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르바루의 환희는 1997년 11월 16일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서 열린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일본이 이란을 3-2로 꺾고 월드컵 본선에 처음 진출한 경기를 일컫는다. 이 경기는 골든 골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오카노 마사유키가 연장 후반 13분에 결승 골을 넣어 일본의 승리를 확정했다. 이 경기는 일본 축구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골든 골 방식으로 월드컵 출전을 결정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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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FIFA 월드컵 예선 -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은 36개 팀이 참가하여 3.5장의 본선 진출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3라운드 예선을 거쳐 최종 예선 각 조 1위는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고, 2위는 플레이오프를 통해 진출 팀을 가려 대륙간 플레이오프 기회를 얻었다.
1998년 FIFA 월드컵 예선 - 1998년 FIFA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 1998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이란과 오스트레일리아가 맞붙은 대륙간 플레이오프는 합계 3-3 동률 상황에서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이란이 승리하여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며, 2차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가 2-0으로 앞서다가 동점을 허용하면서 '멜버른의 비극'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1998년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회는 이전 미국 대회에 비해 출전국 수가 24개국에서 32개국으로 늘어났고,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출전권 역시 2장에서 최대 3.5장으로 증가했다. 아시아 최종 예선은 10개 팀이 A조와 B조로 나뉘어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리그전을 치러 각 조 1위 팀은 본선에 직행했다. 각 조 2위 팀은 3위 결정전(AFC 플레이오프)을 통해 승리 팀이 본선 출전권을 얻고, 패배 팀은 오세아니아 지역 1위 팀과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1]
당초 최종 예선은 집중 개최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고, 사우디 아라비아 등 서아시아 국가들은 바레인 개최를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 축구 협회는 중동 개최의 불리함을 우려하여 중국, 한국,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함께 말레이시아 개최를 주장했다. 결국 1996년 7월 21일 FIFA 총회에서 월드컵 조직위원회 레나르트 요한손 위원장은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변경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경기 수는 두 배로 늘어났고, 경기 간격은 2~3일로 매우 짧아졌으며, 개최 기간도 2개월 반으로 연장되었다. J리그는 리그를 중단하지 않고 대표 선수 없이 경기를 진행하는 특례 조치를 취했다.[2]
최종 예선 일정은 9월 초부터 11월 중순까지 1주일 간격으로 총 10경기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A조는 B조보다 1주일 늦게 시작) 각 조 5개 팀은 다른 4개 팀과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총 8경기를 치렀고, 승점(승리 3점, 무승부 1점, 패배 0점)으로 순위를 결정했다.[3]
정규 시간 90분 내에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전후반 15분씩 연장전을 치르고, 여기서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승부차기를 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연장전에서는 골든 골 제도가 적용되어 골이 터지면 즉시 경기가 종료되었다. 3위 결정전(AFC 플레이오프)에서도 골든 골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4]
일본은 초반 우즈베키스탄과의 홈경기에서 6-3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후 아랍에미리트 원정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특히 9월 28일 홈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경기(도쿄 대첩)에서는 후반 막판 서정원과 이민성에게 연속골을 허용하며 1-2로 역전패했다.[8] 이 경기는 일본 축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으며,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신진당은 이러한 패배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이후 카자흐스탄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부진이 이어지자, 일본 축구 협회는 가모 슈 감독을 경질하고 오카다 다케시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켰다.[9] 오카다 감독은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극적인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이끌어냈고, 이후 팀을 재정비하여 아랍에미리트와의 홈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11월 1일, 서울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원정 경기에서는 이미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한국을 상대로 2-0 완승을 거두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10] 최종전인 카자흐스탄과의 홈경기에서는 5-1 대승을 거두며 최종 예선 B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A조는 중동 4개국과 중국의 조합으로, 전 대회 16강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강호 이란이 소속되어 있었다. 당초 이란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7차전 원정 경기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0-1로 패배하고, 8차전 홈 경기에서 쿠웨이트와 0-0으로 비기고, 9차전 원정 경기에서 카타르에 0-2로 패배하면서 승점을 추가하지 못했다. 이란은 최종 10차전 경기가 없어 승점 12점으로 잠정 선두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11월 12일에 열리는 10차전 사우디아라비아(승점 11)-카타르(승점 10)전이 무승부로 끝나면,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승점이 같아지지만 골득실차로 1위가 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라도 승리할 경우, 다른 한 경기인 중국 대 쿠웨이트가 어느 한쪽의 대승으로 끝나지 않는 한 이란은 2위가 되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대 카타르의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이 경기에서 1-0으로 이긴 사우디아라비아가 1위로 본선 출전권을 획득했고, 이란은 2위로 떨어져 3위 결정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A조 2위가 결정될 때까지 일본에서는 3위 결정전 상대가 사우디아라비아가 더 수월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예상과는 달리 3위 결정전을 다툴 상대는 이란이 되었다.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B조 2위가 아랍에미리트로 예상됨에 따라, 제3 대표 결정전은 바레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축구 협회는 이동 거리와 기후 조건에서 불리하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AFC는 서아시아 팀끼리 대결할 경우 바레인, 동아시아 팀끼리 대결할 경우[13]대한민국, 서아시아 대 동아시아 팀의 대결일 경우 말레이시아(이슬람교 국가이며, AFC 본부가 있음)에서 개최하는 안을 제시했다. 일본 축구 협회의 오구라 준지는 이란 회장에게 전화하여 말레이시아 개최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이란은 시아파 국가이고, 바레인은 수니파가 국정 실권을 잡고 있어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란 측은 바레인보다 말레이시아 개최를 선호했다.[4]
일본 축구 협회는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경기장을 희망했지만, 11월 16일은 말레이시아 컵 개최로 인해 사용이 불가능했다. 대신 말레이시아 축구 협회는 말레이시아 컵에서 탈락한 팀의 홈 경기장인 조호르바루의 라르킨 스타디움을 제안했다.[4]
이란은 일본보다 3시간 30분 늦은 시차와 36시간에 달하는 비행시간으로 인해 컨디션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행기 지연으로 인해 조호르바루 도착이 6시간이나 늦어지면서 선수들의 컨디션은 더욱 악화되었다.[14] 반면, 일본은 제3 대표 결정전 진출이 먼저 확정되어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일본 기업과 일본인 학교의 지원을 받으며 홈 경기와 같은 환경에서 훈련할 수 있었다.[15]
경기 이틀 전, 이란 선수들은 코란을 크게 틀거나 일본 선수 옆에서 런닝하는 등 도발적인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대표 트레이너 나미키 마사미츠는 이란 선수들이 이미 지쳐있음을 간파했다.[14]
4. 1. 경기 진행
경기는 전반 39분, 나카타 히데토시의 스루 패스를 받은 나카야마 마사시가 GK아흐마드 레자 아베드자데의 옆을 꿰뚫는 슈팅으로 선제골을 기록하며 일본이 앞서나가기 시작했다.[16] 전반전은 일본이 1-0으로 리드한 채 종료되었다.
하지만 후반전 시작 25초 만에 알리 다에이의 슈팅 후 흘러나온 공을 호다다드 아지지가 밀어 넣으며 이란이 동점을 만들었다.[16] 후반 14분에는 알리 다에이가 헤딩 슈팅으로 추가 득점에 성공하며 이란이 2-1로 역전에 성공했다.[16]
후반 18분, 일본의 오카다 감독은 미우라 가즈요시와 나카야마 마사시를 대신해 조 쇼지와 로페스 와그너를 투입하고, 동시에 3백으로 전술을 변경했다.[16] 이 전술 변화는 후반 31분, 나카타 히데토시의 크로스를 조 쇼지가 헤딩으로 연결하며 동점 골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냈다.[16]
시간이 흐르면서 이란 선수들은 활동량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지만, 양 팀 모두 추가 득점에는 실패하며 후반전이 종료되었다. 경기는 득점이 나오는 즉시 종료되는 골든골 방식의 연장전에 돌입했다.
이란 역시 반격했지만, 알리 다에이의 슈팅이 골대를 넘어가는 등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 승부차기가 가까워지던 연장 후반 13분, 로페스 와그너가 중앙에서 공을 빼앗아 나카타 히데토시에게 연결했고, 나카타 히데토시는 드리블 후 중거리 슈팅을 시도했다. 아흐마드 레자 아베드자데가 쳐낸 공을 오카노 마사유키가 슬라이딩하며 밀어 넣어 골든 골을 기록했다.[16]오카노 마사유키는 훗날 당시 상황을 "이걸 놓치면 이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회상했다.
경기 종료 시의 스코어보드
결국 일본은 극적인 골든 골로 월드컵 본선 첫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는 1954 FIFA 월드컵 예선 참가 이후 43년 만이자 10번째 도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월드컵 예선 및 본선에서 '골든 골 방식'이 채택된 것은 1998년 프랑스 대회와 2002 FIFA 월드컵뿐이었으며, 2004년부터는 연장 전후반을 모두 실시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골든 골 방식으로 월드컵 출전을 결정지은 유일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한편, 이 경기에서 패배한 이란은 오세아니아 지역 대표 호주와의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이 경기는 일본에서 높은 관심을 받아, 지상파 후지 TV와 위성 방송 NHK-BS1에서 생중계되었다. 특히 후지 TV는 심야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47.9%의 높은 평균 시청률을 기록했다. 오카노의 골든 골 순간, 후지 TV 해설 시미즈 히데히코는 "해냈다!"라고 외쳤고, 실황 나가사카 테츠오는 "마지막은, 오카노오~!! 일본, 이겼다! 일본 이겼다! 월드컵!!"이라고 외쳤다. 닛폰 방송의 모로오카 마사오 역시 "오카노다~! 오카노! 오카노!"라고 절규했다. 다음 날, 일본 언론들은 "일본 전역이 환희했다"라는 문구로 이 승리를 대서특필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나카타 히데토시는 침착하게 "대표팀은 잘 분위기를 띄웠으니, 이제 J리그를 어떻게든 흥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J리그에 대한 관심을 부탁했다.[20]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서브 캐스터 코미야 에츠코와 축구 코너 담당 카와히라 지에이가 기쁨을 전했다.[21] 코미야는 현지에서 직접 관전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22] 오카노의 골든 골 순간에는 너무 흥분해서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카와히라는 지유가오카의 스포츠 바에서 형인 존 카비라와 함께 경기를 보면서 일본의 승리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일본에) 태어나서 다행이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외쳤다. 마지막에는 바의 손님들과 함께 "'''일본 축구의 여명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23]
5. 경기 이후
이 경기는 대한민국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다. 지상파 및 케이블 TV 채널을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많은 축구 팬들이 늦은 시간까지 경기를 시청하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를 지켜보았다. 특히, 일본이 이란을 꺾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순간, 대한민국 축구 팬들과 언론은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일부 팬들은 일본의 승리에 대해 실망감과 좌절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도 기회가 남아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언론들은 일본의 승리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는 공식적인 논평을 자제했지만, 당 내부에서는 일본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대한민국 축구계에 긍정적인 자극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 경기는 한일 양국 축구 경쟁 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통해 경쟁 의식을 더욱 불태우게 되었고, 이는 대한민국 축구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또한, 양국 축구 팬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스포츠를 통한 양국 간의 우호 증진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5. 1. 일본 내 영향
이 경기는 지상파 후지 TV (실황: 나가사카 테츠오, 해설: 시미즈 히데히코[19]), 위성 방송 NHK-BS1 (실황: 야마모토 히로시, 해설: 마츠키 야스타로)에서 생중계되었다. 일요일 심야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후지 TV의 평균 시청률은 47.9%를 기록했다. 당시 "후지 TV가 중계하는 경기에서 일본 대표는 지지 않는다"라는 불패 신화는 이 경기에서도 이어졌다.
오카노의 골든 골 순간, 후지 TV 해설 시미즈 히데히코는 "해냈다!"라고 환호했고, 실황 나가사카 테츠오는 "마지막은, 오카노오~!! 일본, 이겼다! 일본 이겼다! 월드컵!!"이라고 외쳤다. 라디오 실황을 맡은 닛폰 방송의 모로오카 마사오도 "오카노다~! 오카노! 오카노!"라고 절규했다. 다음 날 신문과 뉴스에는 "일본 전역이 환희했다"라는 문구가 실렸다.
경기 후, 많은 선수들이 흥분하거나 울면서 인터뷰에 응했지만, 나카타는 침착하게 "대표팀은 분위기를 잘 띄웠으니, 이제 J리그를 어떻게든 흥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20]
다음 날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서브 캐스터 코미야 에츠코와 축구 코너 담당 카와히라 지에이가 기쁨을 전했다.[21] 코미야 에츠코는 현지에서 직접 관전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22] 오카노의 골든 골 순간에는 너무나 기뻐서 그 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와히라 지에이는 지유가오카의 스포츠 바에서 형 존 카비라와 함께 TV로 경기를 보면서, 일본이 승리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일본에) 태어나서 다행이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외쳤다. 마지막에는 바의 손님들과 함께 "'''일본 축구의 여명이다!'''"라고 승리의 함성을 외쳤다.[23]
5. 2. 대한민국 내 영향
이 경기는 대한민국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다. 지상파 및 케이블 TV 채널을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많은 축구 팬들이 늦은 시간까지 경기를 시청하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를 지켜보았다. 특히, 일본이 이란을 꺾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순간, 대한민국 축구 팬들과 언론은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일부 팬들은 일본의 승리에 대해 실망감과 좌절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도 기회가 남아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언론들은 일본의 승리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는 공식적인 논평을 자제했지만, 당 내부에서는 일본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대한민국 축구계에 긍정적인 자극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 경기는 한일 양국 축구 경쟁 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통해 경쟁 의식을 더욱 불태우게 되었고, 이는 대한민국 축구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또한, 양국 축구 팬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스포츠를 통한 양국 간의 우호 증진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5. 3. 양 팀 감독의 재회
2007년2월 3일, 나가노시 축구 페스티벌 강연회에서 오카다 다케시와 당시 이란 대표팀을 이끌었던 바두가 조호르바루에서의 경기 이후 약 9년 만에 재회하여 대담을 가졌다. 바두는 당시 AC 나가노 파르세이루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나가노에서 대담이 실현되었다. 대담에서는 조호르바루 경기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며, 코다다드 아지지 기용에 관한 정보전 등 당시 지휘 뒷이야기도 다루어졌다.[14]
5. 4. 역사적 기록
이 경기에서 오늘날까지 약 4반세기(25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연속 출전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J리그 및 일본 대표팀 선수 대부분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출전 상임 국가"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 극적인 쾌거는 이미 역사 속 사건, 즉 헤이세이 시대의 한 부분으로서 각종 출판물에 게재되고 있다. 당시 이 경기에 출전했던 나나미 히로시는 자신의 아이로부터 "아빠가 사회 과목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오카노 마사유키 또한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사준 역사 도감에 "아빠가 나와"라는 말을 듣고, 도감을 읽어보니 오카노가 골든 골을 결정한 사진과 일본이 축구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다는 설명이 나와 있어 자신들이 이룬 것을 객관적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24]
아콤은 오카노가 골든 골을 넣은 장면을 패러디하여 찬트 성인이 등장하는 CM을 제작하기도 했다.[25]
참조
[1]
웹사이트
「ジョホールバルの歓喜」両雄再会
http://www.kyoto-np.[...]
京都新聞
2014-04-22
[2]
웹사이트
写真特集:ドーハの悲劇、ジョホールバルの歓喜、そして・・・サッカー日本代表W杯出場をかけた戦い
https://web.archive.[...]
毎日新聞
2013-06-04
[3]
웹사이트
厳しい環境の中で「適応力」を磨け サッカー元日本代表・井原正巳さん
http://www.asahi.com[...]
朝日新聞デジタル
2015-03-27
[4]
웹사이트
ドーハの悲劇、ジョホールバルの歓喜、W杯日韓共催…今、明かされる平成サッカー史の舞台裏
https://web.gekisaka[...]
2019-04-15
[5]
문서
1938 FIFAワールドカップ
[6]
웹사이트
カズ、日本代表での最後の輝き。 衰えを指摘されながらも圧巻の4発
https://sportiva.shu[...]
2020-06-02
[7]
문서
週刊サッカーマガジン 1997//10/8 p.11
[8]
문서
韓国の逆転ゴールを決めたDF李敏成は、マークしていた呂比須がベンチに下がったあと積極的に攻撃参加していた。
[9]
뉴스
加茂監督解任 臆病サッカーの連続ついに決断/復刻
https://www.nikkansp[...]
2016-10-05
[10]
웹사이트
経営とサッカー。
https://www.1101.com[...]
2022-11-10
[11]
뉴스
30歳カズが激怒した夜/記者が振り返るあの瞬間
https://www.nikkansp[...]
2020-04-05
[12]
문서
中山はJリーグで好調を維持していたものの、日本代表では構想外とされ、第4節韓国戦ではテレビ中継のレポーターを務めていた。カザフスタン戦ではゴールを決めた後、下に着込んでいた背番号11の三浦のユニフォームを見せるというゴールパフォーマンスを披露した。
[13]
문서
最終戦までの結果次第で中国と対戦する可能性があった。
[14]
뉴스
焦りが見え隠れしたイランの挑発行為 集中連載「ジョホールバルの真実」(5)
https://sports.yahoo[...]
スポーツナビ
2017-10-31
[15]
뉴스
クアラルンプールでの戦闘準備 集中連載「ジョホールバルの真実」(3)
https://sports.yahoo[...]
スポーツナビ
2017-10-26
[16]
문서
のちにフジテレビ製作「FAIR PLAYの記憶」に出演した岡田は、当初は呂比須のみを投入するつもりだったが、選手のがっくり来た様子を見てショックを与えるため咄嗟に城の投入を決断したと語り、そのため城はウォーミングアップをせずにピッチに立ったと述べた。
[17]
문서
岡野は試合翌日のインタビューで「僕はあんまり緊張とかしない方なんですけど、さすがに昨日の出されかたはちょっとビビりましたね。今まで一回も出てないのに、突然延長で"行くぞ"と言われても」と苦笑した。
[18]
뉴스
キックオフから118分、歴史が動いた 集中連載「ジョホールバルの真実」(18)
https://sports.yahoo[...]
スポーツナビ
2017-11-13
[19]
문서
フジテレビのスタジオでは青嶋達也アナウンサーが進行を担当し、解説は田嶋幸三(前日本サッカー協会会長<2024年5月現在の会長は宮本恒靖>)、ゲストに長谷川健太(当時清水エスパルス、現名古屋グランパスエイト監督)、武田修宏、ラモス瑠偉(ともに当時京都パープルサンガ。元東京ヴェルディ1969|ヴェルディ川崎)、森保一(当時サンフレッチェ広島、現・日本代表監督)が出演した。
[20]
문서
当時のJリーグはリーグ発足時のブームが去り、Jリーグの観客動員は低迷していった。2ndステージの観客動員数も9,651人と1万人を割り込み、年間の平均観客動員数も10,131人と過去最少の数値となり、翌年の横浜マリノスと横浜フリューゲルスの合併に繋がった。決勝ゴールを決めた岡野雅行の自著「野人伝」によると、試合前の控室で選手たちが緊張しているさなか、サッカー協会の偉い人たちが大勢やってきて「今、Jリーグの人気が落ちている。もしW杯に出場できなかったらJリーグはつぶれるかもしれない。だから勝ってほしい」と言いたいことだけ言って去っていった。それを聞いて(ああ、Jリーグが潰れたら、それは俺たちのせいなんだ)と思ったという。
[21]
문서
このときは、川平と読売サッカークラブ(ユース)時代の同僚だった都並敏史(当時湘南ベルマーレ|ベルマーレ平塚)がゲスト出演。
[22]
문서
小宮は前年のマイアミの奇跡|アトランタオリンピックの日本-ブラジル戦を観戦し、日本の勝利を見届けたことから、川平から'''スーパー・ラッキー・ヤングガール'''と称された。試合後の取材で川口能活に対して「顔がやっとほころびましたね」問うたところ、川口は「小宮さん、勝利の女神でしょ。ここ2、3ヶ月笑ってなかったから、まあ、たまには笑わしてください」と返した。また、イラン代表がスタジアム入りした際、アジジを見るや「元気そうじゃないですか」と厳しい顔でコメントする様子が見られた。
[23]
문서
VTR終了後、川平はそのときの自身について「危ない奴ですね」と述べている。
[24]
웹사이트
岡野雅行氏「歴史図鑑出た」ジョホールバル振り返る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7-11-14
[25]
웹사이트
アコム むじんくん サッカー 30
https://www.tcc.gr.j[...]
東京コピーライターズクラ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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