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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이도 옹립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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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카이도 옹립 구상은 198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비주류 파벌들이 당 부총재 니카이도 스스무를 옹립하여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재선을 저지하려던 계획이다. 나카소네 내각이 다나카 가쿠에이 파벌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록히드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다나카가 나카소네를 조정하려 하자, 스즈키 젠코 등은 니카이도를 내세워 나카소네와 다나카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다나카의 반대, 다나카파 내부의 반발, 비주류 파벌 내의 신중론, 그리고 야당의 반대로 인해 니카이도 옹립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후쿠다 다케오, 스즈키 젠코, 미키 다케오 등 원로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감소했으며, 자유민주당 내 파벌 간 세대교체가 가속화되었다. 1986년에도 니카이도는 총재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실패하며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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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이도 옹립 구상
선거 정보
선거 이름198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깃발 이미지
종류총재
진행 여부아니오
이전 선거198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이전 연도1982년
다음 선거1987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다음 연도1987년
선거일1984년 10월 31일
공시일1984년 10월 29일
선거 제도양원 의원 총회에 의한 총재 선거
후보
후보자
후보 1나카소네 야스히로
총재
선거 전나카소네 야스히로
선거 후나카소네 야스히로
니카이도 옹립 구상

2. 배경

1984년 11월에 실시될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높은 지지율을 배경으로 일찍부터 재선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한편, 나카소네 내각은 그 성립 초기부터 다나카파의 영향을 짙게 받아 "직각 내각", "다나카소네 내각" 등으로 불렸기 때문에, 스즈키, 후쿠다, 가와모토 파 등 비주류파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이 해,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가 당 부총재로 기용되면서 비주류파의 불만은 더욱 높아졌고, 미야자와 기이치 (고치카이, 스즈키파), 아베 신타로 (세이와회, 후쿠다파), 고모토 도시오 (신정책연구소, 가와모토파) 등이 재선 저지에 나섰다.

록히드 재판 피고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구상은 "2심 재판에서 무죄를 쟁취하고, 자신이 복권될 때까지 나카소네를 활용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1984년 8월, 최대 파벌을 이끄는 다나카는 가루이자와에서 극비리에 나카소네를 만나 "물론 재선시키겠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9월에는 하코네에서 열린 다나카파 연수회에서 연설하며 나카소네 재선 지지를 표명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나카소네 총재의 재선이 굳건하다고 여겨졌다.

3. 경위

1984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카소네 내각다나카 가쿠에이 파벌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아 '다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에 스즈키 젠코, 후쿠다 다케오, 고모토 도시오 등 비주류 파벌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1984년 4월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가 부총재로 기용되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다.

록히드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나카소네를 뒤에서 조정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나카는 8월에 가루이자와에서 나카소네와 극비리에 만나 재선을 돕겠다는 약속을 했고, 9월에는 하코네정에서 열린 다나카파 연수회에서 나카소네 지지를 표명하여 나카소네의 재선은 무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4년 10월 26일 스즈키 젠코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저택을 찾아와 차기 총재 선거에 니카이도 스스무를 옹립할 것을 제안했다.[1] 다나카파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지만, 다나카 자신이 총리직 복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나카파에서는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져 왔고, 스즈키는 이러한 불만을 역이용하고자 했다.[1] 스즈키의 목적은 다나카와 나카소네를 이간질하여 니카이도 잠정 정권을 발족시키고, 그 후에 자신의 파벌에 속하는 미야자와 기이치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것에 있었다.[1] 또한 스즈키는 나카소네가 자신을 무능한 것처럼 공격한 것과 다나카파와 나카소네파가 자민당 운영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1] 당 운영 주도권에 대해서는 후쿠다 다케오미키 다케오도 스즈키에게 동조했다.[1] 국회 본회의 총리 지명 때는 공명당의 다케이리 요시카쓰, 민사당사사키 료사쿠와도 제휴하는 공작이 있어 나카소네의 재선에 먹구름이 끼는 듯 보였다.[1]

10월 27일 니카이도는 에사키 마스미와 함께 메지로다이에 있는 다나카의 저택을 찾았다.[1] 다나카와 니카이도 사이에서는 "지금 나카소네를 그만두게 할 이유가 없다", "나카소네가 정말 당신을 도울 수 있는가? 나라면 어떻게든 재판을 끝낼 수 있다", "당신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이번엔 내게 맡겨달라"는 식의 대화가 오갔고, 니카이도는 "당신이 잘못된 말을 한다면 나는 당신을 따르지 않겠다. 이건 유언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2]

니카이도는 자신이 나카소네보다 다나카와의 신뢰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비주류파의 의견을 존중함으로써 당내 융화를 꾀한다는 대의를 호소했다.[3] 하지만 비주류파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은 다나카에게 있어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고, 차라리 나카소네를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3]

결국 니카이도는 다케시타 노보루의 후견인인 가네마루 신 등 다나카파 간부들의 반대, 나카소네의 대항마였던 고모토가 다케시타, 가네마루에게 동조하여 미키를 억누른 점, 스즈키파와 후쿠다파 내에서도 신중론이 대세였던 점, 당 내 문제에 야당이 관여하는 것에 대한 자민당 내 저항감, 그리고 다나카의 반대 등 여러 이유로 총재 선거에 나서는 것을 단념했고, 옹립 구상은 실패로 끝났다.[1]

10월 28일 열린 최고고문회의에서 후쿠다와 니카이도 등이 나카소네를 비판하자 나카소네가 당풍을 쇄신하고 당내 융화를 꾀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정리되었다.[1] 이후 나카소네는 무난히 총재 재선에 성공하고 11월 1일 2차 개조 내각이 발족했다.[1]

4. 니카이도 옹립 구상의 실패 요인

5. 영향

니카이도를 총재로 추대하려던 구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후쿠다 다케오, 스즈키 젠코, 미키 다케오 등 총리 경험자들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4] 이는 자유민주당 내 원로 정치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파벌 간 세대교체를 가속화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최대 충신인 니카이도 스스무가 총재 공선에 의욕을 보인 것은 다나카파 내부의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재선에 큰 공헌을 한 다나카파는 내각 및 당직 인사에서 더 많은 지분을 요구했지만, 이전과 같은 6개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특히 간사장 자리에는 다나카가 지지한 오자와 다쓰오가 아닌 니카이도 옹립 구상을 막는데 공헌한 가네마루 신이 선출되었다.[4]

하지만 가네마루가 추천한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 등은 모두 입각에 실패하고 다나카가 지지한 사람들이 각료가 되었기에 당시의 역학 관계는 여전히 다나카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4] 이러한 알력은 1985년 2월 7일 다케시타가 창정회를 창설하면서 폭발했고, 20일 뒤에 다나카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실상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잃으면서 다나카의 지배도 종언을 맞이하게 된다.[4]

6. 2차 니카이도 옹립 구상

1986년 7월 중참의원 동시 선거에서 자민당을 압승으로 이끈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당 규약 개정을 통해 총재 임기 1년 연장을 획득했다. 나카소네로부터 중의원 의장 취임을 제안받은 니카이도 스스무가 이를 고사하자 부총재에서 물러나 무임소 장관이 되었다. 1년 후, 다케시타 노보루 등은 목요클럽(다나카파)을 이탈했다. 목요클럽(다나카파)은 다케시타파(게이세이회), 니카이도 그룹, 중립계 3파로 분열되었다. 소수파로 전락한 니카이도 그룹의 영수로서 니카이도는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했다. 다나카 가문의 승낙을 얻었다며 스즈키 젠코미야자와파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른바 "니카이도 옹립 구상(옹립극) 제2막"이다.

그러나 미야자와 기이치를 총재 후보로 안고 있는 미야자와파에서 니카이도를 지원하는 목소리는 적었고, 제1탄 옹립 구상의 주도자였던 스즈키에게도 최종적으로 지원을 거절당해 총재 선거 고시 전날 니카이도는 출마를 포기했다. 총재 선거 무대에 두 번이나 실패한 니카이도와 니카이도 그룹은 의원 수를 점차 줄여 소멸하게 된다.

7. 한국의 관점

참조

[1] 서적 蘭は幽山にあり 二階堂進聞書 西日本新聞社
[2] 뉴스 田中元首相と大激論 二階堂氏『中道へ認識甘い』 中日新聞 1984-10-28
[3] 문서
[4] 뉴스 田中角栄に反旗、竹下派旗揚げ 「政界のドン」金丸信(5) https://www.nikkei.c[...] 201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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