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시티 로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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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1969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를 연고지로 창단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아메리칸 리그 중부 지구 소속 프로 야구팀이다. 1967년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가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캔자스시티에 새로운 팀을 창단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985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2014년 와일드카드 진출, 2015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했다. 현재는 리빌딩을 진행 중이며, 2024년에는 와일드카드 라운드에 진출했다. 홈 구장은 카우프만 스타디움이며, 라이벌 팀으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뉴욕 양키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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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자스시티 로열스 - 코프먼 스타디움
코프먼 스타디움은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홈구장으로, 1973년 개장하여 유잉 코프먼의 업적을 기려 이름이 변경되었고, "The K"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과 월드 시리즈 경기가 개최되는 등 캔자스시티 야구 역사의 중요한 장소이지만, 2024년 새로운 구장 건설 계획으로 미래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인 야구장이다.
캔자스시티 로열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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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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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블루 크루 보이즈 인 블루 더 크라운스 |
연고지 |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1969년 - 현재) |
창단 | 1969년 |
합류 | 1969년 |
현재 리그 | 아메리칸 리그 |
현재 디비전 | 중부 지구 (1994년 - 현재) |
이전 디비전 | 서부 지구 (1969년 - 1993년) |
구장 | 코프먼 스타디움 (1973년 - 현재) |
이전 구장 | 뮤니시펄 스타디움 (1969년–197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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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결번 | 5 10 20 42 |
색상 | 로열 블루, 흰색, 파우더 블루, 금색 |
웹사이트 | mlb.com/royals |
소유 및 경영진 | |
구단주 | 존 셔먼 |
사장 | J. J. 피콜로 |
단장 | J. J. 피콜로 |
감독 | 매트 콰트라로 |
성적 | |
월드 시리즈 우승 | 2회 (1985, 2015) |
리그 우승 | 4회 (1980, 1985, 2014, 2015) |
디비전 우승 | 8회 (1976, 1977, 1978, 1980, 1981, 1984, 1985, 2015) |
와일드카드 | 2회 (2014, 2024) |
기타 정보 | |
통산 승패 | 4,208승 4,623패 |
승률 | 0.477 |
가치 | 13억 5천만 달러 (2023년) |
2. 구단 역사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1969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창단되었다. 1967년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가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캔자스시티는 메이저리그 야구팀을 잃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미주리주 상원의원 스터트 시밍턴은 새로운 팀 창단을 압박했고, MLB는 1969년에 새로운 팀들이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제약 회사 임원 이윙 코프먼이 새로운 캔자스시티 팀 입찰에서 승리했다. 팀 명칭은 공모를 통해 결정되었는데, 아메리칸 로열을 기념하여 '''로열스'''로 명명되었다.[20] 팀 로고는 캔자스시티에 있는 홀마크 카드의 아티스트 섀넌 매닝이 디자인했다.[21]
초대 단장인 세드릭 탤리스는 여러 트레이드를 통해 팀 전력을 빠르게 강화했다. 에이모스 오티스, 존 메이베리, 쿠키 로하스, 프레드 파텍, 할 맥레이 등이 합류했다. 또한, 폴 스플리토프, 데니스 레너드, 스티브 버스비, 조지 브렛, 프랭크 화이트, 알 코웬스 등을 육성했다.
1971년 첫 승률 5할 이상 시즌을 기록하며 2위를 차지했고, 1973년에는 로열스 스타디움(현재의 캔자스시티 로열스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 1975년 와이티 허조그 감독 부임 후, 로열스는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강팀으로 성장했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뉴욕 양키스에게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했다.
1980년, 조지 브렛의 활약으로 ALCS에 진출, 양키스를 꺾고 첫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패했다.[22] 1984년에는 브렛 세이버헤이건이 데뷔하여 팀은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패했다.
1985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1승 3패로 몰렸지만, 6차전 오심(세기의 오심 참조)과 7차전 세이버헤이건의 완봉승에 힘입어 창단 첫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23]
1980년대 후반,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보 잭슨 등 젊은 스타들을 육성하며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강팀으로 자리매김했다.[24] 1990년, 조지 브렛은 세 시대에 걸쳐 타격왕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94] 그러나 1993년 조지 브렛 은퇴 후 팀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94]
1994년, 로열스는 중부지구로 이동했다.[94] 1996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 최하위를 기록했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 동안 4번이나 시즌 100패를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94]
2013년, 10년 만에 승률 5할(86승 76패)을 달성했다.[94] 2014년 29년 만에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패했다.[94] 2015년 30년 만에 지구 우승, 뉴욕 메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승리하며 두 번째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94]
201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리빌딩에 들어갔다. 2019년 존 셔먼 구단 인수, 네드 요스트 감독 은퇴 후 마이크 매서니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2024년, 2015년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스윕했지만,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 패배했다.
2. 1. 창단 배경 (1967-1969)
1967년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가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캔자스시티는 메이저리그 야구를 잃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미주리주 상원의원 스터트 시밍턴은 캔자스시티에 새로운 팀이 주어지지 않으면 야구의 반독점 면제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19] 메이저리그는 1967년 겨울 회의에서 확장을 결정했고, 캔자스시티는 1971년에 경기를 시작할 네 팀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시밍턴은 캔자스시티가 3년을 더 기다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MLB에 새로운 팀들이 1969년에 경기를 시작하도록 압력을 가했다.제약 회사 임원 이윙 코프먼이 새로운 캔자스시티 팀 입찰에서 승리했다. 그는 팀 명칭을 결정하기 위한 대회를 열었고, 캔자스주 오버랜드 파크 출신의 샌포드 포르테가 미주리주의 축산업을 기념하여 '''로열스'''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아메리칸 로열이 그 화려함과 퍼레이드를 통해 캔자스시티를 가장 잘 보여주므로 새로운 팀의 이름을 로열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0] 1만 7천 건의 제출작 중에서 이 이름이 선정되었고, 로열스 이사회는 6대 1로 이름 채택을 결정했다. 팀의 로고는 캔자스시티에 있는 홀마크 카드의 아티스트 섀넌 매닝이 디자인했다.[21]
로열스는 1969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창단하였다. 홈구장은 애슬레틱스가 사용했던 캔자스시티 시립구장을 그대로 사용했다.
2. 2. 초기 성장과 첫 전성기 (1969-1985)
1969년 4월 8일 첫 경기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12회 연장 접전 끝에 4대 3으로 꺾었다. 로열스는 첫 시즌 69승 93패를 기록했는데, 루 피니엘라가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을 수상하며 팀의 활약을 빛냈다.[20]초대 단장인 세드릭 탤리스의 여러 트레이드를 통해 팀은 빠르게 전력을 강화했다. 중견수 에이모스 오티스는 팀의 첫 번째 스타가 되었고, 1루수 존 메이베리는 강력한 타격을 보여주었으며, 2루수 쿠키 로하스, 유격수 프레드 파텍, 지명타자 할 맥레이 등이 합류했다. 로열스는 또한 탄탄한 팜 시스템에 투자하여 미래의 스타 투수인 폴 스플리토프, 데니스 레너드, 스티브 버스비, 내야수 조지 브렛, 프랭크 화이트, 외야수 알 코웬스 등을 육성했다.
1971년, 밥 레몬 감독의 지휘 아래 첫 승률 5할 이상 시즌을 기록하며 2위를 차지했다. 1973년에는 감독 잭 매키언 체제 하에서 상징적인 "파우더 블루" 원정 유니폼을 채택하고, 시립 경기장에서 새로 지은 로열스 스타디움(현재의 캔자스시티 로열스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
1973년 올스타전은 로열스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으며, 오티스와 메이베리가 아메리칸 리그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1975년에 감독 와이티 허조그가 매키언을 대신했고, 로열스는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의 강력한 프랜차이즈로 빠르게 성장했다. 91승으로 2위를 차지한 후,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7년에는 프랜차이즈 사상 유일한 100승 시즌을 기록했다. 그러나 로열스는 뉴욕 양키스에게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했다.
1979년 시즌에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2위를 차지한 후, 허조그 감독은 해임되었고 짐 프레이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1980년, 프레이 감독과 조지 브렛의 타율 .390 활약에 힘입어 로열스는 ALCS에 진출, 양키스를 꺾었다. 첫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6경기 만에 패했다.[22]
1984년, 브렛 세이버헤이건이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팀은 3년 만에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3연패를 당했다.
1985년, 세이버헤이건은 사이 영 상을 수상했고, 브렛 또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팀은 6번째 지구 우승을 확정지었고,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꺾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대결, 1승 3패로 몰렸지만, 6차전의 오심(세기의 오심 참조)과 7차전에서 세이버헤이건의 완봉승에 힘입어 창단 17년 만에 첫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23]
2. 3. 암흑기 (1986-2012)
1986년 시즌 중반, 딕 하우저 감독이 건강 문제로 사임하면서 마이크 페라로가 감독 대행을 맡았지만, 팀은 76승 86패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94] 이듬해인 1987년 6월 17일, 하우저는 5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등번호 10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94]1980년대 후반,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보 잭슨, 톰 고든, 케빈 자이처와 같은 젊은 스타들을 육성하며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의 강팀으로 자리매김했다.[24] 1989년에는 92승 70패로 메이저리그 3위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24]
1990년, 조지 브렛은 타율 .329를 기록하며 개인 통산 세 번째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로써 브렛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세 시대에 걸쳐 타격왕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94] 그러나 팀은 75승 86패로 지구 6위에 그치며 부진했다. 1993년을 끝으로 조지 브렛이 은퇴하면서 팀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94]
1994년, 로열스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서 새로 창설된 중부지구로 이동했다.[94] 1996년에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 최하위를 기록했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 동안 4번이나 시즌 100패를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94] 특히 2002년에는 62승 100패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100패를 기록했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3년 연속 100패 이상을 기록하며 암흑기를 보냈다.[94]
2007년, 알렉스 고든, 빌리 버틀러 등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며 69승 93패를 기록, 반등의 기미를 보였다.[94] 2008년에는 트레이 힐먼 감독이 부임하고, 일본인 투수 야부타 야스히코를 영입하며 75승 87패(지구 4위)를 기록했다.[94] 2009년에는 잭 그레인키가 사이 영 상을 수상했지만, 팀은 65승 97패로 지구 4위에 머물렀다.[94] 2010년, 네드 요스트 감독이 부임했으나 팀은 67승 95패로 지구 5위에 그쳤다.[94]
2. 4. 두 번째 전성기 (2013-2017)
2013년,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투수진이 리그 최고 팀 방어율(3.45)을 기록하며 분전했고, 시즌 후반까지 와일드카드 진출권을 다투었다. 그 결과, 10년 만에 승률 5할(86승 76패)을 달성하며 비약적인 시즌을 보냈다.[94] 2014년에는 29년 만에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여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패배했다.[94] 2015년에는 30년 만에 지구 우승을 차지했고, 뉴욕 메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4승 1패로 승리하며 두 번째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94]2. 5. 리빌딩과 현재 (2018- )
201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리빌딩에 들어갔다. 시즌 중 마이크 무스타커스를 트레이드했고, 58승 104패로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102]2019년에는 존 셔먼이 구단을 인수했고, 네드 요스트 감독이 은퇴하며 마이크 매서니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팀은 59승 103패로 지구 4위에 그쳤다.[102]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단축 시즌이 진행되었고, 로열스는 26승 34패로 지구 4위를 기록했다.
2021년에는 살바도르 페레스가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메이저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팀은 74승 88패로 지구 4위에 머물렀다.
2022년에는 데이튼 무어 사장과 J. J. 피콜로 단장 체제로 전환되었고, 바비 윗 주니어 등 신인 선수들이 활약했다. 그러나 시즌 후 마이크 매서니 감독이 해임되었고, 팀은 65승 97패로 지구 최하위를 기록했다.
2023년에는 맷 콰트라로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팀은 56승 106패로 부진했다.
2024년에는 2015년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스윕했지만,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 패배했다.
3. 경기장
로열스는 1973년에 시립 경기장에서 새로 지은 로열스 스타디움(현재의 카우프만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29] 1973년 올스타전은 로열스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으며, 오티스와 메이베리가 아메리칸 리그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이 행사는 이전에 애슬레틱스가 캔자스시티에 연고를 두고 있던 1960년에 시립 경기장에서 열렸었다.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2024년 현재 홈구장인 카우프만 스타디움을 대체할 새로운 경기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3. 1. 홈구장
로열스는 1973년 시립 경기장에서 새로 지은 로열스 스타디움(현재의 캔자스시티 로열스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29]1973년 올스타전은 로열스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으며, 오티스와 메이베리가 아메리칸 리그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이 행사는 이전에 1960년에 애슬레틱스가 캔자스시티에 연고를 두고 있던 시절 시립 경기장에서 열렸었다.
3. 2. 미래 경기장 계획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2024년 현재 홈구장인 카우프만 스타디움을 대체할 새로운 경기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4. 팀 문화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팬들과 선수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 독특한 팀 명칭과 마스코트, 그리고 다른 팀과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로열스는 창단 초기부터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80년대 초반 조지 브렛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타선과 댄 퀴젠베리를 필두로 한 탄탄한 불펜진은 팬들에게 잊지 못할 순간들을 선사했다.
로열스는 역사적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뉴욕 양키스 등 여러 팀과 라이벌 관계를 맺어왔다.
번호 | 선수 | 포지션 | 비고 |
---|---|---|---|
5 | 조지 브렛 | 3루수 | 1994년 지정 |
10 | 딕 하우저 | 감독 | 1987년 지정 |
20 | 프랭크 화이트 | 2루수 | 1995년 지정 |
42 | 재키 로빈슨 | 2루수 |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 |
'''고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번호'''
- 29 - 댄 퀴젠베리
- 29 - 마이크 스위니
4. 1. 팀 명칭 및 유니폼

팀 이름 '로열스(Royals)'는 캔자스시티에서 1899년부터 매년 열리는 가축 품평회인 '아메리칸 로열(American Royal)'에서 유래했다.[20] 제약 회사 임원 이윙 코프먼은 새로운 프랜차이즈에 가장 적합한 이름을 결정하기 위한 대회를 열었고, 캔자스주 오버랜드 파크 출신의 샌포드 포르테가 미주리주의 축산업을 기념하여 '로열스'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1만 7천 건의 제출작 중에서 이 이름이 선정되었고, 로열스 이사회는 6대 1로 이름 채택을 결정했다. 코프먼은 처음에 반대했지만, 결국 마음을 바꾸었다.[20] 팀 로고는 방패 위에 왕관이 있고 방패 안에 "KC"라는 글자가 새겨진 형태로, 캔자스시티에 있는 홀마크 카드의 아티스트 섀넌 매닝이 디자인했다.[21]
1973년, 로열스는 상징적인 "파우더 블루" 원정 유니폼을 채택했다.[17]
로열스(Royals)는 "국왕, 왕립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royal은 현지 캔자스시티에서 1899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가축 축제(품평 전시회에 오락 요소를 포함한 이벤트)인 "American Royal(아메리칸 로열)"에서 유래하여 명명되었다.(참고로 아메리칸 로열의 명칭은 기획 당시 참고한 영국의 왕립농업학회가 주최하는 품평 전시회 Royal Show에서 유래한다.) 후에 탄생하는 NFL의 치프스나 NBA의 킹스(현 새크라멘토)는 이 royal이라는 뉘앙스를 참고하고 있다.
번호 | 선수 | 포지션 | 비고 |
---|---|---|---|
5 | 조지 브렛 | 3루수 | 1994년 지정 |
10 | 딕 하우저 | 감독 | 1987년 지정 |
20 | 프랭크 화이트 | 2루수 | 1995년 지정 |
42 | 재키 로빈슨 | 2루수 |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 |
'''고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번호'''
- 29 - 댄 퀴젠베리
- 29 - 마이크 스위니
4. 2. 마스코트
슬러거르(Sluggerrr)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마스코트이다. 슬러거르는 사자이며, 1996년 4월 5일에 처음 등장했다.[93] 경기 당일, 슬러거르는 선수와 팬들에게 적극적인 응원을 보내고, "리틀 K"에서 투구를 하며, 이닝 사이에 핫도그를 공기 대포로 관중석으로 발사한다.4. 3. 라이벌 관계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역사적으로 여러 팀과 라이벌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뉴욕 양키스와의 관계가 두드러진다.카디널스와는 지리적으로 가까워 "I-70 시리즈"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오랜 기간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왔다. 1985년 월드 시리즈에서 로열스가 카디널스를 꺾으면서 본격적인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양키스와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자주 맞붙으며 경쟁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1983년 파인타르 사건은 두 팀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4. 3. 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로열스의 가장 중요한 라이벌은 주 내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이다. 지리적인 이유로 두 팀은 오랫동안 연습 경기를 치렀지만, 진정한 라이벌 관계는 "I-70 시리즈"로 알려진 1985년 월드 시리즈에서 로열스가 카디널스를 이기면서 시작되었다.[80] 당시 카디널스 감독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로열스의 감독을 역임하며 1976년, 1977년, 1978년에 캔자스시티를 프랜차이즈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이끌었던 와이티 허조그였다. 그는 1979년 로열스가 플레이오프 진출에서 탈락한 직후 해고되었다. 1997년 인터리그가 시작되면서 I-70 시리즈는 비연습 경기로 부활했다. 2003년 시즌까지는 카디널스가 14승 13패로 근소한 우세를 보이는 등 시리즈가 상당히 균형을 이루었으나, 2023년 시즌까지 카디널스는 75승 49패로 시리즈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80]4. 3. 2. 뉴욕 양키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로열스는 5년 동안 4번이나 뉴욕 양키스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ALCS)에서 맞붙었다.[81] 양키스가 1976년, 1977년, 1978년에 승리했고, 로열스는 1980년에 승리했다.1983년에는 파인타르 사건으로 두 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이 사건에서 양키스 감독 빌리 마틴은 조지 브렛의 배트에 규정보다 많은 파인타르가 발라져 있다는 이유로 브렛의 홈런을 무효로 주장했고, 심판은 이를 받아들여 홈런을 취소하고 브렛을 퇴장시켰다. 이후 AL 회장 리 맥페일에 의해 홈런이 인정되었고, 몇 주 후 경기가 재개된 후 로열스가 승리했다.
당시 양키스 선수였던 루 피넬라는 "팀으로서 우리는 캔자스시티를 정말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76년, 77년, 78년 포스트시즌에서 그들을 상대로 싸워 매번 이겼습니다. 두 팀 사이에는 아무런 애정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큰 라이벌이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82] 브렛 역시 "저는 양키스의 모든 선수들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정말 모두 싫어했습니다."라며 동의했다.[82]
44년 후인 2024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ALDS)에서 두 팀은 다시 만났지만, 양키스가 승리했다.
5. 선수단
'''캔자스시티 로열스'''(Kansas City Royals|캔자스시티 로열스영어)는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를 연고지로 하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아메리칸 리그 중부 지구 소속 프로 야구팀이다. 1969년 창단했으며, 카우프만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7년 시즌 후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가 오클랜드로 이전하면서 캔자스시티는 메이저리그 야구를 잃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미주리주 상원의원 스터트 시밍턴은 캔자스시티에 새로운 팀이 주어지지 않으면 야구의 반독점 면제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19] 메이저리그는 1967년 겨울 회의에서 확장을 진행하여 캔자스시티를 포함한 네 팀이 1971년에 경기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시밍턴은 캔자스시티가 3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MLB에 압력을 가해 1969년에 새로운 팀들이 경기를 시작하도록 했다.
제약 회사 임원 이윙 코프먼이 새로운 캔자스시티 팀 입찰에서 승리했다. 그는 팀 이름 공모전을 열었고, 샌포드 포르테가 미주리주의 축산업을 기념하여 아메리칸 로열의 화려함을 나타내는 '로열스'라는 이름을 제안하여 선정되었다.[20] 팀 로고는 캔자스시티에 있는 홀마크 카드의 아티스트 섀넌 매닝이 디자인했다.[21]
로열스는 1969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창단하여, 4월 8일 첫 경기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12회 연장 끝에 4대 3으로 꺾었다. 첫 시즌 69승 93패를 기록했고, 루 피니엘라가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을 수상했다.
초대 단장 세드릭 탤리스의 트레이드로 팀은 빠르게 전력을 강화했다. 에이모스 오티스는 팀의 첫 스타가 되었고, 존 메이베리는 강력한 타격을 보여주었으며, 쿠키 로하스, 프레드 파텍, 할 맥레이 등이 합류했다. 또한 팜 시스템에 투자하여 폴 스플리토프, 데니스 레너드, 스티브 버스비, 조지 브렛, 프랭크 화이트, 알 코웬스 등 미래의 스타들을 육성했다.
1971년, 로열스는 첫 승률 5할 이상 시즌을 기록하며 2위를 차지했다. 1973년에는 파우더 블루 원정 유니폼을 채택하고, 시립 경기장에서 로열스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
1973년 올스타전은 로열스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으며, 오티스와 메이베리가 아메리칸 리그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1975년에 와이티 허조그 감독 체제 하에, 로열스는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의 강팀으로 성장했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7년에는 프랜차이즈 사상 유일한 100승 시즌을 기록했다. 그러나 뉴욕 양키스에게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했다.
1985년 정규 시즌, 로열스는 브렛 세이버헤이건의 사이 영 상 수상과 조지 브렛의 활약으로 서부 지구 정상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서 로열스는 두 라운드 모두 시리즈에서 뒤쳐졌지만, 결국 역전하여 1985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4-3으로 꺾었다.
1985년 월드 시리즈("I-70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로열스는 다시 3대 1로 뒤처졌다. 5차전 승리 후, 6차전에서 9회말 조르제 오르타의 땅볼을 돈 덴킹거 심판이 세이프로 판정했고, 이후 로열스는 2점을 뽑아내며 데인 이오르그의 끝내기 안타로 7차전으로 시리즈를 이어갔다. 7차전에서 브렛 사버헤이건이 카디널스를 완파하며 캔자스시티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다.[23]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1980년대 후반에도 상위 팀 중 하나로 명성을 유지했다. 1989년 시즌에는 92승 70패로 메이저리그 3위를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24]
1989년 시즌 말, 팀은 브렛 세이버헤이건, 마크 구비차, 톰 고든 등 강력한 선발진을 자랑했다.[25] 그러나 1990년 시즌을 앞두고 마크 데이비스와 스톰 데이비스를 영입했지만, 두 선수 모두 부진한 시즌을 보내며 팀은 75승 86패로 AL 서부에서 2위에서 두 번째를 기록했다. 보 잭슨은 심각한 고관절 부상으로 1991년 스프링 트레이닝 중 방출되었다.[28]
1990년부터 1992년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파업으로 단축된 1994년 시즌까지 승리 기록을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조지 브렛은 세 번째 타격왕 타이틀과 3000번째 안타를 기록했다.
1994년 로열스는 AL 서부에서 새로 만들어진 AL 중부로 이동했다.
구단주 존 셔먼은 2022년 11월, 구단이 2030년 메이저리그 시즌 종료 시점에 만료되는 임대 계약 종료 전에 카우프만 스타디움을 떠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64] 2024년 4월, 잭슨 카운티 유권자들은 스타디움 건설 자금 지원을 위한 투표안을 부결시켰다. 구단은 2027년 또는 2028년 메이저리그 시즌 개막에 맞춰 새로운 스타디움을 개장할 계획이다.[69] 로열스는 또한 주 경계를 넘어 캔자스주 캔자스시티로 이전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71]
{{MLB 스프링 트레이닝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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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Name=캔자스시티 로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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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2024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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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감독 | 시즌 | 승 | 패 | 승률 | 포스트시즌 진출 | 포스트시즌 승 | 포스트시즌 패 | 월드 시리즈 우승 |
---|---|---|---|---|---|---|---|---|---|
1 | 조 고든 | 1969 | 69 | 93 | .426 | — | — | — | — |
2 | 찰리 메트로 | 1970 | 19 | 33 | .365 | — | — | — | — |
3 | 밥 레몬 | 1970–1972 | 207 | 218 | .487 | — | — | — | — |
4 | 잭 매키언 | 1973–1975 | 215 | 205 | .512 | — | — | — | — |
5 | 화이티 허조그 | 1975–1979 | 410 | 304 | .574 | 3 | 5 | 9 | 0 |
6 | 짐 프레이 | 1980–1981 | 127 | 105 | .547 | 1 | 5 | 4 | 0 |
7 | 딕 하우저 | 1981–1986 | 404 | 365 | .525 | 3 | 8 | 12 | 1 |
8 | 마이크 페라로 | 1986 | 36 | 38 | .486 | — | — | — | — |
9 | 빌리 가드너 | 1987 | 62 | 64 | .492 | — | — | — | — |
10 | 존 와선 | 1987–1991 | 287 | 270 | .515 | — | — | — | — |
11 | 밥 셰퍼 | 1991 | 1 | 0 | 1.000 | — | — | — | — |
12 | 할 맥레이 | 1991–1994 | 286 | 277 | .508 | — | — | — | — |
13 | 밥 분 | 1995–1997 | 181 | 206 | .468 | — | — | — | — |
14 | 토니 뮤저 | 1997–2002 | 317 | 431 | .424 | — | — | — | — |
15 | 존 미제록 | 2002 | 5 | 8 | .385 | — | — | — | — |
16 | 토니 페냐 | 2002–2005 | 198 | 285 | .410 | — | — | — | — |
— | 밥 셰퍼 | 2005 | 5 | 12 | .294 | — | — | — | — |
17 | 버디 벨 | 2005–2007 | 174 | 262 | .399 | — | — | — | — |
18 | 트레이 힐먼 | 2008–2010 | 152 | 207 | .423 | — | — | — | — |
19 | 네드 요스트 | 2010–2019 | 687 | 736 | .483 | 2 | 22 | 9 | 1 |
20 | 마이크 매서니 | 2020–2022 | 165 | 219 | .430 | 0 | 0 | 0 | 0 |
21 | 맷 콰트라로 | 2023–현재 | 56 | 106 | .346 | 0 | 0 | — | — |
합계 | 4,119 | 4,547 | 9 | 40 | 34 | 2 |
5. 1. 영구 결번
로열스는 조지 브렛(5번), 프랭크 화이트(20번), 딕 하우저(10번)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딕 하우저의 10번은 1987년 그가 사망한 후 지정되었다. 전 메이저 리그 공통으로 재키 로빈슨의 42번이 영구 결번이다.
5. 2. 캔자스시티 로열스 명예의 전당
1991–1994회장
1981–1992
2003–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