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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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화는 일제강점기부터 월북 이후 숙청되기까지 활동한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모더니즘과 다다이즘에 심취하여 시와 평론을 발표했으며, 1926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여 서기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 등을 조직하며 사회주의 문학을 이끌었으나, 1947년 월북하여 조선소비에트문화협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1953년 박헌영 등과 함께 미국의 스파이 혐의로 몰려 처형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시집 『현해탄』, 평론집 『문학의 논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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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건설본부는 1945년 임화, 김남천 등 KAPF 소장파가 결성한 문학 단체로, 좌우 통합을 표방했으나 좌익 강경파의 반발과 KAPF 분리 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어 해방 직후 문학 운동 방향 논쟁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임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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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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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Im Hwa |
한글 | 임화 |
한자 | 林和 |
가타카나 | 이무・화 (리무・화) |
인물 정보 | |
본명 | 임인식 |
다른 필명 | 임화 임다다 김철우 양남수 양다림다 |
아호 | 쌍수대인 성아 청로 |
별명 |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 |
출생일 | 1908년 10월 13일 |
사망일 | 1953년 8월 6일 |
자녀 | 임혜란(딸) |
형제 | 임정숙(누나) 임교식(형)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동서구역 동숭방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거주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학력 | 1925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중퇴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직책 | 제1부상 |
임기 | 1950년 9월 2일 ~ 1951년 9월 9일 |
국가 | 북괴 인민 정부 문화선전성 |
장관 | 허정숙 북괴 문화선전상 |
전임 | 김강 |
후임 | 조일명 |
차관 | 정률 북괴 문화선전성 제2부상 안막 북괴 문화선전성 제3부상 |
주석 | 김두봉 |
수상 | 김일성 |
경력 | |
주요 경력 |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지하련(재혼) 리귀례(이혼) |
2. 생애
서울 출생[1]으로, 보성고보를 중퇴한 후 모더니즘 문학과 다다이즘에 심취하여 1926년경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도쿄 유학 후 귀국하여 1926년 가입했던 카프(KAPF)에서 1932년부터 서기장을 지냈다. 1935년 카프가 강제 해산된 뒤에는 고전 연구, 근대 문학사 연구 등에 힘썼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이원조, 김남천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이듬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편)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7년 남조선노동당 계열 문인들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월북 후 조선소비에트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며 해주 등지에서 활동했으나, 1953년 박헌영-리승엽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군사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대표적인 시로는 나카노 시게하루의 시 『비 오는 시나가와 역』(雨の降る品川駅일본어)에 대한 답시인 〈우산 쓰고 가는 요코하마 부두〉(雨傘さす横浜の埠頭일본어)(1929년) 등이 있으며, 시집 『현해탄』(玄海灘일본어)(1938), 『찬가』(讃歌일본어)(1947), 평론집 『문학의 논리』(文学の論理일본어)(1940) 등을 남겼다. 월북 후에는 시집 『너는 어디에 있는가』(おまえはどこにいるのか일본어)(1951) 등을 발표했다. 일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의 생애를 다룬 소설 『북방의 시인』(北の詩人일본어)을 쓰기도 했다.
2. 1. 생애 초반
대한제국 한성부의 한 소시민 가정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1] 1921년 사립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작가 이상, 정치가 리강국 등과 동기생이 되었으나, 1925년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중퇴했다.1920년대 후반부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경부터 모더니즘 문학과 다다이즘에 심취하여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927년에는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친구인 윤기정과 함께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26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KAPF)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929년에는 도쿄에 유학했다가 귀국했다. 1932년부터 카프 서기장을 역임했으나, 1935년 일제에 의해 카프가 강제로 해산되자 이후에는 고전 연구, 근대 문학사 연구, 조선 문고 운영 등에 종사했다.
2. 2. 항일 작가, 문필 활동

서울 출생[1]이다.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모더니즘 문학과 다다이즘에 심취하여 1926년경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임화(림화)라는 필명은 그가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던 1927년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쓰기 시작했다. 1929년 도쿄(東京)에 유학했으며, 같은 해 시 〈우리 옵바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며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 잡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KAPF)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1926년 카프에 가입했다.
1930년 약 1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31년 귀국한 이후, 카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좌파 문학 이론을 생산하고 김기진, 김화산 등과의 문학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카프 활동으로 인해 제1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1932년부터는 카프 서기장을 역임했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 이후 1935년 카프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잠시 순수 문학으로 전향하는 듯 보였으나 고전 연구, 근대 문학사 연구, 조선 문고 운영 등에 종사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인 8월 16일, 서울에서 이원조,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이듬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편)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박헌영에게 매료된 이후 남로당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을 받게 되자, 1947년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문학가, 예술가들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월북 후에는 조선소비에트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해주 등지에서 대남(對南) 활동 및 유격대 활동 지원 등에 종사했다. 그러나 1953년 8월 6일, 이승엽, 박헌영 등과 함께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다음 날 처형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서정적 프로레타리아 시로는 나카노 시게하루의 시 『비 오는 시나가와 역』(雨の降る品川駅일본어)에 대한 답시인 〈우산 쓰고 가는 요코하마 부두〉(雨傘さす横浜の埠頭일본어) (1929년)가 있다.
주요 작품:
- 시:
- 〈우리 옵바와 화로〉 (또는 〈형님과 화로〉, お兄さんと火鉢일본어)
- 〈네거리의 순이〉 (또는 〈십자로의 순이〉, 十字路の順伊일본어)
- 〈우산 쓰고 가는 요코하마 부두〉 (雨傘さす横浜の埠頭일본어) (1929년)
- 시집:
- 『현해탄』 (玄海灘일본어) (1938년)
- 『찬가』 (讃歌일본어) (1947년)
- 『너는 어디에 있는가』 (おまえはどこにいるのか일본어) (1951년, 월북 후 발표)
- 『40년』 (40年일본어) (1952년, 김일성 생일 40주년 기념)
- 평론집:
- 『문학의 논리』 (文学の論理일본어) (1940년)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북방의 시인』 (北の詩人일본어)은 임화의 일생을 다룬 작품이다.
2. 3. 일제 강점기 후반
193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이 강제 해산된 후, 임화는 고전 연구, 근대 문학사 연구, 조선 문고 운영 등에 종사했다. 일제 당국은 그에게 전향을 권고하며 회유했지만, 임화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대화숙에 강제로 입소되기도 했으나, 끝까지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임화를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여 감시했으며, 특히 박헌영과의 관계를 의심하며 내통 여부를 주시했다. 결국 그는 황군 위문 작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위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그 활동의 정도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현해탄』(1938년)과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년) 등이 있다.2. 4. 해방 이후
박헌영의 지지자였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여운형, 안재홍 등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잠시 참여했으나,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이 서울에 나타나자 그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8월 16일에는 서울에서 이원조,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이듬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편)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 부상했다.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7년 남로당 계열의 다른 문학가, 예술가들과 함께 부인인 소설가 지하련과 북한으로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으며, 같은 해 8월 2일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후 평양으로 돌아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했다. 북한에서는 조선소비에트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대남(對南) 활동 및 유격대 활동 지원 등에 종사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그리워하며 쓴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시는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으로부터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하였다"는 비판을 받으며 숙청의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5] 한편, 작곡가 김순남이 곡을 붙여 전쟁 시기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인민항쟁가〉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월북 후 발표한 시집으로는 『너는 어디에 있는가』(1951)가 있으며, 1952년에는 김일성의 40세 생일을 기념하여 시 『40년』을 발표했다.
1953년 2월 17일 평양시 공산당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렸고, 결국 같은 해 8월 6일 박헌영, 리강국, 리승엽 등 남로당 출신 지도부와 함께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다음 날인 8월 7일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처형 과정이나 시점 등 상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2. 5. 숙청과 죽음
한국 전쟁 발발 후 해주 등지에서 대남 활동 및 유격대 활동 지원 등에 종사했으나, 1953년 노동당 내 남로당파 숙청 사건에 휘말렸다. 1953년 2월 17일 평양시 공산당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6일 이승엽, 박헌영과 함께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군사재판에 회부된 뒤 다음 날 처형되었다.당시 임화의 계배(두 번째 부인)였던 작가 지하련은 중공 만주의 창춘에 피난 중이었는데, 1953년 박헌영 계열이 몰락하면서 남편 임화가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큰 충격을 받아 울화병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한편, 2001년 9월에 공개된 전 미군 정보장교 조지 실리(미국 육군 소령)의 보고서에 따르면, 임화가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으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기존에 알려진 통설, 즉 리강국이 김수임을 통해 남한 정보를 북한에 제공했다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미군 측이 김수임과 연결된 리강국을 통해 북한 내부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보고서는 임화에게 씌워진 스파이 혐의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7][8]
3. 작품 활동
보성고보를 중퇴한 후 모더니즘 문학과 다다이즘에 심취하여 1926년경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1] 1929년 도쿄 유학 후 귀국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했으며, 1932년부터는 서기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이 시기 그는 서정적인 프로레타리아 시를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1935년 일제에 의해 KAPF가 강제 해산되자, 고전 연구와 근대 문학사 연구에 몰두하고 조선 문고 운영에 참여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16일, 서울에서 이원조,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이듬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편)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을 받게 되자 1947년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문학가, 예술가들과 함께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조선소비에트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활동했으나, 1953년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후 처형되었다. 월북 이후에도 시집을 발표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3. 1. 주요 작품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나카노 시게하루일본어)의 시 『雨の降る品川駅|비 오는 시나가와 역일본어』에 대한 답시로 쓴 『雨傘さす横浜の埠頭|우산 쓰고 가는 요코하마 부두일본어』(1929년)는 그의 서정적인 프로레타리아 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외 주요 시로는 『십자로의 순이』, 『형님과 화로』 등이 있다.시집으로는 『현해탄(玄海灘|겐카이나다일본어)』(1938년)과 『찬가』(1947년)를 출간했으며,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년)가 있다.
월북 후에는 시집 『너는 어디에 있는가』(1951년)를 발표했고, 1952년 김일성의 40세 생일을 기념하여 장편 서사시 『40년』을 발표했다.
일본의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마쓰모토 세이초일본어)는 임화의 일생을 다룬 소설 『北の詩人|북방의 시인일본어』을 썼다.
4. 평가
일본의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임화의 북한에서의 활동과 생애를 소재로 한 소설 『북의 시인, 임화』(원제: 北の詩人일본어, 1964년)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1987년 대한민국 서울에도 번역본이 소개되었다.
4. 1. 긍정적 평가
임화는 모더니즘 문학과 다다이즘에 심취하여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1]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여 1932년부터 서기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주의 문학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35년 KAPF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이후에도 고전 연구, 근대 문학사 연구, 조선 문고 운영 등에 종사하며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이어갔다.中野重治|나카노 시게하루일본어의 시 '비 오는 시나가와 역'(雨の降る品川駅일본어)에 대한 답시로 쓴 '우산 쓰고 가는 요코하마 부두'(雨傘さす横浜の埠頭일본어, 1929년)는 그의 서정적인 프로레타리아 시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외에도 '십자로의 순이'(十字路の順伊일본어), '형님과 화로'(お兄さんと火鉢일본어) 등의 시를 남겼으며, 시집 『현해탄』(玄海灘일본어, 1938년), 『찬가』(1947년)와 평론집 『문학의 논리』(文学の論理일본어, 1940년) 등을 통해 그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에는 서울에서 이원조,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이듬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편)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비록 미군정의 탄압으로 1947년 월북하였으나, 북한에서도 조선소비에트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시집 『너는 어디에 있는가』(おまえはどこにいるのか일본어, 1951년), 김일성의 생일을 기념한 『40년』(40年일본어, 1952년) 등을 발표하며 활동을 지속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일본의 저명한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가 쓴 소설 『북방의 시인』(北の詩人일본어)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4. 2. 부정적 평가
일제강점기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KAPF)에 가입하여 서기장까지 역임하며 사회주의 문학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1] 카프는 193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그의 사회주의적 신념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1945년 8월 16일, 일본의 패전 직후 이원조,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이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편)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미군정의 탄압 대상이 되었고, 결국 1947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계열의 다른 문학가, 예술가들과 함께 북한으로 월북했다.[1]
북한에서는 조선소비에트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맡으며 활동했고, 해주에서 대남(對南) 활동 및 유격대 활동 지원 등에 종사했다. 그러나 그의 북한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3년,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재판 다음 날 처형당했다.[1]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활동과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선택한 월북이었지만, 결국 북한 정권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5. 임화를 연기한 배우
6. 가계
- 배우자 : 지하련
참조
[1]
웹사이트
임화(林和)
http://encykorea.aks[...]
2022-09-03
[2]
웹사이트
임화의 비극
http://www.redian.or[...]
2014-08-20
[3]
뉴스
(금주의 역사속 인물) 시인 임화, 북한에서 총살
https://news.naver.c[...]
매일신문
2016-08-06
[4]
뉴스
[애송시 100편-제36편]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http://issue.chosun.[...]
조선일보
2008-02-18
[5]
저널
문학과 정치의 우정은 어떻게 가능하고 또 지속되는가 - 백철과 임화의 경우
[6]
웹사이트
월북작가 임화(林和)의 기구한 운명
http://nk.chosun.com[...]
조선일보
2001-09-05
[7]
뉴스
남로당 핵심 이강국·임화 미군방첩대 스파이였다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2001-09-05
[8]
뉴스
남로당 핵심 이강국·임화 CIC 요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매일
200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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