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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라 요시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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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에치젠 아사쿠라 씨의 11대 당주로, 1533년에 태어나 1573년에 사망했다. 그는 문화적 소양과 외교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전국 시대의 급변하는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와 군사적 능력 부족으로 가문을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교토의 문화를 이치조다니에 들여와 번성시켰으며, 다양한 예능을 즐기고 외교에도 힘썼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가신들의 배신으로 결국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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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라 요시카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사쿠라 요시카게
원어 이름朝倉 義景
출생1533년 10월 12일
사망1573년 9월 16일
출생지이치조다니 성
사망지로쿠보 겐쇼지, 오노
가명손지로
어린 시절 이름나가야샤
개명엔케이, 요시카게
계명쇼운인덴타이큐소코다이코지
묘소후쿠이현후쿠이시 이치조다니, 후쿠이현오노시 이즈미초 이치조지 (요시카게 공원)
가문구사카베 성 아사쿠라 씨
아버지아사쿠라 다카카게
어머니다케다 모토미쓰의 딸
배우자호소카와 하루모토의 딸, 히 문자 히메 (고노에 다네이에의 딸)
측실고자이쇼 (쿠라타니 쓰구토모의 딸), 고쇼쇼 (사이토 효부쇼유의 딸) 외
자녀아키마루
아이오마루
시하이 (혼간지 교뇨와 혼약)
딸 (출가)
마쓰 (쇼코지 겐코 실)
야마우라 가게쿠니 실 (우에스기 가게카쓰 양녀)
노부카게
관직 및 지위
관위종4위 하 좌위문독
막부무로마치 막부 : 에치젠 국슈고 직
주군아시카가 요시테루요시아키
가문아사쿠라 씨
군사 및 정치 활동
소속아시카가 막부
아자이 씨
부대아사쿠라 씨
주요 전투가네가사키 공방전 (1570)
아네가와 전투 (1570)
히키다 성 공방전 (1573)
이치조다니 성 공방전 (1573)
기타
종교불교

2. 생애

1533년 9월 24일,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에치젠국 이치조다니 성에서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다케다 모토미쓰의 딸로 추정된다.[3] 1471년, 아사쿠라 씨는 에치젠 국 일부 지역의 수호 군사 지휘관으로서 시바 씨를 대체했다.[1] 1548년, 요시카게는 아버지를 이어 아사쿠라 씨의 당주이자 이치조다니 성의 성주가 되었다.[2][4]

요시카게는 정치적,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는데, 특히 통치 초기에 에치젠에서 일향일揆와의 협상을 통해 양측 간의 주요 갈등을 종식시킨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요시카게의 협상과 효과적인 통치 덕분에 에치젠은 전국 시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누렸다. 그 결과, 에치젠은 간사이 지방의 폭력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이치조다니는 교토를 본뜬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1]

1565년 미요시 요시쓰구 등에 의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암살당한 후, 그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망명해 오자 요시카게는 그를 받아들였다.[16] 요시아키는 여러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이웃 나라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군사를 일으키기 어려웠다. 이에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에게 교토 상경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관계를 깊게 했다. 그러나 요시카게는 1568년 아들이 급사하자, 슬픔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요시아키의 상경 요청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16]

결국 1568년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하여 에치젠을 떠났고, 이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하였다. 요시카게는 노부나가의 상경 명령을 두 차례나 거부했다.[16]

1570년, 오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을 침공했다. 요시카게는 군사적 능력이 부족하여 가네가사키 성을 포위 공격당하고, 아사쿠라 영지 전체가 침공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1][5][6] 비록 아자이 나가마사와 함께 가네가사키에서 협공을 시도했지만, 노부나가를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3]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요시카게와 나가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오다, 도쿠가와 씨 연합군에게 패배했다.[1] 이후 요시카게는 히에이잔으로 도망쳐 노부나가와 화해 협상을 벌여 3년간 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3]

1573년, 히키다 성 전투에서 요시카게가 도망친 후, 노부나가는 이치조다니 성을 포위했다. 결국 요시카게는 사촌인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에게 배신당하고 할복하여 자결했다. 그의 죽음으로 아사쿠라 씨는 멸망했다.[1][2][3]

2. 1. 가독 상속과 전반생 (1533년 ~ 1555년)

덴분 2년(1533년) 9월 24일, 에치젠 아사쿠라 씨 제10대 당주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나가야샤'''('''長夜叉''')였다. 덴분 17년(1548년) 3월, 아버지 다카카게가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아 제11대 당주가 되었다. 초기에는 나이가 어려 고지 원년(1555년)까지 외증조부 아사쿠라 소테키가 정무와 군사를 보좌했다.

덴분 21년(1552년) 6월 16일,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요시(義)' 자를 받아 '''요시카게'''('''義景''')로 개명했다.[15] 고지 원년(1555년) 소테키가 사망하면서 요시카게가 직접 정무를 맡게 되었다.

2. 2. 소테키 사후의 정치와 와카사, 가가 침공 (1555년 ~ 1568년)

1555년, 아사쿠라 소테키가 사망한 후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와카사국가가국을 침공했다.

1565년 5월 19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미요시 요시쓰구 등에게 암살당했다. 요시카게는 이 소식을 5월 20일 다케다 요시미쓰(武田義統)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16] 8월, 아사쿠라군은 와카사로 병력을 보냈다. 같은 해 8월 5일, 요시테루의 숙부인 다이가쿠지 요시토시(大覚寺義俊)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서장에 따르면, 요시테루의 동생 가쿠케이(훗날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7월 28일 유폐되어 있던 나라를 탈출하여 오미국으로 오게 된 배경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획책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요시카게는 요시테루의 가신이었던 와다 고레마사(和田惟政), 호소카와 후지타카, 요네다 다마사(米田求政) 등 가쿠케이 탈출에 관여한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6]

9월 8일,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 야시마 고쇼(矢島御所)에서 쫓겨나 와카사 다케다 가문에 의지하고 있던 가쿠케이, 즉 요시아키(義秋)가 에치젠국 스루가로 이동하자, 요시카게는 가게아키라를 사자로 보내 그의 방문을 환영하였다.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가문의 후원을 기대하며 아사쿠라 가문과 가가 잇코잇키(加賀一向一揆)의 화친을 주선하려 했다. 그러나 양측의 오랜 대립은 매우 심각하여 화친을 도모할 단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1567년 3월, 가신 호리에 가게타다(堀江景忠)가 가가 잇코잇키와 내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가가국에서 스기우라 하루토(杉浦玄任)가 이끄는 잇코잇키 군이 침입해 오자, 요시카게는 야마자키 요시이에, 우오즈미 가게카타(魚住景固)에게 명하여 호리에 가문을 공격하게 했다. 가게타다는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결국 화친하고, 가가국을 지나 노토국으로 쫓겨났다. 이는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의 참언에 의한 내란이었다고 『아사쿠라 시말기(朝倉始末記)』는 기록하고 있다.

11월 21일, 요시아키를 이치조다니의 안요지(安養寺)로 맞이하고, 11월 27일에 요시카게는 축하 인사를 했다. 12월에는 요시아키의 중개로 가가 잇코잇키와 화해가 성립되었다.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겐신 등 여러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재촉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들은 이웃 국가와의 정치적 상황 등 여러 문제로 병력을 내기 어려웠다. 때문에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에게 교토 상경전을 요구했고, 12월 25일에는 비공식적으로 요시카게의 저택을 방문했다. 또한 요시아키가 발급한 어내서(御内書)에 요시카게는 부장(副状)을 첨부하게 하는 등, 이때의 요시카게는 실질적으로 간레이에 준하는 입장에 있었다. 「아사쿠라 계도」(朝倉系図)에서는 아예 요시카게의 지위를 간레이다이(管領代)로 기재하고 있다.

1568년 3월 8일, 요시카게에 의해 고토쿠인(高徳院)이 니이노아마(二位の尼)로 서위되었다. 4월에는 요시아키가 요시아키(義昭)로 이름을 바꾸고 아사쿠라 저택에서 원복을 행하였다. 그 후에도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저택을 방문하여 요시카게뿐 아니라 아사쿠라 일문에 대해서도 관계를 깊게 하며 상경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6월에 요시카게의 적자 구마기미마루가 급사하자, 요시카게는 슬픔에 빠져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이처럼 요시카게는 요시아키가 바라던 상경전에 냉담했기 때문에, 7월에 요시아키는 미노국을 지배하며 세를 떨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해 에치젠국을 떠났다. 요시카게는 이를 말렸으나, 요시아키는 자신이 체재 중에 받은 후의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어내서를 남기고 에치젠을 떠나버렸다.

2. 3. 아시카가 요시아키와의 관계와 상경 거부 (1565년 ~ 1568년)

1565년 미요시 요시쓰구 등에 의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암살당한 후, 그의 동생인 足利義昭|아시카가 요시아키일본어의 망명을 받아들였다.[16] 요시아키는 1567년 11월 21일 이치조타니의 안요지(安養寺)로 거처를 옮겼고, 요시카게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16]

요시아키는 여러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요청했지만, 이웃 나라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군사를 일으키기 어려웠다. 이에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에게 교토 상경을 요구하며, 1567년 12월 25일에는 비공식적으로 요시카게의 저택을 방문하기도 했다.[16] 그러나 요시카게는 요시아키의 상경 요청에 소극적이었다.

1568년 4월,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저택에서 원복(元服)을 행하고 이름을 요시아키(義昭)로 바꾸었다. 그 후에도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저택을 방문하여 요시카게뿐만 아니라 아사쿠라 가문 사람들과 관계를 깊게 하며 상경을 재촉했다. 그러나 6월에 요시카게의 아들이 급사하자, 요시카게는 슬픔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16]

결국 요시아키는 1568년 7월,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하여 에치젠을 떠났다. 요시카게는 이를 만류했지만, 요시아키는 그동안의 후의에 감사하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16] 이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하였고, 요시카게에게 두 차례 상경을 명했으나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했다.[16]

2. 4.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과 몰락 (1570년 ~ 1573년)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요시카게를 섭정으로 임명하고 오다 노부나가를 수도에서 몰아내는 데 지원을 요청했다.[3] 그러나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임명한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에게 모든 지역 다이묘들에게 교토로 와서 연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요시카게는 거절했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을 침공했다. 요시카게의 군사적 능력 부족으로 인해 오다군은 가네가사키 성(현재 쓰루가시)을 포위 공격하여 아사쿠라 영지 전체를 침공에 노출시켰다.[1][5][6]

요시카게는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매부인 아자이 나가마사(1545~1573) 사이의 군사적 갈등으로 이득을 보았다. 아자이는 아사쿠라와 함께 노부나가에 대해 가네가사키에서 집게 공격을 가했지만, 노부나가는 군대를 철수했고, 아사쿠라와 아자이 연합군은 노부나가를 사로잡지 못했다.[3]

1570년 7월, 아네가와 전투에서 요시카게와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이끄는 오다 씨와 도쿠가와 씨의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에게 패배했다.[1] 아네가와 전투 후 요시카게는 히에이잔(엔랴쿠지)으로 도망쳐 노부나가와 화해 협상을 벌였고 3년간 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3]

1573년, 요시카게가 히키다 성 전투에서 도망친 후,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의 성읍을 공격하고 이치조다니 성을 포위했다. 요시카게는 결국 사촌인 아사쿠라 가게아키(1529~1574)에게 배신당했다. 그는 현재 오노시에 위치한 록보 겐쇼지 절에서 할복을 통해 자살하도록 강요받았다. 향년 39세였다.[1][3] 요시카게의 죽음으로 아사쿠라 씨는 멸망했다.[2]

겐키(元亀) 원년(1570년) 6월 28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군은 아네가와 전투에서 격돌하였다. 아사쿠라 군은 아사쿠라 가게타케를 총대장으로 하여 8천 명의 병력으로 도쿠가와 군과 대결했지만,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측면을 찔려 패주했다. 오다 군은 아자이 측의 많은 지성을 함락시켰고, 아자이·아사쿠라 측은 이후 전투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8월 25일, 노부나가가 미요시 산닌슈·이시야마 혼간지 토벌을 위해 셋쓰에 출병하는 틈을 타, 요시카게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다. 아자이 군과 공동으로 9월 20일에 오다 영지인 오미 사카모토에 침공했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하루와 중신인 모리 요시나리를 전사시켰다. 또한 오쓰를 불태우고 활동하여 9월 21일에는 다이고·야마시나에 주둔했다. 노부나가가 오미까지 군대를 돌려오자, 요시카게는 히에이 산에 틀어박혀 오다 군과 대치한다(시가의 진). 이때 노부나가는 히에이 산에 자신에게 편을 들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10월 20일, 오다·아사쿠라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발생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시간을 정해서 결전을 요구했지만, 요시카게는 무시했다. 11월 25일,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의 퇴로를 끊기 위해 가타다에 별동대를 보냈다. 11월 26일에는 아사쿠라·오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지만, 양측 모두 승부를 내지 못했다. 11월 28일, 아시카가 요시아키 등이 사카모토에 내려와 화의 중재를 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조정에 공작을 했기 때문에, 12월에 노부나가와 요시카게는 칙명으로 강화하게 된다.

겐키 2년(1571년) 1월,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명령하여 에치젠과 오미 사이의 교통을 차단·방해하게 했다. 6월 11일, 요시카게는 겐뇨와 화의를 맺고, 겐뇨의 아들인 교뇨와 딸의 약혼을 성립시켰다. 8월, 요시카게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공동으로 오다 영지인 요코야마 성·미누라 성을 공격했지만, 반대로 노부나가에게 병참을 위협받아 패퇴했다. 이후 노부나가는 전년에 아사쿠라를 도왔던 히에이잔을 불태웠다.

겐키 3년(1572년) 7월, 노부나가는 오다니 성을 포위하고, 도라고젠 산·하치조 산·미야베 각 요새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아자이 씨는 아사쿠라 씨에게 나가시마 잇코잇키가 오와리와 미노 사이를 봉쇄했으므로, 지금 출병하면 오다 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허위 정보를 전했고, 요시카게는 이를 믿고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요시카게는 공세를 펼치지 않았고, 오다 군의 산발적인 공격을 받자, 마에바 요시쓰구와 도미타 나가시게 등 유력 가신들이 노부나가 측에 투항했다. 9월, 오다 측 요새가 완성되었다. 노부나가는 다시 시간을 정해서 결전을 제안했지만, 요시카게는 이를 무시했다. 9월 16일, 노부나가는 요새에 기노시타 히데요시를 남겨두고 요코야마 성으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10월, 다케다 신겐이 서상 작전을 개시했다. 도토미·미카와 방면으로 침공하여 도쿠가와 측 성을 잇달아 빼앗았다. 신겐은 요시카게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노부나가가 기후로 철수하자, 요시카게는 아자이 세력과 공동으로 공격했지만, 도라고젠 산 요새의 히데요시 부대에 막혀 패퇴했다. 12월 3일, 요시카게는 부하들의 피로와 적설을 이유로 에치젠으로 철수했고, 신겐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겐키 4년(1573년) 2월 16일, 신겐은 겐뇨에게 요시카게의 철병에 대한 원망을 말하면서 다시 출병을 요청했고, 겐뇨도 요시카게의 출병을 요구했다. 3월, 요시아키가 정식으로 노부나가와 단교하자 요시카게의 상락 소문도 있었지만, 요시카게는 움직이지 않았다. 4월 12일, 아사쿠라 씨 동맹자였던 다케다 신겐이 진중에서 병사하고, 다케다 군은 가이로 철수했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오다 군 주력을 아자이·아사쿠라 측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덴쇼 원년(1573년) 8월 8일, 노부나가는 3만 군사를 이끌고 오미에 침공했다. 요시카게도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려 했으나, 여러 차례 실책을 거듭해 온 요시카게는 이미 가신들의 신임을 잃었고, 아사쿠라 가게카가미, 우오즈미 가게타카 등이 요시카게의 출진 명령을 거부하였다. 요시카게는 야마자키 요시이에, 가와이 소세이 등을 소집하여 2만 군세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8월 12일, 노부나가는 폭풍우를 이용하여 아사쿠라 측 요새인 오오다케 요새를 공격한다. 노부나가의 기습으로 아사쿠라 군은 패퇴하여 요새에서 쫓겨난다.

8월 13일, 조노야마 요새가 함락되고 요시카게는 나가마사와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요시카게는 에치젠으로 철병을 결단한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의 후퇴를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사쿠라 군은 노부나가가 직접 이끄는 오다 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다베야마 전투에서 아사쿠라 군은 패퇴하여 야나세로 도주하였다. 노부나가의 추격은 격렬했고, 아사쿠라 군은 후퇴 도중 도네자카에서 오다 군에게 추격당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요시카게 자신은 히키다 성으로 도망쳤으나, 이 전투에서 사이토 다쓰오키, 야마자키 요시이에, 야마자키 요시노부 등의 무장이 전사하였다.

요시카게는 히키다 성에서 도망쳐 이치조다니를 향하였으나, 이 사이에도 장병들의 탈영이 잇달았고, 남은 것은 도리이 가게치카와 다카하시 가게나리 등 10명 정도의 측근뿐이었다.

8월 15일, 요시카게는 이치조다니에 귀환하였다. 그러나 아사쿠라 군의 궤멸을 알고 이치조다니를 지키고 있던 장병 대부분은 도망쳐 버렸다. 요시카게가 출진 명령을 내려도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를 제외하고는 출진조차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요시카게는 자결하려 하였으나, 신하인 도리이, 다카하시에게 제지당했다고 한다.[17]

8월 16일, 요시카게는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의 권유에 따라 이치조다니를 버리고 에치젠 오노의 도운사로 피신하였다.

8월 17일, 헤이센지의 승병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회유를 받고 있던 헤이센지는 요시카게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도운사를 오히려 공격하였기 때문에, 요시카게는 8월 19일 저녁, 가게카가미의 방비가 불안하다는 권유로 겐쇼지로 피신하였다.

한편, 8월 18일 노부나가가 이끄는 오다 군은 시바타 가쓰이에를 선봉으로 하여 이치조다니를 공격하여 저택과 신사 불각 등을 방화하였다. 이 방화는 사흘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2. 5. 최후 (1573년)

1573년,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의 배신으로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자결했다.[1] 요시카게 사후, 그의 어머니 고토쿠인과 애첩 고쇼쇼, 어린 아들 아이오마루 등 혈족 대부분은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니와 나가히데에게 몰살당해 아사쿠라 가문은 완전히 멸문되었다.[2] 요시카게의 목은 교토의 고쿠몬(獄門)에 효수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의 두개골을 아자이 히사마사나가마사 부자의 것과 함께 금칠하여 백목(白木) 받침대에 놓고 가신들에게 공개했다 (술잔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창작이다).[3] 구와타 다다치카는 이러한 노부나가의 행위를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고 평가했으나, 미야모토 요시미는 적장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새 출발을 다짐한 것이라 분석했다.

3. 인물 및 평가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덴분 2년(1533년) 9월 24일 에치젠의 센고쿠 다이묘인 아사쿠라 씨 제10대 당주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다케다 모토미쓰의 딸로 추정된다. 아명은 나가야샤(長夜叉)였다. 1548년 아버지 다카카게가 사망한 후 가독을 승계하여 16세의 나이로 제11대 당주가 되었고, 1552년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이름자 한 자를 받아 요시카게로 개명했다.

요시카게는 아사쿠라 소테키 생전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딸과 결혼했으나, 정실은 여자 아이를 낳은 직후 사망했다. 이후 고노에 다네이에의 딸을 후실로 맞이했으나, 아이가 없어 이혼했다.

개인적으로 전투보다는 문예에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이며, 가도(歌道), 와카(和歌), 렌카(連歌), 사루가쿠(猿楽), 작정(作庭), 회화, 다도(茶道) 등 다양한 예능을 좋아하고 즐겼다. 특히 다도에 힘을 쏟아 이치조타니에서는 가라모노 다완(唐物茶碗)이나 청자 꽃병, 태국제 항아리 등 당시 고가의 수입품이었던 다기(茶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치세 전반기에는 아사쿠라 소테키라는 명장이 있었고, 그의 사후에도 에치젠은 주변 지역에 비해 안정되고 평화로워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또한, 루이스 프로이스는 에치젠을 "일본에서 가장 고귀하고 주요한 나라의 하나"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외교에도 힘써 아시카가 쇼군가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다이묘들과 문서를 주고받았으며, 다케다 신겐을 섬겼던 히나타 소류로부터 다케다류(武田流) 전술의 비전을 배우는 등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려 했다. 내정에서는 중개무역에 의존하던 교역을 대륙과의 직접 교역로를 열어 수익을 올렸고, 새로운 산업 개발에도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식을 두지 못했고 형제도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 입장이 약했으며, 이는 아사쿠라 가문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상경 요청을 거부하고,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에치젠의 명가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로서 자존심이 강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고도 한다.

3. 1. 긍정적 평가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뛰어난 문화 진흥 정책과 외교 능력, 그리고 초기 안정적인 통치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요시카게는 이치조다니에 교토의 많은 문화인들을 초청하여 문화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가도(歌道), 와카(和歌), 렌카(連歌), 사루가쿠(猿楽), 작정(作庭), 회화, 다도(茶道) 등 다양한 예능을 즐겼으며, 특히 다도에 힘을 쏟아 이치조다니에서는 당시 고가의 수입품이었던 가라모노 다완(唐物茶碗)이나 청자 꽃병, 태국제 항아리 등 많은 다기(茶器)가 출토되고 있다.[13]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에치젠을 "일본에서 가장 고귀하고 주요한 나라의 하나로, 고키보다도 세련된 언어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했다.[13]

또한, 요시카게는 오가사와라류(小笠原流) 궁술의 달인이었고, 여러 차례 이네오우모노(犬追物)를 행하며 궁술을 뽐냈다.

요시카게는 여러 다이묘들과 폭넓은 외교 관계를 맺었다. 아시카가 쇼군가(足利将軍家) 뿐만 아니라 미노의 엔도 씨, 에치고 우에스기 씨, 멀리는 사쓰마국시마즈씨(島津氏), 데와국의 다이호지 씨, 안도 씨, 히타치국의 도키 하루히데 등과 교류했다. 다케다 신겐을 섬겼던 히나타 소류로부터 다케다류(武田流) 전술의 비전을 배우는 등 새로운 전술 도입에도 힘썼다.[14]

요시카게의 초기 통치는 안정적이었고, 에치젠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당시 에치젠을 방문한 사람들은 "요시카게 님은 성인군자의 도를 행하시어 나라도 잘 다스려지고 있으니, 부럽기 그지없다"고 칭찬했다.[19]

3. 2. 부정적 평가

아사쿠라 요시카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주로 그의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 군사적 능력 부족, 가신 통제 실패, 그리고 지나친 자존심에 기인한다.

  •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이치조타니로 망명했을 때, 요시아키의 상경 요청을 거부하여 천하를 쥘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는다.[3] 또한,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시가의 진에서 노부나가가 포위되었을 때 도전을 무시하고 화친을 선택하는 등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9]
  • 군사적 능력 부족: 1570년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침공 당시 가네가사키 성이 함락되는 등 군사적 능력이 부족하여 아사쿠라 영지 전체가 위험에 노출되었다.[1][5][6] 아네가와 전투에서도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등 군사적 역량 부족을 드러냈다.[1]
  • 가신 통제 실패: 아사쿠라 가게아키라를 비롯한 가신들의 배신과 이반은 요시카게의 리더십 부재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19]
  • 지나친 자존심: 에치젠의 명가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라는 자존심이 강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얕잡아보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이는 결국 패배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9]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더불어, 요시카게가 원래 아사쿠라 가문 출신이 아니라 롯카쿠 가문에서 온 양자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 설은 요시카게의 어린 시절 기록 부족, 롯카쿠 가문과의 밀약, 측근들의 출신 배경, 롯카쿠 가문과의 관계, 그리고 화압(花押) 양식의 유사성 등을 근거로 제시된다.[19]

3. 3. 종합 평가

아사쿠라 요시카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이치조타니로 망명했을 때 함께 교토로 상경했으면 천하를 쥘 기회를 얻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리석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당시 요시카게의 상황에서는 요시아키를 받들고 상경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반론도 있다.[19] 다른 유력 다이묘들도 요시아키의 상경 요청을 무시했고, 요시카게가 상경하여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려면 미요시 가문의 견제를 뚫어야 했는데, 당시 아자이-아사쿠라 연합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요시카게는 개인적으로 전투보다는 문예에 힘을 쏟았으며, 가도(歌道) ・ 와카(和歌) ・ 렌카(連歌) ・ 사루가쿠(猿楽) ・ 작정(作庭) ・ 회화 ・ 다도(茶道) 등 다양한 예능을 즐겼다. 특히 다도에 힘을 쏟아 이치조타니에서는 가라모노 다완(唐物茶碗)이나 청자 꽃병, 태국제 항아리 등 당시 고가의 수입품이었던 다기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1581년에 에치젠에서 포교 활동을 한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에치젠을 "일본에서 가장 고귀하고 주요한 나라의 하나로, 고키보다도 세련된 언어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했다.[13] 오가사와라류(小笠原流) 궁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내정 면에서는 중개무역에 의존하던 교역을 대륙과의 직접 교역로를 개척하여 수익을 올렸고, 아사쿠라 가문의 유적에서 유리 공방터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새로운 산업 개발에도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류큐 도해 칸고(琉球渡海勘合)"를 요청하여 통교선의 관리에 착수했고, 데와안도 아이스키에게 철포를 보내 우호 관계를 구축, 일본해(日本海) 항로와 동중국해(東シナ海) 항로를 잇는 무역권을 만들 야심을 가졌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납(鉛)과 이탈리아베네치아에서 만들어진 유리 용기가 이치노타니에서 출토되고 있다.[14]

1570년 오다 노부나가와 화친할 당시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천하는 아사쿠라 님(요시카게)이 가지시옵고, 저는 두 번 다시 (천하를) 바라지 않겠나이다"라는 내용의 기청문을 바치기도 했다. 1572년 노부나가가 기후로 퇴각할 때 추격했다면 노부나가를 사로잡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요시카게에게는 천하를 쟁취하려는 야망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된다.

에치젠의 명가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로서 자존심이 강했던 요시카게는, 시바 가문의 가신 출신에 불과했던 노부나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수치로 여겨 죽는 순간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요시카게는 아사쿠라 가문 출신이 아니라 롯카쿠 가문에서 온 양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자존심이 더욱 강했을 수 있다고 한다.[19] 요시카게가 롯카쿠 가문 출신이라는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20]

요시카게가 롯카쿠 가문 출신이라는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결론적으로,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문화적 소양과 외교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급변하는 전국시대의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와 군사적 능력 부족으로 가문의 몰락을 초래한 비운의 다이묘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요시카게의 모습은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 질서에 안주하려 했던 일부 지도자들의 한계를 보여주며,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4. 이설

요시카게가 아사쿠라 본가 출신이 아니라 오미 롯카쿠 씨(近江六角氏)에서 온 양자라는 설이 있다.

5. 가신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가신은 다음과 같다.

'''아사쿠라 일문(一門衆)'''



'''에치젠 가신(越前の家臣)'''

  • 아오키 가게야스(青木景康)
  • 우오즈미 가게타카(魚住景固)
  • 야마자키 요시이에(山崎吉家)
  • 호리에 가게타다(堀江景忠)
  • 구라타니 후쿠치(鞍谷嗣知)
  • 마에나미 요시쓰구(前波吉継)
  • 마나가라 나오타카(真柄直隆)
  • 마나가라 나오스미(真柄直澄)

6. 등장 작품


  • 소설
  • *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일승곡염상(一乗谷炎上)』
  • * 아카가미 료(赤神諒) 『취상의 유기 아사쿠라 성쇠기(酔象の流儀 朝倉盛衰記)』
  • 만화
  • * 소니시 켄지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 아사이 나가마사와 콤비를 이루어 꼬리 빙빙 돌리는 명콤비로 천하통일을 목표로 활약하는 고양이 캐릭터로 그려진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판 성우는 오타 유스케이다.
  • * 시게노 나오키 『신장의 닌자』 - 텔레비전 애니메이션판 성우는 키시오 다이스케이다.
  • 드라마
  • * 국토쟁탈기 (1973년, NHK 대하드라마, 역: 하마하타 켄키치)
  •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 (1992년, NHK 대하드라마, 역: 키타무라 소이치로)
  • * 에도 막부의 여걸들 (2011년, NHK 대하드라마, 역: 나카야마 진)
  • * 노부나가 협주곡 (2014년, 후지TV, 역: 코이치 만타로)
  • * 기린이 온다 (2020년, NHK 대하드라마, 역: 유스케 산타마리아)

7. 관련 유적

특별 명승, 특별 사적,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씨 유적은 후쿠이현에 있던 아사쿠라 가문의 옛 저택이다. 1967년 발굴되어 이치조다니 성터, 저택, 정원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는 약 278ha에 달한다.

참조

[1] 백과사전 Asakura Yoshikage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08-22
[2] 백과사전 朝倉 義景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08-22
[3] 백과사전 朝倉 義景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08-22
[4] 백과사전 朝倉 義景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08-22
[5] 백과사전 朝倉義景 https://web.archive.[...] Shogakukan 2012-08-22
[6]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7] Kotobank 朝倉義景
[8]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9] 서적 戦国織豊期の社会と儀礼 吉川弘文館
[10] 저널 上洛前の足利義昭と織田信長
[10] 서적 シリーズ・室町幕府の研究 第二巻 足利義昭 戒光祥出版
[11] 저널 織田信長と足利義昭の軍事的関係について
[11] 서적 織田信長政権の権力構造 戎光祥出版
[12] 저널 志賀の陣 和睦の真相
[13] 서적 完訳フロイス日本史3
[14] 저널 等閑視されてきた信長以前の機内近国 吉川弘文館
[15] 서적 戦国織豊期の社会と儀礼 吉川弘文館
[16] 저널 上洛前の足利義昭と織田信長
[16] 서적 シリーズ・室町幕府の研究 第二巻 足利義昭 戒光祥出版
[17] 저널 志賀の陣 和睦の真相
[18] 문서 토리데(砦)란 소규모 성이나 요새를 가리킨다.
[19] 문서 일본의 역사학자인 사사키 도루(佐々木哲, 1961~) 박사가 인용한 [[도야마현]]립도서관(富山県県立図書館) 소장 『아사쿠라 가록』(朝倉家録)에 실린 『아사쿠라 집안의 계도』(朝倉家之系図)에 따른 것이다. 사사키 박사 자신도 실제로 사사키 롯카쿠 씨의 후손이다.
[20] 웹인용 近江六角氏の養子に関する項目 http://blog.sasakito[...] 201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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