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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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유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손책과 손권을 보좌하며 오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손책과 의형제를 맺고 강동 지역 정벌에 참여했으며, 손책 사후 어린 손권을 보좌하며 세력 안정을 꾀했다. 208년 적벽 대전에서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식견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으며, 특히 적벽대전 승리는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과 대립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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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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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주유 |
한자 표기 | 周瑜 |
로마자 표기 | Ju Yu |
자 | 공근 |
이명 | 주랑 (渾名) |
출생 | 175년 |
출생지 | 양주 여강군 서현 |
사망 | 210년 |
사망지 | 형주 한창군 평강현 파구 |
배우자 | 대교 |
자녀 | 주순 주윤 주부인 |
직업 | 장군, 전략가 |
관직 정보 | |
소속 세력 | 손책 → 원술 → 손책 → 손권 |
최종 관직 | 편장군, 남군태수, 도정후 |
주요 경력 | 춘곡장 강하태수 중호군 남군태수 편장군 |
기타 정보 | |
별칭 | 미주랑 |
2. 생애
주유는 현재의 안후이성 루장군 수현(舒縣)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명망 높은 가문 출신으로, 증조부 주경(周景)과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후한 조정에서 최고 군사직인 태위(太尉)를 지냈다. 아버지 주이(周異)는 수도 낙양의 현령을 역임했다.
주유는 훌륭한 풍채를 지녔으며, 지략과 무략이 매우 뛰어나 조조나 유비조차 그의 재능을 경계할 정도였다. 실제로 조조는 장간을 보내 주유를 회유하려 했고, 유비는 손권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손권과 주유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성격은 관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능했다. 다만, 손오의 오랜 장수였던 정보와는 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보는 젊은 주유를 여러 차례 무시했지만, 주유는 늘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결국 정보도 주유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연회에서 술이 여러 잔 오간 뒤에도 연주 속의 작은 실수까지 정확히 알아차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곡조에 실수가 있으면 주랑(周郎, 주유를 가리키는 애칭)이 돌아본다"(曲有誤 周郎顧|취유우 주랑구zho)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주군인 손책 및 손권 형제와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동갑내기인 손책과는 어릴 적부터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서로의 어머니(오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등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손권은 주유를 형처럼 예우하며 많은 옷을 하사했는데, 그 수가 여름옷과 겨울옷을 합쳐 백 벌에 달했으며, 이는 다른 어떤 장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우였다. 주유 자신도 장간과의 대화에서 손권과의 관계를 "밖으로는 군신의 의를 따르지만, 안으로는 형제와 같은 은혜를 맺었으며, 나의 건의는 받아들여지고 계책은 실행되니, 화와 복을 함께하는 사이"라고 설명했다.
주유는 장래성 있는 주군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원술 밑에 있었으나, 그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곁을 떠났다.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었을 때부터 그가 장차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 예견했는데, 훗날 이는 현실이 되었다.
2. 1. 손책과의 만남과 강동 정벌
초평 원년(190년), 손견(孫堅)이 동탁(董卓) 토벌을 위해 거병할 때 그의 가족은 수춘에서 주유의 고향인 서현(舒縣)으로 이주했다.[6] 이때 동갑내기였던 주유는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단금'(斷金), 즉 쇠를 끊을 정도의 굳은 정으로 맺어졌다고 전해진다.[91] 주유는 자신의 큰 저택을 손책 일가에게 내어주고, 손책의 어머니 오부인을 어머니처럼 모시는 등 가족과 같은 교류를 했다.[6][70] 江表傳|강표전zho에는 주유가 손책의 명성을 듣고 수춘으로 찾아가 만났으며, 이후 손책이 주유의 권유로 서현으로 이주했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7]흥평 원년(194년), 원술(袁術) 휘하에 있던 손책은 강동 지역 평정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주유는 숙부인 단양태수(丹楊太守) 주상(周尚)을 돕기 위해 단양군에 머물고 있었다.[8][91] 손책이 양쯔 강을 건너 유요(劉繇)를 공격하려 할 때 주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주유는 즉시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다.[8][91]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그대가 돕는다면, 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8]
주유는 손책과 함께 횡강(橫江)과 당리(當利)를 공략하여 그곳에 주둔하던 유요 휘하의 우미(于糜), 번능(樊能), 장영(張英) 등을 격파했다.[91][9] 이어 양쯔 강을 건너 말릉(秣陵, 현재의 난징)을 점령하고 착융(笮融)과 설례(薛禮)의 군대도 물리쳤다.[91][9] 또한 호숙(湖孰), 강승(江乘)을 거쳐 유요의 본거지인 곡아(曲阿)까지 진격하자 유요는 결국 패주했다.[91][9] 이로써 손책의 군세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손책은 주유에게 단양 방비를 맡기고 자신은 오군과 회계군 공략에 나섰다.[91]
이후 원술은 단양태수를 자신의 사촌 원윤(袁胤)으로 교체하고 주상과 주유를 수춘으로 불렀다. 원술은 주유를 장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유는 원술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동쪽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며 거소(居巢) 현령 자리를 자청했다.[91] 거소 현령 시절, 노숙(魯肅)에게 군량 지원을 요청했고, 노숙이 자신이 가진 곡식의 절반인 3천 곡(斛)을 흔쾌히 내어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깊은 친교를 맺게 되었다.[91][69]
건안 3년(198년), 주유는 원술에게서 벗어나 오(吳)로 돌아왔다.[91] 손책은 주유를 열렬히 환영하며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將)으로 임명하고, 병사 2,000명과 기마 50필, 군악대와 저택까지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손책은 일찍이 단양에서 주유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면 이것도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한다.[70][91] 당시 24세였던 주유는 훌륭한 풍채와 재능으로 '주랑'(周郎)이라 불리며 명성이 높았다.[71][91] 그는 오군(吳郡)에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우저(牛渚) 수비를 맡았고, 이후 춘곡(春穀) 현령도 겸임하게 되었다.[91]
건안 4년(199년), 손책이 형주 공략을 계획하면서 주유를 중호군(中護軍)으로 삼고 강하태수의 직무를 맡겼다.[91]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현(皖縣, 완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91] 이때 교공(橋公)[72]의 두 딸을 얻었는데, 언니인 대교(大喬)는 손책이, 동생인 소교(小喬)는 주유가 아내로 맞이했다.[91] 이후 심양(尋陽)까지 진군하여 당시 여강태수(廬江太守)였던 유훈(劉勳)을 격파했다. 유훈은 손책의 계략에 빠져 본거지인 환성을 비운 사이 공격당해 패배했다.[91][92] 또한 유훈을 도우려던 강하태수 황조(黃祖)의 군대도 물리쳤다.[91] 돌아오는 길에 예장(豫章)과 여릉(廬陵) 두 군을 평정하고, 주유는 파구(巴丘)에 주둔했다.[91]
2. 2. 손권 보좌와 오나라의 기틀 마련
건안 5년(200년) 손책이 급사하자 그의 동생 손권이 뒤를 이었다. 주유는 군대를 이끌고 오군(현재의 쑤저우)으로 돌아와 손책의 장례에 참석했으며, 이후 중호군(中護軍) 직책을 맡아 오군에 머물며 장소와 함께 손권을 보좌하고 강동의 업무를 총괄했다.[14] 당시 손권은 나이가 어렸기에 일부 관리들은 그를 가볍게 여겼으나, 주유는 솔선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어 규범을 보였고 주변 사람들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주유는 재야에 있던 노숙을 설득하여 손권에게 등용되도록 추천했다.건안 7년(202년), 관도 전투에서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손권이 신하들과 논의했으나 장소나 진송조차 뚜렷한 의견을 내지 못했다.[15] 손권은 인질을 보내고 싶지 않아 어머니 오부인과 주유에게만 따로 의견을 물었다.[16] 주유는 과거 초나라의 예를 들며, 현재 손권이 가진 기반과 군사력, 자원의 풍부함을 강조하고, 인질을 보내 조조의 통제 하에 들어가는 것은 남방의 패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질을 보내는 순간 조조와 연결고리가 생겨 그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결국 그들의 통제 하에 놓이는 것"이라며, "인질을 보내지 말고 상황의 변화를 지켜보며 힘을 키워야 한다. 만약 조조가 정당한 수단으로 제국을 통일한다면 그 후에 항복해도 늦지 않고, 만약 폭력에 의존한다면 결국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그들의 침략에 계속 저항하고 운명을 기다려야 한다"고 강력히 반대했다.[17] 오부인 역시 주유의 의견에 동의하며 손권에게 주유를 형처럼 대하라고 말했다.[70] 손권은 이 조언을 따라 인질을 보내지 않았고, 이는 오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는 중요한 결정이 되었다.[18]
건안 11년(206년), 주유는 손유 군대의 감군(監軍)으로서 마둔(麻屯)과 보둔(保屯)의 산월을 토벌하여 1만 명 이상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 말, 강하 태수 황조의 부장 등룡이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시상(柴桑)을 공격하자, 주유는 이를 격퇴하고 등룡을 생포하여 오군으로 압송했다.[19]
건안 13년(208년) 봄, 손권이 강하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자, 주유는 전부대독(前部大督)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몽[20], 능통[21] 등과 함께 황조 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고, 황조는 도주 중 사망했다.[22]
2. 3. 적벽 대전

208년 9월, 하북을 통일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형주 자사 유종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 병력까지 흡수하니, 수군과 보병을 합쳐 80만 대군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손권 진영 내에서는 조조가 후한의 승상으로서 명분을 갖추었고, 형주를 얻어 유표의 수군까지 손에 넣어 장강의 지리적 이점마저 사라졌다는 이유로 항복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91]
이때 파양 방면에 있던 주유는 노숙의 부름을 받고 급히 돌아와 노숙과 함께 강력히 싸울 것을 주장했다. 주유는 조조를 한의 역적으로 규정하여 그의 명분을 부정하고, 오히려 조조군이 원정으로 인한 피로, 수전 경험 부족, 군 내부의 역병 발생 가능성, 북방 출신 병사들의 남방 기후 부적응 등 여러 약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오나라 군대는 지리에 익숙하고 수전에 능하며 사기가 높다는 강점을 들어 손권을 설득했다.[91][26] 주유는 조조의 실제 군세는 15만에서 16만 명 정도이며, 형주에서 얻은 병력 7만에서 8만 명 역시 조조에게 완전히 충성하지 않을 것이라 분석하며, 5만 명의 정예 병력으로도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29] 이에 손권은 "늙은 역적 조조와 나는 함께 설 수 없다"며 항전 의지를 굳히고, 조조에게 항복을 주장하는 자는 앞에 놓인 탁자처럼 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결단을 내렸다.[91][27][28]
손권은 주유와 정보 등에게 정예 병력 3만 명을 내주었고,[94][95] 이들은 형주에서 피난 온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군과 대치했다.[91][32] 유비는 주유의 병력이 3만이라는 말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으나, 주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니, 내가 적을 격파하는 것을 지켜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75][76] 조조군은 이미 군 내에 역병이 돌고 있었고, 첫 교전에서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장강 북쪽으로 물러나 주둔했다.[91][32] 주유는 장강 남쪽에 진을 쳤다.[32]
이때 부장 황개는 조조군의 배들이 서로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화공(火攻)을 건의하며, 불로 이를 격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33] 주유는 이 계책을 받아들여, 황개가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접근하여 불을 지르도록 계획했다.[91][34] 황개는 불을 지르기 쉬운 재료를 가득 실은 맹충(艨艟)과 투함(鬬艦) 10여 척을 준비하고 조조에게 거짓 항복 편지를 보냈다.[33][34] 마침 동남풍이 강하게 불자, 황개는 함대를 이끌고 조조 진영으로 향했다. 조조군 진영에 가까워지자 황개는 배에 불을 붙이고 병사들과 함께 뒤따르던 작은 배 주가(走舸)로 옮겨 탔다.[35] 강한 바람을 타고 불타는 배들은 순식간에 조조의 함대로 돌진하여 배들을 불태웠고, 불길은 강변의 육상 진영까지 번졌다.[91][35] 큰 혼란에 빠진 조조군을 주유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조조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쳤다.[35] 주유는 유비와 함께 조조를 추격했다.[91][36] 조조는 조인에게 강릉성 방어를, 악진에게는 양양 방어를 맡기고 자신은 허창으로 돌아갔다.[37]
적벽 대전 이후, 주유는 유비와 함께 조조군을 남군까지 추격하여 강릉에서 조인과 대치했다.[38] 주유는 감녕에게 이릉(夷陵, 현재의 이창시)을 점령하게 했으나, 감녕이 조인이 보낸 별동대에 포위되자 여몽의 조언에 따라 능통에게 본진 수비를 맡기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감녕을 구출했다.[73] 이후 강릉을 공격하던 중, 주유는 직접 전투에 나섰다가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옆구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79] 조인은 주유가 부상으로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와 오군 진영 앞에서 도발했지만, 주유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와 병사들을 독려했고, 이를 본 조인은 물러났다.[40]
주유와 조인은 1년 넘게 강릉에서 대치하며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결국 조조는 계속되는 손실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조인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고, 209년 주유는 마침내 강릉을 점령했다.[41] 주유는 이 공으로 편장군(偏將軍) 및 남군 태수(南郡太守)에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하준(下雋), 한창(漢昌), 유양(劉陽), 주릉(州陵) 네 현을 봉읍으로 하사받고 강릉에 주둔했다.
2. 4. 형주 쟁탈과 최후
208년 12월 적벽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한 주유는 유비와 함께 남군까지 조조를 추격했고, 이후 강릉에서 조인과 대치했다.[38] 주유는 감녕에게 이릉 점령을 명했으나, 감녕이 조인에게 포위당하자 여몽의 조언을 받아들여 능통에게 수비를 맡기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감녕을 구출했다.[73]이후 주유는 양쯔강을 건너 강릉을 공격하던 중, 조인과의 전투에서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옆구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40][79] 조인이 주유가 부상으로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와 오나라 군대를 도발하자, 주유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직접 병사들을 독려하여 사기를 높였고, 이에 조인은 물러났다.[40] 한편, 유비는 장비에게 병사 1,000명을 주어 주유를 돕게 하고, 자신은 주유에게 받은 병사 2,000명과 함께 하수(夏水)를 건너 조인의 후방을 공격하겠다고 제안했고, 주유는 이를 받아들였다.[39] 조인군은 군량 부족과 부상병 속출로 어려움을 겪었고, 유비군이 남군을 포위하자 결국 1년여의 대치 끝인 209년에 강릉에서 철수했다.[41] 주유는 후퇴하는 조인군을 추격했으나 관우가 이통에게 패하면서 조인을 잡지는 못했다.
강릉 점령 후,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偏將軍) 및 남군 태수(太守)로 임명했다. 주유는 강릉현에 본거지를 두었으며, 하준(下雋), 한창(漢昌), 유양(瀏陽), 주릉(州陵) 지역을 다스렸다.[42]
한편, 형주 목(牧)으로 임명된 유비는 공안현에 주둔했는데, 영지가 부족하다며 손권에게 형주의 여러 군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43] 이때 주유는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유비의 야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비는 사납고 야심찬 영웅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곰과 호랑이의 위력을 가진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군주에게 복종할 사람이 아닙니다.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그곳에 궁궐을 짓고, 그에게 여자와 선물을 바쳐 그를 즐겁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두 사람(관우와 장비)을 각각 다른 곳에 배치합니다. 유비를 인질로 삼아 동시에 (그의 부하들을) 공격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목표(형주 점령)는 달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위해 토지를 개척하고 자원을 제공하며 세 사람을 함께 있게 놔두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는 용이 구름과 비를 만나면 더 이상 연못에 머무르는 것을 만족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44]
그러나 손권은 북쪽의 조조라는 강력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유비와의 동맹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유비를 강제로 제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주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45] 노숙 역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손권에게 진언했다.
210년경, 주유는 조조가 적벽대전의 패배로 당분간 큰 움직임을 보이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익주(益州)의 유장은 장로의 위협으로 입지가 불안정했다. 주유는 이 기회를 이용해 손유와 함께 익주를 점령하고 장로를 공격하자고 손권에게 제안했다. 계획은 손유가 점령지를 지키며 서쪽의 마초와 동맹을 맺고, 자신은 손권과 함께 양양에서 조조를 공격하여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손권은 이 계획에 동의했다.[46]
주유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강릉으로 돌아가던 중, 파구(巴丘, 현재의 후난성 웨양시)에서 병으로 쓰러져 급사했다. 향년 36세였다.[1][47] 죽기 전, 주유는 노숙을 자신의 후임으로 손권에게 추천했다.
손권은 주유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공근(주유의 자)은 유능한 군주를 보좌할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 그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겠는가?"[48] 라며 애통해했다. 손권은 주유를 위해 상복을 입었으며 장례 비용 일체를 부담했고, 그의 유족들이 시종(侍從)을 거느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49] 훗날 229년 동오의 황제로 즉위했을 때, 손권은 신하들에게 "주공근이 나를 돕지 않았다면 오늘날 내가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50] 라고 말하며 그의 공을 기렸다.
3. 평가와 의의
주유는 강인한 체격과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고 묘사된다.[61] 그는 지략과 무용을 겸비하여 당대의 경쟁자였던 조조나 유비조차 그의 재능을 경계할 정도였다.
성격 또한 너그럽고 관대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알려져 있다.[63] 대표적인 일화로, 손씨 가문의 오랜 가신이었던 정보는 연장자로서 처음에는 주유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주유가 겸손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자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정보는 "주공근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로운 술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고 평할 정도였다.[64]
주군인 손권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손권의 형 손책과는 동갑내기 친구였으며,[6] 손권은 주유를 형처럼 대우했다.[62] 주유는 손권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다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62] 장간과의 대화에서는 손권과의 관계를 "밖으로는 군신의 의리에 의탁하고, 안으로는 골육의 정을 나누며, 건의는 받아들여지고 계책은 실행되며, 화복을 함께하는 사이"라고 설명했다. 조조가 장간을 보내 회유하려 했을 때도 주유는 손권에 대한 충성심을 분명히 하며 이를 거절했고, 장간은 조조에게 돌아가 "주유의 도량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라고 보고했다.[65]
군사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자신감을 보였다. 적벽 대전을 앞두고 유비가 병력 부족을 염려하자, 주유는 "조조를 격파하기에 충분하니 지켜보기만 하시오"라고 답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음악에 정통하여, 연회 중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연주되는 곡의 작은 실수까지 알아차리고 연주자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곡조가 틀리면 주랑이 돌아본다"는 말이 유행했다.[96][67]
손권은 훗날 황제에 오른 뒤 신하들에게 "주공근이 아니었다면 나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50] 주유 사후에도 손권은 "공근은 왕을 보좌할 만한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내가 누구를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라며 깊이 슬퍼했고,[48] 육손에게도 주유의 공적을 언급하며 "공근은 용맹과 담력을 겸비하여 조조를 격파하고 형주를 개척했다. 그의 업적은 따라가기 어렵다"고 말했다.[70]
조조 역시 주유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적벽 대전에서 패배한 후 조조는 전염병 때문에 스스로 물러난 것이라 주장하며 주유의 공을 애써 깎아내리려 하기도 했으나,[66] 이는 오히려 주유의 명성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유비는 손권에게 주유에 대해 "공근의 재능과 도량은 만인지상이며, 큰 포부를 품고 있어 오랫동안 남의 신하로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평하며 그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66] 이처럼 주유의 명성이 높아지자 조조와 유비는 그를 비방하며 손권과 주유 사이를 이간질하려 시도하기도 했다.[66]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적벽 대전 당시 오나라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주유와 노숙이 흔들리지 않고 명확한 판단을 내린 것을 "참으로 비범한 재능"이라고 평가했다. 배잠은 배잠론(裴潛論)에서 주유가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인품이 뛰어나 손권과 강동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가 제갈량의 재능을 시기하여 해치려 하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정사 《삼국지》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으며 제갈량에 대한 주유의 실제 생각은 알 수 없다.
후대의 평가도 높아, 동진의 원굉은 그를 삼국의 명신 중 한 명으로 꼽았으며,[83][84] 당나라에서는 무묘에 배향되는 64명장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북송 휘종 때는 평로백(平虜伯)으로 추증되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198년에서 199년 사이, 주유는 손책과 함께 완(皖,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현)을 정벌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름다운 두 딸로 유명했던 교공(橋公|교공중국어)을 만났다. 손책은 맏딸 대교와 결혼했고, 주유는 둘째 딸 소교와 결혼했다.[51] 손책은 주유에게 "교공의 딸들이 비록 아름답지만, 우리 같은 남편을 만났으니 행복할 것이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52]
주유는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두었다.[53] 이 세 자녀가 모두 소교에게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 딸: 주씨 부인은 225년에 손권의 맏아들이자 후일 태자가 되는 손등과 결혼했다.[54][55][56] 손등은 아버지 손권보다 먼저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장남: 주순周循|주순중국어은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으나 일찍 사망했다. 그는 손권의 딸 손노반과 결혼했으며, 동오에서 기병교위騎都尉|기병교위중국어를 지냈다.[57][58]
- 차남: 주윤周胤|주윤중국어은 손권 가문의 여성과 결혼했다. 흥업도위興業都尉|흥업도위중국어로 임명되어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안현에 주둔했다. 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도향후(都鄉侯|도향후중국어)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후 죄를 지어 릉릉군(廬陵郡, 현재의 장시성 지안시 부근)으로 유배되었다. 239년, 제갈근, 보즐 등이 주유의 공적을 들어 손권에게 주윤의 사면과 복권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손권은 처음에는 주윤의 죄가 무겁고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며 망설였으나, 주연, 전종 등의 거듭된 간청에 결국 허락했다. 하지만 주윤은 사면 조치가 내려지기 직전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59]
주유의 형의 아들인 주준周峻|주준중국어은 숙부 주유의 공적으로 손권에 의해 편장군偏將軍|편장군중국어에 임명되어 1,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주준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주호周護|주호중국어에 대해 전종이 무관 임명을 손권에게 요청했으나, 손권은 주호가 잔혹하고 간사하다는 평판을 이유로 거절하며 "공근(주유의 자)의 공로는 잊지 않았지만,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된다"고 답했다.[60]
5. 대중문화 속 주유
주유는 소설, 연극,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진다. 중국 전통극에서는 실제로는 그보다 나이가 어렸던 제갈량과 함께 등장할 때에도, 젊은 남성 역할인 小生|샤오성zho이나 무관 역할인 武生|우성zho으로 배역되는 경우가 많다. 곤극에서는 zhiweisheng|즈웨이성zho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는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주요 인물로 꾸준히 등장하며 재해석되고 있다. 영화와 텔레비전에서는 홍우주(''삼국지''), 양조위(''적벽''), 황유생(''삼국'') 등이 주유를 연기했다. 애니메이션 ''일기당천''과 ''강철 삼국지''에서는 "슈유 코킨"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 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삼국지'' 시리즈와 캡콤의 ''천지를 먹다''에서는 장수로 등장한다. 수집용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의 ''포탈 삼국지'' 세트나 게임 ''Fate/Samurai Remnant''에서도 주유를 찾아볼 수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극적으로 각색된 제갈량과의 라이벌 관계나 최후는 특히 후대의 많은 창작물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때로는 재능이 뛰어나지만 제갈량에게 가려지는 비운의 영웅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5. 1. 삼국지연의
주유는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로, 소설 속에서는 제갈량과의 경쟁 관계가 허구적으로 만들어졌다. 소설 속 주유는 제갈량의 뛰어난 재능을 시기하여 여러 차례 계략을 꾸며 제거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적벽 대전을 비롯한 여러 사건에서 주유의 공적은 제갈량의 활약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그의 죽음 또한 소설적으로 크게 각색되어, 제갈량에 의해 의도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강릉 전투에서 조인의 군대와 싸우다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후, 제갈량의 계략에 번번이 당하면서 병세가 악화되고, 결국 제갈량의 도발적인 편지를 받고는 "既生瑜、何生亮!|지셩위, 허셩량!zho"[89](하늘은 이미 주유를 내셨거늘, 어찌하여 제갈량 또한 내셨는가!)라는 유명한 대사와 함께 피를 토하며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주유와 관련된 대표적인 허구적 이야기로는 제갈량의 강동 외교 임무, 장간을 이용한 반간계, 짚으로 배를 만들어 화살 빌리기, 황개의 고육계, 제갈량이 동풍을 비는 사건, 유비와 손부인의 결혼 주선, 그리고 주유의 죽음 등이 있다.
소설 속 주유는 "용모가 아름답고, 풍류를 아는, 의젓하고 수려한 모습"을 지닌 미남으로 묘사되며, 손책 시대에는 장소·장굉을 추천하고 왕랑과 태사자를 격파하는 등 역사적 사실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한 것으로 나온다. 손책 사후에는 장소와 함께 손권을 보좌하는 중신으로 설정되었다(실제 역사에서는 장소만이 후견 역할을 했다). 적벽대전에서는 역사대로 주전파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며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게 묘사되지만, 제갈량의 지략에 계속해서 당하는 손해 보는 역할을 맡는다. 결국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뛰어난 제갈량의 존재 때문에 고뇌하고 패배하는 인물, 즉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된다.
이러한 제갈량과 주유의 대비 묘사에 대해, 루쉰 등 일부에서는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실존 인물의 공적을 지나치게 왜곡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경극에서는 "미주랑(美周郎)"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미남 배우가 주유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아, 수려한 외모의 영웅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덧붙여, 현대에 제갈량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도사 풍의 융건(綸巾)과 우선(羽扇)은 원래 송나라 시대에는 주유의 모습을 상징하는 복장이었다. 북송의 시인 소식의 『염노교·적벽회고(念奴嬌·赤壁懷古)』에서 "羽扇綸巾,談笑間,檣櫓灰飛煙滅|위샨룬진, 탄샤오젠, 창루후이페이옌메zho"[89](우선과 융건 차림으로, 담소하는 사이에 오랑캐가 재와 연기로 사라지게 했다네)라고 묘사된 이래, 남송의 양만리나 원대의 조이부 등의 시에서도 주유의 상징으로 그려졌으나, 원대 후기 이후 점차 제갈량의 상징으로 바뀌었다(자세한 내용은 삼국지연의의 성립사#융건·우선 참조).
5. 2. 기타
중국 전통극에서 주유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제갈량과 함께 등장할 때에도 小生|샤오성중국어(젊은 남성) 또는 武生|우성중국어(무관)으로 배역되는 경우가 많다. 곤극에서는 zhiweisheng|즈웨이성중국어으로 등장하며, 장비가 그를 사로잡았다가 풀어주는 장면인 "흔동로"(The Swaying Reeds)에서 그 모습을 보인다. 경극에서는 "미주랑"이라는 별명처럼 예로부터 미남 배우가 연기하는 역할이며, 눈썹이 아름답고 수려한 영웅으로서의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다.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용모가 아름답고, 풍류를 아는, 의젓하고 수려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손책 시대에는 이장(장소·장굉)을 추천하고, 계략을 써서 왕랑과 태사자를 격파하는 등 역사적 사실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한다. 손책 사후 유언에 따라 손권을 섬기며 장소와 함께 중신이 되었다(역사적 사실에서는 장소만이 후견을 맡았다). 적벽대전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주전파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지만, 유비와 손부인의 결혼을 제안하기도 한다. 유비의 사자로서 오나라에 머물던 제갈량에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휘둘리는 역할을 맡는다. 자신의 계략을 모두 간파하는 제갈량을 위험하게 여겨 암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시종일관 라이벌로 여기면서도 결국에는 당해내지 못하고 병에 걸려 쓰러진다. 임종 때에도 제갈량으로부터 도발적인 서찰을 받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既生瑜、何生亮|기생유 하생량중국어"(이미 주유를 낳았으면서, 어째서 제갈량까지 낳았는가!)라고 피를 토하며 분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군사적 재능은 『연의』에서도 뛰어나, 적벽 대전을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같다. 한 나라를 이끌 만한 그릇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지만, 그를 압도하는 제갈량의 들러리가 되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제갈량과 주유의 대비 묘사에 대해 루쉰 등은 "이야기라고 해도, 실존 인물의 공을 왜곡하는 정도가 지나치며, 과도하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덧붙여, 『연의』에서 제갈량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도사 풍의 융건(綸巾)과 우선(羽扇)은 원래 원나라 시대까지는 주유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의상이었다. 북송의 시인 소식은 『염노교·적벽회고』(念奴嬌·赤壁懷古)에서 "아득히 생각해보니 공근(주유)의 그 시절, 소교가 처음 시집왔을 때, 늠름한 모습과 영웅다운 기개, 우선과 융건을 하고, 웃음 속에 돛대와 노가 재가 되어 연기처럼 사라졌네"라고 노래했다. 남송 시대의 양만리의 시 『기제주원길호북조사지공당』에서도 "주랑"이 "또 흰 깃털 부채와 융건을 휘두르네"라고 읊었고, 조이부의 『한궁춘차방시부원석견기』에서도 "스스로 웃을지어다, 주랑의 젊은 날, 풍류는 우선과 융건을 했다"라고 하여, 주유와 우선·융건이 하나의 이미지로 묶였다. 이것이 제갈량의 상징이 된 것은 원나라 후기 이후이다.[89] (자세한 내용은 삼국지연의의 성립사#융건·우선 참조)
주유는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작품 | 연도 | 배역 배우 | 비고 |
---|---|---|---|
삼국지 | 1994년 | 홍우주 | 중국 드라마 |
적벽대전 2부작 | 2008년 | 양조위 | 중국, 홍콩, 대만, 일본, 한국 합작 영화 |
삼국 | 2010년 | 황유생 | 중국 드라마 |
삼국지 주유와 손책 | 2020년 | 이선시 | 중국 영화 |
애니메이션 ''일기당천''과 ''강철 삼국지''에서도 주유(일본 이름: 슈유 코킨)가 등장한다.
게임 시리즈/게임 | 역할 | 제작사 |
---|---|---|
진 삼국무쌍 시리즈 | 플레이 가능 캐릭터 | 코에이 |
무쌍 오로치 시리즈 | 플레이 가능 캐릭터 | 코에이 |
삼국지 시리즈 | 장수 | 코에이 |
천지를 먹다 | 적 장군 | 캡콤 |
매직 더 개더링 (포탈 삼국지 세트) | "주유, 총사령관" 카드 | 위저즈 오브 더 코스트 |
Fate/Samurai Remnant | 아처 클래스 서번트 (성우: 오노 켄쇼) | 코에이 테크모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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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5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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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hi Tongjian vol.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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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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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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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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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문서
「郎」とは若者の意。同時期、孫策も孫郎と呼ばれていた。
[72]
문서
三国志演義では喬玄
[73]
서적
『三国志』呉志 甘寧伝
[74]
서적
『建康実録』
[75]
문서
おそらく(戦況に合わせて)進退できるように考えていたのであろう。
[76]
서적
『三国志』呉志 周瑜伝 に引く『江表伝』・『資治通鑑』。
[77]
서적
『三国志』呉志 周魯呂伝・程黄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伝・陸遜伝
[78]
서적
『三国志』呉志 呉主伝
[79]
문서
三国志演義では左の鎖骨に改変されている。
[80]
문서
孫権は「周瑜は王佐の資質を持っていたのに、今後は誰を頼ればいいのか!」と言ったという
[81]
문서
『蒼渓鎮重修三元観記』
[82]
서적
『太平御覧』注に引く『呉書』では、「孫權每賜周瑜衣,寒暑皆百領,諸將皆不及」
[83]
문서
名臣20選には、荀彧、荀攸、袁渙、崔琰、徐邈、陳羣、夏侯玄、王経、陳泰(以上魏 (三国)|魏)、諸葛亮、龐統、蔣琬、黄権(以上蜀漢|蜀)、周瑜、張昭、魯粛、諸葛瑾、陸遜、顧雍、虞翻(以上呉 (三国)|呉)を選出している
[84]
문서
周瑜は「公瑾英達 朗心獨見 披草求君 定交一面 桓桓魏武 外託覇跡 志掩衡霍 恃戦忘敵 卓卓若人 曜奇赤壁 三光参分 宇宙暫隔」と謳われている
[85]
서적
『後漢書』巻45には「興子景」、『三国志』巻54裴松之注には張ハンの『漢紀』を引いて「景父栄」とある。
[86]
서적
『三国志』巻54には「従祖父景」とある。
[87]
서적
『三国志』巻54には「瑜従父尚」とある。
[88]
서적
『水経注』・『太平寰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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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宋詞と言葉
汲古書院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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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안후이성 허페이시
[9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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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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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강표전
[95]
서적
강표전
[96]
서적
삼국지』 권54, 「오서」9, 주유전(周瑜傳), “瑜少精意於音樂,雖三爵之後,其有闕誤,瑜必知之,知之必顧,故時人謠曰:「曲有誤,周郎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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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국춘추》 권7 오7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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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서》, 권6 열전 제6 주시하왕장마유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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