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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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학철은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항일 투쟁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이다. 상하이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으며,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팔로군 내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다리를 절단하는 고초를 겪고, 광복 후 월북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김일성 정권에 환멸을 느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중국에서 문학 활동을 하며 작품을 발표했고, 1989년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1년 사망 후 유골은 두만강에 뿌려졌으며, 그의 항일 독립운동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추모 사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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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191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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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학철 |
한자 | 金學鐵 |
가타카나 | キム・ハクチョル |
로마자 표기 | Kim Hak-Cheol |
조선글 | 김학철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916년 11월 4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원산부 |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창춘 |
사망일 | 2001년 9월 25일 |
거주지 | 일제 강점기 경성부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대한민국 서울 중화인민공화국 둥베이 지방 지린성 지린 |
직업 |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 소설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양부 | 김휘암 |
양모 | 주씨 부인 |
생부 | 홍영일 |
생모 | 송씨 부인 |
경력 | |
경력 | 중국작가협회 둥베이 지방 지린 성 지회 옌볜분회 문예부 차장 |
학력 | |
학력 | 1952년 중공 베이징 대학교 철학과 중퇴 |
군 복무 | |
군 복무 | 1943년 조선의용대 중사 전역 |
정당 |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함주, 평안남도 평양, 경성부 등지에서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33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 호가장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나가사키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활동하다 1946년 월북했으나, 1950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며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등의 작품을 남겼다. 2001년 사망 후 유해는 두만강에 뿌려졌다. 그는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으로 불렸다.[7]
시기 | 주요 내용 |
---|---|
1916년-1932년 | 출생 및 학창 시절 (함경남도 원산, 함주, 평안남도 평양, 경성부) |
1933년-1945년 | 중국 망명 (상하이), 조선의용대 가담, 항일 무장 투쟁, 호가장 전투 부상, 일본군 포로, 나가사키 옥고 |
1945년-1950년 | 광복 후 귀국, 서울 활동, 1946년 월북 |
1951년-2001년 | 중국 재망명, 작가 활동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등), 2001년 사망, 유해 두만강 안치 |
2. 1. 초기 생애 (1916-1932)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함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이후 평안남도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경성부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7] 중학교 시절에는 광주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1]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33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2. 2. 중국 망명과 항일 투쟁 (1933-1945)
1933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 국민당 핵심 인물 양성 기관인 상하이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했다.[7] 1938년 김원봉이 한커우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에 분대장으로 가담하여[7] 팔로군 내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며 중국 동북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7] 194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7]1941년 12월 12일 허베이성 석가장시 호가장에서 벌어진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 제108여단(홍사익 소장)과 교전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의식불명 상태로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7] 이후 나가사키로 끌려가 총상을 입은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고초를 겪었다.[7] 1942년 5월, 석가장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 구류된 후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1943년 4월 29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7] 1945년 2월, 전향서를 쓰지 않아 치료를 받지 못하고 감옥에서 왼쪽 다리가 절단되었다.[7] 1945년 8·15 광복으로 풀려났다.[7]
2. 3. 광복 후 귀국과 월북 (1945-1950)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8·15 광복으로 징역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귀국했다. 서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1946년 월북했다.[7] 월북 후에는 노동신문 기자 등으로 일하며 단편 〈담뱃국〉(1946)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7]2. 4. 중국 재망명과 문학 활동 (1951-2001)
1950년 김일성 정권에 환멸을 느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7] 1951년 베이징으로 건너가 옌지 시에 자리를 잡고, 중국문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1952년 10월, 주덕해 등의 초청으로 연길로 이주하여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을 역임하였다.[1]1953년 7월, 연변주 교육국이 조직한 중학생 하계 캠프에서 문학 강의를 하며 조선어의 혼란(한어의 영향)을 비판하였다.[1] 1954년,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를 발표하였으나,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반동적인 작품으로 비판받았다.[1]
1961년 3월, 베이징의 소련 대사관에 망명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연길로 송환되었다.[1] 그는 당시 중소 관계가 최악이었던 상황에서 소련 대사관에 들어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느냐고 항의했으나, 경관들에게 제지당했다고 회고했다.[1]
1964년 3월, 반우파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마오쩌둥을 비판한 『20세기의 신화』를 몰래 완성하고 일본에서 출판하기 위해 일본어 번역 작업을 진행했다.[1] 그러나 1966년 12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 등 반혁명파에 의해 자택이 수색당하고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었다.[1]
1974년 4월, 연길의 문화궁전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변호인 없이 군중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겠다”고 말했으나, 시민병들에게 밧줄로 목을 졸리고 몽둥이로 걸레를 입에 물리는 등 탄압을 당했다.[1] 결국 징역 10년의 실형 선고를 받고 돈화의 추리구 감옥에 수감되었다.[1]
1977년 12월, 만기 석방되었고, 1978년 명예 회복되었다.[1] 그는 억울함이 풀린 재판장에서 “나는 일찍이 이 북간도 땅에 이렇게 긴 터널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라고 발언하며, 20여 년 동안 박해받은 것에 대해 “무엇이 고마워서 ‘만세’를 외쳐야 하는가. 너희들이 사과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회고했다.[1]
1980년 12월, 『20세기의 신화』에 대해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사회적 영향력이 없었고, 원고를 쓰는 것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하여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1] 24년 만에 집필 중지가 해제되었다.
1983년, 항일 회고록 『항일별곡』을 출판했다. 1985년,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공식적으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 가입하여 분회 부주석을 역임했으며, 『김학철 단편소설집』을 출판했다. 1986년, 장편소설 『격정시대』를 출판했고, 1987년, 『김학철 작품집』을 출판했다.[1]
1987년,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당국으로부터 반환되었다.[1] 그는 원고가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었으며, 당국에게도 귀중품이었던 것이라고 말했다.[1]
1989년 9월~12월 대한민국을, 12월 일본을 방문했다.[1] 1994년, 한국 KBS 방송에서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1996년 12월 12일, 서울 프레스센터 연회장에서 『20세기의 신화』(창작과비평사) 출판기념회가 열렸으며, 이수성(국무총리), 고은(시인), 백낙청(문예평론가, 서울대학교 교수)이 축사를 했다.[2]
1930년대 북간도에서 펼쳐진 항일투쟁을 다룬 전3권의 〈해란강아 말하라〉(1954)와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 민족해방의 투사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전2권의 〈격정시대〉(1986)를 펴냈다.[7] 중국작가협회 옌볜 분회 부주석을 역임했으며 1990년 이후로는 수 차례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7]
2001년 9월 25일, 연변에서 사망했고,[7] 2001년 9월 27일, 유언에 따라 두만강에 유골을 뿌렸다.[1]
3. 사후
2003년 9월 26일, 연변작가협회와 김학철 문학연구회 주최로 훈춘 두만강변에서 작가 김학철 추도회 “다시 만나는 김학철 선생”이 열렸다.[3]
2005년 8월 5일,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시(石家莊市) 후가장촌 입구에 “김학철 항일문학비”와 “금사량(金史良) 항일문학비”가 세워졌다.[3]
2006년 1월, 연변소설가학회가 조선족 작가를 대상으로 “김학철 문학상”을 제정하고 작품을 공모하였다.[3]
2006년 9월 25일, 두만강변에서 추도식이 열리고 김학철 문학연구회,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 등 각계 인사 10여 명이 참석하였다.[3]
2008년 1월 26일,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 등이 주최한 『김학철 평전』 출판기념회가 옌지시(연길)의 호텔에서 열렸다.[3]
2015년 3월 1일, 한국 SBS가 “SBS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을 방영하였다.[3]
4. 작품
- 1936년, 창작 활동 시작.[1]
- 1946년 8월, 단편 『담뱃국(연엽탕)』을 발표하여 인정받음.[1]
- 1954년, 장편소설 『말하라, 해란강』 발표.[1]
-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말하라, 해란강』이 반동적인 작품으로 비판받음.[1]
- 1964년 3월, 반우파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마오쩌둥을 비판한 『20세기의 신화』를 몰래 완성. 일본에서 출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1]
- 1966년 12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 등 반혁명파에 의해 자택이 수색당하고 『20세기의 신화』(현재도 중국에서는 발금) 원고가 발견됨.[1]
- 1983년, 항일 회고록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판.[1]
- 1985년, 『김학철 단편소설집』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1]
- 1986년 3월, 요녕민족출판사에서 장편소설 『열정시대』 출판.[1]
- 1987년 6월, 『김학철 작품집』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1]
- 1987년,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당국으로부터 반환됨.[1]
- 1996년 12월 12일, 서울 프레스센터 연회장에서 「20세기의 신화」(창작과비평사) 출판기념회가 열림. 이수성(국무총리), 고은(시인), 백낙청(문예평론가, 서울대학교 교수)이 축사를 함.[2]
5.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관점
김학철은 항일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항일 독립운동사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1920년대 초와 1930년대 후반, 약 2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였던 경험을 근거로 들었다.[4][5][6]
김학철은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신화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과장된 내용이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독립군의 대일 무장항전에 대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의 전과는 최소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실제로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본군과 싸워 10번 중 9번은 패배했다고 회고한다.[4][5][6]
참조
[1]
뉴스
金学鉄先生の初文学講義(김학철선생님의 첫 문학강의)
http://www.dynews.co[...]
東洋日報
2016-09-08
[2]
뉴스
「20世紀の神話」を出版した金学鉄氏(<20세기의 신화> 출판한 김학철씨)
http://www.sisapress[...]
時事ジャーナル
1996-12-26
[3]
뉴스
抗日文学家、金学鉄・金史良文学碑を中国に建立(항일문학가 김학철・김사량 문학비 中에 건립)
http://news.khan.co.[...]
京郷新聞
2005-08-15
[4]
웹사이트
이 땅의 양심들은 왜 지금 태평한가?
https://www.peoplepo[...]
참여연대
2019-10-22
[5]
웹사이트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옹과의 병상 인터뷰
https://www.peoplepo[...]
People's Solidarity for Participatory Democracy
2001-09-01
[6]
웹사이트
韓国で反日映画続々公開も当事者自ら「神話に近い」と認める
https://www.zakzak.c[...]
2019-07-31
[7]
뉴스인용
[부음] ‘격정시대’ 작가 김학철씨 별세
http://m.chosun.com/[...]
조선일보
2001-09-2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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