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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중전차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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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501중전차대대는 1942년 2월 독일 육군 최초의 중(重)전차 부대 중 하나로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티거 I 전차와 3호 전차를 운용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과 동부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튀니지 전역에서 활약했으나, 이후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과 교전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 1944년에는 티거 II 전차를 장비했으나, 기계적 결함과 소련군의 공격으로 인해 전력이 급감했다. 1945년 2월 제512중전차구축대대로 재편성되었으며, 잔존 병력은 이후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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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중전차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부대 정보
명칭제501 중전차 대대
원어 명칭schwwere Panzerabteilung 501 (s PzAbt 501)
별칭없음
상징배회하는 호랑이
복무 기간1942년 ~ 1945년
국가나치 독일
군종육군
유형전차
역할기갑전
규모대대, 최대 45대 전차
장비티거 I (1942년 ~ 1944년)
티거 II (1944년 ~ 1945년)
지휘 구조필요에 따라 배속되는 독립 부대
주둔지알 수 없음
과거 지휘관알 수 없음
주요 지휘관알 수 없음
전투 및 작전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전투튀니지 전역
동부 전선

2. 편성

독일 육군 최초의 중(重)장갑 부대는 1942년 2월 16일에 창설된 제501중전차대대와 제502중전차대대였다. 이들은 1942년 5월 10일 에르푸르트에서 제501중전차대대로 통합되었으며, 한스-게오르크 루더(Hans-Georg Lueder) 소령이 지휘했다.[1] 1942년 8월 말에 최초의 티거 I 전차가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선적으로 제502중전차대대의 편성을 위해 공급되었다.[1] 제501중전차대대는 아프리카 군단에 배속되어 북아프리카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며, 열대 기후에서의 작전을 대비하여 준비되었다. 초기에 이 대대는 20대의 티거 I과 25대의 3호 전차로 구성되었다.

독일 중전차대대는 처음에는 2개 중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각 중대는 티거 I 2대와 3호 전차 2대로 구성된 4개 소대로 편성되었다. 각 중대 지휘관은 티거 I 1대를 추가로 배정받고, 대대 지휘부는 티거 I 2대를 더 보유하여 총 20대의 티거 I과 16대의 3호 전차를 운용할 계획이었다.[2]

아래는 초기 편제에 따른 차량 번호이다.

부대구성차량 번호
본부중대티거 I01, 02
3호 전차03, 04, 05, 06, 07
1중대1소대 티거 I111, 112
1소대 3호 전차113, 114
2소대 티거 I121, 122
2소대 3호 전차123, 124
3소대 티거 I131, 132
3소대 3호 전차133, 134
4소대 티거 I141, 142
4소대 3호 전차143, 144
2중대1소대 티거 I211, 213
1소대 3호 전차212, 214
2소대 티거 I221, 223
2소대 3호 전차222, 224
3소대 티거 I231, 233
3소대 3호 전차232, 234
4소대 티거 I241, 143
4소대 3호 전차242, 244


3. 전투 서열

제501중전차대대 초기 편제 (1942년)[1][2]
부대소대티거 I 전차 번호3호 전차 전차 번호
본부중대-01, 0203, 04, 05, 06, 07
1중대1소대111, 112113, 114
2소대121, 122123, 124
3소대131, 132133, 134
4소대141, 142143, 144
2중대1소대211, 213212, 214
2소대221, 223222, 224
3소대231, 233232, 234
4소대241, 143242, 244



독일 중전차대대의 초기 계획은 2개 중대(각 중대는 티거 I 2대와 3호 전차 2대로 구성된 4개 소대) 편성이었으며, 중대/대대 지휘부를 포함하여 총 20대의 티거와 16대의 3호 전차 운용을 목표로 했다.[2] 하지만 실제 창설된 제501중전차대대의 초기 편제는 위 표와 같이 티거 I 20대와 3호 전차 25대로 구성되었다.[1]

4. 작전

제501중전차대대는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독일 국방군 육군 소속 중전차 부대로, 주로 북아프리카 전역동부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 부대는 티거 I 중전차를 최초로 실전에 투입한 부대 중 하나이며, 이후 티거 II 중전차도 운용했다.

1942년 말, 대대는 튀니지 전역에 투입되어 티거 I 전차의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앞세워 초기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특히 시디 부 지드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나, 연합군의 공세와 보급 문제, 지뢰 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손실을 입었다. 결국 1943년 5월, 튀니지에서 다른 추축군 부대와 함께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해체되었다.

1943년 9월, 대대는 재편성되어 동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비테프스크와 오르샤 등지에서 소련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1944년 여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 중에 큰 피해를 입고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후 티거 II 전차로 재무장하여 폴란드 등에서 전투를 이어갔고, 1944년 말에는 '''제424중전차대대'''로 부대명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1945년 초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공세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잔존 병력은 서쪽으로 후퇴했으며, 전쟁 말기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4. 1. 북아프리카 전역

1942년 11월 25일 – 12월 10일]]

연합군의 횃불 작전으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상륙 이후, 제501중전차대대는 북아프리카 전역의 마지막 단계인 튀니지 전역에 투입되었다. 1942년 11월 23일, 티거 I 극초기형 3대와 3호 전차 4대로 구성된 첫 부대가 튀니스에 도착했으며[3], 이후 1943년 1월까지 총 20대의 티거 I과 25대의 3호 전차(J형 및 N형)가 배치되었다. 이들은 제5기갑군 사령관 아르님 상급대장의 지휘 아래 놓였다.

도착 직후, 대대는 다른 부대와 함께 캄프그루페 루더(Kampfgruppe Lueder)로 편성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12월 1일, 추축군의 반격 작전에서 첫 전투를 치르며 미국 전차 9대와 영국 전차 2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3] 12월 2일에는 테부르바 공격에 나서 연합군 전차 6대와 대전차포 4문을 파괴했으나, 3호 전차 3대를 잃었다. 12월 4일, 증원된 티거 전차와 융커스 Ju 87 "슈투카" 급강하폭격기의 지원을 받아 테부르바를 점령했지만, 이 과정에서 투입된 티거 대부분이 정비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투입된 전차 182대 중 134대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4] 12월 10일, 수리를 마친 티거 7대와 3호 전차 5대는 제10 기갑사단과 함께 마자 알 바브 방향으로 공격하여 13km를 진격하고 M3 스튜어트 경전차 14대를 격파했다.[4] 다음 날에는 제데이다 동쪽 7km 지점에서 예비대로 활동했다.[4]

1943년 1월, 대대는 오퍼레이션 아일보테(Operation Eilbote) I, II에 참가했다. 1월 18일 시작된 아일보테 I 작전에서는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티거 1대가 지뢰로 인해 손실되었다. 1월 19일에는 로바(Robaa)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히르 무사(Hir Moussa)를 점령하고 미군 수송 차량을 노획했다.[5] 그러나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 6파운더 대전차포와 공병 공격으로 티거 2대가 추가로 파괴되었고, 영국군의 반격을 격퇴하는 과정에서도 손실이 발생했다.[5] 1월 말 시작된 아일보테 II 작전에서는 강력한 대전차 방어선과 지뢰 지대에 막혀 후퇴했으며, 처음으로 티거 전차의 장갑이 관통되어 2대가 파괴되고 1대는 회수 불가능 상태가 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5]

에르빈 롬멜이 노획한 미국 M3 하프트랙을 사용하며 독일군 병사들과 대화하고 있다.


2월 14일, 제1중대의 티거 6대와 3호 전차 9대는 봄바람 작전(Operation Frühlingswind)의 일환으로 파이드 고개를 돌파, 시디 부 지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티거 전차들은 미국 제1 기갑사단 소속 M4 셔먼 전차 20대를 격파하며 큰 전과를 올렸고, 미 제1기갑사단을 거의 전멸 상태로 몰아넣었다.[5] 그러나 아르님과 롬멜 지휘관 간의 갈등으로 독일군은 전략적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2월 26일, 카세린 고개 전투 이후 대대는 제10 기갑사단 제7 기갑연대 제3대대로 개편되었고, 각 중대는 4호 전차 15대를 추가로 배속받았다.[14]

2월 27일 시작된 오흐센코프 작전(Operation Ochsenkopf) 공세에 참여했으나, 연합군의 강력한 포격과 공습, 그리고 진흙탕으로 인해 작전은 난항을 겪었다. 특히 지뢰 지대에서 큰 피해를 입어, 2월 27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티거 8대가 지뢰로 인해 기동 불능 상태가 되었고, 결국 폭파 처리되었다. 루더 소령도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이 공세 실패와 막대한 전차 손실로 인해 제501중전차대대는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다.[6]

1943년 튀니지에서 노획된 제501중전차대대의 티거 I


튀니지 작전,
1943년 1월 30일 – 4월 1일


이후 남은 전차들을 수리하여 3월 10일 기준으로 티거 6대, 3호 전차 12대, 4호 전차 7대를 가동할 수 있었으나[14], 대대 규모의 작전 수행은 불가능했다. 결국 1943년 3월 17일, 제501중전차대대의 남은 티거 전차 11대는 새로 튀니지에 도착한 제504중전차대대에 흡수되었다.[14] 이후에도 튀니스 방어전에 참가하며 전투를 지속했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물량 공세와 제공권 장악으로 전세는 기울었다. 1943년 5월 12일, 튀니지 전역이 추축군의 패배로 끝나면서, 제501중전차대대 소속 병력 대부분은 튀니스 동쪽 본 곶(Cape Bon) 반도에서 다른 23만여 명의 추축군 병사들과 함께 영국군에게 항복했다.[14] 소수의 병력(18명)만이 시칠리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7]

4. 2. 동부 전선

1943년 8월 1일부터 1944년 12월 31일까지의 소련군 진격: 1943년 12월 1일까지(연노랑), 1944년 4월 30일까지(연주황), 1944년 8월 19일까지(연보라), 1944년 12월 31일까지(연녹색)


1943년 9월 9일, 제501중전차대대는 튀니지 전역 종결 전에 유럽으로 후송되어 회복 중이던 부상병을 포함한 구 대대의 잔존 병력으로 재편성되었다. 에리히 뢰베(Erich Löwe) 소령이 지휘를 맡았으며, 11월 12일까지 티거 I 전차 45대(중대당 14대씩 3개 중대 및 지휘 전차 3대)를 완편했다.[8] 12월 5일부터 12일 사이에 대대는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벨라루스) 비테프스크 지역으로 이동했다.[9]

12월 20일, 제501중전차대대는 로소프카 인근에서 소련군 전차 부대를 공격하여 21대의 전차와 28문의 야포를 격파했으나, 자체 손실로 전차 2대를 잃었으며 3개 중대 지휘관 전원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보병 지원 부족으로 대대는 철수해야 했다. 3일 후, 대대장 뢰베 소령은 자신의 전차가 격파된 후 다른 전차로 옮겨 타려다 실종되었다.[9] 이후 5일간 대대는 81대의 소련군 전차를 추가로 격파했다. 그러나 12월 말까지 보유 전차 39대 중 작전 가능 전차는 16대로 줄었으며, 2대는 소련군에게 노획되었다.[9]

1944년 1월, 폰 레가트(von Legat) 소령이 새로운 지휘관으로 부임했으며, 대대는 오르샤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월 13일에는 티거 전차 1대가 포탄에 포탑 상부를 관통당해 파괴되었고, 2월 13일에는 공격 실패로 티거 전차 9대를 손실했다. 3월 1일 기준으로 예비 부품 부족으로 인해 보유 전차 29대 중 17대만이 운용 가능한 상태였다.[9]



3월 12일, 대대는 제256보병사단과 함께 니핀지 북쪽에서 반격 작전에 참여하여 다음 날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는 데 기여했다. 4월 1일까지 예비 부품이 보충되어 작전 가능 전차가 27대로 회복되었다.[9]

6월에는 9대의 전차를 제509중전차대대로 이관하여 작전 가능 전차는 20대로 줄었다. 6월 23일,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되자 대대는 오르샤에서 방어전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대대는 분산되어 며칠간 IS-2 중전차 등을 상대로 개별적인 전투를 벌여야 했다. 후퇴 과정에서 티거 전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오르샤의 다리가 붕괴되었고, 일부 전차는 연료 부족으로 기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10] 남은 부대는 베레지나 강까지 후퇴했으나, 단 6대만이 강을 건널 수 있었고 나머지는 7월 1일과 2일 사이에 모두 자폭 처리되었다.

7월 2일부터 4일까지, 임시로 편성된 티거 전차 방어선은 민스크 지역으로 후퇴했다. 5대의 전차가 보충되어 작전 가능 전력이 7대로 늘었지만, 곧 2대를 잃고 1대는 고장으로 이탈했다. 다음 날에는 말라제치나 인근에서 철수하던 중 티거 전차 2대가 연료 부족으로 멈춰 섰고, 다른 1대는 늪에 빠졌다. 기동 불능이 된 3대의 티거 전차는 모두 자폭 처리되었다. 이로써 대대의 작전 가능 전차는 전무한 상태가 되었다.[10]

제501중전차대대는 7월 14일 오르드루프에서 재편성을 시작했다. 1944년 8월 7일까지 후기 생산형 포탑을 장착한 신형 티거 II 전차 45대를 수령하여 다시 완편되었다.[10]

8월 5일, 2개 중대가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북부 집단군에 합류하고자 폴란드 남동부로 이동했다. 그러나 하차 후 50km의 도로 행군 중에 대부분 최종 구동 장치 고장을 일으켰다. 8월 11일, 대대는 제16기갑사단에 배속되어 운용 가능한 8대의 전차로 바라누프 산도미에르스키 인근 비스와 강의 소련군 교두보를 공격했다. 오그렌도프로 향하던 중, 3대의 티거 II가 T-34-85의 매복 공격으로 파괴되었다.[11] 이 전투에서 탄약 유폭으로 많은 승무원이 사망하자, 이후 티거 II의 주포탄은 안전을 위해 포탑 내부에 보관하지 않게 되었고, 탑재량은 68발로 감소했다. 이후 이틀간 대대는 큰 손실을 입었다.[10] 8월 12일에는 나머지 중대가 오르드루프에서 출발하여 대대에 합류했다.[12]

8월 22일, 라돔 인근에서의 비효율적인 작전 수행 후, 대대장 폰 레가트 소령은 해임되었는데, 이는 그가 7·20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과도 관련이 있었다. 후임으로는 Saemisch 소령이 임명되었다.[12] 9월 1일 기준으로 26대의 티거 II가 운용 가능했으며, 대대는 제38기갑군단에 배속되었다. 그달 말, 나머지 중대가 대대에 합류했다.[12]

1944년 10월 1일, 대대는 보유한 53대의 티거 II 중 36대만이 운용 가능한 상태였다.[12] 11월 1일에는 제509중전차대대의 잔존 부대로부터 여러 대의 티거 I을 흡수하여 운용 가능 전차 수가 49대로 증가했다. 12월 21일, 대대는 '''제424중전차대대'''로 부대명을 변경하고 제4기갑군 소속 제24기갑군단에 배속되었다.[12]

1945년 1월 1일부터 1945년 5월 7일까지의 소련 진격: 1945년 3월 30일까지(연주황), 1945년 5월 7일까지(연녹색)


1945년 1월 12일,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비스와-오데르 공세가 시작되었다. 대대는 대대장부터 집단군 사령관까지 모든 지휘 계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최전선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13] 초기에는 명확한 명령을 받지 못하다가 1월 13일 리소프 방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동 중 티거 II 1대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세 개 중대가 모두 공격을 시도했지만, 많은 전차가 지형 문제로 기동 불능 상태에 빠져 회수가 불가능했다. 오버브라흐트 소위는 두 개의 궤도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적 전차 20대를 격파하는 등 총 50~60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다른 많은 전차는 교전 지점으로 이동 중 고장을 일으켰다. 리소프에서는 IS-2와 대전차포의 매복 공격을 받아 대대장의 전차를 포함하여 대대는 거의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한 티거 II는 기동 불능이 된 동료 전차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고장 나 결국 자폭해야 했다. 이러한 참패는 부실한 정찰 때문으로 평가되었다.[12]

다음 날, 대대의 일부 잔존 부대는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연료 부족으로 전차를 자폭시켜야만 했다. 또 다른 티거 II는 다리 아래로 추락하여 버려졌다. 남은 전차들은 그륀베르크에서 재집결하여 판터 2대, 4호 전차 3대, 호르니세 자주포 2대, 일부 헤처 구축전차 등 가용한 기갑 장비를 모아 임시 전투단을 편성했다.[12] 이 임시 부대로 지연전을 펼친 후, 잔존 병력은 2월 5일 파더보른으로 철수했다.[12]

1945년 2월 11일, 대대의 제1중대와 제2중대의 잔존 병력은 제512중전차구축대대(''schwere Panzer-Jager-Abteilung 512'')로 재편성되었다. 제3중대는 파더보른에 남아 제500전차훈련대대(''Panzer-Ersatz-und Ausbildungs Abt. 500'')에서 지원받은 티거 I 2대, 판터 1대, 4호 전차 1대와 함께 1945년 부활절에 영국군을 상대로 짧지만 성과 없는 전투를 치렀다.[12] 최종적으로 남은 부대원들은 횉스터에서 연합군에게 항복했다.[12]

5. 지휘관


  • 하인츠-게오르크 뤼더 Hans-Georg Luederde 소령 (1942년 5월 10일 – 1943년 2월 28일) (부상)[14]
  • 아우구스트 자이덴슈티커 August Seidenstickerde 소령 (1943년 3월 17일 – 1943년 5월 12일) (제504 중전차대대 소속)
  • 에리히 뢰베 Erich Löwede 소령 (1943년 9월 – 1943년 12월 23일) (실종)[9]
  • 폰 레가트 von Legatde 소령 (1944년 1월 – 1944년 8월 22일) (해임)[9]
  • 제미쉬 Saemischde 소령 (1944년 8월 22일 – 1945년 1월 13일) (전사)[12]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Desert Armour: Tank Warfare in North Africa: Gazala to Tunisia, 1942–43 Osprey Publishing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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