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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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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노스 5세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741년 ~ 775년)로, 레오 3세의 아들이자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성상 파괴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아랍과 불가르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행정 개혁을 통해 제국의 재정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그러나 성상 숭배자들을 탄압하고 이탈리아를 포기한 정책으로 인해 평가가 엇갈리며,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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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로마 황제
이름콘스탄티노스 5세
로마자 표기Kōnstantīnos
별칭코프로니모스, 카발리노스, 우랄리피오스
그리스어 표기, , ,
콘스탄티노스 5세의 솔리두스
출생일718년 7월
출생지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사망일775년 9월 14일 (57세)
종교칼케돈 기독교
통치
왕조이사우리아 왕조
즉위741년 6월 18일
퇴위775년 9월 14일
선임자레온 3세
후임자레온 4세
대관식720년 3월 31일
대관식 종류대관식
섭정아르타바스도스 (741–743)
니케포로스 (741–743)
경쟁 황제아르타바스도스, 니케포로스
가족 관계
아버지레온 3세
어머니마리아
배우자치차크 ("하자르의 이리니")
마리아
에우도키아
자녀레온 4세
니케포로스
크리스토포로스
니케타스
에우도키모스
안티모스
안투사

2. 생애

콘스탄티노스 5세는 레오 3세와 마리아의 아들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720년 부활절에 두 살의 나이로 공동 황제에 올랐으며,[1] 741년 아버지 사후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즉위 직후 매형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으로 위기를 맞았다. 아모리온에서 지지 세력을 모아 743년 복위했다.[11]

복위 후 성상 파괴 운동을 적극 추진,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를 통해 성상 숭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옹호론자들을 탄압했다.[24][25][26] 수도원 재산 몰수 및 수도사 박해 등 강경책을 펼쳤다.[28]

군사적으로 아랍과 불가르족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746년 시리아 북부를 침공하고, 751년 압바스 왕조를 공격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멜리테네를 점령했다.[53][54] 756년부터 불가르족 원정을 통해 안키알루스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제국의 위상을 높였다.[67]

내정 면에서는 히포드롬을 활용해 대중의 지지를 얻고, 타그마타를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38][39][40] 성 이레네 성당 재건 등 건축 사업에도 힘썼다.[51]

746년부터 성상 파괴 정책으로 로마 교회와 갈등을 빚었고, 롬바르드족의 라벤나 점령을 막지 못했다.[58][59] 이로 인해 교황 스테파노 2세프랑크 왕국 피핀 3세와 동맹을 맺어 교황령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2. 1. 초기 생애

공동 황제로서의 콘스탄티누스 5세.


15세기 ''Mutinensis gr. 122''에 묘사된 콘스탄티누스 5세


콘스탄티누스는 레오 3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의 아들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나 레오 3세의 뒤를 이었다. 720년 부활절에 두 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황위에 올랐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1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1] 비잔틴 정치 이론에 따르면 두 명 이상의 황제가 함께 황위를 공유할 수 있었으나, 모든 황제가 동일한 의례적 지위를 부여받았음에도 궁극적인 권력은 단 한 명의 황제만이 행사했다. 황제의 지위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실제적으로도 엄격한 세습보다는 선출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집권 황제는 자신의 아들이나 다른 선택된 후계자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결국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경우가 많았다.[5]

레오 3세는 아들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운 은화인 ''밀리아레시온''을 도입했는데, 이는 금화 ''노미스마''의 12분의 1 가치였으며, 곧 비잔틴 경제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726년,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는 개정된 법전인 ''에클로가''를 공포했는데, 이 법전은 아버지와 아들 공동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중요한 비잔틴 동맹국인 하자르 카간 비하르의 딸 치차크와 결혼했다. 그의 새로운 신부는 732년에 이르네(Eirēnē, "평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741년 6월 18일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단독 황제가 되었다.[6][7][8][9]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그가 간질 또는 나병일 가능성이 있는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통치 초기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그가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을 수 있다.[10]

2. 2. 즉위와 반란, 복위

720년 레온 3세의 아들로 태어나 두 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741년 아버지가 죽자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하자마자 매형이자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으로 제위에서 쫓겨났다. 콘스탄티노스는 아버지의 영향이 강력한 아모리온으로 피신하여 성상파괴론자였던 그곳 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힘을 키웠다. 743년 콘스탄티누스는 다시 제위를 회복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아르타바스두스를 물리치고 11월 2일 다시 제위에 올랐다.[11]

콘스탄티누스 5세가 741년 즉위 직후, 그의 누이 안나의 남편인 아르타바스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타바스도스는 옵시키온 ''테마''(군관구)의 스트라테고스(군사 총독)였으며 아르메니아크 테마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아르타바스도스는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상대로 한 원정 계획을 위해 연합했을 때 콘스탄티누스를 공격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측근인 베세르가 이 공격으로 사망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도망쳐 아모리온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레오 3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지휘했던 지역 군인들의 환영을 받았다.[12][13] 한편, 아르타바스도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고, 섭정 테오파네스 모누테스와 총대주교 아나스타시우스의 지원을 받아 황제로 추대되고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나톨리크와 트라케시안 테마의 지원을 받았고, 아르타바스도스는 자신의 옵시키온과 아르메니아크 군대 외에 트라키아 테마의 지원을 확보했다.[14][15]

두 황제는 군사적 준비를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아르타바스도스는 743년 5월 사르디스에서 콘스탄티누스에 맞서 진격했지만 패배했다. 3개월 후 콘스탄티누스는 모드리나에서 아르타바스도스의 아들 니케타스와 그의 아르메니아크 군대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11월 초, 콘스탄티누스는 포위 공격과 추가 전투를 거쳐 수도에 입성했다.[16] 그는 즉시 반대파들을 처벌하여 많은 사람들을 눈을 멀게 하거나 처형했다. 아나스타시우스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 군중의 조롱을 받으며 당나귀 등에 태워 히포드롬을 돌았지만, 이후에도 직무를 유지하도록 허락받았다.[17][18] 아르타바스도스는 수도에서 도망친 후, 니코메디아 남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아나톨리아의 푸자네스 요새에서 체포되었다. 아르타바스도스와 그의 아들들은 공개적으로 눈을 멀게 한 후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있는 코라 수도원에 감금되었다.[19]

2. 3. 성상 파괴 정책

아르타바스도스와 그의 두 아들은 눈알을 뽑힌 뒤 폐위되었고 그의 지지자들은 처형당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나스타시오스는 모욕을 당했지만 쫓겨나지는 않았다. 제위에 복귀한 콘스탄티노스는 거의 병적으로 성상 파괴를 지시했고 성상 옹호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한 다른 교구들은 여전히 성상에 대해 옹호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신중히 성상파괴운동을 벌였다. 754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위치한 히에라 궁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만 참석한 공의회를 열어 성상 파괴의 교리를 정하고 주요 성상 옹호자를 파문했으며 수도원 자체를 탄압했다. 당시 수도원은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동로마 제국의 국력을 많이 소모시키고 있었다.

후기 성상 옹호파 자료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의 성상 파괴는 마리아와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를 이단으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32] 그러나 종교적 이미지를 강제로 파괴하거나 은폐하려는 일관된 공식 캠페인의 정도나 광범위한 정부 승인 유물 파괴의 존재는 최근의 연구에서 의문을 제기받고 있다. 성상 파괴 이전의 종교적 이미지는 살아남았으며, 다양한 현존하는 기록에 따르면 성상은 숨겨져 보존되었다.[33][34]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히에리아 공의회에서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세상을 위해 중재할 자유가 있는 [마리아와 성인들의 기도]를 요청하지 않는 자"를 저주하는 것을 콘스탄티누스가 마리아와 성인들의 중재를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간주한다.[35] 반대하는 학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니케포로스 1세, 테오파네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메토디우스 1세 (847)의 증거를 지적하며, 히에리아에서 온건한 성상 파괴파가 승리했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급진적인 성상 파괴파가 그 후에 잠시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36]

성상 옹호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죽음을 신의 형벌로 간주했다. 9세기에, 성상 옹호자들의 최종 승리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유해는 성 사도 교회의 황실 무덤에서 옮겨졌다.[37]

2. 3. 1. 성상 파괴 논쟁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버지 레오 3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 운동을 지지했다. 성상 파괴 운동은 종교적 이미지 숭배를 거부하고 기존의 이미지를 파괴하려는 신학적 운동이었다. 성상 파괴는 나중에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미지를 숭배하는 것을 옹호한 성상 옹호자들을 공개적으로 적대했다. 성상 옹호자 작가들은 콘스탄티노스에게 '대변' 또는 '동물 똥'을 의미하는 koprosgrc와 '이름'을 의미하는 onomagrc를 합쳐 ('똥 이름')이라는 경멸적인 칭호를 붙였다.[20]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교부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하나님의 묘사와 관련하여 '제한할 수 없는'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한할 수 없는'과 '묘사할 수 없는' 사이의 연결에 의존하여 제한할 수 없는 것은 이미지로 묘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다라고 믿기 때문에, 그는 또한 이미지로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21] 황제는 신학적 논쟁에 직접 참여하여 13개의 논문을 작성했으며, 그 중 두 개는 단편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22] 그는 또한 제국 전역에서 조직된 회의에서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제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대표자를 보냈다.[23]

754년 2월, 콘스탄티누스는 히에리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이 회의에는 성상 파괴파 주교들만 참석했다. 공의회는 이미지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종교 정책에 동의하여 이미지를 저주로 선언했고, 새로운 성상 파괴파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성인들의 숭배에 대한 비판적이었을 수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공의회는 마리아의 지위를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grc), 즉 '하나님의 어머니'로 확인하고, "성인"과 "거룩한"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정당한 것으로 유지했으며, 성상 숭배를 억압하기 위한 과정에서 교회의 훼손, 소각 또는 약탈을 비난했다.[24][25][26]

히에리아 공의회 이후, 교회 벽에서 이미지를 제거하고 궁정과 관료 사회에서 성상 옹호자들을 숙청하는 캠페인이 벌어졌지만, 이 사건들에 대한 기록은 신뢰성이 의심스럽다.[27] 수도원은 성상 숭배 감정의 요새가 되는 경향이 있었고 국가의 세속적 필요에 거의 또는 전혀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공동체를 특별히 표적으로 삼았다. 그는 또한 국가 또는 군대의 이익을 위해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했다. 수도사들에 대한 이러한 탄압 행위는 황제의 장군 미카엘 라차노드라콘이 주도했는데, 그는 저항하는 수도사들을 맹인으로 만들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많은 수의 수도승과 수녀를 원형 경기장에서 퍼레이드하도록 조직하여 그들의 정결 서약을 공개적으로 조롱했다.[28] 테오파네스 연대기에 따르면, 성상 옹호파 수도원장 젊은 스테파노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 폭도들에게 구타당해 죽었다. 그러나 그의 성인 전기, ''젊은 성 스테파노의 생애''에서도 그의 처형을 황제에 대한 반역과 더 연관시키고 있으며, 실제로 그의 처벌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과 관련된 처벌을 반영한다.[29] 박해의 결과로 많은 수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도망쳤다.[30]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겨냥한 성상 옹호파의 음모를 알게 되자 타협하지 않고 대응했다. 765년, 반역죄로 기소된 18명의 고위 인사가 원형 경기장에서 퍼레이드된 후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되거나, 맹인이 되거나, 추방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콘스탄티누스 2세 총대주교가 연루되어 직위에서 물러났고, 다음 해에 고문을 받고 참수되었다.[31]

병사들이 콘스탄티누스 5세(왼쪽)의 명령에 따라 우상 숭배를 반대하는 교회를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모습, ''마나세스 연대기'', 14세기 불가리아 필사본


콘스탄티누스 5세(왼쪽)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레오 4세(오른쪽)

2. 3. 2. 수도원 탄압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버지 레오 3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 운동을 지지했다. 성상 파괴 운동은 종교적 이미지 숭배를 거부하고 기존의 이미지를 파괴하려는 신학적 운동이었다. 성상 옹호자 작가들은 콘스탄티노스에게 '똥 이름'이라는 뜻을 가진 경멸적인 칭호를 붙였다.[20]

황제는 신학적 논쟁에 직접 참여했는데, 754년 히에리아에서 성상 파괴파 주교들만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이미지를 저주로 선언하고, 새로운 성상 파괴파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성인들의 숭배에 대한 비판적이었을 수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지는 않았다.[24][25][26]

히에리아 공의회 이후, 교회 벽에서 이미지를 제거하고 궁정과 관료 사회에서 성상 옹호자들을 숙청하는 캠페인이 벌어졌다.[27] 수도원은 성상 숭배 감정의 요새가 되는 경향이 있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공동체를 특별히 표적으로 삼았다. 그는 국가 또는 군대의 이익을 위해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했다. 황제의 장군 미카엘 라차노드라콘은 저항하는 수도사들을 맹인으로 만들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많은 수의 수도승과 수녀를 원형 경기장에서 퍼레이드하도록 조직하여 그들의 정결 서약을 공개적으로 조롱했다.[28] 테오파네스 연대기에 따르면, 성상 옹호파 수도원장 젊은 스테파노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 폭도들에게 구타당해 죽었다.[29] 박해의 결과로 많은 수도사들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도망쳤다.[30]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겨냥한 성상 옹호파의 음모를 알게 되자, 765년 반역죄로 기소된 18명의 고위 인사를 처형하거나, 맹인으로 만들거나, 추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콘스탄티누스 2세 총대주교는 연루되어 직위에서 물러났고, 다음 해에 고문을 받고 참수되었다.[31]

후기 성상 옹호파 자료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의 성상 파괴는 마리아와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를 이단으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32] 그러나 종교적 이미지를 강제로 파괴하거나 은폐하려는 일관된 공식 캠페인의 정도나 광범위한 정부 승인 유물 파괴의 존재는 최근의 연구에서 의문을 제기받고 있다. 성상 파괴 이전의 종교적 이미지는 살아남았으며, 다양한 현존하는 기록에 따르면 성상은 숨겨져 보존되었다.[33][34]

성상 옹호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죽음을 신의 형벌로 간주했다. 9세기에, 성상 옹호자들의 최종 승리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유해는 성 사도 교회의 황실 무덤에서 옮겨졌다.[37]

2. 4. 군사적 업적

콘스탄티노스 5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안보를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크게 아랍과의 전쟁과 불가르족과의 전쟁으로 나눌 수 있다.

746년 시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단성론을 지지하는 주민들을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이듬해에는 그리스 화약을 사용하여 아랍 함대를 격파하고,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도 승리했다. 751년에는 압바스 왕조를 공격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멜리테네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이러한 동방 원정은 트라키아의 인구를 늘리고, 동부 국경 지역에 무인지대를 형성하여 제국의 방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756년부터 콘스탄티노스는 불가르족의 침입에 맞서 여러 차례 원정을 감행했다. 763년 안키알루스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불가르족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775년 원정 도중 부상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군사적 노력은 발칸 반도에서 제국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군사적 업적은 성상 파괴 정책으로 인해 가려진 측면이 있지만, 그는 제국의 방위를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한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다. 특히 811년 플리스카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가 크룸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에게 대패했을 때, 타그마타 병사들이 콘스탄티노스의 무덤을 부수고 죽은 황제에게 다시 한번 그들을 이끌어 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로 그의 군사적 업적은 높이 평가되었다.[75]

2. 4. 1. 아랍과의 전쟁

746년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단성론을 지지하는 그곳 주민들을 트라키아로 대거 이주시켰다.[53] 이듬해 아랍 제국의 함대를 그리스 화약으로 격파했고,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도 아랍 군대를 상대로 승리했다.[53] 당시 아랍은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로 바뀌는 상황이었다.[53]

751년, 아스-사파가 이끄는 압바스 왕조를 공격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멜리테네를 점령하고 파괴했으며, 주민 일부를 발칸 반도로 이주시켰다.[54] 동부 원정은 카마쿰(케마)을 제외하고는 점령지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없어 영토 확장은 실패했다.[54]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5세 치하에서 제국은 1세기 이상 방어적인 전쟁을 치르다가 아랍에 대한 공세로 전환했다.[54] 동부 원정의 주된 목표는 국경 너머의 기독교 인구를 트라키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54] 동부 국경 너머 지역의 인구를 줄여 아랍 군대의 집중과 식량 공급이 어려운 무인지대를 만들어 비잔틴 아나톨리아의 안보를 강화했다.[54] 757년에는 그의 존재 소문만으로 아랍 군대가 후퇴할 정도로 군사적 명성이 높았다.[54] 같은 해 아랍과 휴전하고 포로를 교환하여 발칸 반도 원정을 위한 군대를 확보했다.[54][55][56][57]

콘스탄티노스 5세의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 스킬리체스 연대기

2. 4. 2. 불가르족과의 전쟁

756년 불가르족이 대대적으로 제국을 침공해 왔고, 이후 거의 매년 제국을 침공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직접 9차례나 원정을 나섰으며, 763년 안키알루스에서 대승을 거두었다.[67] 773년775년에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775년 8월 콘스탄티노스는 원정길에서 부상을 입고 후퇴해야 했고, 9월 14일 수도로 돌아와서 죽었다.[71]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 재위 기간의 비잔틴-불가리아 전쟁


동방에서의 성공 덕분에 콘스탄티노스는 발칸 반도에서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는 동방에서 이주해 온 기독교인들을 트라키아에 재정착시켜 트라키아의 번영과 방어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주민 유입은 국경을 적극적으로 재요새화하는 것과 결합되어 제국의 북쪽 이웃인 불가리아에게 우려를 안겨주었고, 755년 두 국가는 충돌하게 되었다.[62] 불가리아의 코르미소쉬는 아나스타시안 성벽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가장 바깥쪽 방어선)까지 침략했지만, 콘스탄티누스에게 전투에서 패배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불가리아에 대한 9번의 성공적인 캠페인을 시작하여 마르켈레에서 코르미소쉬의 후계자 비네흐에게 승리했다. 759년, 콘스탄티누스는 리쉬키 고개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불가리아는 그들의 성공을 이용할 수 없었다.[63]

762년 콘스탄티누스는 트라키아마케도니아슬라브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여 일부 부족을 아나톨리아의 옵시키안 테마로 추방했지만, 일부는 분쟁이 많은 불가리아 국경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이주를 요청했다. 동시대 비잔틴 자료에 따르면 208,000명의 슬라브족이 불가리아 통제 지역에서 비잔틴 영토로 이주하여 아나톨리아에 정착했다.[64][65][66]

1년 후, 콘스탄티노스는 9,600명의 기병과 일부 보병을 태운 800척의 배를 이끌고 안키알루스로 항해하여 칸 텔레츠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많은 불가르 귀족들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의 황금문 밖에서 서커스 파벌에 의해 학살되었다. 텔레츠는 패배 후 암살되었다. 765년 비잔틴은 다시 불가리아를 성공적으로 침략했는데, 이 캠페인 동안 콘스탄티누스가 불가리아 왕위 후보로 지명한 톡투와 그의 반대자 파간이 모두 사망했다. 파간은 불가리아의 적들을 피해 바르나로 도망가 황제에게 귀순하려 했지만, 그의 노예들에게 살해당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반복적인 공격 캠페인과 수많은 승리의 누적 효과는 불가리아에 상당한 불안정을 초래하여 6명의 군주가 비잔티움과의 전쟁에서의 실패로 왕위를 잃었다.[67][68][69]

775년, 불가리아 통치자 텔레리크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망명을 요청하며 불가리아에서 도망쳐야 할까 두렵다고 말했다. 텔레리크는 불가리아 내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문의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어리석게도 불가리아 내 그의 요원들의 신원을 드러냈다. 명명된 비잔틴 요원들은 즉시 제거되었다.[70] 이에 대응하여 콘스탄티누스는 불가리아에 대한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다리에 종기가 생겼다. 그는 775년 9월 14일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불가르 국가를 멸망시키거나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발칸 반도에서 제국의 위신을 회복했다.[71][72][73]

2. 5. 내치

콘스탄티누스 5세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히포드롬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전차 경주 팀과 그 지지자들, 즉 '서커스 파벌'을 통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히포드롬은 전쟁 포로와 정치적 적들을 굴욕시키는 의식의 장소로 활용되었고, 군중들은 이를 즐겼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백성과 군대를 지지 기반으로 삼아 수도의 수도원과 관료 사회에 대항했다.[38][39][40] 성상 파괴 정책은 제국의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수도원은 과세가 면제되고 승려는 군 복무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에, 황제는 세속적, 재정적, 인력적 고려에서 수도원에 반감을 가졌을 수 있다.[38][39][40]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버지 레오 3세가 시작한 행정 및 재정 개혁을 이어갔다. 군사 총독(στρατηγοί|스트라테고이grc)의 권한은 강력했고, 넓은 속주의 자원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옵시키온 테마는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을 가능하게 한 권력 기반이었으며, 소아시아 내에서 수도에 가장 가까운 테마였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 테마의 규모를 줄여 부켈라리안 테마와, 옵티마톤 테마를 분할했다. 이러한 조치는 ''스트라테고이''의 수를 늘리고 단일 인물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감소시켜 반란을 어렵게 만들었다.[41][42]

8세기 후반 콘스탄티누스 5세의 지방 개혁에 따른 비잔틴 소아시아와 아랍-비잔틴 변경 지대의 테마 (제국 트라키아의 경계는 필리포폴리스가 비잔틴 도시였음을 반영하지 않음)


콘스탄티누스 5세는 전문 군인으로 구성된 작은 중앙 군대, 즉 제국의 ''타그마타''(연대)를 창설했다. 그는 황궁에 배속된 의례적인 경비 부대를 대상으로 훈련을 실시하고 규모를 확대하여 야전 군대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이 부대는 지방 ''테마'' 부대보다 훈련, 급여, 장비가 더 우수했다. 확장 이전의 스콜라이와 다른 경비 부대는 쓸모있는 군인이 거의 없었을 것이므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전 테마 군인들을 새로운 부대에 편입시켰을 것이다.[43] 대부분 수도 또는 그 근처에 기반을 둔 ''타그마타''는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으며, 지역적 충성심에서 자유로웠다.[44][45][46]

콘스탄티누스 5세의 재정 행정은 매우 유능했다. 그는 세금 징수를 통해 농촌 인구를 억압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제국은 번성했고 그는 후계자에게 충분한 재정을 남겼다. 제국 내 경작지 면적이 확장되었고 식량이 저렴해졌으며, 718년에서 800년경 사이에 트라키아의 밀 생산량이 3배로 증가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궁정은 웅장한 건물로 호화로웠고, 그는 종교 예술을 대체하기 위해 세속 예술 후원을 장려했다.[47][48]

콘스탄티누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 파로스의 성모 교회와 ''자주색 방''을 포함한 여러 주목할 만한 건물을 건설했다. ''자주색 방''은 제국의 자주색 돌인 반암으로 덮인 방으로, 황후들이 출산하는 장소였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가 여기서 태어나 ''자주색에서 태어난''(자주색에서 태어난)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자주색 출생'의 개념은 방이 건설되기 전부터 존재했지만, 방의 존재로 인해 문자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49] 반암은 로마에서 왔다고 전해지며 비잔틴 제국 권위의 고대 기원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나타냈다.[50] 콘스탄티누스 5세는 또한 74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지진으로 심하게 손상된 성 이레네 성당을 재건했다. 이 건물은 성상 파괴적인 교회 장식의 희귀한 예를 보여준다.[51]

이스탄불 성 이레네 성당의 앱스에 있는 모자이크 십자가. 성상 파괴의 몇 안 되는 예술적 잔재 중 하나이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나 테오토코스의 묘사와 같은 예배 이미지를 위해 예약된 앱스의 반원형 돔을 차지한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황실 가족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궁정 칭호를 성문화했다. 그는 장남인 레오만을 공동 황제(751년)로 즉위시켰지만, 다른 아들들에게는 나이가 더 많은 아들에게는 카이사르 칭호를, 나이가 더 적은 아들에게는 노벨리시모스 칭호를 부여했다.[52]

2. 6. 이탈리아 정책과 교황과의 갈등

746년 콘스탄티노스는 성상 파괴 정책으로 로마 교회와 갈등을 빚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 침입한 롬바르드족을 막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교황 스테파노 2세754년 프랑크 왕국의 단신왕 피핀과 손을 잡았다.[60]

콘스탄티노스가 다른 지역의 군사 문제에 집중하고 서방에서의 제국 영향력 유지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으면서, 롬바르드 왕 아이스툴프는 755년 라벤나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중부에서 2세기 이상 지속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종식시켰다.[58][59]

콘스탄티노스의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심오하고 지속적인 결과를 낳았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직접 프랑크 왕 피핀 3세에게 호소했고, 피핀은 아이스툴프를 굴복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스테파노를 로마로 복귀시켰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이탈리아 개입의 시작을 알렸고, 결국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세웠으며, 교황령 창설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세속적 지배를 시작하게 했다.[60]

콘스탄티노스는 라벤나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교황청에 여러 차례 사절단을 보냈지만 실패했고, 군사적 재정복이나 개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61]

3.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
치차크 ("하자르의 이레네")
마리아자녀 없음
유도키아


참조

[1] 웹사이트 Konstantinos 7 http://www.pbe.kcl.a[...]
[2] 서적 Theodore the Stoudite: The Ordering of Holines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A Patristic Greek Lexicon https://archive.org/[...] Clarendon 1961
[4] 서적 A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from Arcadius to Irene (395 A.D. to 800 A.D.) https://books.google[...] 1889
[5] 문서 Nicol, p. 72
[6] 문서 Ostrogorsky, p. 165
[7] 문서 Finlay, p. 43
[8] 문서 Treadgold (1997), p. 349
[9] 문서 Brubaker and Haldon, p. 76
[10] 문서 Brubaker and Haldon, p. 157
[11] 문서 Treadgold (1997), p. 356 (n. 12, p. 939)
[12] 문서 Brubaker and Haldon, pp. 157–158
[13] 문서 Treadgold (1997), pp. 156–157
[14] 문서 Bury, p. 10
[15] 문서 Ostrogorsky, pp. 165–166
[16] 문서 Brubaker and Haldon, p. 159
[17] 문서 Bury, p. 10
[18] 문서 Ostrogorsky, p. 166
[19] 문서 Garland, p. 9
[20] 문서 Bury, p. 9
[21] 문서 Barnard, p. 13
[22] 문서 Ostrogorsky, p. 171
[23] 문서 Brubaker and Haldon, p. 182
[24] 문서 Ostrogorsky, pp. 171–173
[25] 문서 Pelikan, pp. 111–112
[26] 문서 Loos, p. 32
[27] 문서 Brubaker and Haldon, pp. 156, 241
[28] 문서 Brubaker and Haldon, p. 241
[29] 문서 Brubaker and Haldon, pp. 236–237
[30] 문서 Ostrogorsky, pp. 173–175
[31] 문서 Bury, p. 14
[32] 문서 Krausmüller, p. 26
[33] 문서 Brubaker and Haldon, pp. 208–211
[34] 문서 Zuckerman pp. 203–204
[35] 문서 Krausmüller, pp. 26–27
[36] 서적 Krausmüller
[37] 서적 Ostrogorsky
[38] 서적 Angold
[39] 서적 Magdalino
[40] 서적 Rochow
[41] 서적 Bury
[42] 서적 Treadgold
[43] 서적 Treadgold
[44] 서적 Haldon
[45] 서적 Magdalino
[46] 서적 Treadgold
[47] 서적 Bury
[48] 서적 Jenkins
[49] 서적 Herrin
[50] 서적 Magdalino
[51] 서적 Freely and Cakmak
[52] 서적 Jeffreys, Haldon and Cormack
[53] 서적 Tread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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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적 Ostrogorsky
[56] 서적 Treadgold
[57] 서적 Bo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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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서적 Ostrogorsky
[60] 서적 Jenkins
[61] 서적 Tread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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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서적 Jenkins
[64] 서적 Bury
[65] 서적 Ostrogorsky
[66] 서적 Fine
[67] 서적 Bury
[68] 서적 Treadgold
[69] 서적 Curta
[70] 서적 Fine
[71] 서적 Bury
[72] 서적 Ostrogorsky
[73] 서적 Curta
[74] 서적 Brubaker and Haldon
[75] 서적 Garland
[76] 서적 Bury
[77] 서적 Ostrogorsky
[78] 서적 Fine
[79] 서적 Treadgold (2012)
[80] 서적 Brubaker and Haldon
[81] 서적 Zuckerman
[82] 서적 Dagron
[83] 서적 Con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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