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식 폭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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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원식 폭행 사건은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학생들에게 폭행당한 사건이다. 정원식은 교육부 장관 재직 시절 전교조 불법화, 강경대 사망 사건 등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반감을 샀다. 한국외대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던 중 학생들의 시위와 공격을 받았고, 계란, 페인트 등을 맞고 집단 구타를 당했다. 이 사건은 언론 보도를 통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정부의 강경 대응과 학생들의 체포로 이어졌다. 사건 이후 학생운동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커졌으며, 교육자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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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강경대 치사 사건 이후 잇따른 분신 протеst로 조성된 분신정국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와 사회 문제에 대한 반발로 13명의 사망자를 내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으나, 문민정부 출범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 수감에 영향을 주었다.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설인종 고문 치사 사건
- 1991년 6월 -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는 30년 만에 지방 자치 부활의 첫걸음으로 기초의원 및 광역의원 선거로 나뉘어 실시되었으며, 광역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압승, 낮은 투표율, 야권 분열 등의 결과를 낳았다. - 1991년 6월 - 1991년 지중해 게임
1991년 지중해 게임은 그리스에서 18개국이 참가하여 골프, 농구, 축구 등 23개 종목에서 경기를 치른 제10회 대회로, 이탈리아가 금메달 67개, 총 168개로 메달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정원식 폭행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정원식 총리 폭행 사건 |
발생일 | 1991년 6월 3일 |
발생 장소 | 한국외국어대학교 |
관련 인물 | 정원식 강기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
사건 배경 | |
원인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반발 분신정국 |
당시 상황 | 정원식 국무총리,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연 중 |
사건 내용 | |
주요 내용 | 계란, 밀가루, 페인트 등 투척 총리 차량 파손 사자후 사건 연루 학생들의 석방 요구 |
사건 결과 | |
처벌 | 관련 학생들 구속 및 처벌 |
사회적 영향 | 공안 정국 심화, 사회 갈등 심화 |
관련 사건 | |
관련 사건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
2. 사건 전
2. 1. 원인
1991년 5월 24일 정원식이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되기 두 달 전,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전투경찰에게 맞아 숨졌고, 이후 일주일에 한 명 꼴로 각 대학 학생들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 매주 토요일에는 정권 타도를 위한 시위가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열렸고, 성균관대 4학년 김귀정이 시위 도중 사망하면서 학생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1]전교조 불법화에 반대한 대학생들의 집단 시위와 강경대 사건, 연쇄 분신사건, 김귀정 사망 사건은 교육부 장관인 정원식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고조시켰다.[1]
2. 2. 배경
1991년 5월 24일 정원식은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3] 그는 그해 3월 14일 문교부 장관을 퇴직한 이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동덕여자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시간강사로 활동하다가 5월 24일에 국무총리 서리로 내정되었다.[3]정원식은 문교부 장관 재직 중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오종렬 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다.[2] 또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징계, 유급, 퇴학 조치했다가 이후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했다. 이러한 조치와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김귀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2]은 학생운동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학생운동가들은 정원식 퇴진 시위와 정원식 화형식 등을 집행하며 분노를 표출했다.[2]
6월 취임을 앞두고 학생 운동가들은 정원식 공격을 계획했으나, 관련 소문이 사전에 유포되었다.[3] 정원식에게도 테러를 우려한 주변의 건의가 있었으나, 그는 수행원 없이 단출하게 강의를 하러 갔다.[3]
3. 경과
1991년 5월 24일 정원식은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으나, 덕성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등에 강사로 출강하였다.[4][5][6] 6월 3일 오후 6시 30분경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던 도중, 교내 방송을 통해 정원식을 규탄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4][5][6]
이날 외대 학생회는 미리 준비한 전문을 들고 교내방송국을 장악, "학우 여러분, 전교조 선생님들을 학살한 정원식이 지금 우리 학교에 와있습니다"라고 알렸다. 이어 이한열 사망 사건, 강경대 사망 사건, 학생들 분신 사건, 김귀정 압사 사건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다가 정원식을 규탄하는 구호를 계속 외쳤다.
당황한 정원식은 강의를 50분으로 단축해 서둘러 끝내고 교수실로 향했다. 강의실 복도와 계단에 있던 200~300여 명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운동권 학생들은 "외대의 수치다, 정원식을 몰아내자"고 외치며 날계란, 찐계란, 자갈돌, 밀가루, 모래, 검은색 페인트를 투척했다. 학생들은 "참교육 죽이더니 김귀정을 또 죽였다", "강경대를 살려내라", "분단의 원흉 정원식은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쳤다. 운동장에서는 정원식과 장면의 마네킹과 사진이 쇠파이프와 돌, 오재미로 난타당한 뒤 화형식에 처해졌다. 이들은 정원식이 '대통령 특사로 외국을 돌아다니며 남한의 유엔 단독가입을 구걸하러 돌아다닌 분단고착화의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강의를 마친 정원식은 분노한 학생들과 마주쳐 교수실로 피신했다.[1] 학생들은 교수실과 학교 밖에서 정원식이 문교부 장관 재직 당시 전교조 교사 1천여 명을 해고한 것과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한 점, 그리고 대통령 특사로서 남한의 UN 단독 가입을 추진한 것을 비판하며 농성을 벌였다. 정원식은 농성 중인 학생들을 향해 "전교조 문제에 대한 내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외쳤다.
이후 운동권 학생들은 정원식의 멱살을 잡고 팔을 비틀어 강제로 끌어냈고, 418호 강의실 앞에서 넘어뜨린 뒤 집단 구타했다. 정원식을 수행하던 수행원과 조교들도 학생들에게 폭행당했다. 학생들은 '전교조 선생님과 강경대, 김귀정이를 죽인 살인마', '강경대 살려내라', '전교조 선생님들을 살려내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원식에게 계란, 페인트, 밀가루를 던졌다. 유리 조각, 소주병, 맥주병, 자갈돌, 인분 등도 투척되었다.
정원식은 계란, 밀가루, 페인트, 모래 등으로 범벅이 되었고, 학생 50~60여 명은 정원식을 외대 대학원 건물 1층으로 끌고 가면서 폭행했다. 운동장에서 집단 구타를 한 뒤, 학생들은 계란 200여 개, 밀가루, 페인트, 소주병, 맥주병, 자갈돌 등을 던졌다. 정원식은 수행원들과 일부 비운동권 학생, 조교들의 도움으로 스티로폼 아이스박스 덮개로 얼굴을 가린 채 겨우 외대 교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정원식은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받은 뒤 학교를 빠져나갔지만,[1] 소주병, 맥주병, 인분 등이 투척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학생들은 정원식에게 계란, 페인트, 밀가루, 자갈돌, 오재미, 소주병, 맥주병, 인분 등을 던졌다. 정원식은 얼굴과 온몸에 깨진 달걀, 밀가루,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밀가루 범벅이 된 채 교문을 나섰다. 이 모습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정원식은 '전교조 문제에 관한 한 나의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91년 6월 4일자 기사와 6월 5일자 기사 헤드라인에 계란과 페인트, 밀가루로 뒤범벅이 된 정원식의 사진을 대문으로 내보냈다.[1]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구타와 폭행, 유리조각과 콩주머니, 인분, 술병 관련 내용까지 길고 상세하게 서술했고 이는 대내외에 이슈가 되었다.[1]
정원식 총리 한 사람이 외대 학생들에게 당한 봉변의 반작용은 크게 그리고 빠르게 나타났다.[1] 그러나 정작 당시 언론에 의해 '피해당한 스승'이었던 정원식 총리의 입에서 학생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싶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1]
피해 당사자인 정원식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일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당시 행동은 물론 과거 시위 등에 대한 모든 일들을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극적으로 전체 사회의 여론으로 발전한 것이다.[1] 유교이데올로기가 잔존했던 사회 분위기를 이용, 당시 보수 세력은 스승이 집단으로 폭행, 투석, 구타를 당했다는 사실과 유리병과 소주병, 맥주병, 인분에 대한 것을 크게 언급하며 공론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정원식은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였다.
3. 1. 사건 직전
1991년 5월 24일 정원식은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으나, 덕성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등에 강사로 출강하였다.[4][5][6] 6월 3일 오후 6시 30분경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던 도중, 교내 방송을 통해 정원식을 규탄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4][5][6]이날 외대 학생회는 미리 준비한 전문을 들고 교내방송국을 장악, "학우 여러분, 전교조 선생님들을 학살한 정원식이 지금 우리 학교에 와있습니다"라고 알렸다. 이어 이한열, 강경대 사건, 학생들 분신 사건, 김귀정 압사 사건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다가 정원식을 규탄하는 구호를 계속 외쳤다.
당황한 정원식은 강의를 50분으로 단축해 서둘러 끝내고 교수실로 향했다. 강의실 복도와 계단에 있던 200~300여 명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운동권 학생들은 "외대의 수치다, 정원식을 몰아내자"고 외치며 날계란, 찐계란, 자갈돌, 밀가루, 모래, 검은색 페인트를 투척했다. 학생들은 "참교육 죽이더니 김귀정을 또 죽였다", "강경대를 살려내라", "분단의 원흉 정원식은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쳤다. 운동장에서는 정원식과 장면의 마네킹과 사진이 쇠파이프와 돌, 오재미로 난타당한 뒤 화형식에 처해졌다. 이들은 정원식이 '대통령 특사로 외국을 돌아다니며 남한의 유엔 단독가입을 구걸하러 돌아다닌 분단고착화의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3. 2. 구타 사태
강의를 마친 정원식은 분노한 학생들과 마주쳐 교수실로 피신했다.[1] 학생들은 교수실과 학교 밖에서 정원식이 문교부 장관 재직 당시 전교조 교사 1천여 명을 해고한 것과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한 점, 그리고 대통령 특사로서 남한의 UN 단독 가입을 추진한 것을 비판하며 농성을 벌였다. 정원식은 농성 중인 학생들을 향해 "전교조 문제에 대한 내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외쳤다.이후 운동권 학생들은 정원식의 멱살을 잡고 팔을 비틀어 강제로 끌어냈고, 418호 강의실 앞에서 넘어뜨린 뒤 집단 구타했다. 정원식을 수행하던 수행원과 조교들도 학생들에게 폭행당했다. 학생들은 '전교조 선생님과 강경대, 김귀정이를 죽인 살인마', '강경대 살려내라', '전교조 선생님들을 살려내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원식에게 계란, 페인트, 밀가루를 던졌다. 유리 조각, 소주병, 맥주병, 자갈돌, 인분 등도 투척되었다.
정원식은 계란, 밀가루, 페인트, 모래 등으로 범벅이 되었고, 학생 50~60여 명은 정원식을 외대 대학원 건물 1층으로 끌고 가면서 폭행했다. 운동장에서 집단 구타를 한 뒤, 학생들은 계란 200여 개, 밀가루, 페인트, 소주병, 맥주병, 자갈돌 등을 던졌다. 정원식은 수행원들과 일부 비운동권 학생, 조교들의 도움으로 스티로폼 아이스박스 덮개로 얼굴을 가린 채 겨우 외대 교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정원식은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받은 뒤 학교를 빠져나갔지만,[1] 소주병, 맥주병, 인분 등이 투척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학생들은 정원식에게 계란, 페인트, 밀가루, 자갈돌, 오재미, 소주병, 맥주병, 인분 등을 던졌다. 정원식은 얼굴과 온몸에 깨진 달걀, 밀가루,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밀가루 범벅이 된 채 교문을 나섰다. 이 모습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정원식은 '전교조 문제에 관한 한 나의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3. 3. 언론의 보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91년 6월 4일자 기사와 6월 5일자 기사 헤드라인에 계란과 페인트, 밀가루로 뒤범벅이 된 정원식의 사진을 대문으로 내보냈다.[1]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구타와 폭행, 유리조각과 콩주머니, 인분, 술병 관련 내용까지 길고 상세하게 서술했고 이는 대내외에 이슈가 되었다.[1]정원식 총리 한 사람이 외대 학생들에게 당한 봉변의 반작용은 크게 그리고 빠르게 나타났다.[1] 그러나 정작 당시 언론에 의해 '피해당한 스승'이었던 정원식 총리의 입에서 학생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싶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1]
피해 당사자인 정원식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일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당시 행동은 물론 과거 시위 등에 대한 모든 일들을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극적으로 전체 사회의 여론으로 발전한 것이다.[1] 유교이데올로기가 잔존했던 사회 분위기를 이용, 당시 보수 세력은 스승이 집단으로 폭행, 투석, 구타를 당했다는 사실과 유리병과 소주병, 맥주병, 인분에 대한 것을 크게 언급하며 공론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정원식은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였다.
4. 정부의 대응
6월 4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사건에 대한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특별 대책을 주문했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에게서 정원식의 계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접한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바로 관계자를 소집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각부 장관과 경찰, 검찰, 문교부 인사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사회적 윤리와 도덕성, 인성을 회복하고 학원가에 만연한 그릇된 풍토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라고 지시했다.
6월 4일 오후 국무총리실 대접견실에서 최각규 부총리 주재로 국무위원 특별 간담회를 개최하고, 최각규 부총리는 "정원식 총리서리 폭행 사건은 단순한 학원폭력이 아니라 국가와 정부, 인륜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 관련 부처별로 장, 단기 대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당초 노태우 정부는 경찰 수사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으나 보수단체들의 시위로 검찰수사로 사건을 확대했다.
6월 4일 오전 정구영 검찰총장은 오전 기자간담회에서 "검찰의 명예를 걸고 체제 수호 차원에서 강력하게 대처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6월 5일 아침 정구영 검찰총장은 특별 기자회견을 통해 '6월 3일 외국어대 학생들의 정원식 총리서리 집단 폭행 사건은 국가 공권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폭행 주동자 및 가담자들을 가려내 엄단할 것을 서울지검에 긴급 지시했다.
검찰과 경찰의 합동 수사본부가 조직되고 6월 5일 오전 한국외국어대학교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시작, 교내 주변을 탐문수사하여 정원식 규탄시위에 참여한 학생 310명을 체포, 바로 연행하였다. 이 중 핵심 주동자 64명을 철야조사하였다. 사건 직후 전투경찰이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배치되었다.
5. 사태 종료 후
5. 1. 여파
사건 직후 종적을 감춘 한국외국어대학교 총학생회 회장 정원택(鄭原宅, 외대 경제학과 4학년) 등 5명이 수배되었고, 한국외대 당국은 이들을 제적 처리했다. 6월 6일부터 이들 중 최후의 2인인 정원택과 김경하가 체포되기 전까지 서울특별시내에는 특별 검문검속이 계속되었다. 도피 중이던 5명 중 1명은 6월 7일 자수했고, 다른 2명은 불심검문에 의해 검거되었으며, 총학생회장 정원택, 부총학생회장 김경하는 11월 2일 서울 청량리동에서 검거되었다.9월 초에는 경희대학교에 은신해 있다는 제보를 받은 경찰이 교내에 진입하여 한의대와 법대 건물을 수색하던 중 운동권 학생들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9월 5일에는 사복경찰관들이 비밀리에 수사하던 중 경희대 내 운동권 학생들에게 들켜, 이에 반발한 운동권 학생 50여 명이 근처 청량리경찰서 관내 파출소를 습격, 화염병을 던지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 늘어나자 당시 근무자 5명은 파출소 셔터를 내린 뒤 건물 3층에서 M16 소총 10발과 38구경 권총 12발 등 22발의 공포탄과 최루가스를 던져 학생 시위대를 겨우 해산시켰다.
11월 2일 외대 교내 축제인 시월제에 참석했다가 비밀리에 피신하던 정원택과 김경하는 신이문파출소의 불심검문에 검거되어 청량리경찰서로 인계되었다. 이들은 12월 법원에 송치되어 재판받게 된다.
5. 2. 결과
1991년 12월 17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형사합의 1부 심리에서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특수부(검사 박태규)는 폭력행위 가중처벌법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를 적용, 정원택에게는 징역 7년, 부학회장 김경하는 징역 5년, 조진한(23, 외대 불어불문학과 3학년) 등에게는 징역 3년을, 기타 학생들에게는 집행유예와 훈방조치를 내렸다.[7] 그 뒤 항소심에서 12월 30일 서울지법 북부지원 합의 1부(재판장 강병섭 부장판사)는 최종선고공판에서 정원택 등에게는 징역 3년 6개월, 백경선 등 3명에게는 징역 2년 6개월~2년 등, 다른 7명은 집행유예가 선고되어 석방되고, 나머지에게는 훈방조치 등의 판결을 내렸다.[1]정원식 교수가 계란을 맞은 사건은 '군사부일체' 논리가 터져 나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몰고 왔다.[7]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군사정권의 영향과 유교적 권위주의, 성리학적인 가치관이 일부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당사자들이 구속되고 외대생 수십명이 연행되었으며 이들은 스승도 모르는 패륜아로 몰리면서 전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었다. 대통령 노태우는 학생들 처벌을 주문하였으나 정원식은 선처를 호소한다며 '학생들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소감을 밝히는 것으로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계란 투척을 주도한 사람들은 학교당국으로부터 제적 등의 징계를, 공안당국으로부터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라는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이 군사 독재정권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잔존하고 있었다. 군사부일체 라는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이 잔존하던 사회에서 대학 교수와 학교 교사(=제2의 부모)라는 사고가 한국 사회 저변에 만연하였으므로 하나의 충격을 주었다. 언론에서는 학생들을 '반인륜적 패륜아'로 규탄했고, 곧 유림단체의 학생운동가 규탄 성명서와 사회 원로들의 지탄 칼럼이 나돌았다. 이 사건으로 학생운동가들의 도덕성은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정원식 계란 투척 사건이 외신에 보도되면서 국내외에 한국의 학생운동권에 대한 외신 여론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일부 반한 단체나 반한 인사들의 대한민국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과, 한국 공격의 소재의 하나로 활용되기도 했다. 2006년 12월 14일 그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투척했던 당시 한국외국어대 학생들은 명예회복 조치 되었다.[8] 뒤에 정원식에게 계란투척을 한 부산대학교 학생이 민주화 운동가로 보상을 받아 또한차례 논란의 여지를 불러오기도 했다.
5. 3. 영향
정원식 사건은 학생운동권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과 악영향을 초래하였다.[1] 보수 세력은 학생운동권이 마르크스와 레닌, 스탈린의 폭력성을 갖추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밸리즘적인 사상까지 갖춘 비인간적이고 패륜적인 집단이라고 비판하였다.이 사건으로 군사정권 퇴진, 노태우 살인독재 퇴진 구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1] 계란 투척을 주도한 사람들은 학교에서 제적 등의 징계를 받았고, 공안당국으로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1] 그 이후 정국의 상황은 급반전되었고,[1] 동시에 공안정국이 조성되기도 했다.[9]
거의 매주 토요일 서울시내가 아수라장이 되던 시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2주 뒤 치러졌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집권 민자당이 전라남도, 전라북도, 광주직할시 등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리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다.[1] 또한 학생운동권들을 숨겨주거나 함께 시위에 참여하던 시민들의 시선 역시 냉소적으로 변하였다.
1987년의 6월 항쟁과 1987년 11월의 제도권 정치 편입 이후 그 열기를 이어가려던 학생운동권에게 부미방 사건 당시 유언비어 날조 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이어 또 하나의 치명타로 작용했다. 이후 1998년 IMF를 기점으로 각 대학 내 학생운동권이 몰락하는데, 이 사건을 학생운동권 몰락의 시발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6. 의미
이 사건과 전교조 등 관련 사건에 대한 사회적인 토론이 맞물리면서 교육자도 일종의 노동자라는 견해와, 교수나 교사를 부모나 임금과 동격으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대학 교수나, 학교 교사도 하나의 전문 직업인으로 보자는 의견이 한국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참조
[1]
오마이뉴스
91년 정원식 전 총리와 05년 이건희는 달라야 한다
http://www.ohmynews.[...]
2005-05-04
[2]
문서
[3]
문서
[4]
뉴스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5]
뉴스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6]
경향닷컴
경향닷컴 | Kyunghyang.com
http://news.khan.co.[...]
[7]
서적
환경주의자들:시사인물사전 12
인물과사상사
[8]
뉴스
"[민주화 명예회복 4874명]명예회복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 무엇이 있나"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6-12-14
[9]
동아일보
"[인터뷰]前전대협의장 바이어블코리아 이철상사장"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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