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1세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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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으로, 1567년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후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교육을 받았으며, 섭정 시기를 거쳐 친정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왕 즉위 후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의회와의 갈등, 재정 문제, 종교 정책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화약 음모 사건과 같은 사건을 겪으며 종교적 관용을 보이려 했으나, 가톨릭과 청교도 양측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또한, 그는 여러 남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라는 추측을 받기도 했다. 제임스 1세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1625년 사망했으며, 그의 치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을 위한 중요한 시기였으나, 잉글랜드 내전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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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잉글랜드) | |
---|---|
기본 정보 | |
전체 이름 | 제임스 찰스 스튜어트 |
출생일 | 1566년 6월 19일 |
출생지 |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왕국 |
사망일 | 1625년 3월 27일 (58세) |
사망지 | 시오볼즈 하우스, 허트퍼드셔, 잉글랜드 왕국 |
매장일 | 1625년 5월 7일 |
매장지 | 웨스트민스터 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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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국왕 | |
즉위 | 1567년 7월 24일 |
대관식 | 1567년 7월 29일 |
선임자 | 메리 |
섭정 |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백작 (1567–1570) 매튜 스튜어트, 렌녹스 백작 (1570–1571) 존 어스킨, 마르 백작 (1571–1572) 제임스 더글러스, 모턴 백작 (1572–1579) |
후임자 | 찰스 1세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국왕 | |
즉위 | 1603년 3월 24일 |
대관식 | 1603년 7월 25일 |
선임자 | 엘리자베스 1세 |
후임자 | 찰스 1세 |
가문 | |
왕가 | 스튜어트 |
아버지 | 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 |
어머니 | 메리, 스코틀랜드 여왕 |
배우자 | |
배우자 | 덴마크의 안나 |
결혼 | 1589년 8월 20일 |
사망 | 1619년 3월 2일 |
자녀 | |
자녀 | 헨리 프레데릭, 웨일스 공 보헤미아 여왕 엘리자베스 마거릿 찰스 1세, 잉글랜드 왕 로버트, 킨타이어와 론 공작 메리 소피아 |
2. 섭정 시기
제임스는 1566년 6월 19일 에든버러 성에서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20] 그는 스코틀랜드 군주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로스시 공작, 스코틀랜드의 왕자, 스코틀랜드의 총관리인 지위를 받았다. 1566년 12월 17일 스털링 성에서 가톨릭 전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으며, 대부모는 프랑스의 샤를 9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였다.[120]
1567년 2월 10일, 제임스의 생부 단리 경이 살해당했다.[118] 메리 1세가 단리 경 사후 살해 배후로 지목되던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 재혼하자 반란이 일어났고, 메리 1세는 1567년 6월 개신교 귀족들에게 체포되어 로츨레븐성에 갇혔다.[121] 제임스는 어머니와 떨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귀족들은 메리 1세에게 양위를 강요했고, 1567년 7월 24일 생후 13개월의 제임스가 왕위에 올랐다.[121]
너무 어렸던 제임스를 대신하여 섭정이 임명되었다.
- 1567년 - 1570년: 제임스 5세의 사생아였던 머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121]가 섭정을 맡았으나 1570년 1월 23일 암살되었다.[13]
- 1570년 - 1571년: 제임스의 외조부 레녹스 백작 매슈 스튜어트[13]가 섭정을 맡았으나 1년 후 사망했다.
- 1571년 - 1572년: 마 백작 존 어스킨[14]이 섭정을 맡았으나 1572년 10월 28일 사망했다.
- 1572년 - 1578년: 모턴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14]가 섭정을 맡았다.
제임스의 양육은 마 백작과 마 백작부인에게 위탁되었다.[12] 1567년 7월 29일, 스털링의 성 홀리 루드 교회에서 존 녹스의 설교와 함께 스코틀랜드 국왕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제임스는 조지 버캐넌, 피터 영 등에게 교육을 받았다. 버캐넌은 제임스에게 체벌을 가했지만, 문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었다.
1579년 10월 19일, 제임스는 에든버러 입성 의식에서 성인 통치자로 선포되었으나,[16] 레녹스 공작 에스메 스튜어트의 영향 아래 있었다.[15] 1581년 6월 2일 모턴 백작이 처형된 후에도 레녹스 공작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17] 1582년 8월, 고우리 백작 윌리엄 루스벤과 앵거스 백작 아치볼트 더글라스는 제임스를 루스벤성으로 유인하여 가두었고, 레녹스 공작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1583년 6월 27일, 제임스는 포클랜드에서 탈출하여[130] 스코틀랜드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1584년부터 1603년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평화를 유지했다.
2. 1. 출생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메리 1세와 단리 경은 모두 헨리 7세의 딸이자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증손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제임스 4세와 결혼하여 제임스 5세를 낳았고, 제임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하자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하여 단리 경의 할머니의 친정어머니가 되었다.
메리 1세와 단리 경 부부는 스코틀랜드 안팎의 어려움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스튜어트가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며 제임스 4세와 제임스 5세 두 국왕이 연이어 전쟁 중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프랑스 왕가에 의지하였다. 때로는 망명지로 삼았고 때로는 군사적 원조를 받으면서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더욱이 메리 1세는 유년기를 프랑스에서 망명하며 보냈고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하여 한때 프랑스의 왕비로 지냈기 때문에 가톨릭 신앙을 지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는 장로교가 다수를 점한 개신교 국가였고 의회 역시 장로교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반란에 시달려야 하였다. 이들의 결혼은 정략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118] 단리 경은 반군과 비밀리에 공모하여 메리 1세의 개인 비서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다비드 리치오를 살해하였다.[119] 당시 메리 1세는 임신 중이었고 석 달 뒤 제임스를 출산하였다.
제임스는 1566년 6월 19일 에든버러성에서 태어났다. 장남이었던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군주의 후계자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로스시 공작, 스코틀랜드의 왕자,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총관리인의 지위를 받았다. 제임스의 출생 5일 후 잉글랜드의 외교관 헨리 길리그루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던 메리 1세를 알현할 수 있었다. 그는 "아기가 유모를 빨고 있었고 건강해 보였으며 훌륭한 왕자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기록하였다.[120] 제임스는 1566년 12월 17일 스털링성에서 가톨릭 전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다. 대부모는 프랑스의 샤를 9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였으며 이들을 대신하여 외교 사절들이 세례식에 참가하였다. 메리 1세로부터 평소 "곰보 성직자"라 불렸던 세인트엔드루의 대주교 존 해밀던이 세례를 집전하였고, 메리 1세는 당시 관습에 따라 대주교가 아이에게 침을 뱉는 것을 거부하였다. 아마도 아이에게 천연두가 옮겨질까 두려웠을 것이다. 세례식 기념 연회에서 프랑스 사람 바스티앙 파게가 고안한 가장행렬이 사티로스 분장을 하고 등장하였고 잉글랜드 측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 화를 냈다.
제임스의 가계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스튜어트 가문이었다. 아버지 단리 경의 가계는 Stewart of Darnley영어라 불리며, 남계로는 스튜어트 왕조 이전에 분가하였다. 로버트 2세의 조부인 제5대 왕실 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의 동생의 자손이었다. 단리 경은 외조할머니 엘리자베스 해밀턴이 제임스 2세의 외손녀였기 때문에 강력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제임스는 외조부 제임스 5세가 헨리 8세의 누이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인 마가렛 튜더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자이기도 했다.
2. 2. 섭정
제임스는 1566년 6월 19일 에든버러성에서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20] 그는 스코틀랜드 군주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로스시 공작, 스코틀랜드의 왕자, 스코틀랜드의 총관리인의 지위를 받았다. 1566년 12월 17일 스털링성에서 가톨릭 전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으며, 대부모는 프랑스의 샤를 9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였다.[120]
1567년 2월 10일, 제임스의 생부 단리 경이 살해당했다.[118] 메리 1세가 단리 경 사후 살해 배후로 지목되던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 재혼하자 반란이 일어났고, 메리 1세는 1567년 6월 개신교 귀족들에게 체포되어 로츨레븐성에 갇혔다.[121] 제임스는 어머니와 떨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귀족들은 메리 1세에게 양위를 강요했고, 1567년 7월 24일 생후 13개월의 제임스가 왕위에 올랐다.[121]
제임스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제임스 5세의 사생아였던 머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섭정이 되었다.[121] 그러나 1570년 1월 23일 머레이 백작은 암살되었고,[13] 제임스의 외조부 레녹스 백작 매슈 스튜어트가 다음 섭정이 되었으나 1년 후 사망했다. 마 백작 존 어스킨이 섭정이 되었으나 1572년 10월 28일 사망했고, 모턴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가 섭정이 되었다.[14]

제임스의 양육은 마 백작과 마 백작부인에게 위탁되었다.[12] 1567년 7월 29일, 스털링의 성 홀리 루드 교회에서 존 녹스의 설교와 함께 스코틀랜드 국왕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제임스는 조지 버캐넌, 피터 영 등에게 교육을 받았다. 버캐넌은 제임스에게 체벌을 가했지만, 문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었다.
1579년 10월 19일, 제임스는 에든버러 입성 의식에서 성인 통치자로 선포되었다.[16] 그러나 레녹스 공작 에스메 스튜어트의 영향 아래 있었고,[15] 1581년 6월 2일 모턴 백작이 처형된 후에도 레녹스 공작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17] 1582년 8월, 고우리 백작 윌리엄 루스벤과 앵거스 백작 아치볼트 더글라스는 제임스를 루스벤성으로 유인하여 가두었고, 레녹스 공작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1583년 6월 27일, 제임스는 포클랜드에서 탈출하여[130] 스코틀랜드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1584년부터 1603년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평화를 유지했다.
3. 스코틀랜드 통치 시기
제임스 6세는 1583년 폴클랜드에서 탈출한 후,[19]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그는 교회에 대한 왕권을 주장하기 위해 흑인 법령을 통과시켰고, 그의 전임 교사였던 부캐넌의 저서를 비난했다.[20] 1584년부터 1603년까지 존 메이틀랜드 오브 써를리스테인의 도움을 받아 왕정을 안정시키고 귀족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했다.[21]
1586년 제임스는 잉글랜드와 베릭 조약을 체결했다. 1587년 어머니 메리가 처형되었지만, 제임스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위해 형식적인 항의만 하고 묵인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위기 동안 엘리자베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6년부터 제임스에게 연례 보조금을 지급하여 스코틀랜드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25]
제임스는 젊었을 때부터 여성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남성 동반자를 선호했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해 1589년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의 딸인 안나와 결혼했다. 대리 결혼 후, 안나는 스코틀랜드로 항해했지만 폭풍으로 노르웨이 해안에 좌초되었다. 제임스는 직접 안나를 데리러 가는 낭만적인 모습을 보였다. 둘은 11월 23일 오슬로 주교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제임스는 장모로부터 75000DKK의 지참금과 10000DKK의 선물을 받았다.[26] 1590년 5월 1일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27] 부부는 금슬이 좋았고,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더릭,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찰스 1세 등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 스코틀랜드 종교계는 장로파의 영향력이 강했고, 앤드류 멜빌 등은 성직자 임명이 국왕이 아닌 장로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6세는 1584년 "암흑법"을 발포하여 국왕의 최고 권위를 선포하고 감독제를 공표했지만, 신도들의 반발로 1592년 "황금법"을 통해 "집회"를 허용해야 했다. 1598년에는 "주교 의원"을 인정하여 교회(커크)가 추천하는 3명의 주교에게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과 같은 입법 활동을 허용했다.
1600년 8월, 제임스는 고리 백작 존 루선의 동생인 알렉산더 루선에게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22] 루선은 제임스의 시종에게 찔렸고, 고리 백작은 그 후 벌어진 소동에서 사망했다. 제임스와 루선 가문의 과거 관계와 제임스가 그들에게 많은 돈을 빚지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그의 사건 설명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3]
3. 1. 친정 시작과 권력 강화
제임스 1세는 젊은 시절부터 여성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 순결하다는 평판을 얻었지만, 사실 게이 성향이 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1589년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의 딸 아나 애 단마르크 왕녀와 결혼했다. 대리 결혼 후 아나는 스코틀랜드로 향했지만 폭풍을 만나 노르웨이 해안에 정박했고, 제임스는 직접 아나를 데리러 가는 낭만적인 모습을 보였다. 둘은 11월 23일 오슬로 주교궁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75000DKK의 지참금과 10000DKK의 축의금을 받았다.[137] 1590년 5월 1일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으며,[138] 부부는 금슬이 좋았고,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더릭,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찰스 1세 등의 자녀를 두었다.제임스는 덴마크 방문 시 마녀사냥을 목격하고 마법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다. 1563년 마법 금지법 제정 후 스코틀랜드에서는 대규모 마녀사냥이 진행되었고, 아그네스 샘슨 등이 국왕의 선박에 대한 저주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39] 1597년 제임스는 《악마론》을 저술하여 마법 행위를 비판했고,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에서 이 책의 구절을 이용했다. 제임스는 마녀로 기소된 여성들의 고문을 직접 감독하기도 했지만, 1599년 이후 마녀사냥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140]
1582년 루선 습격 사건으로 고리 백작 윌리엄 루선과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감금당하기도 했지만, 1583년 탈출에 성공한 후 왕권을 강화했다.[19] 흑인 법령을 통해 교회에 대한 왕권을 주장하고, 존 메이틀랜드 오브 써를리스테인의 조력으로 효과적인 왕정을 수립했다.
1586년 베릭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1587년 어머니 메리의 처형 이후 잉글랜드 왕위 계승 가능성을 높였다. 스페인 무적함대 위기 시 엘리자베스에게 지지를 표명하고, 연례 보조금을 받으며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25]
1598년에는 『자유 군주국의 진정한 법』을 통해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고, 1599년 『바실리콘 도론』을 통해 군주론을 펼쳤다. 1600년에는 고리 백작 존 루선 형제에게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살아남았다.[22]
3. 2. 종교 정책과 마녀사냥
제임스 1세는 젊은 시절부터 여성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 순결하다는 평판을 얻었지만, 사실 게이 성향이 있었고 남성 동반자들을 선호했다.[26]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해 결혼은 필수적이었고, 1589년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의 딸 아나와 대리 결혼을 했다. 아나는 7만 5천 덴마크 달러의 지참금을 가져왔고, 제임스는 그녀에게 애정을 보였다.[137] 부부는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더릭, 엘리자베스, 찰스 등 세 자녀를 두었지만, 헨리 프레더릭은 1612년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임스는 덴마크 방문을 계기로 마법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녀 사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597년에는 ''데모놀로지''를 저술하여 마녀 행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28] 노스버윅 마녀 재판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제임스의 배에 폭풍을 보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8] 제임스는 마녀로 고발된 여성들의 고문을 직접 감독하기도 했지만, 1599년 이후에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29]
스코틀랜드 북서부 고원지대는 게일인들이 모여사는 게일턱크를 형성하고 있었고, 종교 개혁은 느리게 전파되고 있었다.[31] 제임스 6세는 1598년 파이프 귀족들로 구성된 파이프 신사 모험대에게 루이스섬 식민 계획을 승인하며, 지역 주민들을 "합의가 아닌 악습의 근절"로 다루라고 지시했다.[32] 1609년 아이오나 칙서를 통해 클랜 대표들에게 개신교 목사 지원, 음유시인 불법화, 영어 사용 개신교 학교 교육 등을 강제했다.[33]
북방 군도의 영주이자 제임스 6세의 사촌이었던 오크니 백작 패트릭 스튜어트는 아이오나 칙서에 반발하다 투옥되었고,[144] 그의 아들 로버트는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어, 오크니 백작 부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영지는 몰수되어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는 왕실 소유가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 종교계는 장로파의 영향력이 강했고, 앤드류 멜빌 등은 성직자 임명이 국왕이 아닌 장로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6세는 1584년 "암흑법"(블랙 액트)을 발포하여 국왕의 최고 권위를 선포하고 감독제를 공표했지만, 신도들의 반발로 1592년 "황금법"(골든 액트)을 통해 "집회"를 허용해야 했다. 1598년에는 "주교 의원"을 인정하여 교회(커크)가 추천하는 3명의 주교에게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과 같은 입법 활동을 허용했다.
3. 3. 고원과 도서 지역 통치
1493년 제임스 4세가 헤브리디스 제도의 영주령을 강제로 해산하면서 서해안 지역은 혼란에 빠졌다. 제임스 4세는 헤브리디스 제도의 군사력을 진압했지만,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효과적인 통치 방식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 16세기는 약탈의 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31] 게다가 종교 개혁의 영향은 가엘타흐트|gd에 더디게 미쳐, 이 지역과 중부 저지대의 정치 중심지 사이에 종교적 갈등을 일으켰다.[31]1540년 제임스 5세는 헤브리디스 제도를 순회하며 씨족장들을 강제로 동행하게 했다. 이후 평화가 찾아왔지만, 씨족들은 곧 다시 대립하기 시작했다.[31] 제임스 6세 통치 시기, 헤브리디스 제도의 주민들은 스코틀랜드 기독교와 국가의 요람이라기보다는 무법한 야만인으로 묘사되었다. 공식 문서에서는 고지대 주민들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며 "모든 종류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잔혹 행위"를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고 묘사했다.[31] 제임스 4세와 제임스 5세는 게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제임스 6세 시대에는 "어스어(Erse)" 또는 아일랜드어로 불리며 외국어로 여겨졌다. 의회는 게일어가 고지대 주민들의 문제점의 주된 원인이라 판단하고 이를 폐지하려 했다.[31]

이러한 상황에서 제임스 6세는 1598년 "파이프의 신사 모험가들"에게 "가장 야만적인 루이스 섬"을 문명화하도록 허가했다. 제임스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현지 주민들과 "합의에 의해"가 아니라 "그들을 근절함으로써" 행동해야 한다고 썼다. 스토노웨이에 상륙한 그들은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머독과 닐 맥리오드가 이끄는 현지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1605년에 다시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607년 세 번째 시도는 더 성공적이었다.[32] 1609년에 제정된 아이오나 법령은 씨족장들에게 고지대 교구에 개신교 목사를 지원하고, 음유시인을 금지하며, 에든버러에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상속인들을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영어 사용 개신교 학교에 보내 교육시킬 것을 요구했다.[32] 이는 "게일어의 근절, 전통 문화의 파괴, 그리고 그 담당자들의 억압을 특별히 목표로 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32]
북부 제도에서는 제임스의 사촌인 오크니 백작 패트릭 스튜어트가 아이오나 법령에 저항하여 투옥되었다.[33] 그의 서자 로버트는 제임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백작과 그의 아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33]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오크니와 셰틀랜드 제도는 왕관에 합병되었다.[33]
3. 4. 왕권신수설과 문예 진흥
제임스 1세는 1580년대와 1590년대 동안 스코틀랜드의 문학 진흥에 힘썼다. 1584년, 18세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시문학에서 준수하고 피해야 할 몇 가지 규칙과 주의사항》을 발표하여 스코트어 시문학에 르네상스 원칙을 적용하고자 했다.[148] 또한 음악 교육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148]제임스는 윌리엄 파울러, 알렉산더 몽고메리 등의 시인과 음악가를 궁정에 불러 모았다. 이들은 델포이의 카스탈리아 샘에 모인 뮤즈에 비유되어 캐스탈리안 밴드로 불렸으며, 자코비언 시대를 대표했다. 제임스는 특히 알렉산더 몽고메리를 총애했으며,[149] 스스로 시 짓기를 즐겨 이들과 어울렸다.
1590년대 후반,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스코틀랜드 문학 전통에 대한 옹호는 약해졌다.[150] 윌리엄 알렉산더를 비롯한 궁정 시인들은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1603년 제임스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150] 잉글랜드에서도 제임스는 문학 진흥과 후원에 적극적이었지만,[151] 스코틀랜드 문학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1597년에서 1598년 사이, 제임스 1세는 『자유 군주제의 진정한 법칙』과 『바실리콘 도론』(왕의 선물)을 저술하여 군주제의 신학적 근거를 주장했다. 『자유 군주제의 진정한 법칙』에서 그는 신권왕권론을 제시하며, 성경을 근거로 왕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존재이지만, "가장 높은 자리는 앉기에 가장 미끄럽다"고 설명했다.[34] 이 문서는 왕이 왕권으로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지만, 전통과, "악한 왕들을 벌하기 위해 그가 기뻐하는 재앙을 일으키는" 신에게도 주의해야 한다는 절대 군주제 이론을 제시한다.
『바실리콘 도론』은 네 살 난 헨리 왕자를 위한 교훈서로 쓰여 왕권에 대한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한다.[35] 이 책은 제임스 1세의 산문 중 가장 훌륭한 예로 평가받는다. 제임스 1세는 의회를 왕의 "최고 법정"으로만 이해했으며, 이는 잉글랜드 하원과의 갈등을 예고했다. 그는 헨리에게 "새로운 법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회를 열지 마라. 그럴 일은 드물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자유 군주제의 진정한 법칙』에서 제임스 1세는 왕이 봉건 영주가 자신의 봉토를 소유하듯 왕국을 소유한다고 주장한다. 왕들은 "어떤 신분이나 계급의 사람들보다, 어떤 의회가 열리거나 법이 제정되기 전에 존재했고, 그들에 의해 처음에는 전적으로 그들의 것이었던 땅이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이 법의 제정자였고 법이 왕의 것이 아니었음은 필연적이다."[36]
4. 잉글랜드 왕위 계승
1604년, 제임스 1세는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잉글랜드 국교회와 청교도 대표들을 불러 회의(햄프턴 코트 회의, Hampton Court Conference영어)를 열었다. 제임스 1세는 가톨릭과 청교도 양쪽 모두를 배척하려 했으나, 이는 양측의 반발을 샀다.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을 원했지만, 양국 정부의 반대로 인해 칼뱅주의(스코틀랜드)와 국교회(잉글랜드)로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해야 했다. 햄프턴 코트 회의는 사실상 제임스 1세와 잉글랜드 국교회가 주도한 것이었고, 청교도 측 주장은 흠정역 성서(King James Version) 출판 외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임스 1세는 로마 가톨릭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102]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를 비롯한 가톨릭 신자들이 국왕과 고관들을 암살하려 한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 발생했다. 1611년 간행된 흠정역 성서는 제임스 1세의 명에 따라 국교회 예배용 표준 번역본으로, 랜슬롯 앤드루스 등이 번역에 참여했다. 이 작업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중심으로 과학과 종교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4. 1. 엘리자베스 1세의 후계자
1601년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이자 잉글랜드의 총리였던 로버트 세실은 후계 문제 상의를 위해 제임스와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하였다.[152]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위독해지자 세실은 제임스에게 즉위 선언문 초안을 보냈다. 3월 24일 이른 아침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뒤 제임스는 런던에서 새 왕으로 선포되어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
1603년 4월 5일 에든버러를 떠나면서 제임스는 3년마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잉글랜드에 들어서자 지역 영주들이 길을 따라 나와 환대하였고 제임스는 자신이 새로 즉위하게 된 영지의 부유함을 보고 "돌로 된 소파에서 자다가 깃털 이불을 덮은 침대로 바뀌었다"고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그는 5월 7일 런던에 도착하였고,[153] 신민들이 모여들어 환호하자 새로운 승계에 반발이 크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런던의 주민들은 새 국왕을 보기 위해 수 없이 몰려들었다.
7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제임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흑사병 창궐때문에 축제가 제한되어 있던 런던은 오랫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1604년 3월 토머스 데커와 벤 존슨 같은 극작가들이 제임스의 즉위를 축하하며 《왕실의 런던 입성》을 발표하였고,[154] 여기서 데커는 제임스의 런던 입성을 "거리는 남자들로 매워지고 노점상 마다 아이들이 몰려들고 창문마다 여자들이 얼굴을 내밀고 구경하였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즉위 당시 잉글랜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역의 독점과 무거운 과세가 광범위한 불만을 불렀고 아일랜드와 있었던 전쟁의 비용 때문에 정부는 400000GBP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4. 2. 런던 입성과 초기 통치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은 제임스 1세는 런던에 입성하여 즉위식을 가졌다. 1603년 4월 5일 에든버러를 떠날 때 3년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152] 잉글랜드에 들어서는 제임스를 지역 영주들이 환대하였고,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부유함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1603년 5월 7일 런던에 도착한 제임스는[153] 신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위에 대한 큰 반발이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하였다.[154]1603년 7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지만, 흑사병 창궐로 인해 축제는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런던은 오랫만에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1604년 3월 토머스 데커와 벤 존슨 같은 극작가들은 제임스의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발표하였다.[155]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즉위 당시 잉글랜드는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무역 독점과 무거운 세금으로 인한 불만이 컸고, 아일랜드 9년 전쟁으로 인한 40만 파운드의 부채도 안고 있었다.[156]
5. 잉글랜드 통치 시기
제임스 1세는 즉위 초, 바이 음모(Bye Plot)와 메인 음모(Main Plot)라는 두 건의 음모를 겪었다. 이로 인해 헨리 브룩, 콥험 경(Henry Brooke, Lord Cobham)과 월터 롤리(Walter Raleigh)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다.[46] 엘리자베스 1세의 추밀원(Privy Council) 의원들을 그대로 유임시킨 것에 대해 초기에는 불만이 있었지만, 곧 헨리 하워드와 그의 조카 토마스 하워드를 추밀원에 추가했다.[44]
제임스 1세 초기, 솔즈베리 백작(Earl of Salisbury) 로버트 세실이 정부 운영을 능숙하게 관리했고, 토마스 에거턴과 토마스 새크빌이 그를 지원했다.[44] 덕분에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동군연합(personal union)과 외교 문제 등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합하려 했으나 양국 모두 반대했다.[45] 1604년 10월, "대영제국 국왕" 칭호를 사용했지만,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45]
영국-스페인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여 1604년 8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45] 그러나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예배 자유 문제는 딜레마였다.
1604년 햄프턴 코트 회의에서 종교 문제를 논의했지만, 가톨릭과 청교도 양측 모두에게 반감을 샀고, 《欽定訳聖書(King James Version)》 출판이 결정되었다. 1605년에는 화약 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제임스 1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의회와 재정 문제로 자주 충돌했으며, 1610년 대계약은 실패했다. 1611년 준남작 작위를 만들어 재정을 보충하려 했다.
5. 1. 화약 음모 사건
1605년 11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 제임스 1세의 첫 번째 영국 의회 두 번째 회기 개회식 전날 밤, 의회 건물 지하실에서 반체제 가톨릭 신자 가이 포크스가 발각되었다. 포크스는 36개의 화약통이 가까이 있는 나무더미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이 화약을 이용하여 다음 날 의회 의사당을 폭파하고, 제임스 1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 자신뿐 아니라 나의 아내와 자손, 그리고 국가 전체"를 파괴하려 했다.[46] 곧 "화약 음모"로 알려지게 된 이 충격적인 발견은 국왕과 그의 아들들의 구출에 대한 전국적인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솔즈베리 백작은 이를 이용하여 이후 의회로부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많은 보조금을 징수했다.[46] 포크스와 음모에 연루된 다른 사람들은 처형되었다.1604년, 제임스 1세는 햄프턴 코트 궁전(Hampton Court Palace)에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와 청교도(Puritan) 등 종교계 대표들을 초청하여 회의(햄프턴 코트 회의(Hampton Court Conference))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제임스 1세는 가톨릭과 청교도 양극단을 배제할 것을 선언했지만, 이로 인해 가톨릭과 청교도 양쪽 모두로부터 반감을 샀다. 한편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을 열망했으나, 양 정부는 강력히 반대했기에, 이 회의에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주의(칼뱅파), 잉글랜드에서는 국교회와 각각 다른 종교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햄프턴 코트 회의 자체는 제임스 1세와 잉글랜드 국교회의 짜여진 각본이었고, 이 회의에서 청교도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은 《欽定訳聖書(King James Version)》의 출판뿐이었다.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는 청교도를 억누르는 결정들뿐이었다. 애초에 제임스 1세는 로마 가톨릭 환경에서 자란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102]
이듬해인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 등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국왕과 고관들을 노린 폭파 미수 사건(화약 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1611년에 간행된 《欽定訳聖書(King James Version)》는 제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국교회 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한 표준 번역본으로 번역된 것이다. 이 《欽定訳聖書(King James Version)》를 만들기 위한 조직 구성원에는 랜슬롯 앤드루스 등이 있었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대표로 하는 과학과 종교의 양립적인 발전이 있었던 지적인 구성원들의 모임이 되기도 했다.
5. 2. 의회와의 관계
제임스 1세는 의회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1604년 7월 7일 의회 폐회 연설에서 제임스는 의회가 국가 통합과 예산 증대에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157] 이는 앞으로 있을 의회와의 지속적인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제임스 1세는 통치 기간 내내 재정적 압박에 시달렸다. 즉위 초기 왕실 수입은 연간 35만 파운드였으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 가치 하락과 제임스 1세의 방탕한 씀씀이, 재정 관리 무능으로 인해 재정 압박이 심화되었다.[158] 1610년 2월, 솔즈베리 백작 로버트 세실은 의회에 왕실 부채 탕감을 위한 60만 파운드 일시불 지급과 연간 20만 파운드 기금을 요구하는 대계약을 제안했으나, 의회는 승인을 미루며 협상을 지연시켰다.[159] 결국 제임스 1세는 1610년 12월 31일 의회를 해산했다.
1614년에 소집된 의회 역시 9주 만에 해산되었고,[160] 제임스 1세는 1621년까지 의회 없이 통치하며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오넬 크랜필드를 고용하고 남작 작위를 판매했다.
1605년 화약 음모 사건 이후 잉글랜드의 반가톨릭 정서가 강해졌지만, 제임스 1세는 개인적으로 종교에 관용적이었다.[171] 청교도의 천인청원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을 출간하기도 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주교제를 재건하려 시도했으나, 퍼스 5개 조항 강요 등으로 반발을 샀다.[175]
말년에 제임스 1세는 찰스 왕세자와 버킹엄 공작에게 휘둘렸다. 이들은 스페인과의 결혼 협상이 실패하자 반(反)스페인으로 돌아서 제임스 1세에게 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1624년 의회는 전쟁 자금 지원을 승인했지만, 외교에 대한 의회의 의견을 수용해야 했다. 버킹엄 공작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앙리에타 마리아를 찰스와 결혼시켰지만, 가톨릭에 대한 양보로 인해 의회의 불신을 샀다.
5. 3. 왕세자의 결혼 협상
제임스 1세는 왕세자 찰스와 스페인 인판타 마리아 안나의 결혼을 통해 스페인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전쟁 비용을 절약하려 했다. 이른바 '스페인 결혼' 정책은 거의 10년 동안 협상이 지연될 정도로 제임스에게 중요했다.[50]이 정책은 하워드 가문을 비롯한 가톨릭 성향의 신하들과 외교관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개신교 국가인 영국에서는 깊은 불신을 받았다. 1616년 월터 롤리의 남아메리카 원정이 실패하고 아들이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제임스는 롤리를 처형했고 이는 대중의 분노를 일으켰다.[51]
1620년, 30년 전쟁이 발발하고 제임스의 사위인 프레데리크 5세가 보헤미아에서 축출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제임스는 1621년 의회를 소집하여 군사 원정 자금을 요청했지만, 하원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요구하며 왕권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제임스의 경고를 받았다.[52]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권리를 주장했고,[53] 제임스는 항의를 기록부에서 찢고 의회를 해산했다.
1623년, 찰스 왕세자와 버킹엄 공작은 스페인에 몰래 가서 마리아 안나를 직접 만나려 했지만 실패했다.[54] 스페인은 의회의 반가톨릭 법률 폐지를 요구했고, 찰스와 버킹엄은 10월에 영국으로 돌아와 조약을 파기했다.[55]
이후 찰스와 버킹엄은 제임스의 스페인 정책을 뒤집고 프랑스와의 결혼,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요구했다.[56] 1624년 의회가 소집되었고, 정책 통제권이 제임스에서 찰스와 버킹엄으로 넘어가면서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57] 제임스는 여전히 전쟁을 거부했지만, 찰스는 하원이 전쟁 자금 지원에 동의했다고 믿었고, 이는 이후 의회와의 문제에 영향을 주었다.[58]
5. 4. 종교 정책
총체적인 음모 사건 이후,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가톨릭교도들을 통제하기 위한 강경책을 승인했다. 1606년 5월,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는 충성 맹세를 모든 신민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가톨릭 반역자 법을 통과시켰다.[59] 제임스 1세는 충성 맹세를 한 가톨릭 신자들에게 관대했으며,[60] 심지어 궁정에서도 은밀한 가톨릭 신앙을 용인했다. 예를 들어, 헨리 하워드는 은밀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가톨릭교회로 복귀했다.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옛 종교의 저명한 동조자였던 헨리 퍼시, 노섬벌랜드 백작에게 "조용히 지내고 법에 대한 외면적인 순종만 보이면" 박해하지 않겠다고 확신시켰다.1603년 밀레나리 청원에서, 청교도 성직자들은 견진성사, 결혼 반지, "사제"라는 용어를 비롯한 다른 것들의 폐지와 모자와 수라 착용을 선택 사항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제임스 1세는 처음에는 순응을 엄격하게 강요하여 많은 청교도들에게 박해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61] 그러나 재위 기간이 계속되면서 생계 수단에서의 축출과 정직 처분은 드물어졌다. 1604년 햄프턴 코트 회의의 결과로, 일부 청교도들의 요구는 1604년 ''공동기도서''에서 수용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불만을 품었다.[3] 이 회의는 당시 사용되고 있던 다양한 번역본 간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성경 번역과 승인된 책들의 편찬을 의뢰했다. 킹 제임스 성경으로 알려지게 된 이 성경은 1611년에 완성되었으며, 제임스 1세 시대 산문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잉글랜드 교회에 "가능한 한 가깝게" 만들고 주교제를 재건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정책은 장로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즉위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617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성공회 의식을 시행하기를 희망했다. 제임스 1세의 주교들은 이듬해 총회를 통해 그의 퍼스의 5개 조항을 강행했지만, 이 결정은 널리 저항을 받았다.[62] 제임스 1세는 사망할 때 스코틀랜드 교회를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었고, 이는 그의 아들에게 미래의 문제가 되었다.
1604년, 제임스 1세는 햄프턴 코트 궁전(Hampton Court Palace)에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와 청교도(Puritan) 등 종교계 대표들을 초청하여 회의를 열었다(햄프턴 코트 회의(Hampton Court Conference)). 이 회의에서 제임스 1세는 가톨릭과 청교도 양극단을 배제할 것을 선언했지만, 이로 인해 가톨릭과 청교도 양쪽 모두로부터 반감을 샀다. 한편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을 열망했으나, 양 정부는 강력히 반대했기에, 이 회의에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주의(칼뱅파), 잉글랜드에서는 국교회와 각각 다른 종교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햄프턴 코트 회의 자체는 제임스 1세와 잉글랜드 국교회의 짜여진 각본이었고, 이 회의에서 청교도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은 《欽定訳聖書》(King James Version, 킹 제임스 성경)의 출판뿐이었다.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는 청교도를 억누르는 결정들뿐이었다. 애초에 제임스 1세는 로마 가톨릭 환경에서 자란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102]
이듬해인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등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국왕과 고관들을 노린 폭파 미수 사건(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 발생했다. 1611년에 간행된 《欽定訳聖書》(King James Version, 킹 제임스 성경)는 제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국교회 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한 표준 번역본으로 번역된 것이다. 이 《欽定訳聖書》를 만들기 위한 조직 구성원에는 랜슬롯 앤드루스(Lancelot Andrewes) 등이 있었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대표로 하는 과학과 종교의 양립적인 발전이 있었던 지적인 구성원들의 모임이 되기도 했다.
5. 5. 총신과 파벌
제임스 1세는 통치 기간 내내 재정적 압박에 시달렸다. 즉위 초기 왕실 직할 영지 수입은 연간 35만 파운드였으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 가치 하락이 재정 압박의 원인이었다. 왕실 수입은 늘었지만, 제임스 1세는 씀씀이가 컸고 재정 관리에도 능숙하지 못했다.[158] 1610년 2월, 로버트 세실은 의회에 왕실 소유지 10개를 양도하는 대가로 왕실 부채 탕감을 위한 60만 파운드 일시불과 연간 20만 파운드의 기금을 요구했으나, 의회는 승인을 미루며 협상을 이어갔다. 결국 제임스 1세는 1610년 12월 31일 의회를 해산했고, 세실은 이를 "폐하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비난했다.[159]1614년 소집된 의회는 9주 만에 해산되었다.[160] 제임스 1세는 1621년까지 의회 없이 통치했지만, 의회 동의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만들 수 없었기에,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상인 라이오넬 크랜필드를 고용하고 남작 등의 작위를 팔았다.
제임스 1세 치세의 잉글랜드는 평화롭고 세금이 낮아 안정적이었고, 사람들은 제임스 1세를 애도했다. 왕실 직할지 세금이 부족했기에 제임스 1세는 전매사업 세금과 무역세에 의존했고, 국가 간 분쟁을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대체로 국왕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사냥 등 여가 활동을 하며 정무를 등한시했고, 총신과의 스캔들로 왕실의 위엄이 훼손되었다.
솔즈베리 백작 사후, 제임스 1세는 직접 통치하려 했으나, 경험 부족과 파벌주의로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로버트 카, 서머싯 백작이 총애를 받았으나, 토마스 오버버리 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몰락하고, 조지 빌리어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제임스 1세는 남성 총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63]
1611년에는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 지방의 식민자를 보호하고, 아일랜드인의 반란에 대비하는 군대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잉글랜드 준남작 작위를 창설했다. 1619년에는 아일랜드에서도 판매를 시작했고, 제임스 1세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준남작 판매가 시작되었다.
6. 사망
1625년 초, 제임스 1세는 심각한 관절염, 통풍, 실신 발작에 시달렸고, 3월에는 삼일열로 심하게 아팠으며, 그 후 뇌졸중을 겪었다. 그는 허트퍼드셔의 시오벌즈 저택(Theobalds House)에서 3월 27일 심각한 이질 발작 중에 버킹엄 공작이 곁에 있는 가운데 사망했다.[85] 5월 7일에 거행된 제임스 1세의 장례식은 웅장했지만 무질서했다.[86] 링컨의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주교가 설교를 했는데, 그는 "솔로몬 왕은 약 60년을 살고 평화롭게 죽었고… 제임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다.[87]
제임스 1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그의 납관이 19세기 발굴 중 헨리 7세 납골당에서 발견될 때까지 무덤의 위치는 수년 동안 알 수 없었다.[88]
7. 사후
제임스는 널리 애도되었다. 그는 재코브 시대 동안 지속적인 평화와 비교적 낮은 세금을 누린 백성들의 애정을 상당 부분 유지했다. 켈리 백작은 "그가 평화롭게 살았던 것처럼 평화롭게 죽었고, 우리 왕(찰스 1세)이 그를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작의 기도는 헛된 것이었다.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은 권력을 잡자 일련의 무모한 군사 원정을 승인했고, 그 결과 수치스러운 실패로 끝났다.[89] 제임스는 사냥과 같은 여가 활동을 위해 종종 정부 업무를 소홀히 했으며, 스캔들로 얼룩진 궁정에서 후원자들에게 의존하게 된 것은 엘리자베스 1세가 공들여 구축한 존경받는 군주상을 훼손했다.
제임스 치하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한 울스터 식민이 시작되었고, 1607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과 1610년 뉴펀들랜드주 쿠퍼스 코브의 건설로 영국의 북미 식민이 시작되었다. 다음 150년 동안 영국은 대륙의 지배권을 두고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와 싸웠고,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종교적 분열은 4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제임스는 그의 왕국들의 단순한 동군연합 이상을 적극적으로 추구함으로써 통일된 영국 국가의 기초를 놓는 데 기여했다.
17세기 중반 반스튜어트 역사가들은 제임스의 정치적 절대주의에 대한 취향, 재정적 무책임, 그리고 인기 없는 총애하는 신하들의 등용이 잉글랜드 내전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제임스는 그의 아들 찰스에게 왕권 신수설에 대한 치명적인 믿음과 의회에 대한 경멸을 물려주었고, 이는 찰스 1세의 처형과 군주제의 폐지로 이어졌다. 지난 300년 동안 제임스의 평판은 제임스를 해고하고 1650년대에 제임스에 대한 논문을 쓴 앤서니 웰던의 신랄한 묘사로 인해 손상되었다.[90]
1650년대에 쓰여진 다른 영향력 있는 반 제임스 역사서로는 에드워드 페이트의 "스튜어트 왕가의 왕족의 신성한 파멸"(1652), 아서 윌슨의 "영국 역사, 제임스 1세의 생애와 통치"(1658), 프랜시스 오스본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왕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회상록"(1658)이 있다.[91] 데이비드 해리스 윌슨의 1956년 전기는 이러한 적대감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 역사가 제니 워멀드는 윌슨의 책이 "저자의 대상에 대한 증가하는 증오를 선포하는 모든 페이지를 가진 놀라운 광경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윌슨 이후, 스코틀랜드와 그의 영국 통치 초기의 제임스 정부의 안정성, 그리고 종교와 전쟁에 대한 그의 비교적 계몽적인 견해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이러한 비판의 전통으로부터 그의 명성을 구출했다.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대표하는 것은 폴린 크로프트의 2003년 전기이다. 평론가 존 크램시는 그녀의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크로프트는 제임스에 대해 전반적으로 혼합된 평가를 내린다. 그녀는 영국-스코틀랜드 연합과 같은 문제에 대한 그의 선의, 다른 관점에 대한 그의 개방성, 그리고 그의 왕국들의 재정적 수단 내에서 평화적인 외교 정책의 의제를 인정한다. 그의 행동은 다양한 백성들 사이의 마찰을 완화했다. 그러나 그는 특히 아일랜드에서 왕실의 이해 관계자들을 양극화시킨 식민지를 지지하고, 관대한 후원으로 충분한 정치적 이익을 얻지 못하고, 군주상에 대한 불행한 부주의(특히 이미지에 집착하는 엘리자베스의 통치 이후), 종교적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영국 교회 내에 아르미니우스파의 문을 연 친스페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에 불쾌한 종교적 변화를 강요하는 등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비판의 많은 부분은 찰스 1세에게 남긴 유산(현재 더욱 어려운 것으로 이해됨)을 포함하여 제임스의 통치에 대한 더 긴 관점에서 제기된다.[92]
8. 가계도
튜더 왕가와 스튜어트 왕가 가계도[101] | ||
---|---|---|
튜더 왕가 | 관계 | 스튜어트 왕가 |
헨리 7세 | 증외조부, 외증조모 | 존 스튜어트 |
마가렛 튜더 | 외조모, 증조모 | 제임스 4세 |
헨리 8세 | 외백부 | 제임스 5세 |
마가렛 더글러스 | ||
매슈 스튜어트 | ||
메리 1세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 외종고모, 외종숙 | 메리 |
헨리 스튜어트 | ||
제임스 6세 겸 1세 |
-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1세와 6촌 관계로, 항렬로는 할머니와 손자 사이였다.
9. 가족관계
제임스 1세의 왕비 덴마크의 앤은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그중 세 명이 성인이 되었다.[98]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헨리 프레더릭, 웨일스 공 | 1594년 2월 19일 | 1612년 11월 6일 | 장티푸스로 사망, 향년 18세.[98] |
엘리자베스, 보헤미아의 왕비 | 1596년 8월 19일 | 1662년 2월 13일 | 1613년 프레드릭 5세, 팔츠 선제후와 결혼. 향년 65세에 사망. |
마가렛 | 1598년 12월 24일 | 1600년 3월 | 향년 1세에 사망. |
찰스 1세 |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1625년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와 결혼.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음. |
로버트, 킨타이어 공작 | 1602년 1월 18일 | 1602년 5월 27일 | 향년 4개월에 사망.[99] |
메리 | 1605년 4월 8일 | 1607년 12월 16일 | 향년 2세에 사망. |
소피아 | 1606년 6월 | 1606년 6월 | 출생 후 48시간 이내에 사망.[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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