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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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진건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4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중인 집안 출신으로, 초기에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1924년 단편 〈운수 좋은 날〉을 발표하며 3인칭 시점의 사실주의 소설로 전환했다. 주요 작품으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B사감과 러브레터〉, 〈고향〉 등이 있으며, 장편 역사소설 《무영탑》, 《흑치상지》 등도 집필했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사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고, 현진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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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진건 - 현정건
현정건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참여,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32년 옥중에서 사망하여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현진건 - 현진건문학상
현진건문학상은 수도권 외 지역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상금과 상패를 수여하며, 현진건소설문학독후감 공모전과 현진건청소년문학상을 운영한다. - 일제강점기의 수필가 -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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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전영택은 1919년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화수분〉, 〈소〉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개신교 관련 간행물 발행, 중앙신학교 및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진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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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일 | 1900년 9월 2일 |
출생지 | 대구, 대한제국 |
사망일 | 1943년 4월 25일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작가 |
언어 | 한국어 |
작가 정보 | |
가족 |
2. 가계 및 가족 관계
연주 현씨는 역관(譯官) 등의 잡과(雜科) 출신을 많이 배출한 중인(中人) 집안이다. 현진건의 6대조부터 증조부까지 모두 역관으로 활약했다.[8] 할아버지 학표(學杓)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지냈고, 아버지 현경운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라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지냈다.[28]
현진건의 집안은 윤치호, 윤치영, 윤보선 집안과 이중으로 혼반관계를 형성하였다. 숙부 영운(映運)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아내 분남(粉男)을 통해 출세하여 대한제국 군령부 참장, 주일특명전권공사 등의 고위직을 거쳤다.[28] 다른 숙부들도 관직에 진출했다.
현진건의 친어머니 완산 이씨는 1910년 사망했고, 아버지 경운은 정선 전씨와 재혼했다. 큰형 홍건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 육군 참령을 지냈고, 둘째 형 석건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 셋째 형 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다.[31]
현진건은 5촌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입양되어 법적으로 6촌 형제가 되었다. 현보운은 관립 일어학교 출신으로 궁내부 번역관, 예식원 참리관 등을 지냈다.
장인은 이길우(李吉雨)로 진사였다. 두 살 연상의 아내 이순득에게서 얻은 두 딸은 어린 나이에 죽고, 셋째 딸 현화수는 박종화의 장남 박돈수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낳았다. 외손자 박동건은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인 | 이순득 | |
장녀 | 현경숙 | |
차녀 | 현애경 | |
삼녀 | 현화수 | |
사위 | 박돈수 | 박종화의 아들 |
외손자 | 박동건 |
현진건은 1900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라 생년월일이 9월 2일[2]과 8월 9일[3](음력)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보성고보와 일본 도쿄의 고등학교를 다녔고, 중국 상하이 호강대학(鎬江大學)에서 독일어를 공부했다.[3]
3. 생애
1920년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1921년)로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1922년 박종화, 홍사용, 박영희, 나도향 등과 함께 문예지 『백조』를 창간했다.[3] 조선일보, 시대일보,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4]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1년간 옥살이를 했다. 1940년 백제 장군 흑치상지를 연재했으나, 일제강점기 검열로 완성하지 못했다.[2]
1943년 4월 25일 사망했다.
3. 1. 초기 생애와 교육 (1900년 ~ 1919년)
현진건의 집안은 역관 등 잡과 출신을 많이 배출한 중인 집안이었다.[8] 6대조부터 몽골어 통역관이었던 현시석(時錫)까지 모두 역관으로 활약하였고, 증조부 현경민(敬敏)도 왜역으로 동래에 오랫동안 머물렀다.[8] 할아버지 현학표(學杓)는 무과에 급제하여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지냈다.[8] 아버지 현경운은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지냈으며, 집안은 윤치호, 윤치영, 윤보선 집안과 이중 혼반관계를 맺었다.
광무 4년(1900년) 대구부에서 현경운과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8]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였다.[8] 위로 세 형이 있었는데, 맏형 현홍건은 대한 제국 육군 참령과 외국어학교 부교관을 지냈고, 둘째 형 현석건은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셋째 형 현정건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섰다.[8]
1906년부터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여덟 살 때에 당숙이자 양아버지인 현보운(玄普運)이 세운 대구노동학교[9]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915년, 15세의 나이로 경주 향리의 부호인 진사 이길우(李吉宇)의 딸 이순득과 혼인하여 대구부 수정(竪町) 255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8] 그 해 11월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재학 중인 이듬해 7월에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8]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 이상화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8]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10]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8]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11],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沪江大學|호강대학중국어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12]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8] 서울로 상경,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다.[8]
3. 2. 문단 활동과 언론계 입문 (1920년 ~ 1935년)
1917년 현진건은 다시 귀국하여 대구에서 백기만, 이상화 등과 함께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으나,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10] 1918년 3월 다시 귀국하여,[11]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후장 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12]
1920년, 현진건은 양아버지 현보운의 동생 현희운의 소개로 11월 문예지 『개벽(開闢)』에 「희생화(犧牲花)」를 게재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보다 앞서 『개벽』에 번역소설 「행복」(아르치바세프 원작)과 「석죽화」(쿠르트 뮌체르 원작)를 발표하기도 했다. 자전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희생화」는 당시 문예평론가 황석우로부터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하등 예술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무명 산문"[13]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희생화」를 발표할 때부터 현진건은 '빙허'라는 아호를 사용했는데, 1915년 혼인 후 1916년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이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회고했다. '허공(虛空)에 의지한다'는 뜻의 이 아호는 다소 허무주의적 표현이 없지 않지만, 그의 심경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송나라 문인 소식의 《적벽부(赤壁賦)》 중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서(浩浩乎! 憑虛御風而)..."라는 구절에서 영향을 받아 '빙허'를 아호로 정했다고 한다.[14] 1920년 11월, 현진건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1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15] 같은 해 11월에는 『개벽』에 단편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했고, 1922년 1월부터 4월까지는 『개벽』에 중편소설 「타락자」를 발표하였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풍자하였다.
이전부터 휘문고등학교 출신의 젊은 문인 박종화, 나빈,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등과 함께 잡지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개벽』과 『백조』 두 잡지를 오가며 작품을 발표했다. 『백조』 창간호에는 수필 「영춘류(迎春柳)」, 2호에는 단편소설 「유린」, 그리고 기행문 「몽롱한 기억」을 기고했다. 같은 해 7월에는 『개벽』에 번안소설 「고향」(치리코프 원작)과 「가을의 하룻밤」(고르키 원작)을 발표하였다.
3. 3. 일장기 말소 사건과 투옥 (1936년 ~ 1937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운 채 신문에 실은 사건(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했다.[24]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했다.[24]
3. 4. 투옥 이후의 삶과 죽음 (1937년 ~ 1943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다.[24]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종로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24]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24]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25]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도쿄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가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흑치상지」는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불과 58회만에 강제 중단되었고, 이어 그의 작품집인 「조선의 얼골」까지 총독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판매가 금지된다. 원고료에 양계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현진건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기미(期米) 사업을 시작하지만, 1940년에 당시 명동에 있던 증권회사에 미두를 투자했다가 그것이 모두 실패하면서[27] 양계장이나 다른 재산, 부암동에 있던 집도 처분하고 신설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의 조그만 초가집(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 137번지 61호)으로 이사해야 했다. 이 실패로 현진건은 더욱 술에 빠져 살게 되었고 결국 '혈압' 때문에 쓰러져 눕게 되었다.[27] 이 해에 현진건의 단편소설과 역사소설 「무영탑」이 박문서관에서 「현진건 단편집」과 「무영탑」으로 발간되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기자였던 양재하가 만든 친일잡지인 『춘추』 4월호에 소설 「선화공주」를 연재하지만 9월호에서 중단하였다(미완).
1943년에 지병이었던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경성부 제기동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44세.(공교롭게도 현진건의 동향이자 문우였던 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위암으로 대구에서 별세하였다.)
4. 작품 세계
현진건은 현실적인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운수 좋은 날」을 시작으로 1인칭 서술 방식의 고백적 형식을 버리고 3인칭 시점으로 전환하여 객관적이고 생생하게 삶을 묘사하려 했다. 1931년 마지막 단편소설 「주먹 쥐고 범하는 도둑」을 발표하고 장편 역사소설로 전향하여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 등을 집필했다.[1]
- 희생화|犧牲花한국어 (1920)
- 빈처|貧妻한국어 (1920)
- 술 권하는 사회한국어 (1921)
- 타락자|墮落者한국어 (1922)
- 유린|蹂躪한국어 (1922)
- 지새는 안개한국어 (1923)
- 할머니의 죽음한국어 (1923)
- 까막잡기한국어 (1923)
- 그립은 흘긴 눈한국어 (1924)
- 운수 좋은 날한국어 (1924)
- 불한국어 (1924)
- B사감과 러브레터한국어 (1924)
- 새빨간 웃음한국어 (1925)
- 사립정신병원장한국어 (1925)
- 신문지와 철창한국어 (1926)
- 적도|赤道한국어 (1940)
- 흑치상지|黑齒常之한국어 (1940~, 미완)
- 무영탑|無影塔한국어 (1941)
4. 1. 초기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로의 전환
현진건은 현실적인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운수 좋은 날」을 시작으로 1인칭 서술 방식의 고백적 형식을 버리고 3인칭 시점으로 전환하여 객관적이고 생생하게 삶을 묘사하려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불」, 「B사감과 러브레터」, 「고향」 등 대표작을 썼다. 1931년 마지막 단편소설 「주먹 쥐고 범하는 도둑」을 발표하고 장편 역사소설로 전향하여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 등을 집필했다.[1]4. 2. 역사소설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1년간 복역한 후, 현진건은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장편 역사소설 무영탑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39년 2월 7일)[24] 1939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 역사소설 흑치상지 연재를 시작하며 문예지 「문장」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소설들에 대해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경계했다.[25]같은 잡지에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일제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흑치상지는 58회 만에 강제 중단되었고, 작품집 「조선의 얼골」은 '금서'로 지정되어 판매 금지된다. 이후 그는 장편 역사소설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 등을 집필했다.
4. 3. 주요 작품 목록
제목 | 장르 | 발표 연도 |
---|---|---|
빈처 | 단편소설 | 1921년 |
술 권하는 사회 | 단편소설 | 1921년 |
운수 좋은 날 | 단편소설 | 1924년 |
《까막잡기》 | 단편소설 | 1924년 |
B사감과 러브레터 | 단편소설 | 1925년 |
할머니의 죽음 | 단편소설 | 1925년 |
《불》 | 단편소설 | 1925년 |
《고향》 | 단편소설 | 1926년 |
《무영탑》 | 장편소설 | 1938년 |
《적도》 | 장편소설 | 1939년 |
《흑치상지》 | 연재소설 | 1939년 |
5. 사후 평가 및 기념 사업
2005년 3월 1일에 대통령 표창장이 추서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다. 2009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현진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6. 일화
- 술에 관한 일화가 적지 않다. 하루는 『조선문단』에 함께 작품을 기고하던 염상섭, 김동인, 나도향, 양주동 등과 잡지사에 모였다가 저녁에 술을 마셨는데, 술에 취해 저마다 "나는 조선의 괴테가 될 테니 자네는 (조선의) 톨스토이가 되게", "나는 베르렌이 될테니 너는 체홉이 되라" 등의 주정을 늘어놓으면 곧잘 "그놈의 톨스토이, 괴테 좀 집어치우시오" 하고 큰소리치곤 했다.[33]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명월관에서 있었던 사원들끼리의 송년회식 자리에서 「동아일보」 사장에게 "이 놈아, 먹어, 먹으라고."하며 술을 권하다가 급기야 뺨까지 때렸다. 하지만 사장은 현진건을 내치지 않았다고 한다.[34] (다만 이때 현진건에게 뺨을 맞았던 동아일보 사장이 송진우였는지 김성수였는지는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다).
- 1932년 7월 1일자 『삼천리』 기사에서, '만일 금주법이 실시된다면'이라는 질문에 "돈이 없어서 못 먹으니 차라리 끊어 버리는 것도 나을 듯 싶어서 벌써부터 끊으려고 하는데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날 보고 애주가로 인증하니 참 딱한 일입니다. 우선 귀사에서도 많은 인사를 제쳐 놓고 나에게 물어 보시는 것은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구태여 물어보시는 줄 암니다. 혹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배운 재주라 그렇케 쉽게 버릴까 하는 것도 의문은 됩니다. 정, 먹고 싶으면 카포네 노릇이나 해야 먹게 될 줄 압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 "글 친구보다 술친구가 많으신 것 같았다"고까지 술회될 정도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씩 술 마시고 밤새워 글을 썼고, 글 쓰는 동안만은 식구들도 숨도 못 쉬게 굴었다고 한다.[35]
-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우승규의 술회에 따르면, 1936년의 물난리(병자년 수해)에 수재의연금을 모으러 동지들과 창의문 밖에서 가진 모임에서, 술이 취하여 "일본인한테 기대지 말고 우리끼리 자족자구(自足自求)하자고."하고 기염을 토하다가 공교롭게도 옆에 있던 일본 경찰로부터 주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을 '일본인'이라 부르지 말고 '내지인(內地人)'이라 부를 것을 강요했고 그러지 않는 자는 소위 '불령선인'으로 몰았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내지인'이라고 쓰고 그 위에 '일본'이라는 두 글자를 적었던 것이다)[36]
- 부부생활과 관련해서는, 지인 대부분이 "아내만을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실 그 시절에 부인 외의 다른 여자와 연애하며 따로 살림을 차리기까지 하는 일은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김동인처럼 아예 자기 아내를 버리고 평양에서 서울로 거처까지 옮겨서 기생집을 전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기만은 "자기보다 두 살 더 먹은 아내를 일생을 두고 한결같이 사랑하였을 뿐이요, 다른 여자하고는 깊은 관계를 맺은 일은 없었다"고 했으며, 방인근은 "요릿집에서 술자리를 같이 할 때, 기생이 옆에 와서 지근덕거리면 미남에다가 신문기자라면 기생들이 홀딱 반해서 덤벼드는 시절이니 그러면 빙허는 좋아하는 체 대꾸를 하면서도 쌀쌀하게 범접치 못할 기상으로 난잡하게 굴지 않는다"고 회고하고 있다. 현진건의 아내 이순득도, 남편이 아침에 새로 입고 나간 황라 두루마기와 비단 마고자가 술 때문에 엉망이 되어 들어와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37]
- 처가가 경주에서 알아주는 부호였지만 정작 본인은 집이 가난했기에 처가에서 보내주는 것으로 생계를 잇곤 했으며, 처갓집에 간 아내가 구박을 받고 처남댁이 부자 행세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주인공이 분노한다는 「빈처」는 바로 그의 아내를 모티브로 쓴 것이라고 한다. 이후로도 글을 쓰는 중간중간에 멈추고 아내에게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35]
- 유일하게 살아남은 외동딸 현화수를 귀여워한 반면 엄하게 교육시켜, 딸에게 극장 출입도 엄금했을 뿐 아니라 어려운 살림을 돕겠다며 취직하는 딸을 한사코 반대하였고, 가졌던 많은 장서들도 딸에게는 소설 한 권 읽지 못하게 했을 정도라고 한다. (장서들은 모두 고려대학교에 기증되었다)[35]
- 1936년 전 동아일보 사장 우승규의 회고에 따르면, 창의문 밖에서 동지들과 수해 의연금을 모으는 자리에서 현진건은 구토를 하면서 "일본에 기대지 말고 우리 스스로 살아남자"라고 말했는데, 안타깝게도 옆에 있던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스스로를 '내 동포'라고 부르도록 강요했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른바 '부정선진'으로 몰았다. 그래서 그는 공개적으로 '내 동포'라고 적고 그 위에 '일본'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5]
참조
[1]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klti.or.kr/ke[...]
[2]
서적
Flowers of Fire: Twentieth Century Korean Stories
[3]
웹사이트
한국문학번역원
http://www.klti.or.k[...]
2010-08-10
[4]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5]
뉴스
'대수재와 일제감시'
1974-11-08
[6]
기타
[7]
웹사이트
링크
https://news.naver.c[...]
[8]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
[9]
기타
[10]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11]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12]
뉴스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① 현진건의 딸이자 박종화의 며느리 玄和壽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4-12
[13]
간행물
희생화와 신시를 읽고
1920-12
[14]
간행물
雅號의 由來(2)
1930-05-01
[15]
간행물
憑虛君의 『貧妻』와 牧星君의 『그날밤』을 읽은 印像
1921-05-01
[15]
간행물
文壇의 一年을 追憶하야 現狀과 作品을 槪評하노라
1923-01-01
[16]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16]
간행물
빙허 현진건 군(君)
1954-10
[17]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18]
간행물
文壇風聞
1923-01-01
[19]
간행물
文壇雜談
1925-03-01
[20]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21]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22]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23]
간행물
각 방면 명사의 일일생활
1928-12
[24]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25]
간행물
침묵의 거장 현진건 씨의 문학종횡담
1939-11
[26]
간행물
역사소설문제
1939-12
[27]
간행물
새 자료로 본 빙허의 생애
1973-04
[28]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8
[29]
기록
각사등록
1902-07-28
[30]
기록
승정원일기
1902-06-24
[31]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32]
서적
박종화의 삶과 문학, 문학산책,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33]
뉴스
방인근과 조선문단
경향신문
1983-12-24
[34]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35]
뉴스
憑虛 玄鎭健 無男獨女 玄和壽 女士를 찾아-故人回憶-
조선일보
1961-10-03
[36]
뉴스
大水災와 日帝監視
동아일보
1974-11-08
[37]
서적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도서출판 역락
[38]
웹사이트
사라지는 문학의 고향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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