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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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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서해(1901년 1월 21일 ~ 1932년 7월 9일)는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소작인 겸 한의사의 아들로 성장했으며, 가난과 방랑 생활 속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이후 《탈출기》, 《홍염》 등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식민지 시대 민중의 삶을 그려냈다. 프로 문학 단체인 KAPF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언론인으로도 활동했으나 위병과 아편 중독으로 고통받다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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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최서해
본명최학송(崔鶴松)
출생일1901년 1월 21일
출생지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리
사망일1932년 7월 9일
사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국적대한제국
본관해주
서해(曙海)
언어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활동 기간1918년~1932년
학력
학력함북성진보통학교 중퇴 (1907년)
직업
직업소설가
시인
수필가
언론인
장르
장르소설
시문학
수필
주요 작품
주요 작품"시" 《우후정원의 월광》
"소설" 《고국》
"수필" 《그립은 어린 때》
가족
배우자조분녀(4번째 부인)
자녀2남 2녀
친척조운(이복 서얼 손아랫처남)
경력
경력경성매일신보 학예부 부장
웹사이트
웹사이트최서해

2. 생애

본관해주(海州)이며, 1901년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리에서 소작인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한문중국어를 배웠고 성진공립보통학교를 중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그러나 《청춘》, 《학지광》 등의 문학 잡지를 읽으며 스스로 문학 공부를 하였고,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 감명을 받기도 했다.

1917년 가난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간도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극심한 빈곤과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1918년부터 1924년까지 간도와 회령군 등지에서 유랑하며 겪었던 체험은 그의 문학 세계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가난과 착취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생활고와 과로로 위병을 앓았고,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에 손을 대기도 했다.

1924년 서울로 올라와 이광수의 도움으로 경기도 봉선사에 머물며 창작에 몰두했다. 같은 해 《조선문단》에 단편 소설 《고국》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고, 이듬해 발표한 《탈출기》로 큰 주목을 받으며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 작가로 떠올랐다. 이후 《기아》, 《살륙》, 《홍염》, 《큰물 진 뒤》 등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극빈층의 처절한 삶, 그리고 그들의 저항을 그린 작품들을 발표했다. 1925년 카프(KAPF)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그의 문학은 이념보다는 생존의 문제에서 우러나온 절규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단 활동과 더불어 《중외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기자 및 학예부장으로 일하며 언론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생활고는 계속되었고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1932년 위문협착증 수술을 받던 중 과다출혈로 인해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미아리묘지에 묻혔다가 후에 망우리묘지로 이장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방랑

본관해주(海州)이다. 1901년 1월 21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리에서 소작인한의사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곡(苧谷)이었다. 유아기에는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읍에서, 유년기에는 함경북도 길주군 학성면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다.

1910년경 아버지가 가족을 두고 만주간도 지방으로 떠나면서, 어머니와 함께 성진에서 살았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중국어를 배웠으며, 성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5학년 때 중퇴했다. 이것이 그의 최종 학력이었다. 이후 《청춘》, 《학지광》 같은 문학 잡지를 읽으며 스스로 문학 공부를 했다. 어릴 때부터 소설 읽기를 좋아하여 고금의 소설을 탐독했으며, 17세 때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17년, 조선에서의 가난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간도로 이주했다. 하지만 간도에서의 생활도 나아지지 않아 생계를 위해 품팔이를 해야 했다. 이 시기의 고된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 『탈출기』의 바탕이 되었다. 1918년부터 1924년까지 간도와 회령군 등지에서 유랑 생활을 하며 가난과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농민(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다.

1920년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고, 이후 맞이한 아내는 사망했다. 세 번째 결혼에서 딸 백금(白琴)을 얻었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어머니와 아내, 딸을 부양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으며, 과로로 위병을 얻었다. 위병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아편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결국 중독 상태에 이르렀다.

1923년, 간도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와 국경 근처 마을에 정착했다. 이 무렵 북선일일신문에 "자신(自信)"이라는 시를 투고하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우로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 길거리로 내몰렸다. 결국 어머니는 평안도로, 아내와 딸은 성진으로 보내고 홀로 방랑길에 올랐다.

1924년,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내 서울로 가서 도움을 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광수는 상경해도 고생만 할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최서해는 서울행을 결심하고 그해 11월 이광수를 찾아갔다. 이광수는 그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에 있는 봉선사에 머물도록 주선해주었다.

2. 2. 문학 입문과 작품 활동

성진공립보통학교를 5학년 때 중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최서해는 《청춘》, 《학지광》 같은 문학 잡지를 읽으며 스스로 문학 공부를 했다. 17세 때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18년, 이광수의 소개로 《학지광》에 〈우후정원의 월광〉 등 시 세 편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었다. 그는 첫 작품 발표의 감격을 '아무리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심부름을 가다가도 펴서 읽었지만, 읽고 또 읽어도 싫지 않았다'고 회상했다.[5] 1923년 북선일일신문에 시 〈자신(自信)〉을 투고하면서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7년부터 1924년까지 간도와 회령군 등지에서 겪었던 유랑 생활의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서해는 가난과 지주들의 착취 속에서 고통받는 농민(민중)들의 삶,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농민들의 좌절과 해결책 없는 절망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는 스스로 "체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고 밝힐 정도로 사실주의적인 창작 태도를 견지했다.

1924년 서울로 올라와 이광수의 도움으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 머물며 창작에 몰두했다. 같은 해 방인근이 운영하던 조선문단사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조선문단》에 단편 소설 《고국》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25년 발표한 《탈출기》는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최서해를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 작가로 만들었다. 이후 《박돌의 죽음(朴乭의 死)》, 《기아》, 《살륙》, 《홍염》, 《큰물 진 뒤》 등 극빈층의 고통스러운 삶과 그들의 자연 발생적인 저항을 다룬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5년에는 카프(KAPF, '프로 예맹')에 가입했으나, 그의 문학은 정치적 이념보다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생리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현실 고발에 더 중점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같은 해 봉선사를 나와 방인근의 집에 머물며 김동인 등 여러 문인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1929년에는 《중외일보》 학예부 기자로, 1931년에는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어려운 생활과 건강 악화로 인해 후기에는 창작 활동이 점차 줄어들었다.

2. 3. 언론 활동과 죽음

1925년 카프(KAPF)에 가입했으나, 그의 문학은 정치적 이념보다는 생계 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고통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조선문단 출자자인 방인근의 집에 머물며 김동인 등 여러 문인과 교류했다. 1926년에는 최남선의 주선으로 오랜 친구였던 조운 시인의 여동생과 결혼하며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조선문단사의 경영난으로 다시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후 언론계에 투신하여 활동했지만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주요 언론 및 문단 경력
기간소속직책
1925년 ~ 1926년카프총무위원 겸 사무위원
1926년시대일보학예부 기자
1926년 ~ 1929년중외일보학예부 기자 (1926-27), 학예부 차장 (1927-28), 학예부 부장/주필 (1928-29)
1929년 ~ 1931년경성매일신보학예부장/주필



중외일보 시절에는 회사가 파산 직전이라 2년간 급여를 받지 못하고 일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 경성매일신보 학예부장 등으로 일했으나, 이미 오랜 생활고와 과로로 얻은 위병이 악화된 상태였고 창작 활동을 이어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극심한 위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상습적으로 복용하여 중독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1932년 6월 말, 위문협착증으로 관훈동의 삼호병원에 입원했다. 상태가 위중해져 7월 6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속칭 의전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중 대량 출혈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동료 문인 이익상, 최문국, 박상엽, 김원주 등이 수혈을 위해 애썼지만, 7월 9일 새벽 4시 20분,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미아리묘지에 안장되었고, 2년 후 문인들이 묘비를 세웠다. 이후 미아리묘지가 폐쇄되면서 이헌구 등의 노력으로 망우리묘지로 이장되었다.

3. 작품 세계

최서해는 일제강점기 한국 문학에서 카프파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5] 그의 작품 세계는 주로 간도 등 국경 지대에서 조선인 유민들이 겪는 극한의 빈곤과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대표작들에서 잘 드러난다.

3. 1. 주제와 특징

카프파 소설가로 잘 알려진 최서해지만, 그의 문학 활동은 시(詩)로 시작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으나, 훗날 이광수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였고, 그의 소개로 1918년 잡지 《학지광》에 〈우후정원의 월광〉을 포함한 시 세 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처음 등장했다. 최서해는 이때의 감격을 훗날 '아무리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심부름을 가다가도 펴서 읽었지만, 읽고 또 읽어도 싫지 않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5]

3. 2. 주요 작품


  • 《고국》(故國), 1924년
  • 탈출기》(脫出記), 1925년
  • 《홍염》(紅焰), 1927년
  • 《이중》(二重), 1927년
  • 《큰물 진 뒤》
  • 《혈흔》(血痕)
  • 《토혈》(吐血)
  • 《해돋이》
  • 〈우후정원의 월광〉
  • 〈추교의 모색〉
  • 〈반도청년에게〉

4. 연보


  • '''1901년''' 1월 21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 어릴 적 이름은 오곡(苧谷).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움.
  • '''1910년'''경: 아버지가 가족을 두고 만주로 떠남.
  • 성진공립보통학교 입학, 5학년 때 중퇴. 이 학력이 최종 학력이 됨.
  • '''1917년''': 조선에서의 빈곤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간도로 이주.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 이 시기 경험은 소설 『탈출기』의 바탕이 됨.
  • '''1918년''': 잡지 『학지광』에 시 3편 발표.
  • '''1919년'''–'''1921년''': 경성일보 기자로 활동.
  • '''1920년''': 첫 결혼 후 곧 이혼. 이후 두 번째 아내와 사별.
  • '''1921년''': 세 번째 결혼 후 딸 백금(白琴) 출생.
  • '''1921년'''–'''1922년''': 상하이에서 공산당 당 위원으로 활동.
  • 간도 생활 중 과로로 위병을 앓게 되었고,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하여 중독됨.
  • '''1923년''' 봄: 간도 생활을 청산하고 어머니, 아내, 딸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 국경 근처 마을에서 일하며 생활.
  • '''1923년''': 북선일일신문에 시 "자신(自信)"을 투고하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
  • '''1923년''' 이후: 폭풍우로 집이 무너져 다시 빈곤에 처함. 어머니는 평안도로, 아내와 딸은 성진으로 보내고 본인은 방황.
  • '''1924년''':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
  • '''1924년''' 11월: 서울로 상경하여 이광수를 만남. 이광수의 주선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봉선사에 머물게 됨.
  • 봉선사에서 『탈출기』를 완성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음. 이후 『박돌의 죽음(朴乭의 死)』, 『기아와 살육(飢餓와 殺戮)』, 『큰물진 뒤(大水의 出た後)』 등을 발표하며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부상.
  • '''1925년''' 1월: 봉선사 동료와 다툼 끝에 절을 나옴.
  • '''1925년''' 2월: 이광수의 주선으로 『조선문단』 출자자인 방인근의 집(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하숙하며 김동인 등 문인들과 교류.
  • '''1925년'''–'''1926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여 총무위원 겸 서기로 활동.
  • '''1926년''':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
  • '''1926년''' 4월 8일: 조선문단사에서 최남선의 주선으로 조운의 여동생 조분려(芬麗)와 네 번째 결혼.
  • '''1926년'''–'''1927년''': 중외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
  • '''1927년''': 조선문단사에 입사했으나 경영난으로 곧 퇴사. 장남 백(白) 출생.
  • '''1927년'''–'''1928년''': 중외일보 학예부 부장으로 활동.
  • '''1928년'''–'''1929년''': 중외일보 주필로 활동.
  • '''1929년''': 중외일보가 파산 직전 상태였음에도 기자직을 맡아 2년간 무보수로 일해야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주필 활동 시기와 겹쳐 정확한 확인이 필요함.
  • '''1930년''': 중외일보 도산. 차남 택(澤) 출생.
  • '''1931년''':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취임. 건강 악화와 아편 중독으로 창작 활동은 어려워짐.
  • '''1932년''' 6월 말: 위병 악화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
  • '''1932년''' 7월 6일: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전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으나 과다 출혈로 위독 상태에 빠짐. 이익상, 최문국, 박상엽, 김원주 등이 수혈에 힘썼으나 회복하지 못함.
  • '''1932년'''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사망. 향년 31세.
  • 사후: 유해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2년 후 문인들에 의해 묘비가 세워짐.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 폐쇄 계획에 따라 이헌구 등의 노력으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

5. 가족 관계

최서해는 일생 동안 4번 결혼하였으며, 앞선 세 명의 부인과는 병으로 사별했다.[6] 1926년, 네 번째 부인인 조분녀와 마지막으로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생몰년 및 상세 정보
배우자 (4번째)조분녀(曺粉女)1893년 8월 9일 ~ 1982년 9월 23일 (향년 89세)
1906년 대한제국 전라남도 영광공립보통학교 졸업[7]
1926년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청진부에서 최서해와 재혼.
자녀2남 2녀[8]4명의 부인에게서 각각 1명씩 얻음.
첫째 딸은 폐렴으로 요절.
처남조운(曺雲)1900년 7월 22일 ~ ?
시조 시인[10][11] 겸 대학 교수[9]


참조

[1] 웹사이트 Ch'oe Hae Korean writer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4-14
[2] 웹사이트 최서해 (崔曙海) https://encykorea.ak[...] 2023-04-14
[3] 웹사이트 최서해[崔曙海 https://www.doopedia[...] 2023-04-18
[4] 서적 Čʹoi, Sō-Hä (1901-1932) https://catalogue.bn[...]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2023-04-18
[5] 간행물 그립은 어린 때 조선문단
[6] 설명
[7] 설명
[8] 설명
[9] 설명
[10] 설명
[11]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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