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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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로 성채는 이집트 카이로에 위치한 요새로, 1176년에서 1183년 사이에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에 의해 십자군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모카탐 언덕에 위치하여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19세기까지 이집트 총독부의 중심부로 사용되었다. 성채는 살라딘의 요셉의 우물과 맘루크 시대의 수로 시스템을 갖추어 급수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요 모스크로는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알 나시르 무함마드 모스크, 술레이만 파샤 모스크, 알 아자브 모스크가 있으며, 이집트 국립 군사 박물관, 알 가와하라 궁전 박물관, 마차 박물관, 경찰 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쳐 무함마드 알리 시대에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으며, 현재는 이집트의 주요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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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성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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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카이로 성채는 카이로 동쪽 무카탐 언덕(Mokattam hills) 아래 곶에 자리하여, 공격하기 어려운 천혜의 요새 조건을 갖추었다. 이러한 전략적 위치 덕분에 성채는 건설 이후 19세기까지 약 700년 동안 이집트 정부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2] 오랜 기간 동안 여러 통치자와 정권이 들어서면서 성채의 구조와 배치는 필요에 따라 반복적으로 변경되고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초기 아이유브 왕조 시대의 원형이나 이후 시대의 정확한 계획을 재구성하기는 어렵다.[3][4]
성채의 현재 모습을 만든 주요 건설 시기는 크게 세 차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12세기 아이유브 왕조 시대로, 살라딘이 성채 건설을 시작했다. 두 번째는 14세기 맘루크 왕조 시대로, 특히 알나시르 무함마드 술탄 치하에서 대규모 건설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세 번째는 19세기 무함마드 알리 시대이다.[5] 성채는 1874년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이스마일이 새로 지은 카이로 도심의 압딘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정부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견고한 방어 시설에도 불구하고 성채는 실제 포위 공격을 받은 적은 없지만, 카이로나 이집트 내부의 여러 정치적 갈등에는 연루되었다.[9]
일반적으로 요새 단지는 역사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북쪽 구역'''(현재 국립 육군 박물관 위치)은 역사적으로 군 주둔지로 사용되었고, '''남쪽 구역'''(현재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위치)은 술탄의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또한 서쪽 아래 구역은 역사적으로 맘루크 왕조의 왕실 마구간이 있던 곳이다.[10] 그러나 이러한 기능적 구분은 19세기 무함마드 알리 시대에 전체 부지를 개조하고 다양한 기능의 건물을 건설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4]
성채의 서쪽과 남서쪽에는 역사가들이 '히포드롬' 또는 ''마이단''(광장)으로 자주 언급하는 넓은 야외 공간이 있었다.[3][10][5] 수 세기 동안 이곳은 (특히 승마) 훈련장이자 군사 사열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윤곽은 성채 이쪽의 도로(주로 살라흐 알딘 거리) 배치에서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이 히포드롬의 북쪽 끝에는 루마일라 광장(''Maydan/Midan Rumayla'')으로 알려진 또 다른 광장이 있었는데, 오늘날은 살라흐 알딘 광장(Midan Salah ad-Din) 또는 시타델 광장(Midan al-Qal'a)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왕실 마구간과 인접해 있어) 말 시장으로 사용되었지만, 왕실 및 종교 의식을 위한 공식 광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술탄 하산 모스크와 알리파이 모스크 옆에 큰 회전 교차로가 있다.[3][5][10]
2. 1. 아이유브 왕조 시대 (12세기-13세기)
아이유브 왕조 시대(12세기-13세기)는 카이로 성채의 건설과 초기 발전이 이루어진 중요한 시기이다. 성채 건설은 왕조의 창시자 살라딘에 의해 1176년 시작되어 1183년경 기본적인 골격이 완성되었다.[3][7] 주된 목적은 십자군의 잠재적인 공격으로부터 카이로를 보호하고, 파티마 왕조를 전복시킨 후 새로운 정권의 안전한 정부 중심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3][7]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나 알레포와 같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도시의 중심 역할을 하는 시리아 도시들의 구조에 익숙했으며,[5] 이를 모카탐 언덕 아래의 전략적 위치에 적용하여 방어에 유리한 요새를 건설하고자 했다.[2]살라딘 시대에는 주로 성채의 북쪽 구역이 건설되어 군사적 방어 기능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는 성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깊은 우물('유수프의 우물')과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아이유브 시대 성문인 '밥 알-무다라지'(Bab al-Mudarraj) 등이 만들어졌다.[3][4][10] 건설에는 주변 언덕의 석회암뿐만 아니라 기자의 작은 피라미드 등에서 가져온 석재와 십자군 포로들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3]
살라딘 사후, 그의 후계자인 술탄 알 아딜 1세(al-'Adil I)와 알 카밀(al-Kamil) 시대에도 성채 건설은 계속되었다.[4] 이 시기에는 북쪽 구역의 탑들이 보강되었으며,[3][5] 특히 알 카밀은 성채 남쪽 구역에 궁전, 모스크, 도서관 등 술탄의 거처와 행정 시설을 건설하거나 완공하여 1206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4][8] 또한 성채 서쪽과 남쪽에는 군사 훈련 및 퍼레이드를 위한 넓은 광장(마이단, maydan)을 조성하는 등[8] 성채의 기능을 확장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본적인 구조(북쪽 군사 구역, 남쪽 행정/거주 구역)를 확립했다.[8]
이처럼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 건설되고 확장된 카이로 성채는 이후 맘루크 왕조 시대를 거쳐 19세기 무함마드 알리 시대까지 이집트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2][5] 비록 술탄 알 살리흐(al-Salih)가 잠시 로다 섬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으나, 맘루크 왕조 시대에 이르러 성채는 다시 술탄들의 영구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2. 1. 1. 살라딘 시대

카이로 성채 건설은 1176년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 살라딘(Salah ad-Din)에 의해 시작되어 1183년에서 1184년 사이에 완공되었다.[3][7] 이는 십자군의 잠재적인 공격으로부터 카이로를 보호하고,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새로운 정권의 안전한 정부 중심지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3][7]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나 알레포와 같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도시의 중심 역할을 하는 시리아 도시들의 구조에 익숙했으며, 이를 카이로에 적용하고자 했다.[5]
살라딘은 더 나아가 카이로와 인근의 옛 수도였던 푸스타트를 아우르는 약 20km 길이의 거대한 성벽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성벽으로 나는 [카이로와 푸스타트] 두 도시를 하나로 만들어 한 군대가 두 도시를 모두 방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일강 강둑에서 나일 강둑까지 하나의 성벽으로 두 도시를 둘러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 카이로 성채는 이 거대 성벽 계획의 중심축으로 구상되었다. 비록 살라딘이 구상한 성벽 전체는 그의 사후인 1238년까지도 건설이 진행되었고[3] 끝내 완전히 완공되지는 못했지만[8], 성채 자체는 계획대로 건설되었다.
성채 건설의 실무는 살라딘의 가까운 측근이자 환관이었던 바하 앗딘 카라쿠쉬(Baha al-Din Qaraqush)가 총괄했다. 건설에는 주로 주변 모카탐 언덕에서 채석한 석회암이 사용되었으나, 카라쿠쉬는 기자의 작은 피라미드들이나 멀리 아부시르에 있는 구조물까지 해체하여 석재를 조달하기도 했다.[3] 또한,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기독교인 포로들을 건설 노동력으로 동원했다.[3]
살라딘 시대에 지어진 초기 요새는 오늘날 성채의 북쪽 구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특히 북쪽 구역 성벽의 남동쪽과 북동쪽 부분이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3][5] 다만, 원래 요새의 남서쪽 부분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유수프의 우물과 현재 알-나시르 무하마드 모스크가 있는 지역까지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초기 요새가 현재의 북쪽 구역보다 다소 넓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8]
살라딘 시대의 주요 건축물 중 하나는 '유수프의 우물'(Bir Yusuf) 또는 '살라딘의 우물'이라 불리는 깊은 우물이다. 약 85m 깊이[29]로 파내려간 이 우물은 나선형 계단을 통해 물이 있는 곳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소용돌이의 우물'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이 우물은 성채에 필수적인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살라딘 시대의 유일한 성문은 '밥 알-무다라지'(Bab al-Mudarraj)이다. 이 문은 북쪽 구역 성벽을 따라 하렘 궁전(현 국립 군사 박물관)과 후대에 지어진 '밥 알-자디드'(Bab al-Jadid, "새로운 문") 사이에 위치한다. 원래 성채의 정문이었으나, 후대의 건축물들에 가려져 지금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3] 문의 이름은 성채 아래 도시에서 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다라지')에서 유래했다.[4] 아이유브 시대 군사 건축의 특징인 구부러진 입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10] 문 내부의 돔형 천장에는 후대인 1310년 알-나시르 무하마드 술탄 시대에 그려진 비문이 남아있다.[10][9] 이 문에서는 성채 완공 시기를 1183년-1184년으로 기록한 기초 비문이 발견되기도 했다.[3][4]
또한, 서쪽 성벽의 탑 중 하나(경찰 박물관 근처)에서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살라딘 시대를 상징하는 유물로 여겨진다. 원래 다른 위치에 있었을 수 있으나, 후대에 성벽이 재건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10][9] 현재는 독수리의 머리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과거 기록을 통해 원래 모습을 알 수 있다.[10]
살라딘이 건설한 카이로 성채는 모카탐 언덕의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으며, 이후 19세기 이스마일 총독이 아브딘 궁전으로 정부 기능을 이전하기 전까지 약 700년간 이집트 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며 그 전략적 중요성을 입증했다.[28][2]
2. 1. 2. 살라딘의 후계자들
살라딘 사후, 그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술탄 알 아딜 1세(재위 1200~1218년)와 알 아딜의 아들 알 카밀(재위 1218~1238년) 시대에도 성채 건설은 계속되었다.[4] 알 아딜은 살라딘 통치 시절부터 일부 건설을 감독했으며, 알 카밀 역시 1200년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된 후 성채 공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8]북쪽 구역 성벽의 큰 직사각형 탑들은 알 아딜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살라딘 시대에 지어진 둥근 탑들과 구별된다.[3] 북동쪽 끝에 있는 두 개의 큰 둥근 탑, 부르즈 알람라(Burj al-Ramla|모래의 탑ara)와 부르즈 알하디드(Burj al-Hadid|철의 탑ara)는 원래 살라딘 시대의 탑이었으나, 알 카밀이 1207년에 보강했다.[5]

특히 알 카밀은 성채 남쪽 구역에 궁전들을 건설하거나 완공했으며, 1206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성채에 거주한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4] 그는 궁전 외에도 모스크, 왕립 도서관, "정의의 홀" 등 여러 중요 시설을 건설했다.[8] 1213년에는 오늘날 술탄 하산 모스크 앞에 있는 루마일라 광장(Rumayla Square) 자리에 말 시장을 세웠고, 성채 서쪽과 남쪽에는 기마 훈련과 군사 퍼레이드를 위한 넓은 광장인 마이단(Maydan)을 조성했다.[8] 이는 9세기 이븐 툴룬이 비슷한 용도로 사용했던 장소였다.[8]
이러한 알 카밀의 공사로 성채는 북쪽의 군사 구역, 남쪽의 술탄 거주 및 행정 구역, 그리고 남서쪽 외부의 퍼레이드 장으로 역할이 분담되는 기본 구조가 확립되었고, 이는 수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8] 또한 알 카밀은 나일강에서 성채로 물을 끌어오는 최초의 카이로 성채 수도교를 건설하거나 완성했을 가능성이 있다.[8]
하지만 알 카밀의 후계자인 술탄 알 살리흐(재위 1240~1249년)는 다시 성채를 떠나 나일강의 로다 섬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훗날 맘루크 왕조의 바흐리맘루크 병영이 되었다. 성채가 술탄들의 영구적인 거주지가 된 것은 1250년부터 시작된 맘루크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2. 2. 맘루크 왕조 시대 (13세기-16세기)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살리흐(재위 1240년~1249년)는 성채를 떠나 로다 섬에 새로운 요새화된 구역을 건설했고, 이곳은 이후 권력을 잡은 바흐리 맘루크의 병영이 되었다.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어진 맘루크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성채는 비로소 술탄들의 영구적인 거주지가 되었다.[4]맘루크 시대 동안 성채는 지속적으로 개발되었으며, 특히 남쪽 구역이 확장되고 중요한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초기 바흐리 왕조의 술탄들, 특히 안-나시르 무함마드는 성채 내에 다양한 궁전, 모스크, 행정 건물 등을 건설하거나 재건축하며 성채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이 시기 건물들은 이전 아이유브 왕조의 것들과 달리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형태로 설계되었다.[4] 그러나 이 시대에 지어진 구조물 대부분은 후대에 소실되었다. 후기 부르지 왕조 시대에는 건축 활동이 이전보다 줄었으나, 카이트베이나 알구리 같은 술탄들은 여전히 궁전을 짓거나 카이로 성채 수로와 같은 기존 시설을 보수하며 명맥을 이었다.[5][10]
2. 2. 1. 초기 바흐리 맘루크 시대
초기 바흐리 왕조 시대 동안, 카이로 성채는 지속적으로 개발되었으며, 특히 남쪽 구역은 확장되어 중요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바이바르스, 알-만수르 칼라운, 알-아슈라프 칼릴, 안-나시르 무함마드와 같은 술탄들은 각자 접견장(왕좌의 방), 주요 모스크, 궁전 또는 기타 구조물들을 건설하거나 재건축했다. 초기 아이유브 왕조의 건물들과 달리, 맘루크 시대의 건물들은 점차 멀리서도 눈에 띄고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하도록 설계되었다.[4] 이러한 구조물 중 상당수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바이바르스(재위 1260년~1277년)는 성채를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눈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현재 성채의 남쪽과 북쪽 구역을 나누는 문이자 성벽인 바브 알-쿨라(Bab al-Qullaara)를 건설했다. 이 문의 이름은 그가 근처에 지었으나 나중에 칼라운에 의해 철거된 망루에서 유래했다. 이 문 자체는 1320년 안-나시르 무함마드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8] 이 문은 바이바르스가 더 정교하고 배타적인 왕실 단지로 개발한 새롭게 구획된 남쪽 구역으로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쪽 구역의 일부는 술탄과 그의 가족의 사적 공간인 하렘으로 지정되었고, 다른 부분에는 공공, 의례 또는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더 기념비적인 구조물들이 들어섰다. 그가 이곳에 건설한 구조물 중 하나는 다르 알-다하브(Dar al-Dhahab|황금의 홀ara)로, 그는 이곳을 자신의 사적인 접견실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경찰 박물관 지역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8] 그가 이 지역에 건설한 또 다른 중요한 구조물은 쿠바 알-자히리야(Qubba al-Zahiriyya|알-자히르의 돔ara)로, 중앙 돔이 있는 기념비적이고 화려하게 장식된 홀로서 접견장이나 왕좌의 방 역할을 했다. 이것은 새로운 구조물이거나 기존 아이유브 왕조 구조물에 대한 추가 건설이었을 수 있으며, 아마도 안-나시르 무함마드의 "그레이트 이완(Great Iwan)"의 전신이었을 것이다.[8] 바이바르스는 또한 사자의 탑(Burj al Siba'ara)을 건설했는데, 이는 둥근 탑으로 상단 부분에 사자(바이바르스의 상징)가 새겨진 석조 프리즈가 특징이었다. 이 탑은 후대의 건설로 가려졌지만, 사자 조각을 포함한 유적은 20세기 후반에 재발견되어 현재 경찰 박물관 북서쪽에서 볼 수 있다.[4]
술탄 알-만수르 칼라운(재위 1279년~1290년)은 술탄의 총독 궁전으로 사용된 다르 알-니야바(Dar al-Niyabaara)로 알려진 건물을 건설하거나 상당히 개조했다.[3][8] 그는 또한 바이바르스의 쿠바 알-자히리야를 철거하고 자신의 돔 구조물인 쿠바 알-만수리야(Qubba al-Mansuriyyaara)로 대체했다.[8]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칼라운이 성채의 여러 탑에 거주하는 맘루크(노예 출신 병사)의 정예 부대를 최초로 창설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부르지"(Burji|탑의ara) 맘루크로 불리게 되었다.[8] 부르지 왕조 시대에 술탄국을 지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맘루크 부대였다.

술탄 알-아슈라프 칼릴(재위 1290년~1293년)은 1291년~1292년에 카아(qa'a|접견실ara)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카아 알-아슈라피야(Qa'a al-Ashrafiyyaara)로 불린다. 그 유적은 20세기 후반에 발굴되었고, 현재 바브 알-알람(Bab al-'Alam|깃발의 문ara)이라고 불리는 문의 서쪽, 현재 경찰 박물관 맞은편 테라스에 여전히 남아 있다. 유적에 따르면 홀의 벽 하단부(대좌)는 다색 대리석 패널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진주와 기타 대리석 부조가 있는 작은 대리석 모자이크 프리즈가 있었으며, 그 위에는 나무와 궁전 장면이 묘사된 유리 모자이크 패널이 있었다. 이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와 바이바르스의 묘에 있는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10][11] (발굴 중 모자이크는 연구와 복원을 위해 제거되었다.[11]) 이 홀에는 중앙에 팔각형 대리석 분수가 있었고 바닥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배열된 대리석 모자이크로 포장되어 있었다.[5][10] 이것은 안-나시르 무함마드가 파괴하지 않고 다양한 목적으로 재사용한 이 지역의 몇 안 되는 구조물 중 하나였으며, 부르지 맘루크 시대에는 다르 알-니야바를 대신하여 총독의 궁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8] 알-아슈라프는 또한 그의 아버지 칼라운의 돔형 왕좌의 방인 쿠바(qubbaara)를 다시 철거하고 자신의 구조물인 이완 알-아슈라피야(Iwan al-Ashrafiyyaara, "이완"이라는 단어는 이때부터 이 특정 유형의 건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로 대체했다.[8] 이 새로운 왕좌의 방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에서 이전의 것들과 달랐는데, 바로 알-아슈라프의 아미르(지휘관)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각각의 머리 위에는 계급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10]

맘루크 시대 카이로 성채 건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칼라운의 아들인 알나시르 무함마드였다. 그는 1293년부터 1341년까지 약 5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술탄이 되었다. 남쪽 구역의 경계가 현재의 윤곽으로 확장된 것도 그의 통치 기간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그가 건설한 새로운 궁전과 건물들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8] 그는 성채 내 여러 주요 공사를 담당했지만, 불행히도 그 대부분은 오스만 시대에 폐허가 되었고, 19세기에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최종적으로 철거되었다. 남쪽 구역에 있는 공식 궁전과 준공공 기념물 외에도, 알나시르는 구역의 남동쪽 모퉁이(현재 알자우하라 궁전이 있는 곳)를 자신의 하렘(처첩들과 첩)을 위한 궁전, 개인 정원, 정원으로 따로 마련했는데, 이는 바이바르스가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알쿠수르 알자와니야(al-Qusur al-Jawwaniyyaara)라고 불렸다.[4][12] 그는 또한 성채 외부 인근에 자신이 총애하는 아미르들을 위한 새로운 궁전 건설을 의뢰했고, 그의 사업은 알다르브 알아흐마르와 같은 성채 인근 지역의 개발을 촉진했다.[5][10]
1312년 알나시르는 나일강에서 성채로 물을 끌어들이는 카이로 성채 수로의 보수 공사를 명령했다. 그의 전임자 알-아슈라프는 나일강 기슭에 팔각형의 취수탑을 건설했는데, 이곳에서 물을 끌어올려 수로를 따라 이동시켰지만, 알나시르가 이 공사를 완료했다.[8] 이러한 인프라 개선은 그가 성채 내에서 더 야심 찬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2. 2. 2. 알 나시르 무함마드 시대
맘루크 왕조 시대 카이로 성채 건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알나시르 무함마드였다. 그는 알만수르 칼라운의 아들로, 1293년부터 1341년까지 약 5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8]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성채 남쪽 구역의 경계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그가 새롭게 건설한 궁전과 여러 건물들을 수용하기 위한 조치였다.[8]알나시르 무함마드는 성채 내에서 여러 주요 공사를 주도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건설한 대부분의 건축물은 오스만 시대를 거치며 폐허가 되었고, 19세기에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최종적으로 철거되었다. 그는 남쪽 구역에 공식적인 궁전과 공공 기념물들을 세우는 것 외에도, 구역의 남동쪽 모퉁이(현재 알자우하라 궁전(al-Gawhara Palace)이 있는 자리)를 자신의 하렘(harem)(부인들과 첩(concubine)들을 위한 공간)을 위한 궁전, 개인 정원 등으로 따로 마련했다. 이 공간은 ''알쿠수르 알자와니야(al-Qusur al-Jawwaniyya)''라고 불렸으며, 이는 이전 술탄 바이바르스가 했던 방식과 유사했다.[4][12] 또한, 그는 성채 바깥 인근에 자신이 총애하는 아미르들을 위한 새로운 궁전 건설을 의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그의 사업은 성채 주변 지역, 특히 알다르브 알아흐마르(al-Darb al-Ahmar)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5][10]
1312년, 알나시르 무함마드는 나일강에서 성채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의 보수 공사를 명령했다. 그의 전임자였던 알아슈라프 칼릴이 나일강 기슭에 팔각형의 취수탑을 건설하여 물을 끌어올려 수로로 보내는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 공사를 최종적으로 완료한 것은 알나시르 무함마드였다.[8] 이러한 수로 시스템의 개선은 그가 성채 내에서 더욱 야심 찬 건설 사업들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2. 2. 3. 후기 맘루크 시대
알나시르 무함마드 이후의 술탄들도 성채 내부에 궁전과 행정 건물을 계속해서 짓거나 확장했지만, 알나시르 시대만큼 대규모는 아니었다. 알나시르의 아들인 알살리흐 이스마일 술탄(1342년~1345년 재위)은 1344년 2월에 문을 연 'الدُهَيْشَة|알두하이샤ar'(al-Duhaysha, 작은 경이로움)라는 화려하게 장식된 궁전 또는 홀을 건설했다.[15] 마찬가지로 알나시르의 또 다른 아들인 하산 술탄은 1360년에 'قاعة البيسرية|카아 알바이사리야ar'(Qa'a al-Baysariyya)로 알려진 호화로운 돔형 궁전을 완공했다.[15][16] 이 궁전은 높이가 50m가 넘었으며, 돔으로 덮인 대형 홀 외에도 상아와 흑단으로 장식된 술탄의 거처가 있는 탑이 있었다.[9] 다른 개인 공간에도 돔이 있었고 벽은 그림과 초상화로 장식되었다.[9]부르지 왕조 맘루크 시대에는 이전 시대에 비해 성채 건설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남쪽 구역 남동쪽 모퉁이에 있던 개인 하렘 안뜰인 '호시(Hosh)'는 점차 새로운 접견실이나 다른 구조물을 증축하여 좀 더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4] 후기 부르지 술탄인 카이트베이와 알구리는 현재의 알가와라 궁전 자리에 궁전을 지었다.[5] 특히 알구리는 성채 안팎의 여러 구조물을 복원했는데, 대표적으로 카이로 성채 수로의 대대적인 복원 및 재건축을 진행했다.[10] 그는 또한 복원된 수로에서 물을 공급받는 거대한 수영장을 만들면서 성채 남서쪽 기슭의 맘루크 경마장을 복원하거나 재정비했다.[3][9]
2. 3. 오스만 제국 시대 (16세기-18세기)
1517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집트는 수세기 동안 오스만 지배하에 있었다. 셀림 1세 술탄은 마므루크 시대의 기념비적인 건물들에서 귀중한 자재, 특히 대리석 패널과 장식을 떼어내 자신의 건축 프로젝트에 사용하기 위해 이스탄불로 보냈다.[10]이 기간 동안 성채는 방치되었고 많은 마므루크 건물들이 폐허가 되었지만,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성채 벽의 일부가 재건축되거나 확장되었다.[5] 오스만 군대 내부의 서로 다른 군사 부대 간의 경쟁으로 인해 성채는 오스만 주둔군의 세 가지 요소를 수용하기 위해 세 지역으로 나뉘었다. 북쪽 구역에는 예니체리의 병영이 있었고, 남쪽 구역은 오스만 파샤(총독)와 그의 부대가 사용했으며, 서쪽 하부 구역에는 마굿간이 있었고 '아자반(또는 아자프) 부대가 주둔했다.[4] 각 구역에는 자체 모스크와 시설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사실상 무인지대가 있었고, 그곳에는 이전의 웅장한 마므루크 건물들 중 일부가 버려지거나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는 알-나시르 무함마드의 대이완이 포함되는데, 1521년에 큰 돔이 무너져 재건되지 않았다.[10] 아블락 궁전은 키스와(카바를 덮는 값비싼 천)를 생산하는 제조 센터로 더 생산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카이로에서 20세기까지 계속 생산되었다.[9]
이 기간 동안 몇몇 주목할 만한 건물들이 건설되었다. 오늘날 방문객 입구 근처에 있는 거대한 원형 탑은 남쪽과 북쪽 구역의 모서리에 서 있으며,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술레이만 1세 치하의 그랜드 베지어)가 1525년에 건설했고 '무카탐 탑'(''Burj al-Muqattam'', 무카탐 언덕의 탑)으로 알려져 있다.[10] 두 구역의 다른 모서리(바브 알-쿨라와 바브 알-와스타니 사이)에 있는 원형 탑은 현재 '부르주 알-와스타니'(''Burj al-Wastani'', 중앙 탑)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17] 마므루크 시대 이후 성채에 건설된 최초의 모스크는 북쪽 구역에 있는 술레이만 파샤 모스크로, 1528년 오스만 총독이 예니체리를 위해 건설했다.[4] 이 모스크는 카이로에서 고전적인 오스만 건축 양식에 가까운 몇 안 되는 모스크 중 하나이다.[5]

오늘날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서쪽 하부 구역은 역사적으로 성채의 마굿간이 있던 지역이었다. 언제 처음으로 벽이 세워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마므루크 시대에 이미 둘러싸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4] 이 구역은 '아자반' 병사들이 점령했으며, 1697년 아흐마드 카트쿠다가 건설한 알-아자브 모스크가 있다.(아흐마드 카트쿠다는 기존의 초기 부르지 마므루크 모스크를 개조하고 현재의 오스만식 첨탑을 추가했을 가능성이 있다.[4]) 이 지역의 나머지 부분은 현재 창고와 오래된 공장을 포함한 여러 19세기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다.[10] 하부 구역은 서쪽에서 '바브 알-아자브'(''Bab al-Azab'')라는 기념비적인 문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 문은 1754년 라드완 카트쿠다 알-줄피가 '바브 알-이스타블'(마굿간 문)로 알려진 이전 마므루크 문 자리에 건설했다.[5][10] 이 문은 카이로 북쪽의 옛 파티마 시대 문인 바브 알-푸투를 본떠 만들어졌지만, 내부 정면은 나중에 케디브 시대에 신고딕 양식으로 개조되었다.[4]
현재 방문객 입구는 '바브 알-자발'(산의 문)이라는 작은 서쪽 문을 통과하는데, 이 문은 1785년 오스만 총독 야칸 파샤가 새로운 궁전을 짓기 위해 이 지역을 재정비하면서 건설했다. 야칸은 여기 남쪽에 인접한 벽의 일부를 재건축하기도 했다.[10]
2. 4. 무함마드 알리 시대 (19세기)

무함마드 알리는 1805년 오스만 제국 술탄에 의해 파샤로 임명된 알바니아 출신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1798년~1801년) 이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점차 이집트의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그는 1811년, 여전히 이집트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던 맘루크 세력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유명하고 잔혹했던 사건은 성채에서 일어난 맘루크 학살이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맘루크 지도자들을 성채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 뒤, 그들이 상부 성채에서 바브 알-아자브 문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알바니아 군대를 동원해 기습 공격하여 모두 살해했다.[5]
이후 성채는 때때로 "무함마드 알리 성채"(قلعة محمد عليar)라고도 불리게 된다. 무함마드 알리는 성채를 대대적으로 개조했는데, 가장 큰 변화는 성채 정상에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를 건설한 것이다. 이 모스크는 1828년부터 1848년 사이에 지어졌으며,[18] 1816년에 사망한 그의 둘째 아들 투순 파샤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무함마드 알리가 이전 시대의 상징인 맘루크 유산을 지우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모스크와 주변 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1825년, 알나시르 무함마드가 지었던 대 이완(Great Iwan)과 아블락 궁전(Ablaq Palace)을 포함한 많은 맘루크 시대 건물들이 철거되었다.[10] 무함마드 알리 자신도 사망 후 이 모스크에 묻혔다.[5] 그의 모스크는 기존의 알-나시르 무함마드 모스크를 대신하여 성채의 공식적인 주요 모스크가 되었고,[18] 거대한 돔과 높이 솟은 오스만 양식의 첨탑으로 오늘날까지 카이로 스카이라인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남아 있다.
무함마드 알리는 성채의 기능적 구분에도 변화를 주었다. 맘루크 시대에는 남쪽 구역이 술탄의 거주지, 북쪽 구역이 군사 시설로 주로 사용되었으나, 무함마드 알리는 북쪽 구역에 자신의 하렘 궁전(현재 국립 군사 박물관 자리)을 지으면서 이러한 구분을 없앴다.[4] 또한 그는 일부 성벽을 새로 쌓거나 재건했다. 특히 북쪽 구역과 남쪽 구역을 나누는 바브 알-쿨라(Bab al-Qulla) 문과 주변 성벽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했는데, 이 문의 형태는 카이로의 옛 파티마 왕조 시대 문인 바브 알-푸투를 모방하면서 일부 터키 양식을 가미했다.[4] 1825년에는 북쪽에서 성채로 들어오는 새로운 마차 길을 만들면서 그 입구에 '새로운 문'이라는 뜻의 바브 알-자디드(Bab al-Jadid)를 건설했다.[4] 같은 시기에 이 길이 남쪽 구역으로 이어지는 지점(바브 알-쿨라 바로 북쪽)에는 '중간 문'이라는 뜻의 바브 알-와스타니(Bab al-Wastani)를 세웠다.[17]
성채는 이스마일 파샤(무함마드 알리의 손자이자 후계자)가 1874년 새로 건설된 카이로 도심 지역의 압딘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집트 통치자의 공식 거주지로서의 역할을 마치게 되었다.
2. 5. 20세기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성채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군사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영국 점령 기간 동안 영국군이 주둔했고, 1946년 이후로는 이집트군이 사용했다.[4] 1983년 이집트 정부는 성채의 상당 부분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일부 낡은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등 보수 작업을 시작했으나, 군대는 일부 구역에는 여전히 주둔하고 있다. 현재 성채는 이집트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다.[5][19]3. 급수 시스템
카이로 성채의 생존과 기능 유지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수적이었다. 초기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시대에는 깊이 약 85m[20]에 달하는 유수프의 우물(살라딘의 우물)을 건설하여 물을 확보했다. 이 우물은 당시 공학 기술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4]
이후 맘루크 왕조 시대, 특히 알나시르 무하마드 통치기에는 성채의 인구가 증가하고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물이 필요하게 되었다.[21] 이에 알나시르는 나일강의 물을 성채까지 끌어올리는 대규모 수로 시스템을 정비하고 확장했다. 이 시스템은 강변의 물레방아와 고가 수로를 이용하여 물을 성채 기저부까지 운반한 뒤, 다시 물레방아를 통해 궁전 등 필요한 곳으로 공급하는 방식이었다.[5]
그러나 나일강에 의존하는 수로 시스템은 외부 공격이나 포위 상황에 취약했기 때문에, 비상시를 대비한 안정적인 수원으로서 살라딘의 우물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5] 또한 15세기 말에는 맘루크 아미르 야쿠브 샤 알-미흐만다르가 성채 동쪽 외곽에 지하 저수조를 건설하여 물 저장 능력을 보강하기도 했다.[22][5]
3. 1. 유수프의 우물 (살라딘의 우물)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은 카이로 성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깊이 약 85m[29][20]의 우물을 건설했다. 이 우물은 살라딘의 본명인 유수프(Yūsifar)가 아랍어로 요셉을 의미하기 때문에 '''요셉의 우물'''(Bir Yusuf|비르 유수프ar)이라고 불린다.[4] 성채 건설을 감독했던 살라딘의 총 관리이자 심복인 카라쿠쉬(Qaraqushar)가 이 우물을 파는 작업 또한 책임졌다.[4]이 우물은 중세 공학 기술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4] 우물 입구에서 바닥까지 300개의 계단이 나선형으로 이어져 있어,[29] '''소용돌이의 우물'''(Bir al-Halazon|비르 알할라존ar)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4]
우물의 수직갱은 대부분 바위를 깎아 만들었으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4]
- 상부: 넓은 수직갱으로, 주 수직갱과는 얇은 바위벽으로 분리된 나선형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흙으로 덮어 소가 우물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5][4]
- 하부: 나일강에서 스며드는 지하수면까지 도달하는 또 다른 수직갱이다.[4]
물을 끌어올리는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상부 구역 바닥에서 소 두 마리가 물레방아를 돌려 하부의 물을 상부 바닥까지 끌어올렸다. 그 다음, 우물 꼭대기에 설치된 또 다른 물레방아를 소의 힘으로 돌려 물을 최종적으로 지상까지 운반했다.[4] 이 우물을 통해 얻은 물은 상수도를 따라 성채 곳곳에 공급되었다.[29]
3. 2. 맘루크 수로
알나시르 무하마드 통치 시대에는 살라딘이 만든 우물만으로는 성채의 늘어나는 인구와 알나시르가 계획한 건설 프로젝트에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어려웠다.[21] 물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 알나시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의 수로 시스템(아마도 알카밀이 완성했을 것으로 추정됨)을 개조하고 새로운 수로 시스템을 확장했다. 이 시스템은 나일강에 설치된 여러 개의 물레방아를 이용해 물을 육각형 탑(그의 전임자인 알 아시라프 칼릴이 건설) 꼭대기까지 끌어올린 후, 높이 설치된 수로를 따라 성채 기저부까지 운반하는 방식이었다.[5] 성채 기저부에서는 다시 다른 물레방아 시스템을 통해 궁전들로 물을 공급했다.[5] 그러나 이 새로운 급수 시스템은 포위 공격 시에는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살라딘의 우물은 여전히 필수적인 수원으로 남았다.[5]3. 3. 야쿠브 샤 알 미흐만다르의 저수조
카이로 성채 동쪽 바로 외곽에 위치한 이 작은 돔 건물은 1495년에서 1496년 사이에 아미르(amir|아미르ara) Ya'qub Shah al-Mihmandar|야쿠브 샤 알 미흐만다르ara가 건설했다. 그는 원래 터키의 Erzincan|에르진잔tur 출신으로, 마믈루크의 까이트바이 술탄 치하에서 군에 합류한 인물이다. 돔 형태 때문에 겉보기에는 능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하 저수조로 내려가는 입구를 덮고 있는 구조물이다. 이 건물에는 1486년 아다나에서 까이트바이 술탄의 군대가 오스만 제국 군대를 물리친 승리를 기념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22] 현재 이 저수조는 성채와 분리되어 있으며, 성채 동쪽을 지나는 살라 살렘 도로와 콥리 알-에바게아라는 두 고속도로 사이에 고립된 상태이다.[5]4. 모스크
현재 성채에는 주요 모스크가 네 곳 있으며, 그중 일부는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대표적인 모스크는 다음과 같다.
-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19세기 중반에 완공된 오스만 양식의 모스크로, 성채 남쪽에 위치하며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23]
- '''알 나시르 무함마드 모스크''': 14세기 초 바흐리 맘루크 시대에 건립된 왕실 모스크로, 성채 남쪽에 위치하며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24][5]
- '''술레이만 파샤 모스크''': 16세기 초에 지어진 성채 내 최초의 오스만 양식 모스크로, 성채 북쪽에 위치한다.[10]
- '''알 아자브 모스크''': 17세기 말에 건립된 모스크로, 서쪽 문 근처에 위치하며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는다.[10]
4. 1.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이 모스크는 1830년부터 1848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나, 사이드 파샤 통치 시기인 1857년에 완공되었다. 모스크는 성채 남쪽 구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건축가는 이스탄불 출신의 유수프 부슈낙이며, 같은 도시에 있는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를 모델로 삼았다.[23]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모스크 안뜰에 카라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묘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1857년 하우시 알-바샤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4. 2. 알 나시르 무함마드 모스크
1318년, 초기 바흐리 맘루크 시대에 건립된 모스크이다.[24] 카이로 성채의 왕실 모스크로서, 카이로의 술탄들이 금요일 기도를 올리던 곳이었다. 오늘날 이 다주식 모스크는 여러 차례의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원래 장식의 일부만 복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300년대 모습과 여전히 유사하다.[5] 회반죽으로 마감된 벽 부분은 보강되었으며, 천장의 밝은 파란색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 모스크는 성채 남쪽 구역에 위치해 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4. 3. 술레이만 파샤 모스크

1528년에 건립된 이 모스크는 카이로 성채 내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오스만 양식의 모스크이다. 또한 16세기 "고전적" 오스만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카이로의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모스크는 하렘 궁전(현재 군사 박물관)의 북동쪽, 성채 북쪽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모스크는 성채가 지어지기 전인 파티마 왕조 시대에 아미르 아부 만수르 카스타가 세웠던 옛 시디 사리야 모스크의 유적 위에 건설되었다. 1140년에 만들어진 카스타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모스크 내부에 그대로 남아 있다.[10]
4. 4. 알 아자브 모스크
이 덜 알려진 모스크는 서쪽 주요 관문인 바브 알-아자브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모스크와 관문 두 곳 모두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 성채 구역에 주둔했던 아자반(혹은 아자프)이라는 오스만 군사 연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모스크는 맘루크 아미르 아마드 캇흐쿠다가 1697년에 건립했지만, 이전의 맘루크 모스크나 다른 종교 시설을 통합하거나 개조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0]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으며, 뾰족한 오스만 양식의 미나레트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5. 박물관
카이로 성채 내부에는 여러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국립 군사 박물관, 알-가와하라 궁전 박물관, 마차 박물관, 그리고 옛 감옥 건물에 위치한 경찰 박물관[19] 등이 있다.
5. 1. 이집트 국립 군사 박물관

이집트 육군의 공식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1937년 카이로 시내 이집트 전쟁부의 옛 건물에 처음 설립되었다. 이후 카이로의 가든 시티 지역의 임시 장소로 이전되었다가, 1949년 11월 카이로 성채의 하렘 궁전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1982년과 1993년에 여러 차례 개보수되었다.[25]
5. 2. 알 가와하라 궁전 박물관
비주 궁전(Bijou Palace)으로도 알려진 이 궁전 박물관은 1814년 무함마드 알리 파샤(Muhammad Ali Pasha)가 의뢰하여 건설되었다. 그리스, 튀르키예(Turkey),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의 장인들이 설계 및 건축에 참여했다.[26] 무함마드 알리가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거나 손님을 접견했던 디반(divan, 접견실)에는 프랑스의 루이 필립 1세(Louis Philippe I)가 보낸 1000kg의 샹들리에가 있다. 궁전에는 이탈리아 국왕이 선물한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옥좌도 있다.[26]
5. 3. 마차 박물관
1983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이스마일 파샤의 통치 시대부터 파룩 국왕 시대까지 다양한 역사 시대의 독특한 왕실 마차들을 소장하고 있다. 마차와 관련된 다른 독특한 골동품들도 함께 소장하고 있다.5. 4. 경찰 박물관
이 박물관은 때때로 감옥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바브 알알람(Bab al-'Alam) 문 바로 북쪽, 아래 카이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자리 잡고 있다. 성채의 옛 감옥 건물에 위치하며, 유명한 정치 암살 사건과 당시 사용된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1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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