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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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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한론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 만주,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외교적 마찰과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정한론이 대두되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무력 침공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후 일본의 대만 출병과 강화도 조약 체결, 사족 반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 영향을 미쳤다. 정한론은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학계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의도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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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

2. 역사적 배경

정한론은 처음에는 정조론(征朝論)이라 불렸으나, '朝(조)'가 일본 왕을 뜻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어 정한론으로 바뀌었다.[9] 이는 신공 황후의 '삼한 정벌'에서 이미지를 따온 것이다. 안세이 5개국 조약의 칙허를 요청할 때, 마나베 아키카츠는 "13, 4년 후에는 해외 여러 오랑캐를 이쪽 손 안에 넣고, 삼한을 장악했던 옛날로 돌아가는" 상황을 실현할 수 있다고 조정을 설득했다고 전해진다.[10]

2. 1. 막말(幕末)의 정한론

에도 시대 후기부터 고쿠가쿠(國學)나 미토학(水戶學)의 일부, 그리고 요시다 쇼인 등이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내용을 주장하며 정한론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다.[12] 이들은 『고지키』(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근거로 조선 진출을 주장했으며, 이는 존왕양이 운동의 정치적 주장에 포함되었다.[12]

요시다 쇼인은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취득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정복하고, 교역으로 러시아에 잃는 것은 다시 토지로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하시모토 사내는 일본의 독립 유지를 위해 "산단, 만주 일대, 조선을 병합하고, 또한 아메리카 주 또는 인도 내에 영토를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라던 대로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2] 가쓰 가이슈는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과 연합하여 해군을 강화하고 학술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선 조선과 연합하고 후에 지나(중국)로 나아가야 한다는 아시아 연합론을 펼쳤다.

쓰시마 번에서도 조선에 대해 신의를 가지고 설득하고, 조선이 응하지 않으면 무력 행사를 한다는 조선 진출론이 주장되었다. 오시마 도모노스케는 조선에 "은덕"을 먼저 베풀고, 만약 덕화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때 혁연 징벌하는 용단"에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 2. 메이지 유신과 정한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여러 문제의 해결책 및 국가 발전 방법으로 정한론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9]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 정부 수뇌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책을 주장했다. 이는 에도 시대 후기부터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주장과 존왕양이 운동의 정치적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12]

메이지 유신과 1868년 쇼군(幕府)의 전복 이후 새롭게 형성된 메이지 정부는 일본을 중앙 집권화하고 근대화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외국 세력 배척보다는 막부 말기 조약 준수 및 개정을 통해 국가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외교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는 막부가 담당했던 대외 관계를 인수하기 위해 외교부를 설립했다.

오우에츠 열번 동맹(Ōuetsu Reppan Dōmei)의 저항과 에노모토 다케아키에조 공화국 설립은 메이지 정부에 정치적 곤경을 안겨주었지만, 이 사건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 남서부 번은 메이지 정권의 중추였지만, 번의 원로들은 지역적 이익을 중시하여 중앙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1869년 1월, 4개 남서부 번은 번의 호적을 제국 정부에 반환하는 청원을 제출했고, 같은 해 7월 25일 궁정이 이를 수락하면서 거의 300개에 달하는 번이 유사한 요청을 제출했다. 1871년 8월에는 번이 완전히 폐지되고 현으로 대체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한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삼한 정벌이나 조선 정벌 또는 정한론에 자극받은 것이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독립시켜 놓아야 한다. 그것은 일본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었다"라고 청일 전쟁 이후 대러시아 강경 노선에 동조한 경위를 말했다.[11]

요시다 쇼인은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취득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정복하고, 교역으로 러시아에 잃는 것은 다시 토지로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시모토 사내는 일본의 독립 유지를 위해 "산단, 만주 일대, 조선을 병합하고, 또한 아메리카 주 또는 인도 내에 영토를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라던 대로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일본은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에 신정부 발족을 통고하고 국교를 원했지만, 조선 측은 일본의 외교 문서 형식이 에도 시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했다.[13] 1870년 2월, 메이지 정부는 사다 하쿠보쿠, 모리야마 시게루를 파견했지만, 사다는 조선의 상황에 분개하여 귀국 후 정한을 건백했다.[14]

3. 초기의 정한론 (1870년대)

초기의 정한론은 일본부국강병론적 군국주의자들에게서 등장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쓰시마섬을 통해 조선에 신정부 수립을 통고하고 개국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이를 거부하면서 정한론이 대두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고종 7년)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는 조선을 방문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강경하고 구체적인 정한론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였다.

이후 정한론은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3. 1. 조선의 국서 거부와 외교적 마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신정부는 왕정복고를 알리고 개국을 요구하는 국교 교섭을 조선에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쇄국정책과 척왜정책을 고수하던 조선 정부는 일본 측 외교문서가 이전과 다르고 고종을 격하시키는 등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며 문서 수정을 요구하고 사신 접견을 거부했다.[13] 이러한 조선의 국서 거부와 외교적 마찰은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0년 사다 하쿠보는 조선을 방문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강경하고 구체적인 정한론 건백서를 제출했다.[14] 1872년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수개월간 체류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였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며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했다. 1873년 8월,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 같은 해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정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반대하여 10월에 파견이 중지되었다.

3. 2.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1872년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다.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수개월간 체류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15] 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였다.[16]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며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하였다.[5] 1873년 8월,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18]

3. 3.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반대와 정한론 중지

1872년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수개월간 체류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15] 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했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고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했다.[16] 1873년 8월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18] 같은 해 9월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반대하여, 10월에 파견 중지가 결정되었다.[5]

3. 4. 메이지 6년 정변

정한 토론 그림


1873년 8월, 메이지 정부사이고 다카모리한국에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 같은 해 9월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한국에 갔던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10월에 파견이 중지되었다.[17]

사이고 다카모리는 즉시 출병에는 동의하지 않고, 스스로 사절이 되려고 하였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오쿠마 시게노부, 오키 다카토 등이 찬성하여 일단 내정되었지만, 정식 결정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을 기다리기로 했다. 사절단 귀국 후에도 견사 문제는 연기되어, 오쿠보 도시미치와 소에지마 타네오미의 참의 취임을 기다려 찬반 양론이 격돌했다.[17]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기토 등은 견사에 반대하고, 병으로 쓰러진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를 대신하여 각의를 주도한 태정대신 대행 이와쿠라의 요청을 천황이 칙재하는 형식을 취하여, 10월 24일 각의 결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1873년(메이지 6년) 부산 주재 일본 외무성 7등 출신인 히로츠 히로노부가 외무 소보인 우에노 가게노리에게 보낸 5월 31일자 보고서가 계기가 되어, 각의에서 조선 문제가 다뤄졌다. 이 각의에는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와 참의인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오쿠마 시게노부, 오키 다카토,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가 참석했다.

이타가키는 거류민 보호를 위해 일단의 병력을 보내고, 그 후에 사절을 파견하여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이고는 이에 반대하여, 우선 책임 있는 전권 대사를 파견하여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조는 사절은 군함에 탑승하고 호위병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이고는 그것에도 반대하여, 에보시 히타타레의 정장으로 비무장의 사절을 파견할 것을 주장했다.[18]

이타가키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사이고의 제안에 찬성했으며,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등도 찬성하여, 사이고는 스스로 그 사절을 맡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이날은 결정에 이르지 못했다.

그 후, 청나라에 출장했던 외무경인 소에지마 타네오미가 귀국하자, 사이고는 이타가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절 취임에 대한 강한 마음을 전하고, 산조에게도 각의 개최를 요구했다. 8월 상순에는 사이고와 마찬가지로 조선 사절에 지원했던 소에지마를 방문하여 자신의 사절 취임 실현을 위한 협력을 요구하고, 그 동의를 얻었다.

8월 17일, 각의에서 사이고의 조선 파견(遣使)이 내결되었지만, 이와쿠라 귀국 후에 재토의하는 것도 결정되었고,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 그러나, 사이고의 사절 파견은 사이고 자신도 실패를 예상한 후에 개전을 기한 주장이었으며, 협상 불성공의 경우에는 정부는 공식적으로 개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때문에, 견구(遣歐) 사절단의 이와쿠라·기도·오쿠보는 내치 우선론의 입장에서 이에 반대했고, 산조나 참의 오키 등도 그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다.

10월 14일, 조선 문제에 관한 각의가 개최되어, 사이고는 즉시 조선 파견(遣使)을 주장했고, 오쿠보이와쿠라와 대립했다. 이날은 결정에 이르지 못하고, 10월 15일에 다시 각의가 개최되어, 참의 각자에게 의견을 진술하게 하고, 참의를 물러가게 한 후에 산조·이와쿠라 사이에서 협의가 이루어졌다. 사이고의 압력과 그에 따른 군의 폭발을 두려워한 산조는 태정대신으로서의 자신의 권한으로 사이고의 즉시 파견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이와쿠라·오쿠보 등이 사표를 제출했고, 수습에 곤란을 겪은 산조는 병으로 쓰러졌다. 10월 19일, 이와쿠라가 태정대신 대리가 되어, 10월 23일에 산조의 재가에 의한 즉시 파견이냐, 이와쿠라 자신의 생각인 견사 연기냐는 두 가지 의견을 상소했다. 이를 받아 10월 24일에 천황은 견사를 연기한다는 재가를 내렸다.

정한론이 중지되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소에지마 타네오미,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등이 일제히 하야하였다. 이를 메이지 6년 정변이라 한다. 하야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쓰마 번 무사들은 사족 반란을 일으켰고, 1874년사가의 난부터 1877년세이난 전쟁까지 반정부 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신정부군에 의해 참패했고, 사이고는 패전 도중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과거 사이고 부하, 당시 신정부군)의 칼에 베이고 자결하였다.

4. 1880년대의 정한론

1880년대의 정한론은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등장했다. 1880년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자유주의자들은 군국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조선의 개혁을 일본이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견해를 펼쳤으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의 멸망을 바라는 시각으로 변모하였다.[21]

4. 1. 후쿠자와 유키치의 입장 변화

1880년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자유주의자들은 군국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조선의 개혁을 일본이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견해를 펼쳤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의 멸망을 바라는 시각으로 변모하였다.[21]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이 선도자가 되어 조선, 중국, 베트남의 개혁과 계몽을 이끌어야 한다는 이상론에 따라 조선의 춘향전, 별주부전, 흥부전 등의 작품들을 자신의 지지신보와 다른 잡지 등을 통해 일본에 적극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이 주변국의 개화와 개혁을 지원해야 함을 역설하며, "조선국은(…) 미개하므로 이를 유인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 인민 정말로 완고하고 고리타분하므로 이를 깨우치고(…) 끝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 진보를 도와야 한다."(1882.3)라고 주장하였다.[22]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정변 관련자와 그 일가족에 대한 연좌제, 혹형 등을 시행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은 크게 분노하여 조선의 멸망을 기원하였다. 그는 갑신정변이 터지자 잠수함에 일본 민병대라도 지원하자고 일본 조정에 건의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의 개혁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 그는, 갑신정변 직후 일부 개화파 인사들이 가혹한 형벌을 받고 가족들은 연좌제로 처단당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에 대한 기대감은 경멸과 증오로 변모하였다.

갑신정변 관련자들의 처형과 도피 직후 그는 조선독립당의 처형(朝鮮独立党の処刑)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규탄하였다. 1885년 3월 16일에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하였다. 이어 1885년 8월에는 지지신보의 사설을 통해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며 조선 정부를 규탄하였다. 그는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며 어떤 나라가 조선을 점령하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든 당시의 조선왕국은 멸망하는 것만이 조선 백성들을 속박에서 풀어줄 수 있는 지름길로 내다봤다.

결국 후쿠자와 유키치는 부패하고 견고한 조선 체제의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조선 인민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23]'이라고 냉소하게 된다.

4. 2. 탈아론(脱亜論)

1885년 3월 16일,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사신보(時事新報)에 '탈아론(脱亜論)'을 발표하였다.[22] 이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관련자들과 그 가족들이 연좌제로 처벌받는 것을 보면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에 대한 기대를 접고 경멸과 증오를 품게 되었다.[22] 그는 시사신보의 사설을 통해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고 언급하며,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고 주장했다.[22]

이러한 인식은 후쿠자와 유키치조선 체제의 부패와 견고함 때문에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조선 인민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23]이라고 냉소하게 만들었다.

4. 3. 오사카 사건

1885년김옥균의 처소를 자주 출입하던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이 오사카에서 "조선 토벌을 위해 무장 집단을 파견하자"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24] 이들의 조선 정벌 주장은 일본 사회에 화제가 되었고, 이는 곧 정한론으로 발전하였다.

이 일은 일본의 대륙 침략 세력의 선봉대가 기도한 음모로 김옥균은 전혀 알 리가 없었지만, '오사카 사건'은 김옥균을 배척하려는 무리들의 악의에 찬 선전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24] 곧 "김옥균이 일본인 장사대(壯士隊)를 이끌고 조선에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일본은 물론 청나라 조정에까지 전해져, 청나라의 리훙장은 김옥균 일행을 단단히 구속해두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에게 일본에서 떠날 것을 은근히 종용했다.[24]

4. 4. 김옥균 암살 이후

김옥균의 부관참시는 프랑스인, 일본인, 미국인 등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외국으로 보도되었다. 이같은 조선 정부의 조처에 일본 지식인층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25]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인들은 반문명적인 야만인들이며 이와 같은 조선인들의 비인도적인 테러 행위, 생명 경시 현상을 방치해야 되는가 하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바로 조선인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규탄하였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도회 또는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가졌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1894년 4월 21일에는 간다니시키정(神田錦町)의 금휘관(錦輝館)에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가 열렸고,[25] 여기서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대대적으로 성토하였다. 4월 23일에는 일본 정계의 유력자 1백여 명이 모여서 '대외경파간친회'라는 모임이 아사쿠사(淺草)에 있는 혼간지(本願寺)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성황이었다고 한다.[25]

아오야마의 외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 묘와 비석에는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李埈鎔)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 그 비문을 돌에 직접 조각한 이는 유길준이었다.[26]

5. 정한론의 영향

정한론은 비록 즉각적인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후 일본의 대외 정책, 특히 조선에 대한 정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정부는 정한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이는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1874년 대만 출병과 1875년 강화도 사건을 거쳐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정한론이 외교적, 군사적 압력으로 변형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국내적으로 정한론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의 갈등을 드러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정한론 지지 세력은 사족 반란을 일으켰고,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자유민권 운동을 통해 정부에 맞섰다.

5. 1. 대만 출병과 강화도 조약

메이지 정부는 정한론이 좌절된 이후에도 조선에 대한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강화했다.

1874년에는 미야코지마 섬 주민 조난 사건을 계기로 첫 해외 출병인 대만 출병을 실시했다.[15] 기도 다카요시는 정한론에는 반대했지만, 대만 출병은 정한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사임했다.[15]

1875년에는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여 무력 충돌을 일으킨 강화도 사건이 발생했다.[16] 이 사건의 결과로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다.

5. 2. 사족 반란과 자유민권 운동

메이지 유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일부 세력은 한국메이지 천황일본 제국의 국가 원수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 사절단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정한론을 주장했다.[5] 이들은 한국 문제를 사무라이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기회로 보았다.[5] 사이고는 특사로 한국에 가서 징벌 원정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설이 있지만,[5]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지지를 얻기 위한 시도였다는 반론도 있다.[6]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을 통해 서구 열강의 힘을 실감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내정 개혁을 우선시하며 정한론에 반대했다. 오쿠보는 일본이 근대화 단계에 있고, 침략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고 주장했다.[7] 결국 이와쿠라가 천황에게 사이고 파견 결정을 번복하게 하여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정한론에 대한 입장 차이로 사이고와 이타가키 등은 정부 직에서 사임했다. 사이고는 가고시마로 돌아갔고, 이후 1874년 사가의 난1877년 세이난 전쟁불평 사족의 반란이 일어났다.[5] 한편, 이타가키는 애국 공당을 통해 자유민권 운동을 전개하며 법적 수단을 통해 정부에 맞섰다.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등을 물러나게 했지만, 정한론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사이고 파견은 "연기"되었을 뿐이며, 이후 대만 출병(1874년)과 강화도 사건(1875년)을 거쳐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는 등 정한론은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6. 평가 및 논란

정한론과 메이지 6년의 정변에 관해서는 당시부터 다양한 논의와 억측이 있어왔다.[2] 청일 전쟁·러일 전쟁 후에는 정한론자로서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대륙 경영의 선구자로 칭송되었고, 내치 우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개명성이 강조되었다.[2] 전후에는 오쿠보 등도 조선 침략의 방향성에서는 정한파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는 지적이 이루어지고 있다.[2]

1907년 케무야마 센타로는 저서 『정한론 실상(征韓論実相)』에서 "정한론"이라는 명칭에 어폐가 있다고 지적했다.[13] 사이고가 가까운 미래에 정한을 염두에 두고 조선 사절을 지원했다는 의견과, 조선의 개국 및 수호 관계 실현을 평화적 교섭을 통해 스스로 이루려고 했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1970년대 후반, 모리 토시히코는 사이고가 정한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는 근대사 연구의 큰 쟁점이 되었다. 이후 연구가 활성화되어 2000년경에는 모리설의 옳고 그름이 정한 논쟁 연구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2]

이에치카 요시키는 2018년 저서에서 "죽을 장소를 찾아 정한론을 제창했다고 평가가 학계에서 차츰 지배적이 되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6. 1.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문제

많은 일본 교과서에서 정한론을 자유민권운동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후소샤에서 발행한 교과서에서는 정한론의 배경으로 조선 정부의 무례함을 들고 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를 무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어 사이고 다카모리와 정한론을 미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5]

6. 2. 학계의 연구 동향

사이고가 정한론의 중심 인물이었고, 즉시 조선 출병에 반대하며 평화적인 조선 사절로서 자신이 조선에 가겠다고 주장했다는 인식은 일반적으로 의심받지 않았다.[5] 그러나 1907년 케무야마 센타로는 저서 『정한론 실상(征韓論実相)』에서 "정한론"이라는 명칭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13] 사이고가 가까운 미래에 정한을 염두에 두고 조선 사절을 지원했다는 의견과, 조선의 개국 및 수호 관계 실현을 평화적 교섭을 통해 스스로 이루려고 했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1970년대 후반, 모리 토시히코는 사이고가 정한을 의도하지 않았으며, 메이지 6년 정변의 주요 원인도 조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모리는 사이고가 이타가키 등의 주장에 즉시 조선 출병에 반대하고, 개국을 권하는 평화적인 조선 사절로서 자신이 조선에 가겠다는 것이었고, 오쿠보 등과도 결정적으로 결렬된 것은 아니며, 메이지 6년 정변의 주된 원인도 사법경 에토 신페이 등 반조슈 번 파의 실각이 목적이고, 정한론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 이는 근대사 연구의 큰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2000년경에는 모리설의 옳고 그름이 정한 논쟁 연구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2] 다카하시 히데나오는 모리의 연구 의의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조선 문제가 정변의 실질적인 쟁점이 아니었다는 모리설의 핵심은 부정하고 있다. 타무라 사다오는 모리설을 비판하고, 사이고의 정한론자 설을 재확인하려고 하고 있다.[5]

이에치카 요시키는 2018년 저서에서 "죽을 장소를 찾아 정한론을 제창했다고 평가가 학계에서 차츰 지배적이 되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오치아이 히로키는 사이고가 "시마즈 히사미츠의 신정부 비판과 친위병의 불만이라는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입장을 설명한 후, "사이고는 맨몸으로 협상하러 갈 생각이었다. 무력보다 사절의 생각이었다", "육군 대장인 사이고가 군비를 증강하고, 한국을 공격한다는 발상은 전혀 없었다"라고 하고 있다.[20]

참조

[1] 서적 Japan's emergence as a modern state: political and economic problems of the Meiji period https://books.google[...] UBC Press
[2] 서적 Saigô Takamori: the man behind the myth https://books.google[...] Kegan Paul International 1995-01-01
[3] 서적 The pursuit of power in modern Japan, 1825-199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01-01
[4] 서적 The power of memory in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Global Oriental 2008-01-01
[5] 문서 Hunter
[6] 서적 The Age of Visions and Arguments: Parliamentarianism and the National Public Sphere in Early Meiji Japan
[7] 서적 Saigo Takamori zenshu
[8] 웹사이트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3-12-05
[9] 서적 日本語と韓国語〈文春新書 233〉 文藝春秋 2002-03-20
[10] 서적 藤村(1970)
[11] 서적 島田(1999)
[12] 문서 吉田松陰・幽囚録
[13] 문서 요出典범위 2020-05-01
[14] 문서 「佐田白茅外二人帰朝後見込建白」
[15] 디지털자료 伊藤博文言行録 {{NDLDC|952871}}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6] 디지털자료 維新英雄言行録 {{NDLDC|777422}}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7] 서적 征韓論 平凡社 2007-09-01
[18] 디지털자료 西南記伝上巻1 {{NDLDC|773384}}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 뉴스 西郷どん、実は親韓論者だった?定説『征韓論』に一石 28年前の大河ドラマ放映時にも論争 https://www.nishinip[...] 2018-01-25
[20] 뉴스 西郷隆盛・敬天愛人の会 – 奄美新聞 http://amamishimbun.[...] 2019-05-13
[21] 뉴스 춘향은 어떻게 19세기 일본을 홀렸나 http://www.seoul.co.[...]
[22] 뉴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 야스카와 주노스케 http://news20.busan.[...] 2011-04-16
[23] 뉴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http://www.imaeil.co[...] 2011-04-21
[24] 서적 조선명인전 3 도서출판 일빛
[25] 서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답게
[26] 서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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