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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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복은 1968년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당시 북한 무장공비에게 살해된 사건의 피해자이다. 1968년 12월 9일, 그의 9번째 생일에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사건 이후 언론 보도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1990년대에는 사건 진실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명예훼손 소송과 법적 공방이 있었으며, 대법원은 조선일보의 기사가 사실에 근거한다고 판결했다. 현재 이승복 기념관이 건립되어 그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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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195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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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승복 |
로마자 표기 | I Seung-bok |
한글 표기 | 이승복 |
한자 표기 | 李承福 |
출생일 | 1959년 12월 9일 |
출생지 | 계방산 북쪽 |
사망일 | 1968년 12월 9일 |
사망 원인 | 북한 공비에 의한 살해 |
안장지 | 용평면 노동리 |
직업 | 국민학교 재학 |
알려진 이유 | 북한 공비에 의한 살해, 반공 선전에 이용, 죽음에 대한 음모론 |
가족 | |
아버지 | 이석우 |
어머니 | 주대하 |
친척 | 이승수, 이승자, 이학관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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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의 배경
1960년대 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에는 군사적 긴장이 매우 높았다. 특히 1968년에는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잇따르면서, 한국 사회는 강력한 반공 분위기가 형성되었다.[1]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2. 1.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1968년 10월 30일 밤, 조선인민군 124군 부대 소속 무장 공비 120명이 강원도 울진군과 삼척시 사이 8곳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에 게릴라 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30일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륙으로 진입했다.[1] 이들은 10월 31일 아침, 여러 마을에 들어가 마을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시작했고, 그들 중 몇몇은 몰래 빠져나가 당국에 알렸다. 곧 대한민국 육군 병력이 그 지역에 도착하여 침투자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1]3. 이승복 사건의 발생
1959년 12월 9일, 이승복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현 용평면) 도사리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3월 2일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훗날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에 입학했다.[12]
1968년 11월 2일, 조선인민군 124군 부대 소속 120명이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으로 강원도 울진군과 삼척시 사이 8곳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입했다.[1] 이들은 태백산맥에 게릴라 기지를 구축하려 했으나, 대한민국 육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1]
1968년 12월 9일 밤(이승복의 9번째 생일), 북한 무장 간첩 몇 명이 이승복의 집에 침입했다.[2] 이들은 이승복 가족에게 음식과 숙소를 요구하며, 북한과 남한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물었다.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격분한 무장 간첩들은 이승복과 그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다.[12] 이승복의 아버지 이석우와 형 이학관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2]
3. 1. 사건 당일의 정황
이승복은 아버지 이석우(당시 32세)와 어머니 주대하(당시 32세), 할머니 강순길, 형 이학관(당시 14세), 남동생 이승수(당시 7세), 여동생 이승자(당시 5세)와 함께 7명 가족으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현재 용평면)에서 태어났다. 1967년 3월 2일부터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에 다녔다.[12] 이승복의 가족은 계방산 북쪽 외딴곳에 있는 농장에서 살았다.[12]1968년 11월 2일, 북한 무장공작원 부대 120명이 대남공작을 위해 강원도 동해안 삼척시 해안을 통해 대한민국에 침투했다.(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4]
1968년 12월 9일(이승복의 9번째 생일) 밤, 대한민국 국군에 쫓기던 무장공작원들이 이승복의 집에 들이닥쳤다. 당시 아버지 이석우와 할머니 강순길은 이웃집 이사를 돕느라 집에 없었다. 무장공작원들은 집에 있던 이승복과 가족들을 가두고 북한의 주장과 공산주의 사상을 강제로 가르치려 했다. 무장공작원들은 가족들에게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물었고, 이에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했다.[12]
이에 격분한 무장공작원들은 이승복의 입을 찢고, 이승복과 어머니 주대하, 남동생 이승수, 여동생 이승자를 살해했다. 이승복의 형 이학관은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다.[12]
3. 2. 무장 공비의 침입과 살해
1968년 11월 2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당시, 조선인민군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120명이 강원도 울진군과 삼척시 사이 8곳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에 게릴라 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륙으로 진입했다.[1]12월 9일 밤, 북한 무장공비 몇 명이 이승복의 집에 침입하여 음식과 숙소를 요구했다. 그들은 이승복 가족을 감금하고 북한의 주장과 공산주의 사상을 강제로 설파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물었고,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했다.[2][5]
이에 격분한 무장공비들은 이승복과 그의 어머니 주대하(당시 33세), 남동생 이승수(당시 7세), 여동생 이승자(당시 4세)를 살해했다. 이들은 칼에 찔리거나 돌로 맞아 죽었고, 특히 이승복은 입이 칼로 찢기는 글래스고 스마일 형태로 훼손되었다.[2][5]
이승복의 아버지 이석우와 형 이학관은 간신히 집에서 탈출하여 알렸지만, 군부대 지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이 사건으로 이승복과 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 4명이 희생되었고, 이승복의 형은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다.[2][5]
12월 11일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抗拒(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했고,[12] 12월 13일 대한뉴스 제705호 〈남침공비를 무찌른다 - 제3신〉 편에서는 “공산당이 싫다고 해서 어린 젖먹이를 돌로 때리고 입을 찢어죽인 이들의 만행”이라고 보도하면서 일가족의 시신을 공개했다.
3. 3. 생존자와 신고
1968년 12월 9일 밤, 북한 특수 부대원들이 이승복의 집에 들이닥쳐 음식과 숙소를 요구했다. 아버지 이석우와 형 이학관은 간신히 집에서 탈출하여 가까운 군 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2] 그러나 군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족들이 살해당한 뒤였다.[5]이후 이승복의 형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12월 11일 《조선일보》는 이 증언을 바탕으로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抗拒(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12]
4. 언론 보도와 사회적 파장
이승복 사건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조선일보의 초기 보도는 사건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와 대한뉴스 등의 언론 보도는 이승복과 그 가족이 북한 무장 공비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전하며 국민들의 분노와 반공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사건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의 외침으로 상징화되어, 반공 교육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2][5]
이승복 사건은 냉전 시기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사건 내용이 실리고, 전국 각지에 이승복 동상이 세워지는 등, 이승복은 용감한 애국 소년으로 묘사되며 반공 교육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었다.[5]
4. 1. 조선일보의 초기 보도
1968년 12월 9일 밤, 북한 특수부대원 몇 명이 이승복의 집에 들이닥쳐 음식과 잠자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이승복에게 북한과 남한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지 물었고, 이승복이 남한을 더 좋아한다고 대답하자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승복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고, 격분한 북한군은 이승복과 그의 어머니 주대하(33세), 남동생 이승수(7세), 여동생 이승자(4세)를 살해했다. 이승복의 아버지 이석우와 형 이학관은 집에서 탈출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 북한군은 이승복의 얼굴에 글래스고 스마일을 만들어 훼손했다.[2]4. 2. 대한뉴스의 보도
1968년 12월 9일 밤, 북한 124군 부대 소속 특수부대원 몇 명이 이승복의 집에 침입하여 이승복에게 북한과 남한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물었다. 이승복이 남한을 더 선호한다고 답하자 이들을 구타했고,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격분한 북한군은 이승복과 그의 어머니 주대하(33세), 남동생 이승수(7세), 여동생 이승자(4세)를 살해했다.[2] 이승복의 아버지 이석우와 형 이학관은 간신히 집에서 탈출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 북한군은 이승복의 얼굴을 글래스고 스마일 형태로 훼손했다.[2]4. 3. 반공 교육의 강화
이승복의 죽음은 냉전 시대 당시, 공산권의 최전선이었던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이 사건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렸고, 한국 각지의 학교에 이승복 동상이 세워지는 등, 이승복은 "용감한 애국 소년"으로 묘사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북한의 잔혹성을 강조하기 위해, 교사들이 이승복이 살해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5]5. 이승복 사건을 둘러싼 논쟁
1990년대 초부터 이승복이 실존 인물이 아니며,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대한민국 군사 정부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8년 11월, 조선일보는 김종배와 김주언 두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고, 1999년 7월 서울지방검찰청은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다. 2002년 1심에서는 두 사람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으나, 2004년 10월 28일 항소심에서는 "조선일보의 기사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며 이승복 사건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보도의 자유는 용인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확정하여 이승복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최종적으로 인정했다.[6]
그러나 민주화와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학교 교육 현장에서 이승복 사건이 다루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97년에는 도덕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이 삭제되었고, 각 학교에 세워져 있던 이승복 동상도 많이 철거되었다.[5][7]
5. 1. 의혹 제기의 시작
1992년 가을, 김종배는 미디어오늘 편집국장 시절 계간 저널리즘에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기사를 기고하여 조선일보의 기사가 허위라고 주장했다.[13][14] 그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 이름을 잘못 기록했고, 이승복의 집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를 듣기 어렵다는 점,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 점, 이승복 시신의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 증언을 근거로 조선일보의 기사가 “작문”이라고 비판했다.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김주언은 서울과 부산에서 ‘오보 전시회’를 열어 김종배의 기사를 전시했고, 10월에는 미디어오늘과 월간 말을 통해 더 많은 근거를 들어 오보 내지는 작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5. 2. 명예훼손 소송과 법적 공방
1998년 11월, 조선일보는 김주언, 김종배 두 명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다. 1999년 7월 서울지방검찰청은 두 명을 불구속 기소했고, 2002년 형사 1심에서 두 명에게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을 선고했다.[13][14]2004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있었던 항소심에서는 김주언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김종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조선일보의 기사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거기에 대한 의혹 보도 역시 충분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에서 원심을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1992년 가을, 당시 기자협회의 혁신계 기자였던 김종배한국어는 한국 잡지 "저널리즘" 가을호에 "이승복 사건은 조작이다"라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기사에서는 조선일보가 승복의 형 이름을 잘못 게재한 것, 승복의 입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건은 "조선일보의 소설이다"라고 비판했다.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 독재 하에 보도가 규제되었고, 국가를 반공으로 묶어내기 위해 사건을 날조했다는 주장이었다.
2002년, 1심에서 김주언과 김종배 두 사람에게 각각 징역 6개월과 10개월의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6] 2004년 10월 28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에서 "보도의 자유는 용인되어야 한다"면서도 "(조선일보의) 기사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며 이승복 사건을 "사실"로 인정했다. (두 피고인은 각각 집행유예가 붙은 징역형과 무죄를 선고받았다.)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은 2심 판결을 지지하며 사건을 사실로 인정한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와 남북 화해의 흐름에 따라, 한국의 학교 교육 현장에서 이승복 사건이 다루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사건은 조작"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늘어났다는 영향이 나타났다. 1997년에는 도덕 교과서에서 기술이 삭제되었다. 또한, 각 학교에 세워져 있던 동상도 많이 철거되었다.[5][7]
5. 3. 대법원의 최종 판결
2004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항소심에서 김주언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김종배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조선일보의 기사가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구체성을 가진 의혹 보도 역시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될 수 있다고 밝혔다.[13][14]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은 원심을 유지하여 사건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했으며,[6] 이 판결은 이승복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인정한 것이다.6. 사건의 역사적 재조명과 사회적 의미
이승복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으로, 반공주의 교육과 이념 대립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는 한국 사회에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사건 초기에는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발언이 널리 알려지면서 반공 교육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언론 보도의 과장 의혹과 사건 자체의 진위 논란은 이승복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이승복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은 단순한 진실 규명을 넘어, 한국 사회가 이념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6. 1. 이승복 기념관
이승복기념관(이승복 기념관한국어)은 1982년 이승복의 고향인 노동리 남쪽에 건립되었다. 강원도에 위치한 기념관에는 이승복의 생애, 죽음, 매장과 관련된 사진과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이승복의 집은 계방산에서 공원으로 옮겨졌다. 야외 정적 공원에는 노스롭 F-5, 세스나 O-1, M4 셔먼 및 다양한 포병이 전시되어 있다. 이승복과 그의 가족 묘소는 공원 구역 내에 있다.[13]1975년 10월, 대관령에 "이승복 반공관"이 개관했으며, 1982년 이승복의 생가 부근으로 이전하면서 "이승복 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10][5] 부지 내에는 이승복이 다녔던 척사국민학교 계방분교의 교사도 있다.[11]
6. 2. 진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
이승복은 함께 살해된 어머니 주대원, 남동생 이승수, 여동생 이승자와 함께 묘소에 나란히 묻혀 있다. 한편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은 1999년 이후 매년 이승복의 기일마다 기념관과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1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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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자 묘지 사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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