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바시슈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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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바시슈쿠는 에도 시대에 에도의 4개 숙참 중 하나로, 현재 도쿄도 이타바시구에 위치해 있었다. 나카센도와 가와고에 가도의 기점 역할을 하며, 시나가와슈쿠, 센주슈쿠, 나이토신주쿠와 함께 에도 사숙으로 번성했다. 이타바시슈쿠는 가미슈쿠, 나카슈쿠, 히라오슈쿠의 세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각 구역에는 혼진, 여관, 찻집 등이 들어섰다. 막말의 보신 전쟁 이후 쇠퇴하여 유곽으로 변모하였고, 현재는 이타바시구립 향토자료관에 유곽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다. 주요 명소로는 연끊기 느티나무, 시무라의 이치리즈카, 시미즈자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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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바시슈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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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개요 | |
소재지 | 무사시국 도쿄도 이타바시구 이타바시 |
종류 | 슈쿠 |
속하는 가도 | 나카센도 |
역사 | |
메이지 시대 | 1869년: 이타바시 숙소, 이타바시 마을이 됨 1871년: 우라와 현에 속함 1873년: 사이타마 현에 속함 1889년: 이타바시 정이 됨 1932년: 도쿄 시에 편입되어 이타바시 구의 일부가 됨 |
현황 | |
특징 | 에도 시대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음 역 주변은 상업 지역으로 발전 |
인접 슈쿠바 | 에도 쪽: 스기나미 숙소 교토 쪽: 와라비 숙소 |
2. 역사
에도 시대 이전, 헤쇼지(遍照寺)가 창건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경내가 말 마굿간으로 사용되었고 1907년경까지 말 시장이 열렸다. 1798년 건립된 마두관음상이 그 흔적을 보여준다.
히라오의 이치리츠카에서 상방(교토)쪽으로 이타바시슈쿠를 지나 1ri 더 가면 니혼바시에서 3ri 지점에 시무라 이치리츠카가 있다.[23] 2기 1쌍의 츠카가 오늘날에도 석벽과 느티나무를 그대로[24]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어,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이치리츠카 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구간의 나카센도가 국도로 정비될 때 원래 위치 그대로 3단 쌓기 석벽으로 흙의 붕괴를 막았고, 석벽과 국도 사이의 보도가 좁아져 석벽을 돌아가는 별도의 보도가 있는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25]
이 부근은 아라카와 우안, 아라카와 저지와 무사시노 대지 나리마스대의 경계를 이루는 벼랑 지형으로, 약 20m의 고저차를 급경사 언덕길로 내려간다.
2. 1. 에도 시대
에도 시대 이타바시슈쿠는 에도의 4개 역참 중 하나로 번성했으며, 남북으로 2km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가미슈쿠(上宿), 나카슈쿠(中宿), 히라오슈쿠(平尾宿)의 세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샤쿠지이 강을 가로지르는 이타바시 다리가 가미슈쿠와 나카슈쿠의 경계였다. 혼진과 토이야는 나카슈쿠에 있었고, 히라오슈쿠는 간메이지 부근까지였다.[7]무사시국 토요시마군 시모이타바시 촌의 일부이자, 도카이도의 시나가와주쿠, 고슈 가도의 나이토신주쿠, 오슈 가도 · 닛코 가도의 센주주쿠와 함께 '''에도 사숙 중 하나'''로 번성했다.[7] 1841년-1844년 덴포 12-15년의 조사(『나카센도 숙촌 대개장』)[8]에 따르면, 숙소 길이는 약 2.2km, 인구[9]는 2,448명(남자 1,053명, 여자 1,395명), 가구[10]는 573채였다. 나카주쿠에 혼진 1채, 각 숙소에 와키혼진 1채씩 총 3채, 여관은 총 54채였다.
나카주쿠에는 톤야바, 관목 개소,[11] 말 갈아타는 곳, 반야 (자신번의 근무처)가 있었고, 가미주쿠에는 키친주쿠 (상인 숙소)나 바쿠로주쿠[12]가 있었다.[7]
에도 시대 니혼바시는 각 주요 가도의 형식적 기점이었지만, 실제 여행의 기점 · 종점은 시나가와주쿠, 센주주쿠, 나이토신주쿠, 이타바시슈쿠 등 에도 사숙이 담당했다. 찻집, 술집, 메시모리 여관이 많아 여행객, 배웅객,[13] 메시모리 여인을 찾는 손님들로 몹시 붐볐다.
규모는 센주주쿠(9,556명, 2,370채), 시나가와주쿠(7,000명, 1,600채), 나이토신주쿠(2,377명, 698채), 이타바시주쿠(2,448명, 573채) 순으로, 이타바시슈쿠는 사숙 중 가장 작았지만, 나카센도에서 가장 번성한 곳 중 하나였다.[7] 이타바시슈쿠는 메시모리 여인 150명을 두는 것이 허용되었고, 니혼바시 쪽에 가까운 히라오주쿠에 메시모리 여관이 많았다.
막말 보신 전쟁 때, 나카센도를 따라 에도 공격을 위해 진군하던 관군은 텐쇼인의 서신을 받고 이곳에서 멈추었다.
3. 지리 및 구조
이타바시슈쿠는 무사시국 도요시마군 시모이타바시 촌의 일부로, 도카이도의 시나가와주쿠, 고슈 가도의 나이토신주쿠, 오슈 가도·닛코 가도의 센주주쿠와 함께 '''에도 사숙''' 중 하나로 번성했다. 에도 경계에 위치하여, 에도 후기에는 가미주쿠 입구의 오키도 안쪽을 '에도 고후나이', 즉 '에도'로 취급했다.[7]
이타바시슈쿠는 가미가타(교토 쪽, 북쪽)에서부터 '''가미슈쿠'''(현재의 혼초), '''나카주쿠'''(현재의 나카주쿠), '''히라오주쿠'''(현재의 이타바시)의 세 숙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중봉행의 덴포 12-15년(1841년-1844년) 조사(『나카센도 숙촌 대개장』)[8]에 따르면, 숙소 왕래 길이는 20정 9간(약 2.2km)이며, 이 중 정내지는 길이 15정 49간(약 1.7km)이었다. 숙내 인구[9]는 2,448명(남자 1,053명, 여자 1,395명), 숙내 가구[10]는 573채였다. 혼진은 나카주쿠에 1채, 와키혼진은 각 숙소에 1채씩 총 3채가 설치되었으며, 여관은 총 54채였다.
에도 시대에는 니혼바시가 각 주요 가도의 형식적인 기점이었지만, 실제 여행의 기점·종점으로는 에도 사숙이라 불리는 시나가와주쿠, 센주주쿠, 나이토신주쿠, 이타바시주쿠가 기능했다. 이 숙소들에는 찻집과 술집은 물론 메시모리 여관도 많아, 여행객뿐만 아니라 배웅객[13]이나 메시모리 여인(숙소 여관)을 목적으로 하는 손님도 끌어들여 몹시 번성했다.
덴포 15년경 숙내 인구와 가구를 비교하면, 센주주쿠(9,556명, 2,370채), 시나가와주쿠(7,000명, 1,600채), 나이토신주쿠(2,377명, 698채), 이타바시주쿠(2,448명, 573채) 순으로, 이타바시주쿠는 사숙 중에서는 가장 작았지만, 그 번영은 나카센도에서 으뜸이었다.[7]
3. 1. 가미슈쿠(上宿)
에도 시대 동안 이타바시슈쿠는 에도의 4개 역참 중 하나로 번성했으며, 남북으로 2km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도쿄 북쪽에서부터 가미슈쿠(上宿), 나카슈쿠(中宿), 히라오슈쿠(平尾宿)의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가미슈쿠와 나카슈쿠는 샤쿠지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이타바시로 경계를 이루었다.3. 2. 나카슈쿠(中宿)
에도 시대에 이타바시슈쿠는 에도의 4개 역참 중 하나로 번성했으며, 그 중 나카슈쿠(中宿)는 이타바시슈쿠의 중심지였다. 나카슈쿠에는 혼진 1채와 각 슈쿠에 1채씩 설치된 와키혼진 3채, 그리고 총 54채의 여관이 있었다.[8]덴포 12-15년(1841년-1844년) 도중봉행의 조사(『나카센도 숙촌 대개장』)에 따르면, 숙소 왕래의 길이는 20정 9간(약 2.2km)이었고, 이 중 정내지는 길이 15정 49간(약 1.7km)으로 남북으로 뻗어 있었다. 숙내 인구[9]는 2,448명(남자 1,053명, 여자 1,395명)이었고, 숙내 가구[10]는 573채였다.[8]
나카슈쿠에는 톤야바, 관목 개소[11], 말갈아타는 곳, 반야 (자신번의 근무처)가 있었다. 가미가타측(교측, 북쪽)부터 '''가미슈쿠'''(현재의 혼초), '''나카슈쿠'''(현재의 나카주쿠), '''히라오슈쿠'''(현재의 이타바시) 순으로 위치했으며, 나카슈쿠와 가미슈쿠는 이시가미이가와에 놓인 이타바시 다리로 경계를 이루었다.[7]
이타바시슈쿠는 150명이나 되는 메시모리 여인을 두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니혼바시 쪽에 가까운 히라오슈쿠에는 메시모리 여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보신 전쟁 때, 나카센도에서 에도 공격으로 진군 중이던 관군은 텐쇼인의 서신에 의해 여기서 멈추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나카센도의 중요성이 감소함에 따라 쇠퇴하여 이타바시 유곽으로 변모해 갔다.[14][15]
3. 3. 히라오슈쿠(平尾宿)
에도 시대에 이타바시슈쿠는 에도의 4개 역참 중 하나로 번성했으며, 남북 2km에 걸쳐 있었다. 도쿄 북쪽에서부터 가미슈쿠(上宿), 나카슈쿠(中宿), 히라오슈쿠(平尾宿)의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히라오슈쿠는 시모슈쿠(下宿)라고도 불렸으며, 현재의 이타바시에 해당한다. 히라오슈쿠의 경계는 간메이지 부근까지 뻗어 있었고, 나카주쿠와 히라오슈쿠의 경계도 간묘지 부근에 있었다.[7]이타바시슈쿠는 150명이나 되는 메시모리 여인을 두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니혼바시 쪽에 가까운 히라오주쿠에는 메시모리 여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3. 4. 이타바시(板橋)
이타바시는 나카슈쿠 부근 샤쿠지이 강에 놓였던 다리로, '이타바시'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그 이름은 『요시츠네기』 등의 문헌에서 헤이안 시대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등장한다. 고대부터 근대에 걸쳐서는 문자 그대로 널빤지로 만든 목교였고, 에도 시대의 것은 길이 9간(약 16.4m), 폭 3간(약 5.5m)의 완만한 다이코바시(太鼓橋)로,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나 하세가와 셋탄의 『에도 명소도회』에도 그려져 있다.
다리 모양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지만, 1932년을 기점으로 이후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되었다. 현재 두 개의 강과 두 개의 다리가 연속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남쪽으로 크게 V자 모양으로 굽이돌았던 강을 1972년의 하천 개수로 직선화한 결과이다. 북쪽으로 약 10m 이동한 샤쿠지이 강의 다리와, 매립되어 공원화된 원래 강에 걸린 다리가 있다. 콘크리트제이지만 난간에 나무 무늬를 넣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다리 옆에는 "거일본교 2리 25정 33간", "일본교에서 10km 643m"[16]라고 적힌 표주와 안내판이 있다. 현재는 이타바시 10경 중 하나로 꼽힌다.[17]
4. 교통
- 철도
- * 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 사이쿄선 이타바시역
- * 도부 토죠선 시모이타바시역
- * 도에이 지하철 미타선 이타바시혼초역(카미슈쿠), 이타바시쿠야쿠쇼마에역(나카슈쿠), 신이타바시역 (히라오슈쿠)
- 노선버스
- * 코쿠사이코교버스 이케20계통 : 이케부쿠로역 서쪽 출구 - 니시다이역 경유 - 타카시마헤이조 차장 및 이케21계통 : 이케부쿠로역 서쪽 출구 - 후나토쵸 경유 - 다카시마헤이조역이 나카센도 (국도17호)를 경유한다.
- ** 나카슈쿠 지구 : 이타바시구청, 나카슈쿠
- ** 카미슈쿠 지구 : 카미슈쿠, 오오와정
- ** 시무라 지구 : 시무라 이치리즈카, 시무라 사카가미, 시무라 사카시타
- 자동차 도로
- * 국도 17호
- * 국도 122호
- * 국도 254호
- * 도쿄도도 311호 환상 8호선 (칸파치도오리)
4. 1. 나카센도
니혼바시 - '''이타바시슈쿠''' - 와라비슈쿠에도 시대 무사시국 도요시마군 시모이타바시 촌의 일부로, 도카이도의 시나가와주쿠, 고슈 가도의 나이토신주쿠, 오슈 가도·닛코 가도의 센주주쿠와 함께 '''에도 사숙''' 중 하나로 번성했다.[7] 에도 경계에 위치하여, 에도 후기에는 가미주쿠 입구 오키도 안쪽을 '에도 고후나이', '주히키', 즉 '에도'로 취급했다.[7]
이타바시슈쿠는 묘주가 설치된 세 숙소(가미주쿠, 나카주쿠, 히라오주쿠)의 총칭이다. 가미가타(교 방면, 북쪽)부터 '''가미주쿠'''(본래 '가미-슈쿠', 현재 혼초), '''나카주쿠'''(나카-슈쿠, 나카-주쿠, 중숙이라고도 함, 현재 나카주쿠), '''히라오주쿠'''(히라오-슈쿠, 시모주쿠(시모-슈쿠)라고도 함, 현재 이타바시) 순으로 있었다. 가미주쿠와 나카주쿠 경계는 지명 유래인 이타바시가 놓인 이시가미이가와였으며, 나카주쿠와 히라오주쿠 경계는 간묘지 부근이었다.[7]
도중봉행 조사(덴포 12~15년(1841년~1844년), 『나카센도 숙촌 대개장』)[8]에 따르면, 숙소 왕래 길이는 2.2km, 이 중 정내지는 1.7km로 남북으로 뻗어 있었다. 숙내 인구[9]는 2,448명(남 1,053명, 여 1,395명), 가구[10]는 573채였다. 혼진은 나카주쿠에 1채, 와키혼진은 각 숙소에 1채씩 총 3채, 여관은 총 54채였다. 중심지인 나카주쿠에는 톤야바, 관목 개소[11], 말갈이 하는 곳, 반야 (자신번 근무처)가 있었다. 가미주쿠에는 키친주쿠(상인 숙소)나 바쿠로주쿠[12]가 있었다.[7]
에도 시대 니혼바시는 각 주요 가도 형식상 기점이었지만, 실제 여행 기점·종점은 에도 사숙(시나가와주쿠, 센주주쿠, 나이토신주쿠, 이타바시슈쿠)이 담당했다. 이 숙소에는 찻집, 술집, 메시모리 여관이 많아 여행객, 배웅객[13], 메시모리 여인(숙소 여관)을 찾는 손님으로 몹시 붐볐다. 규모는 덴포 15년경 숙내 인구·가구 비교 시 센주주쿠(9,556명, 2,370채), 시나가와주쿠(7,000명, 1,600채), 나이토신주쿠(2,377명, 698채), 이타바시주쿠(2,448명, 573채) 순으로, 이타바시슈쿠는 사숙 중 최하위였으나 나카센도에서는 번영한 편이었다.[7] 이타바시슈쿠는 메시모리 여인 150명 보유가 허용되었고, 니혼바시 쪽에 가까운 히라오주쿠에 메시모리 여관이 많았다.
보신 전쟁 때 나카센도로 에도 공격을 위해 진군하던 관군은 텐쇼인 서신에 의해 이곳에서 멈췄다. 메이지 시대에 나카센도 중요성 감소로 쇠퇴, 이타바시 유곽으로 변모했다. 유곽 번성은 쇼와 중기 태평양 전쟁 중까지 이어졌다. 유곽으로 쓰인 『신토루』 현관은 이타바시구립 향토자료관으로 이전, 보존되었다.[14][15]
에도 니혼바시에서 교토 산조오하시까지 전 구간은 532.8km[29]이며, 이 중
- 에도 니혼바시 - '''이타바시슈쿠''' : 9.8km
- '''이타바시슈쿠''' - 와라비슈쿠 : 8.9km
- '''이타바시슈쿠''' - 교토 산조오하시 : 523km
에도 시대 성인 남성은 보통 하루 40km(평지 8~10시간, 시속 4km~5km)를 걸었다.[30]
- 나카센도 일리즈카 목록
:혼고 오이와케(1리) - '''히라오'''(2리) - '''시무라'''(3리) - 도다(4리)
4. 2. 가와고에 가도
가와고에 가도는 와키오칸(脇往還)의 하나로 에도 쪽에서 분기하여 히라오슈쿠를 기점으로 했으며, '''히라오 오이와케'''라고 불렸다. 이타바시슈쿠는 나카센도의 숙참인 동시에 가와고에 가도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가와고에 가도''' ('''가와고에코다마 왕래''')
: '''이타바시슈쿠''' (히라오주쿠) - 가미이타바시
4. 3. 후지오야마 길
이타바시슈쿠에서 1리 이상 위쪽(교토 방면)의 시무라에서 사가미오야마에 이른다.[7]4. 4. 현대의 교통
동일본여객철도 (JR동일본) 사이쿄선 이타바시역, 도부 토죠선 시모이타바시역, 도에이 지하철 미타선 이타바시혼초역(카미슈쿠), 이타바시쿠야쿠쇼마에역(나카슈쿠), 신이타바시역 (히라오슈쿠)이 근처에 있다.코쿠사이코교버스 이케20계통(이케부쿠로역 서쪽 출구 - 니시다이역 경유 - 다카시마다이라 차량사업소) 및 이케21계통(이케부쿠로역 서쪽 출구 - 후나토초 경유 - 다카시마다이라역)이 이 지역의 나카센도(국도17호)를 경유한다. 이 버스는 나카주쿠 지구(이타바시구청, 나카주쿠), 카미슈쿠 지구(카미슈쿠, 오오와정), 시무라 지구(시무라 이치리즈카, 시무라 사카가미, 시무라 사카시타)를 경유한다.
자동차 도로로는 국도 17호, 국도 122호, 국도 254호, 도쿄도도 311호선 환상 8호선(칸파치도오리)이 있다.[7]
5. 문화 및 명소
에도 시대에는 나카센도의 슈쿠바 마을인 이타바시슈쿠의 일부로, 도카이도의 시나가와주쿠, 고슈 가도의 나이토신주쿠, 오슈 가도·닛코 가도의 센주주쿠와 함께 '''에도 사숙''' 중 하나로 번성했다.[7] 에도의 경계에 위치하여, 에도 후기에는 가미주쿠 입구의 오키도 안쪽을 "에도 고후나이", 즉 "에도"로 취급했다.
이타바시주쿠는 가미주쿠(현재의 혼초), 나카주쿠(현재의 나카주쿠), 히라오주쿠(현재의 이타바시)의 세 숙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덴포 연간(1841년~1844년)의 조사에 따르면, 이타바시주쿠의 인구는 2,448명, 가구는 573채였다. 혼진은 나카주쿠에 1채, 와키혼진은 각 숙소에 1채씩 총 3채가 있었고, 여관은 총 54채였다.[8][9][10] 이타바시주쿠는 150명이나 되는 메시모리온나를 두는 것이 허가되었으며, 히라오주쿠에는 메시모리 여관이 즐비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나카센도의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이타바시주쿠는 쇠퇴하였고, 이타바시 유곽으로 변모했다. 유곽은 태평양 전쟁 중까지 번성했다.
이타바시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다리인 '''이타바시'''는 샤쿠지이가와에 놓여 있었으며, 헤이안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6][17] 에도 시대에는 길이 9칸(약 16.4m), 폭 3칸(약 5.5m)의 완만한 다이코바시였으며,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나 하세가와 셋탄의 『에도 명소도회』에도 그려져 있다. 1932년 이후 콘크리트 다리가 되었으며, 1972년 하천 개수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5. 1. 연끊기 느티나무
연끊기 느티나무는 エノキ大六天神|느티나무 다이로쿠텐진일본어의 신목(神木)이다. 가도의 표지로서 심어진 수령 수백 년 된 느티나무(에노키[18])의 거목으로, 가지가 가도를 덮을 듯이 뻗어 있었다고 한다.그 아래를 시집가는 행렬이나 장가드는 행렬이 지나가면 반드시 인연이 끊어진다고 믿어져 불길한 명소였지만, 스스로는 이혼할 수도 없었던 봉건 시대 여성에게는 의지할 곳이었고, 음으로 양으로 신앙을 모았다. 나무 껍질에 닿거나 나무 껍질을 차나 술에 섞어 마시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도쿠가와 가에 강가하는[19] 이소노미야, 사사노미야, 가즈노미야 일행은 모두 이곳을 피해 지나가, 이타바시 혼진에 들어갔다고 한다.
가즈노미야의 경우, 분큐 원년(1861년) 4월, 막부의 공무합체 정책의 일환으로 쇼군 이에모치에게 가마를 보내 결혼하게 되어, 간토로 내려가는 길로 나카센도를 통과했다. 성대한 행렬이 동쪽 아래에 번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타바시 혼진에 들어갈 때는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연끊기 느티나무를 싫어하여, 미리 보수 공사해 놓은 우회로를 사용해서 통과했다고 한다. 덧붙여, 가즈노미야 일행이 짚(고모[20])으로 나무를 감싸서 바로 아래를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우회로를 만들어 그쪽으로 통과한 것이 사료로 확인되고 있다[21][22]。
현재의 느티나무는 3대째의 어린 나무로, 장소도 도로의 반대편으로 이동했지만, 이 나무에 기도하고 남녀의 연을 끊기를 바라는 신앙은 살아 있다. 제육천신이지만, 일본 3대 연끊기 이나리로 꼽히기도 한다.
5. 2. 시무라의 이치리즈카
분고오이와케 (1리) - '''히라오''' (2리) - '''시무라''' (3리) - 토다 (4리)히라오(平尾)의 이치리즈카에서 교토(京都)쪽으로, 이타바시슈쿠를 지나 1리 진행한 곳에 니혼바시에서 3리(약 11.8km) 떨어진, 3번째 이치리즈카인 시무라의 이치리즈카가 있다.[23] 2기 1쌍의 츠카(塚)는 석벽과 느티나무를 그대로[24]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이치리즈카 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나카센도가 국도로 정비된 쇼와 초기, 원래 위치에 3단 석벽을 쌓아 흙의 붕괴를 막았다. 석벽과 국도 사이 보도가 좁아져 석벽을 돌아가는 별도 보도가 있는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25]
이 부근은 아라카와 우안, 아라카와 저지와 무사시노 대지 나리마스대의 경계로, 약 20m의 고저차를 급경사 언덕길로 내려간다.
5. 3. 시미즈자카
히라오의 이치리츠카에서 상방(교토쪽)으로 이타바시슈쿠를 지나 1리쯤 가면 니혼바시에서 3리(약 11.8km) 떨어진 곳에 3번째 이치리츠카인 시무라의 이치리츠카'''[23]가 있다. 2기 1쌍의 츠카가 오늘날에도 석벽과 느티나무를 그대로[24]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으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이치리츠카 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쇼와 초기에 이 구간의 나카센도를 국도로 정비할 때 원래 위치 그대로 3단 쌓기 석벽으로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석벽과 국도 사이의 보도가 좁아져 석벽을 돌아가는 별도의 보도를 만들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25]
이 부근부터는 아라카와 우안, 아라카와 저지와 무사시노 대지 나리마스대의 경계를 이루는 벼랑 지형으로, 약 20m 높이 차이가 나는 급경사 언덕길로 내려간다.
5. 4. 기타 명소
히라오의 이치리즈카에서 교쪽(가미가타)으로, 이타바시슈쿠를 지나 1리 진행한 곳에, 니혼바시에서 3리(약 11.8km) 떨어진 세 번째 이치리즈카인 '''시무라의 이치리츠카'''[23]가 세워져 있다. 2기 1쌍의 츠카가 오늘날에도 석벽과 느티나무를 그대로[24]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으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이치리츠카 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구간의 나카센도가 국도화된 쇼와 초기의 정비 때 원래 위치 그대로 3단 쌓기 석벽으로 흙의 붕괴를 막았고, 석벽과 국도 사이의 보도가 좁아져 석벽을 돌아가는 별도의 보도가 있는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25]
이 부근부터는 아라카와 우안, 아라카와 저지와 무사시노 대지 나리마스대의 경계를 이루는 벼랑 지형이 되어, 약 20m에 달하는 고저차를 급경사 언덕길로 내려간다.
6. 출신 및 연고 인물
참조
[1]
웹사이트
Itabashi-shuku
http://kkubota.cool.[...]
2007-07-10
[2]
문서
「きそ-かいどう いたばし-の-えき」 当時[[木曽街道]]と呼ばれた[[中山道]]の名所を描いた[[名所絵]]([[浮世絵]][[風景画]])『[[木曽海道六十九次]]』の1枚。
[3]
문서
ぼうじ-くい、ぼうじ-ぐい、ぼうじ-こう。境界の目印として木製の建てられた標柱。
[4]
문서
名所絵では起点と終点も数に入れるため、表記上の数がずれる。したがって、浦和宿は「第二」の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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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現在では、東京都に属する唯一の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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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亀]]2年(西暦[[771年]])[[10月27日 (旧暦)|10月27日]]以前は[[東山道]]武蔵国豊島郡広岡郷の一部。以後、東海道に属す。[[平安時代]]末期以降は板橋郷の一部。
[7]
서적
中山道を歩く
山と溪谷社
2006
[8]
문서
『中山道宿村大概帳(なかせんどう しゅくそん-だいがいちょう)』に基づく。『[[宿村大概帳]]』とは、幕府の道中奉行所が調査した[[五街道]]とその脇街道の宿場の記録で、53冊が収蔵されている。各宿場の人口、家数、本陣、旅籠の数、高札の内容、道路の広さ、橋、寺社、地域の産業、特産品など、宿場と街道筋の村落の状況が詳しく記載されており、五街道分間延絵図とともに道中奉行所が用いたものらしい。成立年代不明ながら、天保から[[安政]]([[1840年|1840]]- [[1850年]]代)にかけての調査と考えられている。
[9]
문서
当時の表現では、宿内人別。
[10]
문서
当時の表現では、宿内惣家数。宿場内の総戸数。
[11]
문서
公用な荷物を[[伝馬]]で運ぶため、重量を測り運賃を決める役所。当時は貫目御改所(かんめ-お-あらため-しょ)と呼ばれた。中山道上の貫目改所は、板橋宿のほか、信州の[[洗馬宿]]と[[追分宿]]にも設けられていた。
[12]
문서
ばくろう-やど。馬に荷駄を背負わせ、それらを売りさばく商売をしていた人々が馬喰であり、彼らの宿泊のための施設を馬喰宿と言う。
[13]
문서
当時は旅立つ者を身内や知人が宿場まで見送りに出る習慣があった。
[14]
웹사이트
新藤楼縮尺図
https://www.city.ita[...]
板橋区立郷土資料館
2021-06-12
[15]
서적
東京の花街、色街、艶な町
[16]
문서
距離・日本橋より2里25町33間、10.642 km。
[17]
웹사이트
板橋十景 板橋(旧中山道の仲宿付近の石神井川にかかる橋)- 板橋区公式サイト
http://www.city.itab[...]
[18]
문서
参考 :[[エノキ]] ;[[ニレ科]][[エノキ属]]の[[葉#落葉|落葉]][[高木]]で、江戸時代には街道を示す目印として一里塚や道路脇に植えられることが多かった。
[19]
문서
参考 :[[徳川将軍家御台所]]
[20]
문서
[[マコモ]]を粗く編んだ[[筵]](むしろ)。今は[[藁]](わら)を用いる。
[21]
문서
現地「縁切榎」の立て札(板橋区教育委員会)の一文、その他に基づく。
[22]
웹사이트
縁切霊木譚 - 日本史史料研究会
http://www17.plala.o[...]
[23]
웹사이트
板橋十景 志村一里塚 - 板橋区公式サイト
http://www.city.itab[...]
[24]
문서
ただし、西塚の2代目榎は昭和42年([[1967年]])に枯れ、その後、3代目が植えられた。
[25]
웹사이트
板橋区ホームページ「時代を紡ぐ 志村一里塚は動かなかった!」
http://www.city.itab[...]
[26]
문서
板橋区教育委員会が2000年に清水坂に立てた説明板には「昭和三十年ごろまでは旧街道の面影を残していましたが、地下鉄三田線の開通など都市化の波によってその姿を変えました。」と記されているが、1955年(昭和30年)時点では志村地区における地下鉄敷設計画はまだ立てられていない。同年6月10日に都電志村線が延長開業されたため、ここでは「都電志村線」とするほうが歴史的に正当である。
[27]
문서
由緒ある古い寺。古寺。
[28]
웹사이트
板橋十景 石神井川の桜並木- 板橋区公式サイト
http://www.city.itab[...]
[29]
문서
1[[里 (尺貫法)|里]] = 3.92727…[[キロメートル|km]]、1[[町 (単位)|町]] = 0.109090…km、1[[間]] = 0.001818…km である。
[30]
문서
徒歩については「[[歩く]]」「[[徒歩旅行]]」を参照。短い距離を想定した現代の不動産業の基準値は、時速4.8 km(「[[徒歩所要時間]]」参照)。
[31]
간행물
日本紳士録 第41版
http://dl.ndl.go.jp/[...]
2018-08-28
[32]
간행물
日本紳士録 第39版
http://dl.ndl.go.jp/[...]
201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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