으며, 그의 암살 이후 들어선 제1 스페인 공화국(1873-1874)은 연방주의적 성격 때문에 통합에 적합한 시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보수 복고 세력에게 이베리아주의는 공화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입장을 대변하며 기존 체제의 안정을 위협하는 사회 변화의 요인으로 간주되었다.[1]
20세기에 들어 이베리아주의는 아나키스트 운동 내에서 일부 계승되었다.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과 이베리아 자유주의 청년 연맹(FIJL) 같은 단체들이 이 이념을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의 에스타두 노부와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국가주의 독재라는 정치적 유사성과 어느 정도의 상호 지지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소위 "등을 맞대고" 사는 상태로 평가받았다.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의 의회에 의석을 가진 정당 중 이베리아주의를 공식 목표로 내세우는 곳은 없다. 하지만 두 나라는 1986년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함께 가입했고, 솅겐 조약에 따라 국경이 개방되었다. 스페인의 이키에르다 레푸블리카나는 국가 구조로서 '이베리아 연방주의'를 지지하기도 했다.[2]
경제적으로는 양국 대기업들의 상호 진출이 이루어졌으며, 포르투갈 정부가 국경 지역인 엘바스의 출산 센터를 폐쇄하고 주민들이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의료 시스템을 이용하도록 하는 등[3][4]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도 나타난다. 일부 시민 단체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장교들 사이에서 이베리아주의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5] 그러나 앙골라 주간지 ''솔''이 2006년에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포르투갈 국민 중 양국 통합에 찬성하는 비율은 28%에 불과했다.[6] 통합 시 수도에 대해서는 마드리드(42%)와 리스본(41%) 선호도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2. 4. 20세기 이후
20세기에 이베리아주의는 아나키스트 계열, 특히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과 이베리아 자유주의 청년 연맹(FIJL)과 같은 일부 좌익 단체의 이념에 영향을 미쳤다.포르투갈의 에스타두 노부 정권과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시기에는 양국이 국가주의적 독재라는 정치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어느 정도 상호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서로 거리를 두며 "등을 맞대고" 지내는 관계로 평가받았다.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의 의회에 의석을 가진 정당 중 이베리아주의를 공식적인 목표로 내세우는 곳은 없다. 그러나 두 나라는 1986년 유럽 경제 공동체(현 유럽 연합)에 함께 가입했으며, 솅겐 조약에 따라 국경이 개방되어 인적, 물적 교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스페인의 정당인 카탈루냐 좌파 공화당(ERC)은 국가의 정치 구조로서 '이베리아 연방주의'를 지지하고 있다.[2]
경제적으로는 양국의 대기업들이 상대국 시장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으며, 사회적 교류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 정부는 국경 지역인 엘바스의 출산 센터를 폐쇄하고 해당 지역 주민들이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의료 시스템을 이용하도록 한 사례가 있다.[3][4] 일부 스페인과 포르투갈 장교를 포함한 특정 단체들은 여전히 이베리아주의를 지지하고 있다.[5]
그러나 일반 대중의 지지는 낮은 편이다. 2006년 앙골라의 주간 신문 Solpt이 실시한 설문 조사[6]에 따르면, 포르투갈 국민 중 28%만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통합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합 시 수도 위치에 대해서는 마드리드를 선호하는 응답(42%)과 리스본을 선호하는 응답(41%)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3. 현대의 이베리아주의
현대에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합을 지지하는 이베리아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으며, 양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연방 국가 창설에 대한 지지 의견이 나타나고 있다.[7]
3. 1. 정치적 통합 논의
2009년 여론조사에서는 스페인 응답자의 30.3%, 포르투갈 응답자의 39.9%가 양국 간 연방 국가 창설을 지지했다.[7] 2010년에는 이 비율이 각각 31%, 45%로 증가했다.[7]스페인 살라망카 대학교가 2011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참여 인원 1741명)에 따르면, 스페인 응답자의 39.8%, 포르투갈 응답자의 46.1%가 두 국가 간 연방 국가 수립을 지지했다.[7]
3. 2. 여론 조사
2009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응답자의 30.3%, 포르투갈 응답자의 39.9%가 연방 국가 창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7] 2010년에는 이 비율이 각각 31%와 45%로 증가했다.[7]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교가 2011년에 174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스페인 응답자의 39.8%, 포르투갈 응답자의 46.1%가 두 국가 간 연방 국가 수립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7]
4. 주요 이베리아주의자
이름 | 설명 |
---|---|
미구엘 데 우나무노 | 바스크 출신 철학자 |
후안 발레라 이 알칼라-갈리아노 | 안달루시아 출신 작가 |
에밀리오 카스텔라르 | 제1차 스페인 공화국 대통령 |
호안 마라갈 | 카탈루냐 출신 시인 |
시니발도 데 마스 | 스페인 정부의 카탈루냐 출신 외교관 |
프란시스코 피 이 마라갈 | 제1차 스페인 공화국 대통령 |
호세 사라마구 | 포르투갈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
알폰소 다니엘 로드리게스 카스텔라오 | 갈리시아 민족주의자 |
시니발도 데 마스는 이베리아 연방 또는 연합의 수도를 포르투갈 리바테주 지방의 산타렘에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287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히스파니아의 교구의 수도는 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 지방의 에메리타 아우구스타(현재 메리다 (스페인))였다.
참조
[1]
서적
Procesos de nacionalización e identidades en la península ibérica
https://web.archive.[...]
University of Extremadura
2018-10-15
[2]
웹사이트
un modelo de estado basado en el federalismo iberista
https://web.archive.[...]
2009-12-23
[3]
뉴스
Prevén que 350 niños portugueses nazcan cada año en Badajoz
http://www.hoy.es/pg[...]
Hoy
2006-03-06
[4]
뉴스
Badajoz realizou 15 partos de grávidas alentejanas num mês
https://web.archive.[...]
Diário de Notícias
2008-01-21
[5]
웹사이트
Arquivo.pt
http://arquivo.pt/wa[...]
2008-10-24
[6]
웹사이트
Sol
https://web.archive.[...]
2008-01-06
[7]
웹사이트
El 40% de los españoles a favor de la creación de una federación entre España y Portugal
http://www.20minutos[...]
2016-06-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