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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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눌은 고려 시대의 승려로, 선종의 승려로서 교종을 융합하려는 시도를 통해 한국 불교 선 사상의 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강조하며, 선과 교의 조화, 그리고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것을 설파했다. 1188년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조계산 송광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조계종을 창시하였다. 그의 사상은 혜능의 선에 화엄 사상을 흡수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한국 불교에 독창적인 조계선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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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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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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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속성 - 정씨 |
법명 | 지눌 |
호 | 목우자 |
시호 | 불일 |
존칭 | 불일보조국사 |
출생 | 1158년 |
출생지 | 고려 황해도 동주 (현재의 서흥군) |
입적 | 1210년 (53세) |
종교 및 종파 | |
종지 | 선종 |
종파 | 조계종 |
사찰 | |
사찰 | 송광사 |
스승 및 제자 | |
스승 | 종휘 선사 |
제자 | 천진 확연 수우 인민 가혜 혜심 |
저서 | |
저서 |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진심직설(眞心直說)》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
2. 생애
1158년 고려 국자감 학정(學正) 정광우(鄭光遇)의 아들로 태어났다.[9] 8세(다른 기록에는 1173년 16세[1])에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파의 종휘(宗暉) 선사를 은사로 하여 승려가 되었다.[9][5]
1182년(명종 12년), 25세의 나이로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 출세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5] 대신 여러 선승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고, 경전을 탐구하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했다.[1] 특히 《육조단경》과 《화엄경》 등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는 그의 독자적인 사상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10][9]
1188년 득재(得才)·몽선(夢船) 등과 팔공산 거조사(居組寺)로 옮겨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하고, 1190년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선포하며 당시 침체된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했다.[11] 1197년에는 결사 내의 갈등으로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수행하기도 했다.[9] 1200년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11년간 머물며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5] 그의 가르침은 선종과 교종을 아우르는 선교일원(禪敎一元) 사상에 기반했으며, 이는 조계종 창립의 토대가 되었다.
지눌의 활동은 희종의 주목을 받아 왕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204년 즉위한 희종은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하고 직접 쓴 편액(扁額)을 하사하는 등 지눌을 존경하였다.[5][11]
1210년 4월 22일 수선사에서 설법하던 중 주장(拄杖)을 잡은 채 앉은 자세로 입적하였으며,[11] 사후 희종으로부터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감로(甘露)라는 탑호를 받았다.[11] 주요 저서로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진심직설(眞心直說)》,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염불요문(念佛要門)》, 《수심결(修心訣)》 등이 있다.[11]
2. 1. 출생과 출가
1158년 국자감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와 부인 조(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9] 속성은 정(鄭)씨이다. 출생지는 동주(현재의 서흥군)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다른 기록에는 1173년 16세[1])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파의 종휘(宗暉) 선사를 은사로 하여 승려가 되었고, 법명으로 '지눌'을 받았다.[9][1] 구족계(具戒)를 받은 후, 특정한 스승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경전을 공부하고 선(禪) 수행을 통해 도를 구하고자 했다.[5][1] 그의 전기에 따르면 젊은 시절 스승과의 관계가 깊지 않았으며, 지눌은 타고난 지성과 고독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인해 스스로 경전을 탐구하며 수행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된다.[1]1182년(명종 12년), 25세의 나이로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 출세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5] 대신 여러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고,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1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수행 공동체인 결사(結社)를 만들기로 약속했다. 이후 창평(지금의 담양[11]) 청원사(淸願寺)에서 《육조단경》을 읽던 중 “진여자성(眞如自性)은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고, 혜능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10]
1185년에는 세속을 떠나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 하가산(下柯山, 지금의 예천 학가산[11]) 보문사(普門寺)로 들어갔다.[5] 그곳에서 《대장경》을 깊이 연구하던 중,[5]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다”는 구절과 이통현(李通玄)이 쓴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의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구절을 통해 다시 한번 크게 깨달았다고 전해진다.[10] 이를 통해 선(禪)과 교(敎)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확립하였다.[9]
2. 2. 깨달음과 정혜결사
1182년(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5]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10여 명의 동료들과 뒷날 수행 공동체인 결사(結社)를 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창평(현재의 담양군) 청원사(淸願寺)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은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지눌은 선종의 제6대 조사인 혜능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10]1185년 속세를 피하고 도를 구하기 위하여 하가산(下柯山, 현재 예천군 학가산)의 보문사(普門寺)에 들어갔다.[5] 그곳에서 《대장경》을 열독하며 불도에 전력하던 중,[5]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여래(부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과 이통현(李通玄)이 쓴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의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구절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전해진다.[10] 이로써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9] 이는 스승 없이 경전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가는 지눌의 자립적인 수행 방식을 보여준다.[1]
1188년 득재(得才)·몽선(夢船) 등과 팔공산 거조사(居組寺)로 거처를 옮겨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했다. 1190년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선포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11] 이 운동의 목표는 산속 깊은 곳에 규율 있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수행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던 중,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를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禪定)을 닦았다. 그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9]
1200년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서 11년 동안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론》, 《대혜록》 등으로 가르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經截門)의 3종으로 수행을 이끌었는데,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5] 지눌은 명상, 교리, 염불 및 강론을 포함한 불교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가르치며 조계종을 창시했다. 1209년까지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를 완성했는데, 이는 중국의 다양한 선종을 광범위하게 탐구하고 중국 승려 규봉 종밀의 저술에 대한 광범위한 해설과 개인적인 메모를 담고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고려, 특히 희종의 존경을 받았다. 1204년 즉위한 희종은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하고, 친히 제방(題榜)을 써서 보냈다.[5] 또한 희종은 지눌에게 만수가사(滿繡袈裟)를 하사하고, 120일 동안 낙성법회를 열게 하였다.[11]
2. 3. 수선사(修禪社)와 입적
1200년 송광산의 길상사로 옮겨 11년 동안 머물며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눌은 그들에게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론》, 《대혜록》 등을 가르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經截門)의 세 가지 수행법으로 이끌었다.[5] 또한 억보산의 백운정사·적취암과 서석산의 주봉란야·조월암 등을 창건하고 왕래하며 수행(修禪)하였다.[5]1204년 희종이 즉위하자 지눌의 높은 명성을 기려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을 바꾸고, 직접 쓴 편액(扁額)을 하사하였다.[5] 또한 희종은 지눌에게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리고, 120일 동안 성대한 낙성법회를 열도록 지원하였다.[11] 이는 당시 왕실이 지눌의 사상과 활동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1209년에는 자신의 대표 저서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를 완성했다. 이 책은 중국의 여러 선종 사상을 깊이 탐구하고, 특히 중국 승려 규봉 종밀의 저술에 대한 폭넓은 해설과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
1210년 4월 22일, 지눌은 승려들을 모아 법당에 올라 설법하던 중, 주장자(拄杖子)를 짚은 채 앉은 자세로 입적하였다.[11] 그의 나이 53세였다. 희종은 지눌의 입적 소식을 듣고 깊이 애도하며, 그에게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감로(甘露)라는 탑호를 내렸다.[11]
지눌의 입적 후, 왕명으로 문신 김군수(金君綬)가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웠으나, 훗날 전쟁으로 인해 비석은 파괴되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귀부, 龜趺)만 남게 되었다. 이 비석은 1678년(조선 숙종 4년)에 백암 성총(栢菴 惺聰) 등이 다시 세웠다.[5]
3. 사상
지눌은 1182년 선과(禪科)에 합격한 후, 청원사(淸願寺)에서 혜능(慧能)의 《6조단경(六祖壇經)》,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 대혜(大慧) 선사의 《대혜어록(大慧語錄)》 등을 접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12] 이러한 경험은 그의 독창적인 선사상 형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12]
그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②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③ 경절문(經截門)이라는 세 가지 방편을 사용했는데, 이는 각각 자신의 깨달음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경전과 어록에 기반한 것이다.[12]
지눌 사상의 핵심은 선과 교의 조화에 있다. 의천(義天)이 교(敎)의 입장에서 선(禪)을 포용하려 했던 것과 달리, 지눌은 선(禪)의 입장에서 교(敎)를 융합하고자 했다. 그는 선종의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는 가르침과 화엄 사상의 '모든 존재가 불성의 드러남(性起說)'이라는 관점이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다.[11] 그는 선과 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모두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수행 방법으로는 단번에 깨닫더라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12]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강조했다.[11] 또한 한국 불교의 중요 개념인 체용(體用) 사상 역시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2] 지눌은 모든 존재 안에 내재된 불변하는 참된 본성, 즉 불성(佛性)과 열반의 가능성을 강조했다.[3][4]
지눌의 이러한 사상 체계는 조계 혜능의 선 사상에 화엄을 창조적으로 융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2] 그의 사상은 이전까지 중국 선의 영향 아래 있던 한국 선불교가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갖추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12]
그러나 후대에 성철 스님은 지눌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며, 깨달음과 동시에 수행이 완성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종 본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여 논쟁이 일기도 했다.[10]
3. 1.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논쟁
지눌은 1182년 선과(禪科)에 합격한 후, 청원사(淸願寺)에서 혜능(慧能)의 《6조단경(六祖壇經)》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을 통해 선(禪)과 교(敎)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또한 대혜(大慧) 선사의 《대혜어록(大慧語錄)》을 통해 마지막 의혹을 해소했다고 전해진다.[12]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은 그의 독창적인 선사상 형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12]
지눌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세 가지 방편, 즉 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②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③ 경절문(經截門)을 사용했는데, 이는 각각 그의 깨달음에 영향을 준 《6조단경》·《화엄론》·《대혜어록》에 기반한 것이다.[12]
지눌은 선과 교가 서로 배척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했다. 그는 교(敎)의 입장에서 선(禪)을 포용하려 했던 의천(義天)과는 달리, 선(禪)의 입장에서 교(敎)를 융합하고자 했다. 지눌은 “부처의 말씀은 교(敎)가 되고, 조사(祖師)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 되었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만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켜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가”라고 말하며 선과 교의 궁극적인 일치를 주장했다.[11]
돈오점수에서 돈오(頓悟)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문득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점수(漸修)는 비록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오랜 습관으로 인한 번뇌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므로, 깨달음 이후에도 정(定, 선정)과 혜(慧, 지혜)를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12] 지눌이 제시한 3문 중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은 돈오(頓悟)의 내용과 통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점수(漸修)의 내용과 연결된다.[12] 그러나 지눌은 이러한 돈오점수가 자칫 지적인 이해(知解)에 머무를 수 있음을 경계하며, 이를 넘어서기 위해 선의 화두를 참구하는 경절문(經截門) 수행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3][12]
또한 지눌은 수행 방법으로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강조하여 선과 교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교학(敎學)만을 중시하는 것을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로, 선(禪)만을 중시하는 것을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으로 보았다. 따라서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참선 수행을 병행하는 정혜쌍수가 중요하며, 계율 실천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11]
지눌의 이러한 선사상 체계는 조계(曹溪) 혜능의 선 사상에 화엄을 융합한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12] 지눌 이전의 한국 선이 중국 선의 연장선에 있었다면, 지눌은 한국 선의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고 여겨진다.[12]
오랜 기간 한국 불교의 정설로 받아들여진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은 성철 스님에 의해 비판받았다. 성철은 지눌의 돈오점수가 아닌, 깨달음과 동시에 수행이 완성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종 본래의 수행 관행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일으켰다.[10]
3. 2. 정혜쌍수(定慧雙修)
지눌은 수행 방법으로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였다. 이는 선이나 교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11] 그는 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를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라고 비판했으며, 선만을 내세우는 것 역시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라고 지적했다.[11]지눌은 교학(敎學)이 자칫 세세한 분별에 얽매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선학(禪學)은 비밀스럽게 뜻을 전한다는 명목 아래 의미 없이 앉아 졸거나, 설령 약간의 깨달음을 얻더라도 그 깊이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다.[11]
따라서 지눌은 교와 선을 분리해서 보지 말고,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한 바탕 위에서 참선하는 정혜쌍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실천 역시 중요하게 여겼다.[11]
3. 3. 선교일치(禪敎一致)
지눌은 1182년 선과(禪科)에 합격한 후 청원사(淸願寺)에서 혜능(慧能)의 《6조단경(六祖壇經)》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통현(李通玄) 거사의 《화엄론(華嚴論)》을 통해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대혜(大慧) 선사의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읽고 마지막 의문을 해소했다고 한다.[12]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은 그의 독창적인 선사상의 기초가 되었다.[12]
지눌은 선과 교가 교리적으로 서로 배척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했다. 돈오(頓悟)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단번에 깨닫는 것이고, 점수(漸修)는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번뇌가 쉽게 사라지지 않으므로 꾸준히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12]
그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세 가지 방편, 즉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經截門)의 3문을 사용했다. 이 세 가지 문은 각각 그의 깨달음에 영향을 준 《6조단경》, 《화엄론》, 《대혜어록》에서 비롯된 것이다.[12] 이 중 원돈신해문은 돈오점수의 돈오에 해당하고, 성적등지문은 점수에 해당한다.[12] 그러나 이러한 돈오점수가 자칫 학문적 이해(지해, 知解)에 머무를 수 있으므로, 이를 넘어서기 위해 선의 화두를 참구하는 경절문(經截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3][12]
지눌은 교의 입장에서 선을 포용하려 했던 의천(義天)과 달리, 선의 입장에서 교를 융합하고자 했다. 그는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는 선종의 가르침과, 모든 존재가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는 화엄(華嚴) 사상의 성기설(性起說)이 궁극적으로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처의 말씀은 교(敎)가 되고, 조사(祖師)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 되었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데, 어찌 근원을 살피지 않고 각자 익힌 것에만 집착하여 헛된 논쟁으로 세월을 보내는가?”라며 선과 교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다.[11]
수행 방법으로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다. 교만을 중시하는 것을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로, 선만을 중시하는 것을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으로 비판했다. 교학(敎學)은 분별하는 지혜에 얽매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깨달음을 놓치기 쉽고, 선학(禪學)은 비밀스럽게 전수된다는 이유로 자칫 앉아서 졸기만 하거나 얕은 깨달음에 머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교와 선을 나누지 않고,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며 참선하는 정혜쌍수가 필요하며, 계율 실천 역시 중요하다고 가르쳤다.[11]
지눌의 이러한 선사상 체계는 조계(曹溪) 혜능의 선 사상에 화엄 사상을 통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2] 그의 조계선(曹溪禪)은 독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그 이전 한국의 선은 중국 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12]
한편, 오랫동안 주류였던 지눌의 종합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 성철 스님은 이를 비판하며, 지눌의 돈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종 수행의 올바른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0]
3. 4. 체용(體用) 사상
체용(體用)은 한국 불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특히 지눌의 철학과 저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2] 지눌은 선과 교의 조화를 강조하며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그의 깨달음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1182년 선과에 합격한 후, 혜능의 《육조단경》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이통현의 《화엄론》을 통해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으며, 대혜 선사의 《대혜어록》을 읽고 최후의 의혹을 해소했다고 전해진다.[12]
지눌은 교(敎)의 입장에서 선(禪)을 포섭하려 했던 의천과 달리, 선(禪)의 입장에서 교(敎)를 융합하고자 했다. 그는 선종의 핵심 교의인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는 가르침과, 모든 존재와 현상이 바로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는 화엄 사상의 성기설(性起說)이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다.[11]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선과 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역설했다.
> "부처의 말씀은 교(敎)가 되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 되었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만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켜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가"[11]
이러한 선교관은 그의 수행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눌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선과 교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강하게 경계했다. 그는 교(敎)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라고 비판했고, 선(禪)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라고 지적했다. 교학(敎學)은 자칫 분별하는 지혜에 사로잡혀 견성성불의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고, 선학(禪學)은 자칫 형식적인 수행에 머물러 깨달음의 깊이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참선 수행을 병행하는 정혜쌍수가 필요하며, 계율의 실천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1]
또한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중요한 수행 방법으로 제시했다. 돈오(頓悟)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단박에 깨닫는 것이고, 점수(漸修)는 비록 깨달았더라도 오랜 습관으로 남은 번뇌를 점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정과 혜를 꾸준히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12] 이는 지눌이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용한 세 가지 방편인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經截門)과도 연결된다. 원돈신해문은 돈오에 해당하고, 성적등지문은 점수에 해당한다.[12]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과 수행이 지적인 이해(知解)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선의 화두를 참구하는 경절문(經截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2][13]
지눌의 이러한 사상 체계는 조계 혜능의 선 사상을 바탕으로 화엄 사상을 통합한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12] 지눌 이전의 한국 선이 주로 중국 선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평가되는 것과 비교할 때, 그의 사상은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12]
다만 후대에 성철과 같은 인물은 지눌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며,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수행을 마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야말로 선종 본래의 수행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눌의 사상은 오랫동안 한국 불교, 특히 조계종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4. 저서
- 『권수정혜결사문』 1권
- 『목우자수심결』 1권
- 『진심직설』 1권
- 『계초심학인문』 1권
- 『화엄론절요』 3권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권
- 『원돈성불론』 1권
- 『간화결의론』 1권
- 『염불요문』 1권
- 『육조단경발문』 1권
- 『상당록』 1권
5. 관련 문화재
-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 - 보물 제1639호
-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
-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참조
[1]
서적
The Korean Approach to Zen: The Collected Works of Chinul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
[2]
간행물
The Key Operative Concepts in Korean Buddhist Syncretic Philosophy: Interpenetration (通達) and Essence-Function (體用) in Wŏnhyo, Chinul and Kihwa
1995-03
[3]
서적
Tracing Back the Radiance: Chinul's Korean Way of Ze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1
[4]
서적
Tracing Back the Radiance: Chinul's Korean Way of Ze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1
[5]
백과사전
지눌
https://ko.wikisourc[...]
[6]
웹사이트
종단 소개 > 종조 > 종조 도의국사
http://www.buddhism.[...]
2018-06-20
[7]
웹사이트
종단 소개 > 종조 > 중천조 보조지눌국사
http://www.buddhism.[...]
2018-06-20
[8]
웹사이트
종단 소개 > 종조 > 중흥조 태고보우국사
http://www.buddhism.[...]
2018-06-20
[9]
웹사이트
지눌
https://terms.naver.[...]
[10]
웹사이트
인물한국사 - 지눌
https://terms.naver.[...]
[11]
웹사이트
지눌
https://terms.naver.[...]
[12]
백과사전
지눌
https://ko.wikisourc[...]
[13]
웹인용
YouTube
https://www.youtube.[...]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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