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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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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은 1741년 작센바이마르와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이 동군 연합으로 성립된 이후 대공국으로 승격되어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의 영토였다. 1871년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1918년 독일 혁명으로 마지막 대공이 퇴위하고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자유주가 되었다가 1920년 튀링겐주에 합병되었다. 주요 도시로는 바이마르, 예나, 아이제나흐가 있으며,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중심지로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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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깃발 (1813–1897)
깃발 (1813–1897)
깃발 (1897–1920)
깃발 (1897–1920)
문장
수도바이마르
일반 언어독일어
튀링겐 방언
국가
독일 제국 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에르네스틴 공국 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역사
존속 기간 시작1809년
존속 기간 종료1920년
이전 사건작센-아이제나흐와 작센-바이마르의 동군 연합
이전 사건 날짜1741년
시작 사건아이제나흐와 바이마르의 합병
시작 사건 날짜1809년 9월 20일
사건 1대공으로 승격
사건 1 날짜1815년
사건 2독일 혁명
사건 2 날짜1918년
종료 사건튀링겐에 합류
정치
정치 체제절대 군주제 (1809–1816)
입헌 군주제 (1816–1918)
공화국 (1918–1920)
국가 지위라인 연방의 국가 (1809–1813)
독일 연방의 국가 (1815–1866)
북독일 연방의 연방 국가 (1867–1871)
독일 제국의 연방 국가 (1871–1918)
바이마르 공화국의 연방 국가 (1918–1920)
지도자카를 아우구스트 (최초)
빌헬름 에른스트 (최후)
지도자 직함대공
최초 지도자 통치 시작1809년
최초 지도자 통치 종료1828년
최후 지도자 통치 시작1901년
최후 지도자 통치 종료1918년
통화
통화작센 탈러 (1857년까지)
작센 페어아인스탈러 (1857–1873)
독일 금 마르크 (1873–1918)
현재 국가
현재 국가독일

2. 역사

1741년 작센바이마르 공국과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은 동군연합 상태였다. 1809년 두 공국이 합병하여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이 되었고, 1815년 빈 회의 결과에 따라 동쪽의 노이슈타트 지역을 흡수하며 대공국으로 승격하였다.

1871년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다. 1918년 군주제 폐지 후 2년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자유주'''로 존속하다 1920년 튀링겐주에 합병되었다.

2. 1.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의 성립 (1741년 ~ 1815년)

1741년 작센바이마르와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은 베틴 가문에 의해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이는 아이제나흐 공작 빌헬름 하인리히가 후사 없이 사망했기 때문이다.[1]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1세가 이 동군연합의 첫 공작이 되었고, 그의 아들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2세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1]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2세의 아내 안나 아말리아는 섭정으로서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를 대신해 통치했다. 그녀는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를 아들의 교육자로 초빙했다.[1]

18세가 된 카를 아우구스트는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와 결혼하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초청했다. 괴테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프리드리히 실러바이마르로 초청하여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기반을 다졌다.[1]

1804년, 카를 아우구스트의 아들 카를 프리드리히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 마리아 파블로브나와 결혼하여 왕조의 위상을 높였다. 이 결혼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공국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1]

1809년, 작센바이마르 공국과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은 공식적으로 합병되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이 되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로 인해 영토를 확장하고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동쪽의 노이슈타트 지역(Neustädter Kreisde) 대부분과 에르푸르트 공국의 대부분을 획득했다.[1]

2. 2. 대공국 승격과 발전 (1815년 ~ 1918년)

1804년,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카를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인 마리아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에르네스틴 작센바이마르 왕조의 부상을 결정적으로 촉진했다. 또한 이 결혼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공국에 어느 정도의 보호를 제공했다. 처음에 프로이센 왕국의 동맹국이었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나폴레옹의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그의 퇴위를 피하기 위해 1806년 12월 15일 라인 연방에 가입했다.

1809년 공식적인 합병 이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은 북쪽의 수도 바이마르와 서쪽의 아이제나흐 주변의 별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러시아와의 연관성 덕분에, 공국은 1815년 빈 회의에서 실질적인 이득을 얻었다. 동쪽으로는 작센 왕국으로부터 노이슈타터 크라이스(노이슈타트 지역)의 대부분을 얻었다. 또한 전쟁 전에는 마인츠 선제후국의 월경지였고, 점령 하에 직접 관리되는 프랑스 봉토였던 에르푸르트 공국의 대부분을 받았다. 또한 블랑켄하인과 크라니히펠트와 같은 작은 영토도 얻었다. 뢰른 산맥 지역에서는, 아이제나허 오버란트는 헤센-카셀 방백령의 인접한 이전 지역과 세속화된 풀다 대수도원이 보유했던 영토로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이 국가는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세계적인 성향을 가진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은 1816년 5월 5일, 독일 최초의 자유주의 헌법을 자신의 대공국에 부여했다. 예나 대학교의 학생들은 독일 최초의 학생 친목 단체인 우르부르셴샤프트를 조직했고, 1817년 10월 바르트부르크에서 바르트부르크 축제를 기념했다. 많은 자유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연설자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으며, 독일에서 가장 초기의 민주주의자 중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1828년부터 대공비였던 마리아 파블로브나는 프란츠 리스트페터 코르넬리우스와 같은 작곡가들을 후원했다. 1853년부터 대공이었던 그녀의 예술을 사랑하는 아들 카를 알렉산더 (1818–1901) 역시 예술, 특히 음악을 지원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지원한 소피 공주와 결혼했고, 쇠퇴해가는 바르트부르크 성을 당시의 낭만적인 역사주의 양식으로 재건하고 모리츠 폰 슈빈트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는 또한 응용 미술 학교의 설립을 반쯤 지지했는데, 이는 1919년 바우하우스를 형성하기 위해 합병되었다.

1815년부터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던 이 대공국은 1848년 독일 혁명의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 후 20년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사이의 갈등이 커지는 동안 중립을 유지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대공국은 북독일 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1871년에는 새로운 독일 제국에 구성 국가로 가입했다.

1901년 카를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 빌헬름 에른스트가 즉위했으며, 그는 그라이츠의 캐롤라인 로이스 공주와 결혼한 후 작센-마이닝겐의 페오도라 공주와 재혼했다. 1903년, 대공국은 공식적으로 이름을 '''작센 대공국'''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웃한 작센 왕국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라고 불렀다.

빌헬름 에른스트는 1918년 11월 9일 왕위를 포기했으며, 이로써 이 국가의 군주제가 종식되었다. 그것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자유주'''로 계속 존속하다가, 1920년 대부분의 이웃 국가와 합병하여 튀링겐을 형성했으며, 바이마르는 주의 수도가 되었다.

2. 3. 독일 제국 편입과 멸망 (1871년 ~ 1918년)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은 그 구성국이 되었다. 1848년 독일 혁명의 영향은 크지 않았고, 이후 20년간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갈등에서 중립을 지켰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에는 북독일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01년 카를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손자인 빌헬름 에른스트가 대공위를 계승했다. 그는 캐롤라인 로이스 공주와 결혼했다가 이혼 후 작센마이닝겐의 페오도라 공주와 재혼했다. 1903년 대공국의 공식 명칭을 '''작센 대공국'''으로 변경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작센 왕국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계속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라고 불렀다.

1918년 독일 혁명이 발발하자 빌헬름 에른스트는 11월 9일 퇴위했고,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대공국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자유주'''(Freistaat Sachsen-Weimar-Eisenach)로 존속하다가 1920년 이웃 국가들과 합병하여 튀링겐에 합병되었다. 바이마르는 튀링겐 주의 주도가 되었다.

3. 역대 군주

베틴 가문의 Ernestinerde계 대공들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을 통치했다.

1809년 공식적으로 작센바이마르 공국과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이 합병되었고, 1815년 빈 회의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은 다음과 같다.

이름재위 기간비고
카를 아우구스트1815년 ~ 1828년
카를 프리드리히1828년 ~ 1853년
카를 알렉산더1853년 ~ 1901년
빌헬름 에른스트1901년 ~ 1918년



1918년 군주제가 폐지된 이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수장은 다음과 같다.

이름재위 기간
빌헬름 에른스트1918년 ~ 1923년
카를 아우구스트1923년 ~ 1988년
미하엘1988년 ~ 현재


3. 1. 작센바이마르 및 작센아이제나흐 공작 (1741년 ~ 1809년)

베틴 가문의 Ernestinerde계 공작들이 통치했다.

작센바이마르와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은 1741년부터 같은 베틴 가문 분파에 의해 개인 연합으로 통치되었다. 이는 아이제나흐 가문의 공작 빌헬름 하인리히가 사망하면서 대가 끊겼기 때문이다. 이 개인 연합의 첫 번째 공작은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1세였으며, 그는 바이마르에 벨베데레 궁전을 건설했다. 그의 아들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2세는 겨우 3년 동안 통치했으며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18세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주 안나 아말리아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보다 1살 어렸고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였다. 1년 후 그녀는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를 낳았고, 1년 후 미망인이 된 그녀는 아들 콘스탄틴을 낳았다.

과부 대공비 안나 아말리아는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승인과 그녀의 윤리적인 재상 폰 프리치 남작의 지원을 받아 적극적으로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아들들의 교육자로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교수였던 시인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를 고용했다.

18세의 카를 아우구스트는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다. 그는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고용했고, 곧 그와 친구가 되었다. 괴테는 다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프리드리히 실러를 바이마르로 초청하여 바이마르 고전주의 원의 기초를 다졌으며, 이는 안나 아말리아의 지원을 받았다. 나중의 섭정들은 이 유산을 지키는 것을 주요 과제로 여겼다.

1804년,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카를 프리드리히는 마리아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이었으며, 이 결혼은 에르네스틴 작센바이마르 왕조의 부상을 결정적으로 촉진했다. 또한 이 결혼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공국에 어느 정도의 보호를 제공했다. 처음에 프로이센 왕국의 동맹국이었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나폴레옹의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그의 퇴위를 피하기 위해 1806년 12월 15일 라인 연방에 가입했다.

1809년까지의 작센바이마르 및 작센아이제나흐 공작은 다음과 같다.

이름재위 기간비고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1세1741년 ~ 1748년1707년부터 작센바이마르 공작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2세1748년 ~ 1758년
카를 아우구스트1758년 ~ 1809년1775년까지 어머니인 안나 아말리아의 섭정 하에 통치


3. 2.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작 (1809년 ~ 1815년)

카를 아우구스트 (1809년 ~ 1815년)

3. 3.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1815년 ~ 1918년)


  • 카를 아우구스트 (1815년 ~ 1828년)
  • 카를 프리드리히 (1828년 ~ 1853년)
  • 카를 알렉산더 (1853년 ~ 1901년)
  • 빌헬름 에른스트 (1901년 ~ 1918년)

3. 4.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수장 (1918년 이후)

4. 정치와 행정

1816년 5월 5일 헌법(1850년 10월 15일 개정)에 따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은 남계 세습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1852년 선거법에 따르면, 란트타크는 3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21명은 총선에서 선출되었다. 1명의 의원은 토지를 소유했던 전 제국 기사들이, 4명은 다른 부유한 토지 소유주들이, 5명은 다른 출처에서 연간 소득이 1000탈러를 초과하는 유권자들이 선출했다. 후자의 유권자 집단은 일반적으로 "천 탈러 맨"이라고 불렸다. 1896년 4월 17일 선거법은 의회를 33명으로 확대했다. 대공국은 제국 연방 평의회에서 1표를 행사했고, 제국 의회에서 3명의 의원을 보유했다.[1]

1909년, 란트타크의 후일 의장인 알프레드 아펠리우스의 주도하에 보통 선거가 도입되었다. 대규모 토지 소유주와 "천 탈러 맨"은 추가 투표권을 유지했으며, 예나 대학교, 상공 회의소, 상업 회의소, 농업 회의소 및 노동 회의소를 대표하는 5명의 특별 의원이 의회에 추가되었다.[1]

이 지역의 최고 법원은 예나에 있는 항소 법원이었으며, 모든 튀링겐 지역의 항소를 처리했다. 바이마르와 아이제나흐에는 지방 법원이 있었다.

대공국은 1개의 보병 연대를 보유했으며, 1871년 이후에는 독일 제국군의 제11군단에 소속되었다.

5. 지리

(1840년 12월 1일)바이마르11,444아이제나흐9,377예나5,949노이슈타트 안 데어 오를라4,154아폴다4,128와이다3,756일메나우2,721알슈테트2,507오스트하임 포어 데어 론2,497슈타트렌크스펠트2,239파하2,239부트슈테트2,164크로이츠부르크2,103



| valign="top" |

도시인구
(1910년 12월 1일)
1840년 대비
변동
예나38,487+ 547%
아이제나흐38,362+ 309%
바이마르34,582+ 202%
아폴다22,610+ 448%
일메나우12,202+ 348%
와이다9,036+ 141%
노이슈타트 안 데어 오를라7,095+ 71%
알슈테트3,353+ 34%
부트슈테트2,843+ 32%
오스트하임 포어 데어 론2,277– 9%
파하2,2400 %
크로이츠부르크2,062– 2%
슈타트렌크스펠트1,593– 29%



|}

1910년, 루라 (바이마르 부분: 3917, 1533: +156%), 블랑켄하인 (3405, 1689: +102%), 바트 술차 (3052, 1422: +115%), 아우마 (2978, 1701, +75%), 트립티스 (2948, 1480: +99%), 티펜오르트 (2539, 1237: +105%), 바트 베르카 (2379, 1228: +94%), 오버바이마르 (2095, 621: +237%), 올디스레벤 (2064, 1332: +55%), 미흘라 (2008, 1294: +55%) 등도 인구 2,000명을 넘었다.

독일 제국 시대 영토는 서부의 구 작센-아이제나흐 공국, 중부의 구 작센-바이마르 공국, 동부의 노이슈타트 안 데어 올라|노이슈타트de와 다수의 월경지로 나뉘었다. 구 작센-바이마르 공국 지역에는 수도 바이마르예나 대학교가 있는 예나가 있었다. 구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의 중심지 아이제나흐J.S. 바흐의 출생지였다.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은 다른 튀링겐 제후국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작센-마이닝겐 공국,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 공국,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공국,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로이스-게라 후국)과 프로이센 왕국, 작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과 경계를 접했다.

6. 경제

바이마르아이제나흐는 주요 교통 중심지였으며, 많은 은행들이 이곳에 지점을 열었다. 1895년에는 대공국에 23개의 저축 은행 지점이 있었고, 약 의 예금을 관리했다.

대공국은 튀링겐 관세 동맹에 속해 있었지만, 오스트하임, 올디슬레벤, 알슈테트 등의 월경지는 예외였다.

6. 1. 농업

1900년까지 농업은 대공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였다. 대공국 영토의 총 56%가 농업에 사용되었으며, 주로 바이마르 및 노이슈타트 지역과 골데네 아우 지역의 알슈테트 및 올디슬레벤 월경지에서 이루어졌다.

1895년의 수확량은 다음과 같았다.

작물면적 (km2)수확량 (톤)
216km227,100
호밀295km233,300
보리276km241,900
귀리334km239,600
감자225km2232,200
건초574km2192,717
사료92km2152,400



과일은 주로 잘레 계곡, 예나와 뷔르겔 주변에서 재배되었다. 도른부르크와 캄부르크 사이의 예나 북쪽 지역에서는 포도 재배도 이루어졌다.

6. 2. 제조업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에는 다양한 제조업이 발달했다. 예를 들어, 뷔르겔과 일메나우에는 도자기 공장(전체적으로 39개의 공장이 있었다)이 있었다.[1]

일메나우와 예나에서는 유리가 생산되었다(특히 쇼트 공장).[1] 유리 산업은 산업용 유리(예: 일메나우 주변 지역의 온도계와 같은 측정 장치)와 예나 주변의 광학 제품을 전문으로 했다.[1] 1846년, 카를 차이스는 정밀 공학 및 광학 회사를 설립하여 빠르게 세계 선두 기업으로 성장했다.[1] 1889년, 에른스트 아베는 카를 차이스 재단(Carl-Zeiss-Stiftung)을 설립했으며, 이 재단은 카를 차이스 AG(Carl Zeiss AG)와 쇼트 AG(Schott AG)의 유일한 주주가 되었다.[1]

섬유 산업 또한 중요했다.[1] 이 산업은 아폴다 (대부분 양말 편물 공장)와 노이슈타트안데어오를라에 집중되었다.[1] 그 외 주요 섬유 공장은 베니겐예나, 아이제나흐, 바이더, 렘다 및 블랑켄하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1]

룰라는 금속 가공 산업의 중심지였다.[1] 이 나라 최초의 자동차 공장은 1895년 아이제나흐에 건설되었다.[1] 페인트 공장과 같은 화학 산업 또한 아이제나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1] 또한, 오버바이마르에는 제지 공장이, 일메나우에는 장난감 공장이 있었다.[1] 등나무 세공은 쿠펜뢰른 지역에서, 파이프는 가이서에서 제조되었다.[1] 1895년, 대공국에는 257개의 양조장이 있었으며, 이 중 가장 큰 곳은 아폴다와 일메나우에 있었다.[1]

6. 3. 광업

튀링겐 숲의 일메나우와 루라는 중요한 광업 중심지였다. 1900년경, 베라 계곡, 바하와 베르카/베라 주변에서 칼륨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크로이츠부르크와 바트 술차에는 염전이 있었다.

7. 교육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에는 주립 대학교인 예나 대학교가 하나 있었으며, 이 대학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와 다른 튀링겐 국가들이 함께 자금을 지원했다. 바이마르에는 여러 미술 학교와 음악 학교가 있었고, 일메나우에는 기술 및 과학 교육을 제공하는 사립 대학교인 일메나우 공과대학교가 있었다. 김나지움은 바이마르, 아이제나흐, 예나에 있었으며, 실과학교는 바이마르, 아폴다, 예나, 아이제나흐, 노이슈타트, 일메나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1895년에는 462개의 초등학교가 있었으며, 모든 어린이는 최소 4년간의 초등 교육을 받았다. 바이마르와 예나에는 각각 200,000권의 장서를 보유한 대형 도서관이 있었다. 1869년에는 바이마르에 주립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8. 종교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과 마찬가지로, 모든 튀링겐주에서 루터교가 가장 널리 퍼져 있었다. 1895년의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종교인구비율
개신교325,315명95.9%
가톨릭12,112명3.6%
유대교1,290명0.4%
기타/무교500명0.1%



아이제나흐 지역에서는 분포가 약간 달랐다.

종교인구비율
개신교85,319명89.6%
가톨릭8,809명9.3%
유대교979명1.0%
기타/무교119명0.1%



아이제나흐 지역의 가톨릭과 유대교 소수는 주로 뢰른(Rhön)에 거주했다. 가이(Geisa) 마을 주변 지역은 주로 가톨릭 신자였으며 풀다 교구에 속했다.

참조

[1] 뉴스 The new Electoral Act Berliner Tageblatt 1909-03-05
[2] 문서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는 영토가 있던 국가
[3] 문서 1863년 이후 안할트에 합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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