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반정의 공신이었으나 반정에 대한 불만으로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웠지만 2등 공신 책록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난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하고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살해되었으며, 그의 난은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괄의 난 - 흥안군 (1598년)
흥안군 이제는 선조의 열번째 서자이자 활달한 성격의 왕자였으나,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국청 없이 처형되었고, 위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나 작위와 시호는 철회되었으며, 묘소는 사라졌지만 흥안대로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 이괄의 난 - 정충신
정충신은 임진왜란 때 무관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고, 다방면에 능통했으며, 사후 충무의 시호를 받았다. - 조선의 반란자 - 홍경래
홍경래는 조선 후기 평안도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한 지도자로, 평안도 지역 차별과 수탈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관군에 패배하여 사망했다. - 조선의 반란자 - 임꺽정
임꺽정은 조선 명종 시기에 양주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관아를 습격하고 빈민을 구제한 의적으로,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꼽힌다. - 정사공신 (1623년) - 이귀
이귀는 조선 시대 문신으로 연안 이씨이며, 이정화의 아들이고 장민의 딸과 혼인하여 이시백, 이시담, 이시방을 두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배우가 연기했다. - 정사공신 (1623년) - 구인후
구인후는 조선 시대 무신이자 정치인으로, 인조반정 참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의 공훈, 그리고 심기원의 모역 음모 적발 등의 공로를 세워 정사공신, 영국공신에 책록되고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이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한글 이름 | 이괄 |
한자 이름 | 李适 |
로마자 표기 | I Gwal |
자(字) | 백규(白圭) |
출생 | 1587년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
사망 | 1624년 2월 14일 (38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 원인 | 암살 |
본관 | 고성(固城)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광주 이씨 부인 |
자녀 | 이전(아들) |
친척 | 이돈(아우) |
경력 | |
복무 | 조선 군사 |
복무 기간 | 1606년 ~ 1624년 |
최종 계급 | 함경도, 평안도 병마절도사(품계:종2품급) 겸 부원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인조반정 참가, 이괄의 난 |
기타 이력 | 한학을 수학한 조선의 무관 관료 겸 군인 |
2. 생애
선조 때인 160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인조 반정 거사 도중 기밀이 누설되자 후퇴한 김류, 이귀 등을 대신하여 반정군을 인솔하여 반정이 성공하게 했고 후금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성책을 쌓고 국경을 경비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2등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서인 공신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난 것과 아들 이전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해 반역의 무고를 받자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기익헌, 한명련 등을 포섭하여 난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 서울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서울 입성 2일 후 관군에게 패퇴한 뒤, 부하에게 암살되었다.[1]
인조반정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주장한 광해군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침입한 여진족에게 함락되었고, 여진족은 자신들의 이름을 청나라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만주 평원에 거주하던 여진족과 오랜 분쟁을 겪었으며, 여진족은 명나라 말기에 요동을 점령하고 후금을 세웠다.
이괄은 한양을 함락하고 광해군을 유배 보냈다. 그러나 그는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을 뿐 인조에게 외면당했다.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선 정부와 인조는 이괄을 평안도 국경으로 보내 여진족의 침략을 막게 했다. 그곳에서 이괄은 국경 주변의 성곽과 요새를 강화하고 엄격한 군사 질서를 유지했다.
북쪽 국경에 주둔한 1만 5천 명의 군대 중 이괄은 용천에 주둔한 1만 명을 지휘했고, 나머지 5천 명은 장만 장군이 평양에 주둔했다.
2. 1. 가계 및 초기 생애
이괄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용헌 이원(李原)의 증손이자 이육(李育)의 현손이다.[4] 이육은 안기도 찰방(安奇道 察訪)을 지냈으나,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큰형인 쌍매당 이윤(雙梅堂 李胤)과 둘째 형 만헌 이주(忘軒 李胄)가 연루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청도로 낙향했다.이후 이괄의 아버지 대에 경기도 여주군에 정착하였다. 이괄은 무예뿐 아니라 글과 글씨에도 능하여 명성이 있었다.
항목 | 내용 |
---|---|
아버지 | 이제(李磾) (1538 - ?) |
어머니 | 동래 정씨(東萊 鄭氏) (1539 - ?) |
형제 | |
배우자 | 광주 이씨(廣州 李氏) (1566 - 1624) |
자녀 | |
친척 | 이응태 (1556 - 1586) |
2. 2. 초기 관료 생활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년) 윤 4월 9일 선전관으로 재직 중, 중국 명나라의 장수 유 제독(劉提督) 휘하의 항왜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유 제독 휘하의 항왜가 독약을 잘 만들자, 좌상 이덕형이 이 항왜를 꾀어내기 위해 사사로이 도감의 초료를 내어 항왜 사야여문(使也汝文) 등에게 주어 꾀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항왜가 황해남도 평산(平山)에 이르러 달아나자 제독이 크게 노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잡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계략으로 잡아 참수하게 하고 그 머리를 보냈다.[1]1599년 5월 1일 명천 현감(明川縣監)으로 부임하였고, 1603년 내직으로 돌아왔다. 그해 8월 30일 비변사 회의에서 이덕형은 "전에 명천 현감(明川縣監)으로 있었으므로 오랑캐의 정세를 잘 아는데, 이미 대정(大靜)에 제수되었으나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니 바꾸어 보낼 수 있습니다. 변장에 마땅한 사람을 얻어 군사를 어루만져 돌보면 적을 막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이괄을 변방에 천거하였다.[2]
그러나 1603년(선조 36) 11월 이신(李愼)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606년 11월 4일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28일 간원으로부터 나이 어린 무관(武官)으로 범람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3]
1607년(선조 40년) 3월 14일 태안군수를 지냈고, 그해 9월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부임하였다.[4]
2. 3. 광해군 시절
1610년 고령군수를 지내고, 그해 10월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역임했다. 1616년(광해군 8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3년간 근무했다. 1617년 허락 없이 군량과 무기를 조성했다는 이유로 우부승지 이원(李瑗)의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이 무마시켰다.[1]1622년(광해군 14년) 12월 16일 포도대장을 거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1] 부임하기에 앞서 김유, 이귀 등이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많음을 인정하고 반정의 비밀 계획을 알려왔다.[1] 이괄은 당초 이들의 요청을 거부했으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해 있을 때 신경진의 아우 신경유(申景裕)가 협박하다시피 권유하여 상경, 1623년(광해군 14년) 이귀, 김유 등의 반정 세력과 합류하여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1]
2. 4. 인조반정
1623년(광해군 15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인조반정 당일, 능양군을 주축으로 하는 반정군을 지휘해야 할 김자점이 예정 시각에 도착하지 않자 이괄이 직접 반정군을 진두지휘하여 성사시켰다.[5] 거사 당일 부서 분담 등 모든 계획을 도맡아 했지만, 인조반정 모의가 알려지면서 김유와 이귀 등은 반정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괄은 즉시 병사를 이끌고 한성부를 수색하여 광해군을 체포했다.사실 인조반정은 이괄의 과단성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쿠데타였다. 반정군의 대장을 맡기로 한 김유는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채, 자신의 무관함을 드러내기 위해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이괄이 대신 대장을 맡아 군사를 움직이자 김유는 그제서야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 반정에 합류했다.[6]
1622년, 이괄은 인조반정에 참여했다. 인조반정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주장한 광해군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침입한 여진족에게 함락되었고, 여진족은 자신들의 이름을 청나라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만주 평원에 거주하던 여진족과 오랜 분쟁을 겪었으며, 여진족은 명나라 말기에 요동을 점령하고 후금을 세웠다.
이괄은 한양을 함락하고 광해군을 유배 보냈다. 그러나 그는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을 뿐 인조에게 외면당했다.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선 정부와 인조는 이괄을 평안도 국경으로 보내 여진족의 침략을 막게 했다. 그곳에서 이괄은 국경 주변의 성곽과 요새를 강화하고 엄격한 군사 질서를 유지했다.
북쪽 국경에 주둔한 1만 5천 명의 군대 중 이괄은 용천에 주둔한 1만 명을 지휘했고, 나머지 5천 명은 장만 장군이 평양에 주둔했다.
2. 5. 논공행상과 불만
인조반정에서 이괄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2등 공신으로 책록되자 이에 불만을 품었다.[5] 서인은 이괄이 반정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김유 등의 주도로 2등 공신으로 책봉하고 한성부 판윤에 임명했다가, 곧 후금과의 국경 분쟁을 이유로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전출시켰다.[6]이괄은 인조반정 거사 도중 기밀이 누설되자 후퇴한 김류, 이귀 등을 대신하여 반정군을 인솔하여 반정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공신 책봉 과정에서 김유보다 낮은 2등에 책록되자, 이귀는 '반정하던 날 이괄의 공적이 많았다'고 변호했으나, 김유의 고집으로 2등 공신에 머무르게 되었다.[6]
이러한 결정은 이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억울하게 여길 정도였다. 이괄은 평소 반정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낮은 직위에 머무른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특히 김유 등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반감이 컸다. 학계 일각에서는 서인 사대부들이 이괄을 폄하하기 위해 이러한 불만을 과장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6]
서인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이괄은 중앙의 서인들이 자신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인조 즉위 10개월 만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5]
3. 이괄의 난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인조반정 거사 도중 기밀이 누설되자 후퇴한 김류, 이귀 등을 대신하여 반정군을 이끌어 반정을 성공시켰고, 후금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성책을 쌓고 국경을 경비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주역이었으나, 2등 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서인 공신들의 비판을 받았다.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난 것과 아들 이전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하여 반역의 무고를 받자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기익헌, 한명련 등을 포섭하여 난을 일으켰다.[7]
이괄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이는 1627년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괄의 이름은 가계에서 삭제되었다가 1930년 이후 다시 기록되었다.
3. 1. 발발
1624년(인조 2년) 1월 아들 이전이 지식층과 교류하며 공신들의 횡포로 어지러워진 시정을 개탄한 것이 반역으로 과장되어 무고를 당했다. 영변 군영에 금부도사 고덕률(高德律)·심대림(沈大臨), 선전관 김지수(金芝秀), 중사(中使) 김천림(金天霖) 등이 당도하고, 1월 말 대간에서 이괄에 대한 탄핵이 계속되자, 이괄은 아들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상황에 분노했다. 그는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하여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잠복 부대를 파견하여 아들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한명련 등을 구출하고 난을 일으켰다.[7]이 과정에서 한성에 있던 부인과 장인 이방좌, 아우 이돈은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정충신과 이중로가 이끄는 관군을 거듭 격파한 이괄의 반란군은 임진강 나루터에서 관군을 다시 격파하고 서울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서울 함락이 눈앞에 닥치자 인조와 서인 정권은 공주로 피난하기로 결정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을 버리고 도망한 지 불과 30년 만이었다. 반정 세력 끼리 내분이 일어나 나라를 또 한번 혼란에 빠뜨린 것이었다.[6] 이괄은 군사를 일으킨 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서자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새 정권을 수립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년이 안되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8]
태조가 유교 왕조를 건설한 이후로 정부 내 당파 간의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연산군 때처럼 유혈 사태로 이어지는 분쟁도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선조 시대에는 정치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고, 동인은 점차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1624년 1월, 서인들은 이괄(북인 소속)과 북인 일부가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왕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던 신하들이 상소를 제출했기에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허위로 판명되었고, 서인들은 이괄을 규탄하는 데 실패했다. 이들은 곧 다시 시도했고, 이는 왕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이괄의 아들 이전을 체포하기 위해 영변에 사헌부와 체포대를 파견했다. 아들이 자백할 경우 자신도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이괄은 선제공격을 결심하여 체포대를 살해했고, 1624년 1월 22일 반란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향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왕을 사로잡으려 했다.
정부군과의 첫 충돌은 함경도에서 발생했는데, 정부군은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끌었다. 이괄은 이 두 장군을 피해 그들의 군대를 제압했다. 수도로 향하는 행군 중 이괄은 많은 저항에 직면했지만, 모두 물리쳤다. 인조는 곧 수도를 버렸고, 이괄은 2월 10일에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 건국 이후 반군이 수도를 함락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괄은 왕족인 흥안군을 왕위에 올리고, 백성들이 자신의 군대를 지지하도록 전단을 도시 곳곳에 뿌렸다. 그러나 반군의 수도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성은 장만 등 정부군 장군들의 위협을 받았다. 이괄은 한명련을 파견하여 적과 싸우게 했지만, 불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반군은 패배했다. 이때 반군이 해체되고 흩어지자 이괄은 수도에서 탈출하려 했다. 2월 15일 이괄과 한명련이 탈출을 시도하던 중, 정부의 용서를 구하려던 기익헌이 이끄는 자신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괄은 실패했지만, 조선 사회는 혼란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이는 1627년 정묘호란을 촉발하고 쉽게 만들었다. 결국 조선은 멸망하고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3. 2. 전개
1624년(인조 2년) 1월 아들 이전이 지식층과 교류하며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으로 몰렸다. 금부도사 등이 영변 군영에 당도하고, 1월 말 대간에서 이괄에 대한 탄핵이 이어졌다. 아들이 역모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이괄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잠복 부대를 파견하여 아들과 한명련 등을 구출하고 난을 일으켰다.[7] 이괄의 군대는 곳곳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한성을 점령하여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이 과정에서 한성에 있던 이괄의 부인과 장인 이방좌, 아우 이돈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정충신과 이중로가 이끄는 관군을 연이어 격파한 이괄의 반란군은 임진강 나루터에서 다시 관군을 격파하고 서울 진입을 눈앞에 두었다. 서울 함락이 임박하자 인조와 서인 정권은 공주로 피난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을 버리고 도망한 지 불과 30년 만이었다. 반정 세력 간의 내분으로 나라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6] 이괄은 군사를 일으킨 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서자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새 정권을 수립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년도 안 되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8]
태조가 유교 왕조를 건설한 이후, 조선 시대의 정치적 상황은 정부 내 당파 간의 끊임없는 정치적 분쟁을 야기했다. 연산군 때처럼 유혈 사태로 이어지는 분쟁도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선조 시대에는 정치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1624년 1월, 서인들은 이괄(북인 소속)의 성공에 불만을 품고 이괄과 북인 일부가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왕과 가까운 신하들이 상소를 제출했기에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보고서는 허위로 판명되었고 서인들은 이괄을 규탄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다시 시도했고, 이는 왕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이괄의 아들 이전을 체포하기 위해 용변에 사헌부와 체포대를 파견했다. 아들이 자백하면 자신도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이괄은 선제공격을 결심, 체포대를 살해하고 1624년 1월 22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향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왕을 사로잡으려 했다.
함경도에서 정부군과의 첫 충돌이 발생했는데, 정부군은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끌었다. 이괄은 이 두 장군을 피해 그들의 군대를 제압했다. 수도로 향하는 행군 중 이괄은 많은 저항에 직면했지만 모두 물리쳤다. 인조는 곧 수도를 버렸고, 이괄은 2월 10일에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 건국 이후 반군이 수도를 함락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괄은 왕족인 흥안군을 왕위에 올리고, 백성들이 자신의 군대를 지지하도록 전단을 도시 곳곳에 뿌렸다. 그러나 반군의 수도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성은 장만 등 정부군 장군들의 위협을 받았다. 이괄은 한명련을 파견하여 적과 싸우게 했지만, 불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반군은 패배했다. 반군이 해체되고 흩어지자 이괄은 수도에서 탈출하려 했다. 2월 15일 이괄과 한명련은 탈출을 시도하던 중, 정부의 용서를 구하려던 기익헌이 이끄는 자신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3. 3. 진압
1624년(인조 2년) 1월 아들 이전이 지식층과 사귀다가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고 영변의 군영에 금부도사 등이 당도하였다. 이후 1월 말 대간에서 이괄에 대한 탄핵 역시 계속되었다. 아들이 역모내통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금부도사 등을 죽인 뒤 잠복부대를 파견하여 자신의 아들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한명련 등을 구출하고 난을 일으켰다.[6] 곳곳에서 관군을 대파한 그의 군대는 마침내 한성까지 점령, 흥안군[7]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성에 있던 부인과 장인 이방좌, 아우 이돈이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정충신과 이중로가 이끄는 관군을 거듭 격파한 이괄의 반란군은 임진강 나루터에서 관군을 다시 격파하고 서울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서울 함락이 눈앞에 닥치자 인조와 서인 정권은 공주로 피난하기로 결정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을 버리고 도망한 지 불과 30년 만의 일이었다. 반정 세력 끼리 내분이 일어나 나라를 또 한번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었다.[6] 이괄은 군사를 일으킨 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서자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새 정권을 수립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년이 안되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8]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그의 군대는 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이천 묵방리로 퇴각했다가 부장이던 이수백, 기익헌(奇益獻) 등에게 살해당하고 시신을 능지처참하여 육신을 전국 팔도에 보내어 목이 잘려 수급은 인조가 피난해 있던 공주로 보내져 효시(梟示)되었다.
1624년 1월, 이괄(북인 소속)의 성공에 불만을 품은 서인들은 이괄과 북인 일부가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이 상소는 왕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던 신하들이 제출한 것이었기에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보고서는 허위로 판명되었고, 서인들은 이괄을 규탄하는 데 실패했다. 이들은 곧 다시 시도했고, 이는 왕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이괄의 아들 이전을 체포하기 위해 영변에 사헌부와 체포대를 파견했다. 아들이 자백할 경우 자신도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이괄은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결국 그는 체포대를 살해했고, 1624년 1월 22일 반란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향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왕을 사로잡으려 했다.
정부군과의 첫 충돌은 함경도에서 발생했는데, 정부군은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끌었다. 이괄은 이 두 장군을 피해 그들의 군대를 제압했다. 수도로 향하는 행군 중 이괄은 많은 저항에 직면했지만, 모두 물리쳤다. 인조는 곧 수도를 버렸고, 이괄은 2월 10일에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 건국 이후 반군이 수도를 함락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괄은 왕족인 흥안군을 왕위에 올리고, 백성들이 자신의 군대를 지지하도록 전단을 도시 곳곳에 뿌렸다. 그러나 반군의 수도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성은 장만 등 정부군 장군들의 위협을 받았다. 이괄은 한명련을 파견하여 적과 싸우게 했지만, 불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반군은 패배했다. 이때 반군이 해체되고 흩어지자 이괄은 수도에서 탈출하려 했다. 2월 15일 이괄과 한명련이 탈출을 시도하던 중, 정부의 용서를 구하려던 기익헌이 이끄는 자신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4. 이괄의 난 이후
이괄의 군대는 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배하였고, 이천 묵방리로 퇴각했다가 부장인 이수백, 기익헌 등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어 전국 팔도로 보내졌고, 목은 인조가 피난해 있던 공주로 보내져 효시(梟示)되었다.[9]
4. 1. 조선에 미친 영향
이괄의 난은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조선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6] 그는 한때 한성을 점령하고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기도 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7][8]이괄의 난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
- 정치적 혼란: 반정 세력 간의 내분으로 인해 조선은 또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인조는 임진왜란 때처럼 수도를 버리고 공주로 피난을 가야 했다.
- 사회 불안: 이괄의 난은 정묘호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란군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쳐 인조 즉위의 부당함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 문화적 손실: 이괄은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지만,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의 작품과 저술 대부분이 사라졌다.
- 족보 기록 변경: 이괄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문중의 족보에서 빠졌다가 1930년 이후 다시 실리게 되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 사회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특히, 이 난은 조선이 외세의 침략에 취약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4. 2. 후손
이괄의 형제의 손자인 이복령(李福齡)은 숙모인 진주강씨(晋州姜氏)의 강보에 싸여 서해안으로 탈출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진주강씨는 어린 이복령을 데리고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를 거쳐 태안에 숨어 살게 되었다.[9]이괄과의 가까운 관계 때문에 후손들은 조선시대 내내 고성이씨(固城李氏)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못하고 진주이씨(晋州李氏)로 본관을 숨기고 생활하다가 대한제국 멸망 후에 고성 이씨로 환원하였다.[9]
이괄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문중의 족보에서 빠졌다가 1930년 이후 다시 실리게 되었다. 이때 그의 친족으로 일찍 죽은 이응태에 관한 기록까지 추가로 발견되면서, 400년 만에 발견된 미이라에 대한 자료로 연구 중에 있다.[9]
5. 평가
19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데다가 어느 정도 준수한 능력까지 갖고 있었지만, 이것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되려 독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괄의 눈에는 세상이 너무 쉬워 보였다. 인조반정을 주도해서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 상당한 공을 세웠음에도 다른 인조반정 공신들에 비해 나이가 심하게 젊어 2등공신에 책록되자, 이괄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불만을 품었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1]
공신 책봉에서 너무 어린 인물이, 게다가 너무 일찍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 너무 높은 공신에 책록되면 해당 인물은 더욱 자만하고 오만방자해지며 다른 공신들의 불만이 매우 높아질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인조 반정공신 중에서 김류와 신경진은 둘 다 이괄보다 10살 이상 연상이었으며 심지어 이귀는 그 나이가 이괄에게는 아버지뻘이었다. 다만 김자점은 그나마 이괄과 나이가 비슷했으나 그 대신 김자점은 이괄보다 늦게 관직에 올랐기에 세상을 그 정도로까지 쉽게 보는 마인드는 없었다.[1] 이괄이 능력과 공훈이 상당하지만 관록이 없다는 결함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래서 이괄을 처음부터 높은 공신에 책록하지 않고 일부러 진급할 여지를 남겨두었지만, 이괄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고 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품었다.[1]
이에 비해 김류와 신경진은 둘 다 인조반정 시점에서 이미 이괄에 비해 관록을 상당히 많이 쌓은 상태인 데다가 둘 다 조선에서 이름높은 장수의 아들들이기까지 했는데, 김류는 김여물의 아들이며 신경진은 한 술 더떠서 조선 최고의 맹장이라 불리던 신립의 아들이다.[1]
이괄의 성격이 긍정적인 성격이었더라면 평안도에 부원수로 봉해져서 부임하는 것에 대해 '임금님께서 나에게 관록을 쌓게 해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이괄은 지나치게 세상을 쉽게 여겼고 '부원수'라는 결코 낮지 않은 관직을 낮은 관직으로 여길 정도로 이괄의 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상태였다.[1] 그리고 그 이괄의 지나치게 높아져 버린 안목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1] 이는 오늘날로 따지면 마치 본인이 지상작전사령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상작전사령관'이라는 보직을 분대장 같은 병졸 보직처럼 여긴 것이나 다름없다.[1]
이는 무려 46살이나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한 권율과 대조되는 인생으로, 이괄은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오른 것이 되려 이괄 본인의 혈기를 부추겼고 그게 원인이 되어 자멸했다. 다만 이일이 능력마저 무능한 것과는 달리 이괄은 어느 정도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1] 관록을 쌓지 못한 것이 상당히 아쉬운 인물이 바로 이괄이다.[1]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이제(李磾) |
어머니 | 동래 정씨(東萊 鄭氏), 정순하(鄭淳蝦)의 딸 |
형 | 이윤(李胤) |
형 | 이주(李胄) |
동생 | 이돈(李遯) |
부인 | 광주 이씨(廣州 李氏), 이방좌(李邦佐)의 딸 |
아들 | 이전(李栴) |
며느리 | 계이(季伊, ? - 1624년 2월 6일) |
장인 | 이방좌(李邦佐, ? - 1624년 2월 4일) |
친족 | 이응태(1556년 - 1586년) |
7. 관련 작품
다음은 이괄이 등장한 작품이다.
7. 1. 드라마
7. 2. 웹툰
칼부림7. 3. 시사 교양
채널A의 프로그램 천일야사에서 배우 박재현이 이괄을 연기했다.[1]참조
[1]
서적
Historical Atlas of Northeast Asia, 1590-2010: Korea, Manchuria, Mongolia, Eastern Siberia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09-02
[2]
서적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Jimoondang
2005
[3]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4]
블로그
모헌 고성 이공 휘 육 유허비(慕軒固城李公諱育遺墟碑)
https://blog.naver.c[...]
[5]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6]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7]
문서
선조의 서10남
[8]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9]
문서
해방 이후 월여당 이희열(李希烈), 형제 군수 이기석(李基奭), 이기상(李基祥), 도지사 이영진(李寧鎭) 등의 현달한 후손이 계속적으로 배출하게 되자 진주(晋州)로 잠칭하던 본관을 고성(固城)으로 환본하기에 이르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