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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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혁명선언은 1922년 김원봉의 의뢰를 받아 신채호가 초고하고 유자명이 보좌하여 완성된 선언문이다. 의열단 결성, 주요 사건, 체포 및 압수, 그리고 관련 단체의 활동을 연표 형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배포되었으며, 황옥 경부 사건으로 압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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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선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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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 조선혁명선언 |
한자 | 朝鮮革命宣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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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련 사항 연표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의열단은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 직접 혁명 노선을 제시하며,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활발한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1935년 의열단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고, 신채호는 1936년 사망하였다. 1940년대에 조선민족혁명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이후 김원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다 1958년 숙청되었다.[2]
2. 1. 1910년대
1910년대는 일제강점기로, 3·1 운동 등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아직 "조선혁명선언"과 관련된 직접적인 내용은 없다.2. 1. 1. 1919년
1919년 11월,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여 총 13명으로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황상규, 김대지가 고문을 맡았다.[2]2. 2. 1920년대
1919년 11월,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황상규, 김대지가 고문을 맡았다. 의열단은 1920년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사건 등 여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신채호는 김원봉의 의뢰를 받아 "조선혁명선언"을 초고했으며, 의열단원 유자명이 이를 보좌하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조선혁명선언"이 배포되었다. 같은 해 종로경찰서 폭탄 사건, 황옥 경부 사건("조선혁명선언" 약 950부 압수), 박열, 가네코 후미코 체포(1925년 예심 조서에 "조선혁명선언" 첨부)등의 사건들이 있었다. 1924년에는 이중교 폭탄 사건이, 1926년에는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사건이 있었다. 1928년 신채호가 체포되었고, 의열단원에 의한 박용만 암살 사건이 있었다.[2]2. 2. 1. 1920년
1919년 11월, 김원봉을 단장으로 총 13명이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황상규, 김대지가 고문을 맡았다.[2]1920년 9월에는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 12월에는 밀양경찰서 폭탄 사건이 있었다.[2]
2. 2. 2. 1921년
1920년 9월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 12월 밀양경찰서 폭탄 사건에 이어, 1921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폭탄 사건이 발생하였다.[2]2. 2. 3. 1922년
1922년 3월, 의열단은 다나카 기이치 육군 대장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 2. 4. 1923년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조선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의 국민대표회의에서 "조선혁명선언"이 배포되었다.[2] 신채호가 초고를 작성하고, 의열단원 유자명이 보좌하였다.[2]같은 해 1월 12일, 종로경찰서 폭탄 사건이 발생하였다.[2] 3월 14일부터 16일에는 황옥 경부를 포함한 의열단원 18명이 체포되는 황옥 경부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폭탄 36개와 함께 "조선혁명선언" 약 950부가 압수되었다.[2]
9월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체포되었으며, 1925년 예심 조서에 "조선혁명선언"이 자료로 첨부되었다.[2]
2. 2. 5. 1924년
1924년 1월, 이중교 폭탄 사건이 일어났다.2. 2. 6. 1926년
1926년 12월, 나석주가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2]2. 2. 7. 1928년
1928년 5월, 신채호가 대만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의열단원 여러 명이 박용만을 암살했다.[2]2. 3. 1930년대
1935년 의열단이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고, 1936년 신채호가 사망하면서 조선혁명선언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가하였고,[2]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 취임하였으나, 1958년 숙청되었다.[2]2. 3. 1. 1935년
1935년 7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이 조선민족혁명당에 통합되었다.[2]2. 3. 2. 1936년
1936년 2월, 신채호는 뤼순 감옥에서 사망하였다.[2]2. 4. 1940년대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가했다.[2]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 취임했으나,[2] 1958년 11월에 숙청되었다.[2]
2. 4. 1. 1942년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가했다.[2]2. 4. 2. 1948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 취임하였다.[2] 그러나 1958년 11월에 실각하고 숙청되었다.[2]2. 5. 1950년대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 취임하였으나 1958년을 전후로 실각 및 숙청되었다.[2]2. 5. 1. 1958년
김원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국가검열상에 취임하였으나, 김두봉의 종북 행위 등을 이유로 비판받아 1958년 11월에 실각하였다. 이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참조
[1]
뉴스
이덕일의 천고사설 암살과 김원봉
http://www.hankookil[...]
Hankook-Ilbo
2015-08-20
[2]
뉴스
null
null
東亜日報
196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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