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다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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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젠다오성은 1934년 만주국에 의해 설치된 행정 구역으로, 지린성, 펑톈성의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설립되었다. 옌지에 성 공서가 설치되었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1943년에는 둥만총성의 관할이 되었고, 1945년 만주국 국무원의 직할이 되었으나, 만주국 붕괴와 함께 소멸되었다. 이후 소련군 점령, 임시 정부 수립, 국공 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길림성에 편입되었다. 주요 산업은 광업과 제조업이었으며, 여러 신사와 개척단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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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다오성 | |
---|---|
지도 | |
![]() | |
기본 정보 | |
이름 | 간도성 |
한자 | 間島省 |
병음 | Jiāndăo Shěng |
가타카나 | 젠다오 |
한국어 | 간도성 |
로마자 표기 | Gandoseong |
별칭 | 해당 없음 |
사용 명칭 | 해당 없음 |
이름 유래 | 해당 없음 |
행정 | |
국가 | 만주국 |
등급 | 성 |
주소 | 연길현 간도시 |
역사 | |
설치 | 1934년 |
폐지 | 1945년 |
이전 | 길림성 (만주국) 봉천성 |
이후 | 길림성 |
2. 역사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수립된 만주국은 1934년 12월 1일, 기존의 지린성 소속 4개 현(옌지현, 왕칭현, 훈춘현, 허룽현)과 펑톈성 소속 안투현을 통합하여 젠다오성(間島省)을 신설하였다. 성의 행정 중심지인 성공서(省公署)는 옌지현 옌지가(延吉街, 1943년 젠다오시(間島市)로 승격)에 설치되었다. 젠다오성은 주민 중 일본인과 조선인의 비율이 높은 특수한 지역이었다.
설치 이후 젠다오성은 몇 차례 행정적 변화를 겪었다. 1943년에는 둥만총성(東滿總省)의 관할로 편입되었으며, 1945년에는 만주국 국무원 직할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이 붕괴하면서 젠다오성 역시 자연스럽게 소멸하였다. 8월 20일, 소련군은 젠다오성 관리였던 윤태동을 내세워 '간도성 임시 정부'를 수립했으나[2][3], 11월 23일 해산하고 연변행정독찰 전원 공서(延邊行政督察專員公署)에 사무를 이관하였다[5]. 이후 이 지역은 국공 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지린성에 편입되었다.
2. 1. 만주국 이전의 간도 지역
1907년, 러일 전쟁에 협력한 북양 군벌의 봉천파(위안스카이, 장쭤린 등)가 만주(동삼성)의 총독에 취임하였다. 1909년, 청과 일본 사이에 간도 협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대한제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길림성 연길현 간도 지역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개발 등 주요 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1912년 신해혁명을 거쳐 위안스카이 등이 중화민국을 수립하였으나, 1919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중국은 군벌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장쭤린이 만주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926년 12월,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대원수에 취임하며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난징 사건과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국민 정부를 수립하고 북벌을 추진하며 장쭤린 정권과 대립했다. 1928년, 일본 정부와 난징 국민 정부 사이에 산둥 출병, 지난 사건 등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관동군은 만주국 수립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으며[1], 같은 해 6월 장쭤린 폭살 사건을 일으켜 만주 지역의 불안정을 심화시켰다.
1930년 5월 간도 공산당 폭동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 약 200명을 간도 만보산 지역에 이주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은 현지 중국 농민들과의 수리권 분쟁을 조장하였고, 일본 경찰이 직접 개입하여 양측의 대치를 격화시켰다. 1931년 7월, 결국 만보산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한반도 내 화교들에 대한 조선인 배척 사건으로까지 번졌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같은 해 9월, 일본 관동군은 봉천 인근에서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이는 이후 만주국 수립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2. 만주국의 간도성
1934년 12월 1일, 만주국은 지린성에 속해 있던 옌지현, 왕칭현, 훈춘현, 허룽현의 4개 현과 펑톈성의 안투현을 합쳐 젠다오성(間島省)을 신설했다. 성의 행정 중심지인 성공서(省公署)는 옌지현 옌지가(延吉街)에 설치되었으며, 이곳은 1943년 젠다오시(間島市)로 승격되었다. 당시 젠다오성 주민의 상당수는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다.1936년 2월호 잡지 『삼천리』에 실린 기행문 「창망한 북만주」에는 당시 옌지(연길)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연길시의 옛 이름은 국자가이다. 현재의 간도성의 수부이다. 종래에는 용정이 간도의 조선인의 중심이고, 연길은 중국인의 중심이다. 만주 사변 이후, 경도선(京圖線)이 개통되어 간도성의 수부가 연길시가 되었다." 같은 기행문에는 1935년 10월 말 기준 옌지의 인구가 만주인 15,263명(2,478호), 일본인 1,460명(465호), 조선인 9,229명(1,848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연길시는 신흥 도시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고 묘사했다.
젠다오성 설치 초기에는 조선인이 성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1936년 5월 기준 성공서 직원의 민족 비율은 중국인 35%, 조선인 33%, 일본인 32%였고, 같은 해 8월 17일에는 일본인 가나이 쇼지가 성장으로 취임했다. 1937년 12월부터 1940년 5월까지는 이범익이 성장 대리를 맡았다.
만주국 시기 젠다오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변화와 사건들이 있었다.
- 조선인 이주: 1937년 3월, 조선에서 제1차 간도 이민으로 약 19,900명이 이주했으며, 1938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농민의 지린성 및 젠다오성 이주 계획 실행에 착수했다.
- 교육 기관 개편: 1937년 영신 중학교가 간도성립 광명 국민학교로, 1939년 동흥 중학교와 대성 중학교가 통합되어 용정 국민학교로, 1942년 용정 은진 중학교가 간도성립 용정 제3국민학교로 개편되는 등 교육 체계가 변화했다.
- 간도 특설대 창설: 1938년 12월, 기존의 국경 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간도 특설대가 옌지현 명월진(明月鎭)에서 창설되었다. 같은 해, 젠다오 지구의 관할권이 조선군에서 관동군으로 이전되었다.
- 동북 3성 치안 숙정 공작: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동북 항일 연군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토벌 작전인 '동북 3성 치안 숙정 공작'이 전개되었다. 이 작전으로 동북 항일 연군 제1로군 사령관 양징위 등이 전사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1943년 10월, 젠다오성, 무단장성, 동안성(東安省)이 통합되어 둥만총성(東滿總省)이 설치되면서 그 관할 아래 들어갔다. 이후 1945년에는 만주국 국무원의 직할이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이 붕괴하면서 젠다오성도 자연 소멸하였다. 8월 20일, 소련군은 젠다오성 관리였던 윤태동을 내세워 '간도성 임시 정부'를 수립했으나[2][3],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11월 23일 해산을 선언하며 연변행정독찰 전원 공서(延邊行政督察專員公署)에 공식적으로 사무를 이관하였다. 해산 당시 간도 시 인구의 80%는 조선인이었다[5]. 이후 이 지역은 국민 정부군과 중국 공산당군 사이의 국공 내전 무대가 되었다.
1946년 소련군 철수 후,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군대는 구 야마토 보통학교 강당에 전(前) 젠다오성 고위 관리와 민간 유력자 등 약 180명을 소집하여 구금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 중 일부는 처형되거나 이른바 '노동 개조'에 동원되었으며, 이 사건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4·26 사건' 또는 '연길 보통학교 사건'으로 불린다[6].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면서, 옛 젠다오성 지역은 지린성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2. 3. 만주국 붕괴 이후
1945년 8월 만주국이 붕괴하면서 간도성은 자연스럽게 소멸하였다. 8월 20일, 소련 적군은 간도성 관리였던 윤태동을 지명하여 '''간도성 임시 정부'''를 세웠으나[2][3], 같은 해 11월 23일 해산을 선언하고 연변행정독찰 전원 공서에 정식으로 사무를 이관하였다. 해산 당시 간도시 인구의 80%는 조선인이었다[5]. 이후 이 지역은 국민 정부(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인민 해방군 사이의 국공 내전의 무대가 되었다(1949년까지).1946년 소련군이 철수한 뒤, 중공군은 4월 26일 구 야마토 보통학교 강당에 옛 간도성의 고위 관리와 민간 유력자 약 180명을 모아 구속하였다. 이들은 3개 소대로 나뉘었는데, 간부 27명으로 구성된 제1소대는 연길 감옥(현재의 연길 극장)에 수용된 후 모자산 등지에서 처형되었다. 제2, 제3 소대는 연길역까지 행진하여 열차에 태워져 안도 등에서 "노동 개조"를 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4·26 사건''' 또는 '''연길 보통학교 사건'''으로 불렸다[6].
1949년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주석으로서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하면서 간도성 지역은 길림성에 편입되었다. 국민 정부는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3. 행정 구역
4. 역대 성장
별도 언급이 없는 경우, 『세계 제국의 제도·조직·인사 : 1840-2000』에 따른다.
이름 | 재임 기간 |
---|---|
차이윈성 | 1934년 12월 1일 - 1936년 6월 16일 |
카나이 쇼지 | 1936년 8월 17일 - 1937년 11월 1일 |
키요하라 노리마스 | 1937년 11월 1일 - 1940년 5월 16일 |
칸키 마사카즈 | 1940년 5월 16일 - 1942년 8월 8일 |
키베 요헤이 | 1942년 8월 8일 - 1944년 4월 21일 |
스가와라 타츠로 | 1944년 4월 21일 - 1945년 4월 14일 |
쿠라우치 젠조 | 1945년 4월 14일 - (종전) |
5. 주요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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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명 | 소재지 | 주요 생산품/업종 | 비고 |
---|---|---|---|
노두구탄광공사 | 연길현 유서촌 노두구 | 석탄 | |
훈춘탄광 주식회사 | 훈춘현 영자구 | 석탄 | |
동만주철도 주식회사 | 훈춘현 훈춘가 | 철도 | |
동만주인견펄프 주식회사 | 연길현 광개촌 개산둔 | 펄프 | 1934년 설립 |
동양펄프 주식회사 | 왕청현 춘화촌 석현 | 펄프 | 1936년 설립. 일본 모직 주식회사의 자회사 |
대동주정 주식회사 | (소재지 정보 없음) | 아세톤, 부탄올 | |
만주소다 주식회사 | 연길현 도문가 | 소다 |
6. 성내의 신사
젠다오성 지역에는 일제강점기 및 만주국 시기에 일본 제국에 의해 여러 신사가 세워졌다. 주요 신사 목록은 다음과 같다.
신사명 | 제신 | 창립 연월 | 위치 (진좌지) |
---|---|---|---|
간도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25년 10월 | 용정가 |
조양천 신사 | 오오쿠니누시 | 1934년 9월 | 연길현 조양천 기무단 산 |
명월구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33년 6월 | 연길현 명월구 서산 |
두도구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33년 11월 3일 | 연길현 두도구 북산 |
개산둔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37년 9월 | 화룡현 광개촌 개산둔 |
연길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35년 9월 | 연길현 연길가 서산공원 |
영구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34년 3월 | 왕청현 대황구 |
백초구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29년 9월 18일 | 왕청현 백초구 |
도문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33년 6월 25일 | 도문 |
훈춘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37년 8월 | 훈춘현 |
아사히 신사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 1940년 10월 | 훈춘 아사히 개척단 |
방야 신사 | (정보 없음) | (정보 없음) | 왕청현 후하향 |
7. 성내의 개척단
1940년 5월 6일 (본대)
자료: 멀어져 가는 황야의 하늘 훈춘 아사히 개척단 회고록 (1982)
(아오모리 개척단장 겸임)
패전의 궤적이 풍화된다... (1981)
자료: 북변의 묘표 제4차 고하 의용대 개척단의 기록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