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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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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창원은 영사 조말생의 후손이자 호조판서 조존성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아버지 조존성을 따라 종군했다. 이항복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1612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인조반정 이후 형조 좌랑을 시작으로 직산현감, 군자감정, 여산군수 등을 역임했고, 1638년에는 딸이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로 간택되면서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46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명을 찬했다.

2.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인조의 국구(國舅)이다. 영사(領事)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이며, 호조판서를 지낸 조존성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였고, 아우 조계원과 함께 이항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1601년 별좌(別坐), 의금부 도사 등을 지냈으며 1612년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615년 아버지 조존성이 신경희의 옥사[1]에 연루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아버지를 봉양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형조좌랑으로 복직하였다. 이후 1631년 직산현감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쌓았고, 군자감정, 여산군수, 인천부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1638년 그의 셋째 딸이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로 간택되면서 국구(國舅)가 되었다. 이에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었다가[2], 왕비의 명호가 정해진 후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고, 부인 최씨는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 되었다.[3]

1646년 향년 64세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며[4], 사후 서인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그의 묘는 본래 양주에 있었으나 여러 차례 이장되었고, 현재 정확한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5]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천성 부근 남산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었으나 묘는 찾지 못했고,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실제 묘로 추정되는 묘가 있다.

대사간 최철견의 딸인 전주 최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조윤석(趙胤錫)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고, 장녀는 신흠의 아들 신익전과 혼인하였고, 그 딸이 인조의 서장자 숭선군의 부인인 영풍군부인 신씨이다. 셋째 딸이 장렬왕후이다.

2. 1. 초기 생애와 임진왜란 종군

영사(領事)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으로, 호조판서와 중추부지사를 지낸 조존성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세의 나이로 아버지 조존성을 따라 종군하였다. 아우 조계원 (신흠의 사위, 조사석의 부친)과 더불어 이항복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음서로 출사하여 1601년(선조 34) 별좌(別坐),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5년 신경희의 옥사[1]에 아버지 조존성이 연좌되어 화를 입자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와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2. 2. 음서 출사와 진사시 합격

영사(領事)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이며, 호조판서와 중추부지사를 지낸 조존성(趙存性)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세의 나이로 아버지 조존성을 따라 종군하였다. 아우 조계원(신흠의 사위이자 조사석의 부친)과 함께 이항복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1601년(선조 34) 별좌(別坐),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이후 1612년(광해군 4년)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615년 신경희의 옥사[1]에 아버지 조존성이 연좌되어 화를 입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모셨다.

2. 3. 인조반정 이후 관직 복귀와 지방관 생활

1623년(광해군 15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형조 좌랑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1631년(인조 9년)에는 직산현감(稷山縣監)으로 부임하여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 후 중앙 관직인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다시 지방관인 여산군수(礪山郡守)와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했다.

2. 4. 장렬왕후의 아버지, 국구로서의 삶

1638년(인조 16) 10월 26일, 인조의 계비를 뽑는 삼간택에서 셋째 딸(장렬왕후 조씨)이 최종 간택되어 왕비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창원은 먼저 돈녕부 도정에 임명되었다.[2] 이후 왕비의 명호가 정해진 같은 해 11월 1일,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내인 최씨는 완산부부인이 되었다.[3] 이로써 그는 국구(國舅), 즉 왕의 장인이 되었다.

1646년(인조 24) 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4] 사후에는 서인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그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2. 5. 사망과 사후

1646년(능양군 24) 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다.[4] 사후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3. 묘소

사후 본적인 양주에 장사되었다. 현종 4년(1663년)에 부인 최씨가 사망하자 금천(金川)으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가, 현종 9년(1668년) 왕명에 따라 용인 동침동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이후 고종 37년(1900년)에 새로 조성하는 능의 해자(垓字) 구역 안에 있는 무덤들을 옮기면서 다시 이장되었는데[5], 이후의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현재 조창원 부부의 무덤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의 오천성(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부근 남산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었으나 묘는 찾지 못하였고, 실제 묘로 추정되는 또 다른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다.

4. 가족 관계

영사(領事)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이며, 호조판서와 중추부지사를 지낸 조존성(趙存性)의 아들이다. 아우는 조계원(趙啓遠)이다.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인 전주 최씨와 혼인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그의 3녀가 인조의 계비가 된 장렬왕후이다. 장렬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자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고, 부인 최씨는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 되었다.[2][3]

장남 조윤석(趙胤錫)은 1642년(인조 20년) 진사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고 여러 음직을 거쳐 1656년(효종 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등을 지냈다. 조윤석의 두 번째 부인인 신 안동 김씨는 부사 김수인(金壽仁)의 딸이다. 김수인은 서인 산당의 김광현의 아들이자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외종오빠이며, 소현세자의 빈 민회빈 강씨의 오빠인 강문명(姜文明)의 처남이다.

장녀는 인조반정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신흠의 차남 신익전(申翊全)과 혼인했다. 신익전은 선조의 부마 신익성의 동생이다. 조창원의 장녀와 신익전 사이의 5남 3녀 중 차녀가 인조의 서장자 숭선군의 부인인 영풍군부인 신씨이며, 영풍군부인은 동평군의 어머니이다. 차녀는 현감 한정상(韓鼎相)에게 시집갔다.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조부조남(趙擥)
부친조존성(趙存性)1554 ~ 1628지돈녕부사, 증 영의정
모친용인 이씨이신충(李藎忠)의 딸
조종원(趙宗遠)1574 ~ ?
여동생조순완(趙順婉)1587 ~ ?
남동생조계원(趙啓遠)1592 ~ 1670신흠의 사위, 조사석의 부친
부인완산부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1583 ~ 1663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
장녀조수임(趙壽任)1607 ~ ?
사위신익전(申翊全)1605 ~ 1660신흠의 차남, 신익성의 동생. 딸이 영풍군부인 신씨(숭선군의 처, 동평군의 모친)[6]
장남조윤석(趙胤錫)1615 ~ 1664승지 역임
자부대구 서씨첨지(僉知) 서경빈(徐景霦)의 딸
자부신 안동 김씨부사(府使) 김수인(金壽仁[7])의 딸, 김광현의 손녀, 인선왕후의 외종질녀
차녀조종임(趙終任)1623 ~ ?
사위청주 한씨 한정상(韓鼎相)현감 역임
3녀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1624 ~ 1688인조의 계비
사위인조1595 ~ 1649조선 제16대 국왕


5. 신도비명

조창원이 세상을 떠난 후, 우암 송시열이 그의 공적과 생애를 기리기 위해 신도비명을 지었다.[4]

신도비명에는 인조장렬왕후를 계비로 맞이하게 된 경위가 담겨 있다. 당시 왕비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자 여러 신하들이 덕망 있는 가문의 규수를 왕비로 맞이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이에 인조조존성의 손녀이자 조창원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장렬왕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아버지 조창원은 돈녕부 도정을 거쳐 보국숭록대부 한원부원군 영돈녕부사에 봉해졌다. 조창원은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되었음에도 교만하지 않고 늘 조심스럽게 처신했다고 비문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도비명은 조창원의 생애와 인품을 상세히 묘사한다. 그는 재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신중하고 온후했으며, 1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기도 했다. 광해군 시절 정치가 혼란하고 아버지 조존성이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아버지를 모셨다. 인조반정 이후 형조좌랑으로 관직에 복귀하여 공정하게 옥사를 처리했으며, 직산현감과 여산군수로 재직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특히 직산현감 시절에는 세금을 감면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떠났던 백성들이 돌아오게 했으며, 여산군수 시절에는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여 지역을 안정시켰다. 인천부사로 재직하던 중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다.

비문은 조창원의 성품이 진솔하고 성실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고 평가한다. 관직에 있을 때는 인자함과 위엄을 함께 갖추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근민 사무(近民使無, 백성을 가까이하고 부림을 없게 한다)"라는 글귀를 집무실에 걸어두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드러냈으며, 국구로서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집안을 엄격하게 단속했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신도비명에는 조창원의 가계, 부인인 완산부부인 최씨의 현숙함, 아들 조윤석과 사위 신익전, 한정상, 그리고 딸인 장렬왕후 등 자녀들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송시열은 조창원의 겸손하고 청렴한 덕행이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평가하며 비문을 마무리했다.

참조

[1] 문서 광해군을 폐위하고 조선 인조|인조의 아우인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모반 사건
[2] 간행물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 10월 26일 을묘 1번째기사
[3] 간행물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 11월 1일 기미 1번째기사
[4] 간행물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2월 30일 정미 1번째기사
[5] 간행물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9월 21일 양력 1번째기사
[6] 문서 신흠의 차남
[7] 문서 김광현의 아들, 인선왕후 장씨의 외종 오빠, 김수항의 재종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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