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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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토 진사이는 1627년 교토에서 태어나 1705년 사망한 일본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다. 그는 주자학의 경전 해석 방식을 비판하고, 텍스트를 직접 검토하는 실증주의적 방법을 통해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연구했다. 불교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주자학의 편향성을 지적하며,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고의학'을 제창했다. 주요 저서로는 『논어고의』, 『맹자고의』, 『동자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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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진사이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토 진사이 |
한자 표기 | 伊藤 仁斎 |
로마자 표기 | Itō Jinsai |
출생일 | 1627년 8월 30일 |
출생지 | 교토 |
사망일 | 1705년 4월 5일 |
사망지 | 교토 |
가족 이름 | 이토 |
인물 정보 | |
출생 연도 (간지) | 간에이(寛永) 4년 |
어린 시절 이름 | 쓰루야 시치우에몬(鶴屋 七右衛門) |
호칭 | 고가쿠 선생(古學先生) |
상호 | 야고(屋号) |
기타 | |
언어 | 일본어 |
2. 생애
간에이 4년 7월 20일 (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태어났다. 1662년 교토 호리카와(堀川)에 고기당(古義堂)을 열었다.[4]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의 학교와 호리카와 강(堀川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4]
이토 진사이는 교토 상인 이토 료슈쓰(伊藤良質)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공부하고 주희의 송대 신유학 사상에 몰두했다.[1] 10대 시절 내내 유학을 공부하며 삼촌이 아버지에게 남긴 옛 책들을 탐독했으며, 10살 때에는 한때 고요제이 천황을 치료했던 유명한 의사인 삼촌에게서 배웠다.[1][2] 또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서 배운 교토 출신의 신유학 학자 마쓰나가 세키고에게서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2]
28세에 원인 불명의 병을 앓은 후 가업을 동생에게 넘기고 불교와 도교를 공부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3] 이 시기에 주희의 철학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의 필명까지 바꾸었다.[3]
고기당은 야마자키 안사이가 생전에 주희의 송대 신유학 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과는 달리, 주희의 사상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제시했다.[4] 특히 교토에서 긴사이의 학교는 큰 성공을 거두어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학생 3,000명을 유치했다.[4] 1705년 긴사이가 사망한 후 고기당의 지도자는 그의 아들 이토 도가이(東涯, 1670~1736)가 이어받았다.[4] 보영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이토 진사이는 간에이 4년 7월 20일 (1627년 8월 30일) 교토 상인 이토 료슈쓰(伊藤良質)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이 어떤 상업에 종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한자를 공부하여 주자의 송대 신유학 사상에 몰두하였다. 10대 시절 내내 삼촌에게서 남겨진 유학 서적들을 탐독하며 공부하였다.[1]열 살 때, 고요제이 천황을 치료했던 유명한 의사였던 삼촌에게서 수학하였다.[2] 또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서 배운 교토 출신의 신유학 학자인 마쓰나가 세키고에게서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2]
28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가업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불교와 도교를 공부하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의 철학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필명까지 바꾸었다.[3]
이후 1662년 교토에 고기당(古義堂)이라는 사숙을 설립했다.[4] 야마자키 안사이의 학교와 호리카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위치였다.[4] 고기당은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학생 3,000명을 유치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4] 도가이(1670~1736)가 고기당을 이어받았다.[4] 보영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했다.
2. 2. 질병과 은둔
이토 진사이는 간에이 4년 7월 20일(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태어났다. 1662년 교토 호리카와에 고기당(호리카와 학원)을 열었다. 호리카와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야마자키 안사이의 안사이 학당이 있었다. 호에이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했다.2. 3. 고기당 설립과 교육 활동
간에이 4년 7월 20일 (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태어난 이토 진사이는 1662년 교토의 호리카와(堀川)에 고기당(古義堂)을 설립했다.[4]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의 학교와 호리카와 강(堀川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4]이토 진사이는 교토 상인 이토 료슈쓰(伊藤良質)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공부하고 주희의 송대 신유학 사상에 몰두했다.[1] 10대 시절 내내 유학을 공부하며 삼촌이 아버지에게 남긴 옛 책들을 탐독했으며, 10살 때에는 한때 고요제이 천황을 치료했던 유명한 의사인 삼촌에게서 배웠다.[1][2] 또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서 배운 교토 출신의 신유학 학자 마쓰나가 세키고에게서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2]
28세에 원인 불명의 병을 앓은 후 가업을 동생에게 넘기고 불교와 도교를 공부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3] 이 시기에 주희의 철학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의 필명까지 바꾸었다.[3]
고기당은 야마자키 안사이가 생전에 주희의 송대 신유학 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과는 달리, 주희의 사상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제시했다.[4] 특히 교토에서 긴사이의 학교는 큰 성공을 거두어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학생 3,000명을 유치했다.[4] 1705년 긴사이가 사망한 후 고기당의 지도자는 그의 아들 이토 도가이(東涯, 1670~1736)가 이어받았다.[4] 보영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했다.
2. 4. 사망
이토 진사이는 간에이() 4년 7월 20일 (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태어났다. 1662년 교토 호리카와(에 고기도(를 열었다. 호리카와(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야마자키 안사이의 안사이 학당이 있었다. 보영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했다.2. 5. 가족
이토 진사이는 40세를 넘어서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지만, 52세 때에 첫 번째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수년 후 재혼하여 4남 1녀를 더 낳았다. 68세에 막내 아들 란구(란구/蘭嵎일본어)가 태어났다.다섯 아들은 모두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는데, 이토 도가이(이토 도가이/伊藤 東涯일본어), 이토 바이우(이토 바이우/伊藤 梅宇일본어), 이토 가이데이(이토 가이데이/伊藤 介亭일본어), 이토 지쿠리(이토 지쿠리/伊藤 竹里일본어), 이토 란구(이토 란구/伊藤 蘭嵎일본어)이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이토 진사이의 고조(고조/五蔵일본어)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각 동애(東涯)(원조(原蔵)), 매우(梅宇)(중조(重蔵)), 개정(介亭)(정조(正蔵)), 죽리(竹里)(평조(平蔵)), 란구(蘭嵎)(재조(才蔵))로 불렸다.
3. 학설과 사상
이토 진사이는 당시 주류였던 주자학의 논리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을 버리고 텍스트를 직접 검토하는 방법으로 학문하였다.[4] 주자학은 정교한 학문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불교의 선학(禪學)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 등 유교와 관련 없는 사상의 영향을 받아 경서 해석에 편향성이 있었다.[4] 이러한 점을 비판하며, 이토 진사이는 불교나 노장사상이 혼합된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을 불완전한 텍스트로 간주하고, 공자와 맹자의 언행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코기가꾸()를 제창했다.[4]
이토 진사이는 모든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어 있는 대상이나 현상의 범위 전부나 자연 따위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정신이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기초하여 된 표상을 향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거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에 근거하지 않고 순수하게 논리에 부합하는 사고만으로 현실이나 사물을 인식하려는 일이나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인식이나 지식에 토대한 직관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으로써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려는 방법을 이용한다.[4]
이토 진사이는 만물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아닌 실재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된 표상이나 본질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의 모든 범위와 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조금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감정[심정]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4]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공자와 맹자는 이(理)를 찾아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주자학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꾸미는 불손한 견강부회라고 비판했다.[7] 또한 주자학이 실제 덕행을 소홀히 하게 하는 위선의 실마리이며, 신앙의 강제이고, 보통 사람들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소외시키는 차별의 합리화라고 주장했다.[7]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여생을 모두 바쳤다.
이시다 바이가쿠(伊島 바이ガク)는 주희(朱熹)의 추상적인 철학이 일상 윤리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독자적인 유교 철학을 형성했다.[4] 그는 주희의 철학이 동아시아 유교의 거의 정전 수준으로 격상시킨 사서(四書) 중 두 권인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성현의 도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4] 바이가쿠는 『대학』 대신 『논어』와 『맹자』에서 논의된 철학 용어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다.[4]
바이가쿠는 종종 정치와 무관한 철학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고모지기』는 이상적인 정치 질서의 철학적 기초를 정의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글로 볼 수 있다. 『논어』 13/3에서 공자는 제자에게 정치 권력을 얻으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명칭을 바로잡겠다"(正名, zheng ming)고 대답했다.[3]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선함보다는 바이가쿠는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人情, ninjō)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시(詩)의 중요성이 생겨났다. 그는 이것이 감정과 욕망의 필요한 해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3]
주요 저서로는 『논어고의』, 『맹자고의』, 『어맹자의』, 『중용발휘』, 『동자문』, 『고학선생문집』 등이 있지만, 생전에 강의와 저술을 정리하고 퇴고하는 데 전력을 경주했기 때문에 직접 발간한 저작은 없다.
이토 진사이는 당시 주류였던 주자학의 논리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을 버리고 텍스트를 직접 검토하는 방법으로 학문하였다.[4] 주자학은 과거의 선진 유학보다 이론이나 이치에 매우 합당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불교의 선학(禪學)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과 같이 유교와 관계없는 사상에 영향받아 경서를 다소 편향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4]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 유학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4]
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에서 중시하는 “리(理)”에 반대하고 “정(情)”을 바람직하게 평가했다.[4] 만물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아닌 실재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된 표상이나 본질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의 모든 범위와 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조금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심정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여생을 모두 바쳤다. 공자와 맹자는 이(理)를 찾아 이 세상 너머의 신비나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7]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꾸미는 불손한 견강부회이며, 논의만 분분하게 하여 실제로 필요한 덕행을 소홀히 하게 하는 위선의 실마리라고 주장했다.[7] 또한, 형이상학에 기초한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여 분쟁을 야기하기 쉬운 신앙의 강제이며, 수준 높은 식자 능력을 갖추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소외시키는 차별의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7]
이시다 바이가쿠(伊島 바이ガク)는 주희(朱熹)의 추상적인 철학이 일상 윤리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독자적인 유교 철학을 형성했다.[4] 그는 주희의 철학이 동아시아 유교의 거의 정전 수준으로 격상시킨 사서(四書) 중 두 권인 『논어』와 『맹자』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성현의 도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4] 나머지 두 권인 『중용』과 『대학』은 원래 『예기』의 장이었지만, 정이(程頤)와 주희에 의해 상당한 수정을 거쳐 별도의 책으로 다뤄졌다.[4] 바이가쿠는 『대학』 대신 『논어』와 『맹자』에서 논의된 철학 용어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다.[4] 바이가쿠의 유학 연구 방법은 오늘날 고의학(古義學, kogigaku) 또는 "고의 연구"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4]
바이가쿠는 송대 후기 이후 유교 사상의 최고 해석자인 주희와 몇 가지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3] 주희가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한 반면, 바이가쿠는 인간의 본성은 선해질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잠재력은 일상적인 수련과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또한 그는 송대 유교에서 제시된 이(理, li)와 기(氣, qi)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생명과 모든 사물의 창조로 이어진 것은 기(氣)뿐이라고 믿었다.[3]
이토 진사이는 논어를 "최고 중의 최고, 우주 제일의 책"이라고 칭했다. 고의학(古学)을 제창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논어고의』, 『맹자고의』, 『어맹자의』, 『중용발휘』, 『동자문』, 『고학선생문집』 등이 있는데, 생전에는 강의와 저술의 정리·추교에 전념하여 저서를 공개적으로 출판하지 않았다.
인재의 학문 방법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주자학적 경전 해석을 버리고, 직접 텍스트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매우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성립 과정에 유입된 선학이나 노장사상과 같은 비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경서 해석에 치우침이 있었다. 진사이는 그러한 요소를 유학에 있어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고, 일종의 실증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 유학 연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사이는 주자학의 "이(理)" 사상에 반하여, "정(情)"을 적극적으로 가치화했다. 객관적이고 냉담한 이론보다 인간적이고 생생한 심정을 신뢰했다. 성선설을 주장했다.
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의 “리(理)”에 반대하고 “정(情)”을 바람직하게 평가했다. 만물의 근원과 현상 전체가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인간적이고 혈액이 통하는 감정을 굳게 믿고 의지했다.[7]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했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공자와 맹자가 존재와 도덕이 생겨나는 본바탕이 되는 원리, 즉 이(理)를 찾아 이 세상 너머의 신비나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7]
이시다 바이가쿠(伊島 바이ガク)는 주희(朱熹)의 추상적인 철학이 일상 윤리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독자적인 유교 철학을 형성했다. 그는 주희의 철학이 동아시아 유교의 거의 정전 수준으로 격상시킨 사서(四書) 중 두 권인 『논어』와 『맹자』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성현의 도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4] 바이가쿠는 『대학』 대신 『논어』와 『맹자』에서 논의된 철학 용어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이가쿠의 유학 연구 방법은 오늘날 고의학(古義學, kogigaku) 또는 "고의 연구"로 알려져 있다.[4]
바이가쿠는 송대 후기 이후 유교 사상의 최고 해석자인 주희와 몇 가지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희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했지만, 바이가쿠는 인간의 본성은 선해질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잠재력은 일상적인 수련과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송대 유교에서 제시된 이(理, li)와 기(氣, qi)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생명과 모든 사물의 창조로 이어진 것은 기(氣)뿐이라고 믿었다.[3]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선함보다는 바이가쿠는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人情, ninjō)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시(詩)의 중요성이 생겨났다. 그는 이것이 감정과 욕망의 필요한 해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는 송대 유교가 너무나도 진지함과 인간 본성의 억제를 주장했다고 느꼈다.[3]
3. 1. 고기학(古義学) 창시
이토 진사이는 당시 주류였던 주자학의 논리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을 버리고 텍스트를 직접 검토하는 방법으로 학문하였다.[4] 주자학은 정교한 학문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불교의 선학(禪學)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 등 유교와 관련 없는 사상의 영향을 받아 경서 해석에 편향성이 있었다.[4] 이러한 점을 비판하며, 이토 진사이는 불교나 노장사상이 혼합된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을 불완전한 텍스트로 간주하고, 공자와 맹자의 언행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코기가꾸()를 제창했다.[4]이토 진사이는 모든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어 있는 대상이나 현상의 범위 전부나 자연 따위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정신이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기초하여 된 표상을 향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거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에 근거하지 않고 순수하게 논리에 부합하는 사고만으로 현실이나 사물을 인식하려는 일이나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인식이나 지식에 토대한 직관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으로써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려는 방법을 이용한다.[4]
이토 진사이는 만물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아닌 실재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된 표상이나 본질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의 모든 범위와 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조금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감정[심정]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4]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공자와 맹자는 이(理)를 찾아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주자학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꾸미는 불손한 견강부회라고 비판했다.[7] 또한 주자학이 실제 덕행을 소홀히 하게 하는 위선의 실마리이며, 신앙의 강제이고, 보통 사람들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소외시키는 차별의 합리화라고 주장했다.[7]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여생을 모두 바쳤다.
이시다 바이가쿠(伊島 바이ガク)는 주희(朱熹)의 추상적인 철학이 일상 윤리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독자적인 유교 철학을 형성했다.[4] 그는 주희의 철학이 동아시아 유교의 거의 정전 수준으로 격상시킨 사서(四書) 중 두 권인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성현의 도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4] 바이가쿠는 『대학』 대신 『논어』와 『맹자』에서 논의된 철학 용어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다.[4]
바이가쿠는 종종 정치와 무관한 철학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고모지기』는 이상적인 정치 질서의 철학적 기초를 정의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글로 볼 수 있다. 『논어』 13/3에서 공자는 제자에게 정치 권력을 얻으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명칭을 바로잡겠다"(正名, zheng ming)고 대답했다.[3]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선함보다는 바이가쿠는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人情, ninjō)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시(詩)의 중요성이 생겨났다. 그는 이것이 감정과 욕망의 필요한 해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3]
주요 저서로는 『논어고의』, 『맹자고의』, 『어맹자의』, 『중용발휘』, 『동자문』, 『고학선생문집』 등이 있지만, 생전에 강의와 저술을 정리하고 퇴고하는 데 전력을 경주했기 때문에 직접 발간한 저작은 없다.
3. 2. 주자학 비판
이토 진사이는 당시 주류였던 주자학의 논리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을 버리고 텍스트를 직접 검토하는 방법으로 학문하였다.[4] 주자학은 과거의 선진 유학보다 이론이나 이치에 매우 합당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불교의 선학(禪學)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과 같이 유교와 관계없는 사상에 영향받아 경서를 다소 편향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4]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 유학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4]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에서 중시하는 “리(理)”에 반대하고 “정(情)”을 바람직하게 평가했다.[4] 만물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아닌 실재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된 표상이나 본질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의 모든 범위와 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조금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심정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여생을 모두 바쳤다. 공자와 맹자는 이(理)를 찾아 이 세상 너머의 신비나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7]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꾸미는 불손한 견강부회이며, 논의만 분분하게 하여 실제로 필요한 덕행을 소홀히 하게 하는 위선의 실마리라고 주장했다.[7] 또한, 형이상학에 기초한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여 분쟁을 야기하기 쉬운 신앙의 강제이며, 수준 높은 식자 능력을 갖추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소외시키는 차별의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7]
이시다 바이가쿠(伊島 바이ガク)는 주희(朱熹)의 추상적인 철학이 일상 윤리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독자적인 유교 철학을 형성했다.[4] 그는 주희의 철학이 동아시아 유교의 거의 정전 수준으로 격상시킨 사서(四書) 중 두 권인 『논어』와 『맹자』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성현의 도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4] 나머지 두 권인 『중용』과 『대학』은 원래 『예기』의 장이었지만, 정이(程頤)와 주희에 의해 상당한 수정을 거쳐 별도의 책으로 다뤄졌다.[4] 바이가쿠는 『대학』 대신 『논어』와 『맹자』에서 논의된 철학 용어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다.[4] 바이가쿠의 유학 연구 방법은 오늘날 고의학(古義學, kogigaku) 또는 "고의 연구"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4]
바이가쿠는 송대 후기 이후 유교 사상의 최고 해석자인 주희와 몇 가지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3] 주희가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한 반면, 바이가쿠는 인간의 본성은 선해질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잠재력은 일상적인 수련과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또한 그는 송대 유교에서 제시된 이(理, li)와 기(氣, qi)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생명과 모든 사물의 창조로 이어진 것은 기(氣)뿐이라고 믿었다.[3]
3. 3. 실증주의적 방법
이토 진사이는 논어를 "최고 중의 최고, 우주 제일의 책"이라고 칭했다. 고의학(古学)을 제창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논어고의』, 『맹자고의』, 『어맹자의』, 『중용발휘』, 『동자문』, 『고학선생문집』 등이 있는데, 생전에는 강의와 저술의 정리·추교에 전념하여 저서를 공개적으로 출판하지 않았다.인재의 학문 방법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주자학적 경전 해석을 버리고, 직접 텍스트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매우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성립 과정에 유입된 선학이나 노장사상과 같은 비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경서 해석에 치우침이 있었다. 진사이는 그러한 요소를 유학에 있어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고, 일종의 실증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 유학 연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사이는 주자학의 "이(理)" 사상에 반하여, "정(情)"을 적극적으로 가치화했다. 객관적이고 냉담한 이론보다 인간적이고 생생한 심정을 신뢰했다. 성선설을 주장했다.
3. 4. 인간 중심 사상
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의 “리(理)”에 반대하고 “정(情)”을 바람직하게 평가했다. 만물의 근원과 현상 전체가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인간적이고 혈액이 통하는 감정을 굳게 믿고 의지했다.[7]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했다.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공자와 맹자가 존재와 도덕이 생겨나는 본바탕이 되는 원리, 즉 이(理)를 찾아 이 세상 너머의 신비나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7]
이시다 바이가쿠(伊島 バイガク)는 주희(朱熹)의 추상적인 철학이 일상 윤리에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독자적인 유교 철학을 형성했다. 그는 주희의 철학이 동아시아 유교의 거의 정전 수준으로 격상시킨 사서(四書) 중 두 권인 『논어』와 『맹자』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성현의 도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4] 바이가쿠는 『대학』 대신 『논어』와 『맹자』에서 논의된 철학 용어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이가쿠의 유학 연구 방법은 오늘날 고의학(古義學, kogigaku) 또는 "고의 연구"로 알려져 있다.[4]
바이가쿠는 송대 후기 이후 유교 사상의 최고 해석자인 주희와 몇 가지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희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했지만, 바이가쿠는 인간의 본성은 선해질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잠재력은 일상적인 수련과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송대 유교에서 제시된 이(理, li)와 기(氣, qi)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생명과 모든 사물의 창조로 이어진 것은 기(氣)뿐이라고 믿었다.[3]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선함보다는 바이가쿠는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人情, ninjō)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시(詩)의 중요성이 생겨났다. 그는 이것이 감정과 욕망의 필요한 해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는 송대 유교가 너무나도 진지함과 인간 본성의 억제를 주장했다고 느꼈다.[3]
3. 5. 한국과의 연관성
4. 저작
이토 진사이의 저작으로는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어맹자의』, 『동자문(童子問)』[5], 『대학정본(大學定本)』, 『중용발휘』 등이 있다.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는 각각 1922년과 1924년에 동양 도서에서 출판되었으며, 2013년에는 소명출판에서 장원철 역으로 출판되었다. 『동자문』은 1970년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판되었고[5], 2013년에는 그린비에서 최경열 역으로 출판되었다.
이 외에도 『백시문주(白氏文集)』(1704년), 『고학선생님 시와 글집』, 『인재일찰(仁斎日札)』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키무라 에이이치가 편집·해설한 『일본의 사상 11 이토 진사이집』(1970년), 요시카와 고키지로 등이 교주한 『일본사상대계 33 이토 진사이 이토 토가이』(1971년), 카이즈카 시게키가 책임편집한 『일본의 명저 13 이토 진사이』(1972년)[6]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5. 연구서
- 이기동 저, 이토 진사이
- 비토 마사히데, 「이토진사이에 있어서의 학문과 실천」, 「사상」 제524호, 1968년 2월
- 요시카와 고지로, 「진사이,소라이,노리나가」,이와나미서점,1975년 6월,복간2000년외
- 와타나베 히로시, 「이토진사이·이토토가이-송학 비판과 「고의학(古義学)」, 사가라 도루·마츠모토3지개·원 료원편 「에도의 사상가들」상권, 연구사 출판, 1979년 11월
- 고야스 노부쿠니, 「이토진사이 인륜적 세계의 사상」, 도쿄대학 출판회, 1982년 5월
- 증보판, 「이토진사이의 세계」리카응사, 2004년
- 이시다 가즈요시, 「이토진사이」<인물 총서> 요시카와 히로후미관, 1989년
- 사가라 도루, 「이토진사이」리카응사, 1998년
- 마루야 코이치, 「이토 히토시재의 「정」적 도덕 실천론의 구조」, 「사상」 제820호, 1992년 10월
- 다니자와 에이이치, 「일본인의 논어 「동자문」을 읽는다」 PHP 신서상·아래, 2002년
- 「일본 유교의 정신 주자학·진사이학·소라이학」시냇물사 1998년 8월
- 탄자와 에이이치, 『일본인의 논어-이토 진사이 「동자문」을 읽는다』 PHP연구소, 2015년 2월
- 와타나베 쇼이치, 『이토 진사이 「동자문」에 배우는 인간 수양에 지름길 없다』 지치출판사, 2015년 12월
참조
[1]
논문
The Early Life and Thought of Ito Jinsai
1983
[2]
서적
Itō Jinsai's Gomō jigi and the Philosophical Definition of Early Modern Japan
1998
[3]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2, 1600 to 2000
2005
[4]
서적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An Anthology, 1600-1900
2006
[5]
간행물
일본古典文学大系97 近世思想家文集
岩波書店
[6]
간행물
論語古義 の現代語訳
[7]
뉴스
[책과 삶]“공자와 맹자의 날것이 최고”…일본의 최초 유학서"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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