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케다 쓰네오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케다 쓰네오키는 1536년 오와리국에서 태어난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했다. 그는 오케하자마 전투, 아네가와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아라키 무라시게의 반란 진압 후 이타미성을 영지로 받았다.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하며 야마자키 전투에서 활약했고, 기요스 회의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적손 오다 히데노부를 옹립하는 데 기여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84년 사망 - 이반 4세
    이반 4세는 1547년부터 1584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한 최초의 차르로, 초기 개혁과 영토 확장에도 불구하고 오프리치니나 시행과 리보니아 전쟁 실패로 혼란과 쇠퇴를 초래했으며, 잔혹함과 권력욕으로 악명 높지만 중앙집권화와 영토 확장에 기여한 복잡적인 인물이다.
  • 1584년 사망 - 빌럼 1세 판 오라녜
    빌럼 1세 판 오라녜는 16세기 네덜란드 독립을 이끈 지도자로서 오라녜 공작으로서 독립 전쟁을 이끌었으며, 정치적 수완과 군사적 전략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건립의 토대를 마련하고 종교적 관용을 옹호하여 네덜란드의 국부로 추앙받는다.
  • 1536년 출생 - 송응창
    송응창은 명나라 관료로서 임진왜란 때 경략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평양 수복에 기여했으나, 석성과의 갈등과 당쟁으로 은퇴 후 《경략복국요편》을 저술했으며, 산동순무 시절 행정 능력을 인정받은 위엄 있는 인물이다.
  • 1536년 출생 - 삿사 나리마사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호쿠리쿠에서 공을 세웠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다 항복 후 히고 국주로 임명되었지만 히고 국인 일기를 진압하지 못해 할복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 미노 이케다씨 - 이케다 아쓰코
    이케다 아쓰코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넷째 딸로 태어나 이케다 다카마사와 결혼하며 황족 신분을 떠난 후 이케다 동물원 운영을 돕고 이세 신궁 제주와 신사본청 총재를 역임한 일본의 옛 황족이다.
  • 미노 이케다씨 - 오카야마성
    오카야마성은 일본 오카야마현에 위치하며, 남북조 시대에 축성되어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 이케다 씨의 거성으로 사용되었고, 메이지 시대에 폐성령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1960년대에 재건되어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천수각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케다 쓰네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케다 쓰네오키 (하야시바라 미술관 소장)
본명이케다 쓰네오키
일본어 이름池田 恒興
별명쓰네오키, 쇼자부로
관직
관위기이노카미
생애
출생1536년
출생지오와리국
사망1584년 5월 18일
사망지나가쿠테시
계명고코쿠인 오가쿠 소에이 다이젠조몬
묘소교토시 우쿄구 하나조노의 묘신사 지운인
기후현 이비군 이케다정 혼고의 류토쿠사
돗토리현 구라요시시의 쇼뉴지
와카야마현 이토군고야정의 고야산 오쿠노인
가문
씨족미노 이케다 가문
가문 문양[[File:Japanese Crest Bizenn Chou.svg|15px]] 비젠 나비
가족 관계
아버지이케다 쓰네토시
어머니요토쿠인
배우자젠오인
자녀모토스케

데루마사
나가요시
나가마사
와카마사도코로
덴큐인
아사노 요시나가 정실
오다 가쓰나가 정실
양자시치조
경력
주군오다 노부히데
노부나가
노부타다
히데노부
하시바 히데요시
소속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직위가로, 다이묘
지휘 부대이누야마성, 오가키성
주요 전투이노 전투
스에모리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
이나바야마성 공방전
아네가와 전투
히에이산 공성전
마키시마성 공방전
나가시노 전투
데도리가와 전투
하나쿠마 공성전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봉록오가키 13만 석
주요 봉직오다 노부나가
이력
이누야마성 성주1570년 ~ 1583년
오가키 성주1583년 ~ 1584년
가독 상속1538년
가독 계승자이케다 데루마사

2. 생애

덴분 5년(1536년), 오와리국 오다 가문의 가신 이케다 쓰네토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요토쿠인은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였으며, 후에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의 측실이 되었다. 그의 통칭은 가쓰자부로(勝三郎)였고, 관직은 기이노카미(紀伊守)였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오와리국 외에도 미노국, 셋쓰국, 오미국 등 여러 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오다 노부나가고쇼(小姓, 시동)로 오다 가문을 섬겼다. 고지 3년(1557년),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쓰 제거에 가담했고, 이후 오케하자마 전투(1560년), 미노국 공략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8][4]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전투의 공으로 이누야마성 성주가 되었고,[8] 덴쇼 8년(1580년) 하나쿠마성 전투 후에는 셋쓰국 이타미성 성주가 되었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주고쿠에서 회군한 하시바 히데요시와 합류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 격파에 기여했다. 이때 히데요시와 사돈 관계를 맺고 삭발하여 '''쇼뉴'''(勝入)라 칭했으며, 오다 가문의 숙로(宿老)가 되었다.

기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를 지지하여 노부나가의 손자 산보시 옹립에 기여했고, 그 결과 셋쓰국 오사카, 아마가사키, 효고 일대 12만 석을 받았다. 이듬해인 덴쇼 11년(1583년)에는 미노국 오가키성 성주가 되어 13만 석을 추가로 얻었다.[5]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는 기후성 성주가 되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여 참전했으나, 전투 중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 사위 모리 나가요시와 함께 전사했다. 나가이 나오카쓰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향년 49세였다. 가독은 차남 이케다 데루마사가 이었고, 유해는 교토 묘신지에 안장되었다.

2. 1. 오다 가문 가신 시절

덴분 5년(1536년), 오와리국에서 오다 가문의 가신 이케다 쓰네토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머니 요토쿠인은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였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의 측실이 되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통칭은 가쓰자부로(勝三郎)였다. 쓰네오키는 유년기부터 노부나가의 고쇼(小姓, 시동)로 오다 가문을 섬겼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오와리국 외에도 미노국, 셋쓰국, 오미국 등 여러 설이 있다.

고지 2년(1556년 또는 1557년), 주군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모반을 꾀한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오다 노부카쓰)를 치는 데 가담했다.[1] 에이로쿠 3년(1560년) 5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 군을 상대로 싸웠고[8], 이후 미노국 공략[4]에도 참여했다. 특히 에이로쿠 10년(1567년) 이나바야마 성 공방전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제1부대를 이끌고 사이토 가문과 싸웠다.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을 상대로 공을 세워 이누야마성 성주가 되어 1만 관(貫)의 영지를 받았다.[8]

이후에도 오다 가문의 주요 전투에 꾸준히 참여했다. 겐키 2년(1571년)에는 히에이 산 방화와 나가시마 잇코잇키 진압에 참여했고, 덴쇼 원년(1573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공격한 마키시마성 전투[4]에 참전했다. 덴쇼 2년(1574년)에는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빼앗긴 아케치성을 방어하기 위해 미노국 동부의 오리성(오자토성)에 주둔했다.[4]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다케다 가문을 상대로, 덴쇼 5년(1577년) 데토리가와 전투에서는 우에스기 가문을 상대로 싸웠다.

덴쇼 6년(1578년) 11월부터는 오다 노부타다 휘하에 배속되어 아라키 무라시게가 일으킨 반란 진압(아리오카성 전투)에 종군했다. 덴쇼 8년(1580년) 7월, 셋쓰국의 아마가사키성과 하나쿠마성을 함락시키는 공(하나쿠마성 전투)을 세웠다. 이 공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의 옛 영지였던 셋쓰국 이타미성(아리오카성에서 옛 이름으로 복귀)과 그 영지를 하사받았다.

덴쇼 10년(1582년) 3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고슈 정벌에는 두 아들을 출진시키고, 본인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셋쓰국 수비를 맡았다. 같은 해 5월, 주고쿠의 빗추 다카마쓰성을 공격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자, 6월 11일 주고쿠에서 급히 회군하여 아마가사키에 도착한 하시바 히데요시 군에 합류했다. 이때 히데요시와 사돈 관계(차남 이케다 데루마사를 히데요시 양자로,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사위로)를 맺기로 약속하고, 삭발하여 '''쇼뉴'''(勝入)라 칭했다.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4,000명(혹은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우익 선봉을 맡아 미쓰히데 군 격파에 기여했고[1], 그 공으로 오다 가문의 숙로(宿老, 중신)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오다 가문의 후계와 영지 재분배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 대립하며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노부나가의 적손인 산보시(三法師, 후의 오다 히데노부)를 옹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회의 결과, 쓰네오키는 셋쓰국오사카, 아마가사키, 효고 지역을 아우르는 12만 석의 영지를 획득했다. 쓰네오키는 오사카로 거처를 옮겼고,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는 이타미, 차남 이케다 데루마사는 아마가사키에 배치되었다.

덴쇼 11년(1583년) 기요스 회의에서 대립했던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히데요시 측을 지원했다. 전투 후인 같은 해 5월, 미노국 내 오다 노부타카의 옛 영지였던 13만 석을 하사받아 오가키성 성주가 되었다.[5] 장남 모토스케는 기후성 성주가 되었다.

2. 2. 도요토미 가문 지지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자, 쓰네오키는 주고쿠 지방에서 회군한 하시바 히데요시와 6월 11일 아마가사키에서 합류했다. 이때 히데요시와 약속하여 차남 이케다 데루마사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내고,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사위로 맞이하기로 했다.[1] 이후 삭발하고 '''쇼뉴'''(勝入)라 칭했다.[1]

같은 해 6월 13일에 벌어진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우익 선봉을 맡아 아케치 미쓰히데 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으며[1], 이 공으로 오다 가문의 슈쿠로(宿老) 반열에 올랐다.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가문의 후계 문제와 영지 재분배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노부나가의 적손인 산보시(오다 히데노부)를 옹립하는 데 힘을 보태며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 대립했다. 회의 결과, 쓰네오키는 셋쓰국오사카, 아마가사키, 효고 지역에 걸쳐 12만 석의 영지를 새로 받았다.

덴쇼 11년(1583년)에 히데요시와 가쓰이에가 충돌한 시즈가타케 전투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전투 후인 같은 해 5월, 미노국 내에서 오다 노부타카가 가지고 있던 옛 영지 13만 석을 받아 오가키성의 성주가 되었다.[5]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는 기후성 성주가 되었다.

덴쇼 12년(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및 오다 노부오 연합군과 히데요시 간에 벌어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히데요시는 승리할 경우 쓰네오키에게 오와리국 전체를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설도 있다.[6] 쓰네오키는 전투 초반 이누야마성을 공략하는 등 활약했으나, 4월 9일 미카와국을 기습하려던 중 이와사키성을 공격한 후 벌어진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의 반격을 받아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 사위 모리 나가요시와 함께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쓰네오키는 나가이 나오카쓰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가독은 차남 이케다 데루마사가 상속했다.

2. 3.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죽음

덴쇼 12년(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및 오다 노부카쓰 연합군과 하시바 히데요시 사이에서 벌어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히데요시 측으로 참전하였다. 히데요시는 쓰네오키에게 승리할 경우 오와리 일국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해진다(『이케다 문서』).[6]

쓰네오키는 전투 초반 이누야마성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였다. 이후 미요시 히데쓰구(당시 이름 미요시 노부요시), 사위인 모리 나가요시, 그리고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를 공략하기 위해 남하했다. 4월 9일(음력), 이와사키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나가쿠테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의 반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하였다.[1] 전투 전 안장에 총탄을 맞아 낙마하며 부상을 입었던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사할 당시, 의자에 앉아 진을 정비하던 중 나가이 나오카쓰의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1] 향년 49세였다.[1]

이케다 쓰네오키의 묘, 기후현 이케다


이 전투에서 쓰네오키뿐만 아니라 그의 장남 모토스케와 사위 모리 나가요시도 함께 전사하였다.[1] 쓰네오키의 유해는 도토미국 아라이(新居)에 잠시 매장되었다가, 이후 교토의 묘신지 내 지원원(慈院)으로 이장되었다. 시세를 보는 눈과 용맹함을 갖추었으나, 때로는 생각이 짧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장남 모토스케의 전사로 이케다 가문의 가독은 차남 데루마사가 상속하게 되었다.

2. 4. 사후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 편으로 참전하였다. 서전으로 이누야마성을 공략한 후, 미요시 히데쓰구, 모리 나가요시,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를 공략하려 했으나, 이에야스 군의 역습을 받아 전사하였다.[1] 전투 초반에 안장에 총탄을 맞아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진을 정비하던 중 나가이 나오카쓰의 창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향년 49세였다.

이 전투에서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와 사위 모리 나가요시도 함께 전사하여[1] 이케다 가문의 가독 승계에 문제가 생겼다. 모토스케의 장남이자 쓰네오키의 손자인 이케다 요시유키는 당시 8세로 어렸기 때문에, 차남 이케다 데루마사가 가독을 이어 이케다 씨족의 새로운 당주가 되었다.[1] 딸 이케다 센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1]

장례는 도토미국에서 치러졌으나, 후에 교토 묘신지에서 다시 장례를 치렀다.

3. 평가

시세를 보는 눈과 용맹함은 갖추었으나, 생각이 짧다는 평가가 있다.

3. 1. 부정적 평가

덴쇼 12년(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오다 노부카쓰 연합군과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하시바 히데요시 편으로 참전하였다. 서전으로 이누야마성을 공략한 뒤 미요시 히데쓰구,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를 공략하려 했으나, 전투 중 안장에 총탄을 맞아 낙마하고 부상을 입었다. 결국 이에야스군의 역습을 받아 진을 정비하던 중 나가이 나오카쓰의 창에 찔려 전사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시세를 보는 눈과 용맹함은 갖추었으나, 생각이 짧다는 평가가 있다.

4. 이름

어릴 적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통칭은 가쓰자부로(勝三郎)였다. 나중에 쇼자부로(勝三郎)라고도 불렸다. 그의 관직명은 키이노카미(紀伊守)로, 이는 기이 국의 지사를 의미한다. 나중에 승려가 되어 쇼뉴(勝入)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휘에 대해서는 노부테루(信輝)라는 설이 있으나, 신뢰할 수 있는 동시대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 군기물에서는 휘를 노부테루(信輝)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간세이 중수 제씨보』에는 '''노부테루(信輝)'''로 기록되어 있으며, "처음엔 쓰네오키(恒興)"라고 부기되어 있다. 이 사료에는 오다 노부히데를 섬겨 호시자키 성을 공격할 때 공을 세워 휘를 하사받아 노부테루(信輝)라고 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5. 가계


  • '''아버지''': 이케다 쓰네토시 池田恒利일본어 (?-1538)
  • '''어머니''': 요토쿠인 養徳院일본어 (1515-1608) -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 이케다 마사히데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 '''정실''': 젠오인 善応院일본어 (?-1604) - 아라오 요시쓰구 荒尾善次일본어의 딸. 원래 오다 노부토키의 부인이었으며, 노부토키와의 사이에 딸(시치조 七条일본어)을 두었다. 이 딸은 쓰네오키의 양녀가 되었다.


'''자녀'''
구분이름생몰년생모비고
장남이케다 모토스케 池田元助일본어1559년/1564년 ~ 1584년젠오인
차남이케다 테루마사 池田輝政일본어1565년 ~ 1613년젠오인히메지번 초대 번주
삼남이케다 나가요시 池田長吉일본어1570년 ~ 1614년젠오인돗토리번 초대 번주
사남이케다 나가마사 池田長政일본어1575년 ~ 1607년젠오인카타기리 토시모토 片桐俊元일본어의 양자
장녀이케다 센 池田せん일본어? ~ ?불명모리 나가요시의 부인, 후에 나카무라 카즈우지의 부인
차녀와카만도코로 若政所일본어? ~ 1601년불명별칭: 若御前일본어, 天瑞院殿일본어?.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정실
삼녀텐큐인 天球院일본어? ~ ?불명야마자키 이에모리의 정실, 후에 이혼
사녀이름 불명? ~ ?불명아사노 요시나가의 정실
오녀이름 불명? ~ ?불명오다 가쓰나가의 정실


  • '''양녀'''
  • * 시치조 七条일본어 - 오다 노부토키와 젠오인의 딸. 이이오 도시나리 飯尾敏成일본어의 정실, 후에 시모마 요리타츠 下間頼龍일본어의 정실.

6.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서적 Hideyoshi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 Asia Center 2017-08-12
[3] 웹사이트 林原美術館ホームページ 企画展「戦陣に舞う揚羽蝶-池田家草創期-」 http://www.hayashiba[...]
[4] 서적 『信長公記』
[5] 서적 『多聞院日記』
[6] 문서 『池田家文庫文書』
[7] 서적 『土岐斎藤軍記』
[8] 서적 『池田氏家譜集成』
[9] 서적 『太閤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