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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바라 에키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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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바라 에키켄은 일본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자 본초학자로, 지쿠젠 국 후쿠오카 번의 무사였다. 18세에 후쿠오카 번에 출사했으나 낭인 생활을 거쳐 번의 학자로서 주자학을 강의하고 조선 통신사 대응, 사가 번과의 경계 문제 해결 등 중책을 맡았다. 《양생훈》을 비롯해 60부 27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 조선에서 유출된 문헌을 활용, 《징비록》과 《유합》을 일본에 소개하여 임진왜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그의 저서는 조선의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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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바라 에키켄
기본 정보
오가타 겟코의 가이바라 에키켄 초상화
오가타 겟코의 가이바라 에키켄 초상화
본명가이바라 시게히사 (貝原 重久)
출생1630년 12월 17일
사망1714년 10월 5일
국적일본
학문 분야
주요 관심사유학
본초학
식물학
업적
주요 저서야마토 혼조 (大和本草)
양생훈 (養生訓)
화속 (和俗)
규원 (稽原)
대의록 (大疑録)
해내기문 (海内奇聞)
흑전잡록 (黒田雑録)
추가 정보
영향일본의 본초학 및 유학 발전에 기여
로마자 표기Kaibara Ekiken
기타
참고 문헌조셉슨의 "일본에서의 종교의 발명", 115–6쪽
일본어 표기貝原 益軒
일본어 읽기かいばら えきけん

2. 생애 및 인물

가이바라 에키켄 좌상 (후쿠오카시 주오구 긴류지)


가이바라 에키켄은 지쿠젠 국(지금의 후쿠오카현) 후쿠오카번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면서 다양한 활동을 한 인물이다.

1714년 (쇼토쿠 4년)에 사망하였다. 임종에 임하여, 사세의 한시 2수와 와카 "넘어온 길은 하룻밤 같은 기분으로 팔십이나 되는 꿈을 꾸었을 뿐"을 남겼다. 묘소는 후쿠오카시 긴류지(金龍寺)에 있으며, 일본 후쿠오카현 지정 사적이다.

1911년 (메이지 44년) 6월 1일, 정4위가 추증되었다.[19]

2. 1. 초기 생애

지쿠젠 국(지금의 후쿠오카현) 후쿠오카번 무사이자 구로다 번의 우필이었던 가이바라 간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아쓰노부(篤信), 자는 자성(子誠), 호는 유사이(柔斎), 손켄(損軒)이며 널리 알려진 에키켄이라는 호는 만년에 사용한 것이다. 통칭은 구베(久兵衛)이다.

1648년(게이안 원년) 18세로 후쿠오카 번에 출사하였으나, 1650년(게이안 3년) 2대 번주 구로다 다다유키의 분노를 사 7년 동안 낭인 신세가 되었다. 1656년(메이레키 2년) 27세에 3대 번주 구로다 미쓰유키에게 사면받아 번의(藩醫)로서 번에 복귀하였다.[17] 이듬해 번의 비용으로 교토에 유학하여 본초학과 주자학 등을 배웠다.

이 무렵 기노시타 준안, 야마자키 안사이, 마쓰나가 샤쿠고, 무카이 모토마사, 구로카와 도유 등과 교류하였다. 또한 같은 번의 미야자키 야스사다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7년간 유학한 뒤 1664년 35세 때 귀번하여 150석의 지행을 받고 번에서 주자학 강의, 조선 통신사 대응, 사가번과의 경계 문제 해결 등 중책을 맡았다. 40세 때 4대 번주 구로다 쓰나마사에게서 아라쓰 히가시하마(지금의 아라토 1초메)에 저택을 받아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18]

2. 2. 번사 시절

1648년(게이안 원년), 18세로 후쿠오카번에 출사하였으나, 1650년(게이안 3년), 2대 번주 구로다 다다유키의 분노를 사서 7년 동안 낭인 신세가 되었다. 1656년(메이레키 2년) 27세의 나이로 3대 번주 미쓰유키의 사면을 받아 번의로서 귀번하였다.[17] 이듬해 번의 비용으로 교토에 유학하였으며 그곳에서 본초학이나 주자학 등을 배웠다.

이 무렵 기노시타 준안, 야마자키 안사이, 마쓰나가 사케오, 무카이 모토카이, 구로카와 미치 등과 교우를 깊게 하였다. 또한 같은 번의 미야자키 안사이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7년의 유학 뒤인 1664년 35세 때에 귀번하여 150석 지행을 얻고, 번내에서의 주자학 강의나, 조선 통신사에의 대응을 맡기도 하였으며, 또 사가번과의 경계 문제 해결에 분주하는 등 중책을 맡았다. 40세 때 4대 번주 구로다 쓰나마사로부터 아라쓰 히가시하마(현재의 아라토1초메)에 저택을 받았고, 이곳에서 평생을 머물렀다.[18]

번의 명으로 《구로다 가보》를 편찬하였다. 또, 에키켄의 상신에 대하여 구로다 번은 1688년(겐로쿠 원년)에 《지쿠젠 국 속풍토기》의 편찬을 허락하였다.

2. 3. 은퇴 후 저술 활동

1699년, 70세에 은퇴하여 저술에 전념하였다. 에키켄의 저서는 1712년(正徳|쇼토쿠일본어 2년)에 출판한 《양생훈》을 시작으로 평생 60부 270여 권에 달한다. 퇴역 후에도 번내를 두루 순검(巡検)하며 《지쿠젠 국 속풍토기》 편찬을 계속하여, 1703년(元禄|겐로쿠일본어 16년)에 번주에게 헌상했다.[19]

2. 4. 가이바라 도켄과의 관계

에키켄은 39세 때 지인이자 아키즈키 번 의사인 에즈키 미치타쓰(江月道達)의 조카로 당시 17세였던 하쓰코(初子)와 결혼했다. 하쓰코는 나중에 '도켄(東軒)'이라 불렸다. 하쓰코는 와카에 능숙하였으며, 남편 에키켄을 따라 여러 곳을 여행하며 기행문을 짓거나 「여대학」 등을 돕기도 하였다. 둘 사이에 비록 자식이 없었으나 금슬이 좋았다고 전한다. 하쓰코 역시 에키켄처럼 병약하였으며, 가이바라 집안에 남아 있는 《용약일기》(用薬日記)에는 하쓰코의 병 치료 등으로 종종 한약을 조제하고 있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 하쓰코는 남편 에키켄이 사망하기 약 8개월 전에 향년 62세로 사망하였고[25] 에키켄이 사망한 것은 이듬해의 일이었다.

에키켄의 형 가이바라 라쿠켄(貝原楽軒)은 지쿠젠 후쿠오카 번에서 우라부교(浦奉行)를 지냈으며, '가이바라 의질 교훈서(貝原義質教訓書)'를 저술했다.

라쿠겐의 아들 가이바라 호코(貝原好古)는 훗날 숙부 에키켄의 양자가 되어 그 집안을 이었다. 호코는 번의 명으로 양아버지 에키켄의 「지쿠젠국 속풍토기」 편집에 조력하거나, 「일본세기」(日本歳時記)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3. 주요 저서

가이바라 에키켄은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 1709년(호에이 6년)에 출판된 《야마토 본초》는 중국의 《본초강목》에 훈점을 달고 자신의 경험을 덧붙인 책이다.[20] 이 책은 본초학박물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0]
  • 1712년(쇼토쿠 2년)에 쓰인 《자오집》(自娯集)은 에키켄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 『신사록』(慎思録)은 교리, 도덕, 교육 등에 대한 에키켄의 생각을 담고 있다.
  • 『대의록(大擬録)』은 주자학에 대한 에키켄의 의문을 담은 책으로, 1714년 에키켄 사후에 출판되었다.[7]
  • 『다자이후 신사 연기』(太宰府神社縁起)[4]
  • 『신기훈』(神祇訓)[4]
  • 『신주 평고 아이모토라자루 론』(神儒平行相違無論)[4]
  • 『야마토 소혼』(大和草本)[6]
  • 1713년의 『요조쿤(養生訓)』[6]


독일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지볼트는 가이바라 에키켄을 '일본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평가했다.

3. 1. 본초학 서적

가이바라 에키켄은 중국에서 출판된 《본초강목》에 훈점을 붙이고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더하여 《야마토 본초》를 1709년(호에이 6년)에 발행하였다.[20] 이전까지 중국에서 전해지는 약초를 일본어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던 본초학에, 실용적인 관점에서의 기술을 더해 박물학으로 전개되는 단초가 되었고, 이후 식물의 형상, 생태, 일상 활용 가능성 등으로 본초학의 관심이 향하게 되었다.[20]

『야마토 본초』(국립과학박물관 전시)

3. 2. 교육서

가이바라 에키켄은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로 저술 활동을 했다. 《야마토 속훈》 서문에서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하고, 먼 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치가 있다"라고 하여, 서민, 여성, 유아 등 폭넓은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서를 저술했다.

대표적인 교육서는 다음과 같다.

  • 《양생훈》
  • 《야마토 속훈》
  • 《화속동자훈》
  • 오상훈
  • 《가도훈》
  • 《온나 다이가쿠》(女大學) (1729년경)[5]

3. 3. 유학 및 기타 서적

가이바라 에키켄은 어릴 적 몸이 약해 독서에 몰두하여 높은 학식을 쌓았다. 책뿐만 아니라 직접 발로 걷고 보고 만지며 확인하는 실증주의적인 면모도 보였다.

1709년(호에이 6년)에는 중국의 《본초강목》에 훈점을 붙이고 자신의 경험을 더한 《야마토 본초》를 발행하였다.[20] 이는 기존의 본초학에 실용적 관점을 더해 박물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식물의 형태, 생태, 활용 가능성 등으로 본초학의 관심이 확장되었다.[20]

사상서로는 1712년(쇼토쿠 2년)의 《자오집》(自娯集)이 있다. 학문적 공적으로는 사상, 교리, 도덕, 교육 등에 대한 의견을 저술한 『신사록』(慎思録), 주자학에 대한 의문을 저술한 《대의록(大擬録)》 등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다음이 있다.

  • 『다자이후 신사 연기』(太宰府神社縁起) [4]
  • 『신기훈』(神祇訓) [4]
  • 『온나 다이가쿠(女大學)』, 1729년경. [5]
  • 『신주 평고 아이모토라자루 론』(神儒平行相違無論) [4]
  • 『야마토 본초(大和本草)』, 1709년.
  • 『야마토 소혼』(大和草本) [6]
  • 『요조쿤(養生訓)』, 1713년. [6]
  • 『대의록(大疑錄)』, 1714년 사후 출판. [7]


3. 4. 기행문

에키켄은 《화주순람기(和州巡覧記)》를 비롯한 여러 기행문을 남겼다.

4. 가이바라 에키켄과 조선

가이바라 에키켄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여러 문헌을 입수하여 자신의 저술에 활용하고 일본에 소개한 인물이다.

에키켄은 《조선징비록》 서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선에는 가이바라 에키켄의 저술로 전하는 《화한명수》(和漢名數)라는 책이 전해져 이익, 안정복, 이덕무실학자들의 일본 관련 저술 집필에 쓰였다. 《화한명수》는 엔포 6년(1678년)에 간행된 수사 어휘집으로, 제1천문(天文)부터 제15불가(佛家)까지 모두 1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제3지리(地理)조에 삼한(三韓) 항목을 두고 조선의 역사책 《동국통감》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에키켄과 학술적 관계를 맺고 있던 고사이 시게스케(香西成質)의 병학 문헌 《히데요시 각하 격조선론》(秀吉閣下擊朝鮮論)과 《본방지세변》(本邦地勢辨)도 조선 통신사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이 문헌들은 이익의 《성호사설[22]이중환의 《택리지[23], 한치윤의 《해동역사[24]에 실려 실학자들에게 소개되었다.

4. 1. 《징비록》 소개

가이바라 에키켄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징비록》 등의 문헌을 일본에서 이른 시기에 입수하여 자신의 집필 작업에 활용하고, 일본판 간행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일본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1695년 교토의 출판업자 야마토야 이헤이(大和屋伊兵衛)에 의해 간행되었는데,[21] 《조선징비록》의 서문을 쓴 것이 가이바라 에키켄이었다. 에키켄은 《조선징비록》 서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명분이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조선측이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 역시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중국 제갈원성의 《양조평양록》에 보이는 조선 비판에 근거한다.

《조선징비록》이 간행되기 8년 전인 1687년에 완성된 《구로다 가보》에서도 에키켄은 《징비록》을 자주 인용하였다.

4. 2. 《유합》 간행

가이바라 에키켄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한자 입문서 《유합》을 일본에서 이른 시기에 입수하여 간행하였다. 겐로쿠 5년(1692년) 에키켄의 서문과 함께 《조선국 정본 천자유합》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유합》은 《천자문》을 본떠 4자 1구, 390구로 이루어진 한자 학습서이다. 이 책은 나가사키 데지마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인 필리프 지볼트를 통해 유럽에까지 전달되기도 하였다.[21]

4. 3. 기타

가이바라 에키켄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한자 입문서 《유합》(類合) 및 《징비록》(懲毖錄) 등의 문헌을 일본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입수하여 자신의 집필 작업에 활용하고, 그 일본판을 간행하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었다.[21]

류성룡의 《징비록》은 일본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1695년 교토에서 출판업자 야마토야 이헤이(大和屋伊兵衛)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조선징비록》의 서문을 쓴 것이 가이바라 에키켄이었다. 에키켄은 《조선징비록》의 서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는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조선측이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 역시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선징비록》이 교토에서 간행되기 8년 전인 1687년에 《구로다 가보》가 완성되었는데, 이 책에서도 에키켄은 《징비록》을 자주 인용하였다.

천자문》을 본떠 4자 1구, 390구로 이루어진 한자 학습서 《유합》은 《조선징비록》보다 3년 앞선 겐로쿠 5년(1692년) 에키켄의 서문과 함께 《조선국 정본 천자유합》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에는 가이바라 에키켄의 저술로 전하는 《화한명수》(和漢名數)라는 이름의 책이 전해져 이익, 안정복, 이덕무 등 실학자들의 일본 관련 저술 집필에 쓰였다.

에키켄과 학술적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의 고슈류 병학자 고사이 시게스케(香西成質)의 병학 문헌 《히데요시 각하 격조선론》(秀吉閣下擊朝鮮論)과 《본방지세변》(本邦地勢辨)도 조선에서 온 조선 통신사를 통해 각각 '격조선론'(擊朝鮮論)과 '일본지세변'(日本地勢辨)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에 전해졌다. 이 문헌들은 이익의 《성호사설[22]이중환의 《택리지[23], 한치윤의 《해동역사[24]에 실려 실학자들에게 소개되었다.

5. 평가 및 영향

가이바라 에키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독일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지볼트는 그를 '일본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평가했다.

5. 1. 지볼트의 평가

독일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는 가이바라 에키켄을 '일본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평가했다.

6. 기타

에키켄의 아버지 가이바라 간사이의 지행지이자 에키켄이 어린 시절을 보낸 후쿠오카현 이즈카 시에는 '가이바라 에키켄 학습의 비'가 세워져 있다.[1]

참조

[1] 서적 Mapping Early Modern Japan: Space, Place, and Culture in the Tokugawa Period (1603–1868)
[2] 서적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 서적 Women and Confucian Cultures in Premodern China, Korea, and Japan
[4] 웹사이트 Encyclopedia of Shinto - Home : Personalities : Kaibara Ekiken http://eos.kokugakui[...]
[5] 웹사이트 See excerpt http://chnm.gmu.edu/[...] George Mason University
[6] 웹사이트 Regions - IIAS Newsletter Online https://web.archive.[...] 2008-01-08
[7]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男の更年期は貝原益軒『養生訓』の叡智で乗り越えられる https://diamond.jp/a[...]
[9] 웹사이트 貝原益軒とは https://kotobank.jp/[...] 2022-02-23
[10] 서적 貝原益軒『養生訓・和俗童子訓』 岩波文庫
[11] 웹사이트 福岡市の文化財を見に行こう https://bunkazai.cit[...] 福岡市経済観光文化局 文化財活用部 文化財活用課 2022-04-08
[12] 서적 医家先哲肖像集 https://dl.ndl.go.jp[...] 刀江書院 1936-07-20
[13] 저널 本草学 都市出版 2013-02-03
[14] 웹사이트 『養生訓』と貝原益軒⑦ http://www.kyotsujig[...] 協通事業 2018-10-02
[15] 웹사이트 男の更年期は貝原益軒『養生訓』の叡智で乗り越えられる https://diamond.jp/a[...]
[16] 웹인용 貝原益軒とは https://kotobank.jp/[...] 2022-02-23
[17] 서적 貝原益軒『養生訓・和俗童子訓』 岩波文庫
[18] 웹인용 福岡市の文化財を見に行こう https://bunkazai.cit[...] 福岡市経済観光文化局 文化財活用部 文化財活用課 2022-04-08
[19] 서적인용 医家先哲肖像集 https://dl.ndl.go.jp[...] 刀江書院 1936-07-20
[20] 저널인용 本草学 都市出版 2013-02-03
[21] 서적 전쟁의 문헌학 열린책들
[22] 웹사이트 일본지세변급격조선론 https://db.itkc.or.k[...]
[23] 문서 택리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4] 웹사이트 왜적을 막은 데에 대한 시말 https://db.itkc.or.k[...]
[25] 웹인용 『養生訓』と貝原益軒⑦ http://www.kyotsujig[...] 協通事業 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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