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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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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백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이귀의 아들이며 이항복, 김장생에게 수학했다. 인조반정 공신으로 정사공신에 책록되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에서 활약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을 지켰으며, 이후 영의정에 이르렀다. 효종 때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김육의 건의로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기여했다. 드라마,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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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별명자는 돈시, 호는 조암
출생일1581년 (1592년 설도 있음)
출생지조선 연안
사망일1660년
국적조선
직업문신, 정치인
종교유학
직위
직책문신

2. 생애

아버지 이귀의 아들로, 어려서는 백사 이항복, 이후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유생 시절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으며,[1] 1624년 이괄의 난 진압과 정묘호란 당시 인조의 피난을 돕는 등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진무공신에도 책록되었다. 1629년 판결사를 시작으로 양주목사, 강화유수 등 지방관을 지내다가 1633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636년 경주부윤으로 나갔으나 곧 왕의 부름을 받아 병조참판 겸 남한산성수어사로 복귀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 방어에 참여하였다. 전쟁 이후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고 인조가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그는 적장자 계승 원칙에 따라 세손(世孫)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638년 공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청나라에 서자를 볼모로 보낸 일로 인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2] 이후 복귀하여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형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마침내 1650년 우의정, 1652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같은 해 효종의 명으로 청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655년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기여하여 민생 안정에 힘썼다.[3] 어려서 성혼, 김장생, 이항복 등 당대의 명망 높은 학자들에게 배웠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힘이 매우 세었을 뿐 아니라 지혜롭고 겸손하며 청렴결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이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백사 이항복과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유생 시절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로서 이천의 길목을 지켰으며, 안현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하여 진무공신에도 책록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수원 방어사를 맡아 인조가 강화도로 안전하게 피난하는 것을 도왔다.

1629년 이후 판결사(判決事)를 시작으로 양주목사, 강화유수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633년에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636년 경주부윤으로 나갔으나 곧 인조의 부름을 받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참판과 남한산성수어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2. 2. 인조반정

유생 시절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로서 이천(利川)의 길목을 지켰으며, 안현(鞍峴)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하여 진무공신에도 책록되었다. 이후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수원 방어사를 맡아 인조가 강화도로 안전하게 피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3.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가 되어 이천에서 길목을 지켰으며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파해 진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수원 방어사로 인조를 무사히 강화도로 대피시켰다.

2. 4.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1636년 경주부윤으로 임명되었으나, 인조의 부름을 받아 병조참판과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게 되었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데 참여하였다.

2. 5. 전후 복구 노력과 외교 활동

1636년 병자호란 이후 1638년 공조판서로 승진하여 지의금부사를 겸하였고, 같은 해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청나라에 서자를 볼모로 보낸 일로 인해 여산군에 유배되었다가 1639년 풀려나 충용사가 되었다. 이후 1644년부터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646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2]

1649년 호조판서를 지낸 뒤 이조판서, 좌참찬, 좌찬성을 거쳐 1650년 우의정, 1652년 좌의정에 올랐다. 1652년 효종 때 청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외교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655년에는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여 민생 안정에 힘썼다.[3]

2. 6. 정치 활동

유생 시절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로서 이천의 길목을 지켰으며,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진무공신에도 책록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수원 방어사를 맡아 인조가 강화도로 안전하게 피난하는 데 기여했다.

1629년 이후 판결사를 거쳐 양주목사, 강화유수를 지냈고, 1633년에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36년 경주부윤으로 발령받았으나, 왕의 부름을 받아 병조참판과 남한산성수어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을 지키는 데 힘썼다.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인조가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그는 적장자 계승 원칙에 따라 세손(世孫)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638년 공조판서로 승진하여 지의금부사를 겸직했으며, 같은 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서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일로 인해 잠시 여산으로 유배되었다. 1639년 풀려나 충용사가 되었고, 1644년 이후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1646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2]

1649년 호조판서를 시작으로 이조판서, 좌참찬,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1650년 우의정, 1652년 좌의정에 올랐다. 1652년 효종의 명으로 청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655년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기여하였다.[3]

3.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이정화(李廷華)
  • '''부친''' : 이귀(李貴, 1557~ 1633)
  • '''모친''' : 장민(張旻)의 딸 인동 장씨
  • * 남동생 : 이시담(李時聃, 1584 ~ 1665) - 백부 이자(李資)의 양자로 출계
  • * 동생 : 이시방(李時昉, 1594 ~ 1660)
  • * 이복 남동생 : 이시응(李時應)
  • * 이복 남동생 : 이시형(李時衡)
  • * 여동생 : 이여순(李女順)[4]
  • * 여동생 : 변경윤의 처
  • * 여동생 : 경주 김씨 김경여(金慶餘)의 처
  • * 여동생 : 김설의 처
  • '''부인''' : 윤지숙(尹止淑, 1579 ~ ?)[5]
  • * '''장남''' : 연창군(延昌君) 이흔(李忻, 1598 ~ 1662) - 동돈녕(同敦寧)
  • * 자부 : 서윤(庶尹), 증 승지(贈承旨) 이경항(李景恒)의 딸 신평 이씨
  • ** 손자 : 이상주(李相胄)
  • ** 손자 : 이상저(李相著)
  • ** 손녀 : 이태장의 처
  • ** 손녀 : 여민제의 처
  • * '''차남''' : 이한(李憪, 1601 ~ ?) - 참의(參議)
  • * 자부 : 감사(監司) 송영망(宋英望)의 딸 진천 송씨
  • ** 손자 : 이홍저(李弘著) - 생부 : 이열
  • * '''3남''' : 이열(李悅, 1613 ~ ?) - 군수(郡守)
  • * 자부 : 첨정(僉正) 성원(成遠)의 딸 창녕 성씨
  • * 자부 : 통덕랑(通德郞) 신현(愼晛)의 딸 거창 신씨
  • ** 손자 : 이문저(李文著)
  • ** 손자 : 이유저(李有著)
  • ** 손자 : 이인저(李仁著)
  • ** 손녀 : 정시일의 처
  • ** 손녀 : 정순양의 처
  • * '''장녀''' : 연안 이씨(1617 ~ ?)
  • * 사위 : 풍양 조씨 조내양(趙來陽 1614 ~ 1648)
  • 내손(來孫) : 좌의정 이후 - 참판 이명희(李命熙)의 아들, 판서 이유(李瑜)의 동생

4. 관련 작품

이시백은 조선 인조 대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그의 생애와 활동은 여러 드라마영화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4. 1. 드라마

4. 2. 영화

5. 박씨전

유명한 군담 소설인 《박씨전》에서 박씨 부인의 남편으로 묘사된다.

참조

[1] 문헌 인조 6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6월 11일(계사)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624-06-11
[2] 문헌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3월 18일(을축)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646-03-18
[3] 문헌 효종 20권, 9년(1658 무술 / 청 순치(順治) 15년) 4월 13일(기묘)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658-04-13
[4] 문서 법명은 예순(禮順)이다.
[5] 문서 영산군]]의 외고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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