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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시르 메나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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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나시르 메나시 전투는 1789년 일본 에도 시대에 쿠나시르 섬에서 일어난 아이누족의 봉기 사건이다. 아이누족은 과도한 상업적 착취와 열악한 노동 환경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인 상인들이 살해되었다. 마쓰마에 번은 봉기를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처형했으며, 이후 에도 막부는 에조치(홋카이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아이누족의 경제적 환경을 통제했다. 이 사건 이후, 아이누족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일본인들의 정착이 본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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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시르 메나시 전투
전투 정보
명칭쿠나시르-메나시 전투
다른 명칭메나시-쿠나시르 전쟁
로마자 표기Kunashiri Menashi no tatakai
장소홋카이도 동부, 쿠나시르 섬과 메나시 지역
결과마쓰마에 번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마쓰마에 번
교전 2아이누 (쿠나시르와 메나시 지역)
지휘관 및 지도자마쓰마에 미치히로
이사리보
쓰키노에
전력
마쓰마에 번700명
아이누1,600명
피해 규모
마쓰마에 번79명 사망
아이누170명 사망

2. 역사적 배경

1615년(겐나 원년)부터 1621년(겐나 7년)경까지 마쓰마에 번의 『신라지 기록』에는 메나시 지방(현재의 홋카이도 메나시 군라우스정, 시베츠정 주변)의 에조(아이누)가 100척 가까운 배에 독수리 깃털이나 수달의 모피 등을 싣고 마쓰마에에서 위마무[1]를 하고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1731년(교호 16년)에는 쿠나시리·에토로후의 수장 등이 마쓰마에 번주를 방문하여 헌상품을 보냈다. 1754년(호레키 4년) 도토 아이누 영역의 최동단에 마쓰마에 번 가신의 지행지로서 쿠나시르 섬, 에토로후 섬, 우루푸 섬을 포함하는 쿠나시리 장소가 열렸고, 쿠나시리 섬의 토마리에 교역 거점 및 번의 출장 기관으로서 운상옥이 설치되었다. 운상옥에서는 주민의 무육 정책으로서 옴샤 등도 행해졌다. 1773년(안에이 2년)에는 상인 히다야가 쿠나시리 장소에서의 교역을 청부하게 되었고, 1788년(텐메이 8년)에는 대규모의 시메카스 제조를 시작하자 그 노동력으로 아이누를 고용하게 되었다. 시메카스는 생선을 삶은 후, 어유를 짜낸 찌꺼기를 건조시켜 만든 비료이다.[2]

164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탐험선 「카스트리쿰 호」가 에토로후 섬과 우루푸 섬을 발견하고 앗케시 만에 기항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쿠릴 아이누의 영역인 북쿠릴 열도(슘슈 군, 무시르 군)까지 남진하고 있었다.[2] 에도 막부는 이에 대항하여 1784년(텐메이 4년)부터 에조지를 조사했고, 1786년(텐메이 6년)에는 최상 도쿠나이에게 우루푸 섬까지의 쿠릴 열도를 답사하게 했다. 쿠릴 아이누는 북쿠릴 열도에서 저항했지만, 러시아인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한 후 모피세 등 중과세를 부과받아 경제적으로 고통받았다. 일부 쿠릴 아이누는 러시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도토 아이누의 영역인 우루푸 섬이나 에토로후 섬 등으로 남하했다. 이러한 쿠릴 아이누의 보고로 일본 측도 러시아가 북쿠릴 열도에 침출하고 있는 현상을 감지했고, 북방 경계의 중요성을 설파한 『아카에조 풍설고』 등이 저술되었다.[2]

2. 1. 와진과 아이누의 관계

1615년(겐나 원년)부터 1621년(겐나 7년)경까지 마쓰마에 번의 『신라지 기록』에는 메나시 지방(현재의 홋카이도 메나시 군라우스정, 시베츠정 주변)의 에조(아이누)가 100척 가까운 배에 독수리 깃털이나 수달의 모피 등을 싣고 마쓰마에에서 '''위마무'''[1]를 하고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1731년(교호 16년)에는 쿠나시리·에토로후의 수장 등이 마쓰마에 번주를 방문하여 헌상품을 보냈다. 1754년(호레키 4년) 도토 아이누 영역의 최동단에 마쓰마에 번 가신의 지행지로서 쿠나시르 섬, 에토로후 섬, 우루푸 섬을 포함하는 쿠나시리 장소가 열렸고, 쿠나시리 섬의 토마리에 교역 거점 및 번의 출장 기관으로서 운상옥이 설치되었다. 운상옥에서는 주민의 무육 정책으로서 '''옴샤''' 등도 행해졌다. 1773년(안에이 2년)에는 상인 히다야가 쿠나시리 장소에서의 교역을 청부하게 되었고, 1788년(텐메이 8년)에는 대규모의 시메카스 제조를 시작하자 그 노동력으로 아이누를 고용하게 되었다. 시메카스는 생선을 삶은 후, 어유를 짜낸 찌꺼기를 건조시켜 만든 비료이다.[2]

2. 2.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대응

164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탐험선 「카스트리쿰 호」가 에토로후 섬과 우루푸 섬을 발견하고 앗케시 만에 기항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쿠릴 아이누의 영역인 북쿠릴 열도(슘슈 군, 무시르 군)까지 남진하고 있었다.[2] 에도 막부는 이에 대항하여 1784년(텐메이 4년)부터 에조지를 조사했고, 1786년(텐메이 6년)에는 최상 도쿠나이에게 우루푸 섬까지의 쿠릴 열도를 답사하게 했다. 쿠릴 아이누는 북쿠릴 열도에서 저항했지만, 러시아인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한 후 모피세 등 중과세를 부과받아 경제적으로 고통받았다. 일부 쿠릴 아이누는 러시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도토 아이누의 영역인 우루푸 섬이나 에토로후 섬 등으로 남하했다. 이러한 쿠릴 아이누의 보고로 일본 측도 러시아가 북쿠릴 열도에 침출하고 있는 현상을 감지했고, 북방 경계의 중요성을 설파한 『아카에조 풍설고』 등이 저술되었다.[2]

3. 봉기의 발발

1789년(간세이 원년), 쿠나시리메나시의 아이누들이 봉기하여 일본인들을 습격했다. 마쓰마에번이 진압에 나섰고, 아이누 을명(乙名)들의 설득으로 봉기 가담자들은 투항했다. 봉기의 중심 인물들은 처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인 71명이 희생되었다.[1] 막부는 소우야 장소 등에서 "어구교역(御救交易)"을 실시했다.[1] 러시아 사절 락스만이 통상을 요구하며 네무로에 온 것은 이 소동 3년 후였다.[1]

사건 10년 후인 1799년(간세이 11년) 동 에조지(홋카이도 태평양 연안 및 치시마 열도)가, 1807년(분카 4년)에는 화인지 및 서 에조지(홋카이도 일본해안·사할린(후의 북 에조지)·오호츠크 해안)도 공의어료가 되었다.[1]

3. 1. 직접적인 원인: 히다야의 착취

1789년(간세이 원년), 장소 청부인인 히다야(飛騨屋)와의 상거래 및 노동 환경에 불만을 품은 쿠나시리(国後) 장소(국후군)의 아이누가 쿠나시리의 총을명(惣乙名) 츠키노에가 부재중일 때 봉기하여 상인과 상선을 습격하고 일본인을 살해했다.[1] 네모로(根室) 장소 메나시의 아이누도 이에 호응하여 일본인 상인을 습격했다.[1] 마쓰마에 번은 진정 직후 히다야의 책임을 물어 장소 청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 후의 교역을 새로운 장소 청부인인 아베야(阿部屋) 무라야마 덴베에에게 맡겼다.[1]

3. 2. 봉기의 전개

1789년(간세이 원년), 쿠나시리(国後)의 장소 청부인인 히다야(飛騨屋)와의 상거래 및 노동 환경에 불만을 품은 쿠나시리 장소(국후군)의 아이누가 쿠나시리의 총을명(惣乙名) 츠키노에가 부재중일 때 봉기하여 상인과 상선을 습격하고 일본인을 살해했다.[1] 봉기를 호소한 가운데 네무로(根室) 장소 메나시의 아이누도 이에 호응하여 일본인 상인을 습격했다.[1] 마쓰마에번이 진압에 나섰고, 아이누의 을명(乙名)들도 설득에 나서 봉기한 자들은 투항했으며, 봉기의 중심이 된 아이누는 처형되었다.[1] 봉기에 소극적인 아이누를 일부 일본인이 보호한 사례도 있지만, 이 소동으로 일본인 71명이 희생되었다.[1] 마쓰마에 번은 진정 직후 히다야의 책임을 물어 장소 청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 후의 교역을 새로운 장소 청부인인 아베야(阿部屋) 무라야마 덴베에에게 맡겼다.[1] 한편, 막부는 간세이 3~4년, 쿠나시리 장소와 소우야 장소에서 "어구교역(御救交易)"을 실시했다.[1] 러시아 사절 아담 락스만이 통상을 요구하며 네무로에 내항한 것은 소동이 일어난 지 불과 3년 후인 간세이 4년의 일이다.[1]

사건 발생 10년 후인 1799년(간세이 11년) 동 에조지(홋카이도 태평양 연안 및 지시마 열도)가, 이어서 1807년(분카 4년) 화인지 및 서 에조지(홋카이도 일본해안·사할린(후의 북 에조지)·오호츠크 해안)도 공의어료가 되었다.[1]

3. 3. 진압과 그 이후

1789년(간세이 원년), 장소 청부인인 히다야(飛騨屋)와의 상거래 및 노동 환경에 불만을 품은 쿠나시리(国後) 장소의 아이누가 쿠나시리의 총을명(惣乙名) 츠키노에가 부재중일 때 봉기하여 상인과 상선을 습격하고 일본인을 살해했다.[1] 봉기를 호소한 가운데 네모로(根室) 장소 메나시의 아이누도 이에 호응하여 일본인 상인을 습격했다.[1] 마쓰마에 번이 진압에 나섰고, 아이누의 을명(乙名)들도 설득에 나서 봉기한 자들은 투항했으며, 봉기의 중심이 된 아이누는 처형되었다.[1] 봉기에 소극적인 아이누를 일부 일본인이 보호한 사례도 있지만, 이 소동으로 일본인 71명이 희생되었다.[1] 마쓰마에 번은 진정 직후 히다야의 책임을 물어 장소 청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 후의 교역을 새로운 장소 청부인인 아베야(阿部屋) 무라야마 덴베에에게 맡겼다.[1] 한편, 막부는 간세이 3~4년, 쿠나시리 장소와 소우야 장소에서 "어구교역(御救交易)"을 실시했다.[1] 러시아 사절 아담 락스만이 통상을 요구하며 네무로에 내항한 것은 소동이 일어난 지 불과 3년 후인 간세이 4년의 일이다.[1]

사건 발생 10년 후인 1799년(간세이 11년) 동 에조지(홋카이도 태평양 연안 및 치시마 열도)가, 이어서 1807년(분카 4년) 화인지 및 서 에조지(홋카이도 일본해안·사할린(후의 북 에조지)·오호츠크 해안)도 공의어료가 되었다.[1]

4. 봉기 이후

이 봉기 이후, 에도 막부는 에조치를 공의어료(公儀御料)로 하여 에조치에 일본인의 정주 제한을 완화하였고, 기타미 방면 남부로 일본인(시삼·샤모)의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다. 막부는 아이누 봉기의 원인이 경제적 곤경에 있다고 보고 장소 청부제도 막부 직할로 하였다. 이로 인해 아이누의 경제적 환경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이는 아이누가 일본인의 경제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2]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1863년에 출판한 「시레토코 일지[3]」에 따르면, 아이누 여성이 나이가 들면 쿠나시리로 보내져 어부들의 위안거리가 되었고, 유부녀는 회소에서 번인들의 이 되고, 남성은 부역 때문에 낙도에서 5년이나 10년이나 혹사당했으며, 독신자는 결혼도 어려웠다고 한다.

막말에 하코다테 봉행이 종두를 실시하여 대책을 강구했으나, 일본인이 가져온 천연두 등의 감염병이 맹위를 떨쳐 아이누인의 인구를 본격적으로 감소시켰다. 에도 시대의 일본 인구 통계에 따르면 1804년 (분카 4년)에 23,797명이었던 아이누 인구는 1873년 (메이지 6년)에는 18,630명으로 줄어들었다. 아이누의 인구 감소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기타미 지방 전체에서 1880년 (메이지 13년)에 955명이었던 아이누 인구는 1891년 (메이지 24년)에는 381명으로 줄었다.

연도아이누 인구
1804년 (분카 4년)23,797명
1873년 (메이지 6년)18,630명
1880년 (메이지 13년, 기타미 지방 전체)955명
1891년 (메이지 24년, 기타미 지방 전체)381명


4. 1. 일본의 지배 강화와 아이누의 쇠퇴

이 봉기 이후, 에도 막부가 에조치를 공의어료(公儀御料)로 하여 에조치에 일본인의 정주 제한을 완화하면서 기타미 방면 남부로 일본인(시삼·샤모)의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다. 막부는 아이누 봉기의 원인이 경제적 곤경에 있다고 보고 장소 청부제도 막부 직할로 했다. 이로 인해 아이누의 경제적 환경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이는 아이누가 일본인의 경제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2]

막말인 1845년, 1846년에 시레토코 지방을 방문한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1863년에 출판한 「시레토코 일지[3]」에 따르면, 아이누 여성이 나이가 들면 쿠나시리로 보내져 그곳에서 어부들의 위안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유부녀는 회소에서 번인들의 이 되고, 남성은 부역 때문에 낙도에서 5년이나 10년이나 혹사당했으며, 독신자는 혼인도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막말에 하코다테 봉행이 종두를 실시하여 대책을 강구했으나, 일본인이 가져온 천연두 등의 감염병이 맹위를 떨쳐, 아이누인의 인구를 본격적으로 감소시켰다. 그 결과 문화 4년(1804년)에 2만 3797명으로 파악된 인구(에도 시대의 일본 인구 통계도 참조)가 메이지 6년(1873년)에는 1만 8630명으로 줄어들었다. 아이누의 인구 감소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기타미 지방 전체에서 메이지 13년(1880년)에 955명이었던 아이누 인구는 메이지 24년(1891년)에는 381명으로 줄었다.

4. 2. 묘비 발견

1912년(메이지 45년) 5월, 노삽곶 근처 고요마이 해변에서 매장된 묘비가 발견되었다. 묘비 표면에는 "횡사 71인 묘"라고 새겨져 있었고, 옆면에는 "문화 9년 임신 4월에 세움"이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에는 사건 경위가 한문으로 새겨져 있었다. 문화 9년은 서기 1812년이다. 현재 이 묘비는 노삽곶 옆에 세워져 있으며, "간세이의 봉기 일본인 순난 묘비"라는 명칭으로 네무로시에서 지정 사적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5. 관련 사료 및 작품

다음은 쿠나시르-메나시 전투와 관련된 사료 및 작품이다.


  • Brett L. Walker, ''The Conquest of Ainu Lands: Ecology and Culture in Japanese Expansion 1590–180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pages 172–176.[3]
  • Takakura Shinichirō and John A. Harrison, "The Ainu of Northern Japan: A Study in Conquest and Acculturation" in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New Series, Vol. 50, No. 4 (1960), pp. 1–88[4]


관련 소설로는 마에카와 야스오의 『마인의 바다』(1969년), 후나토 요이치의 『에조지 벳켄』(1995년)이 있다. 장편시로는 신타니 유키의 『놋카마푸의 언덕에 불타올라라』가 있는데, 이는 놋카마푸에서 행해진 주모자 처형을 주제로 한다.

5. 1. 관련 사료

마쓰마에 번의 『신라지 기록』에는 1615년(겐나 원년)부터 1621년(겐나 7년)경, 메나시 지방(현재의 홋카이도 메나시 군라우스정, 시베츠정 주변)의 에조(아이누)가 100척 가까운 배에 독수리 깃털이나 수달의 모피 등을 싣고 마쓰마에에서 '''위마무'''[1]를 하고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1644년(쇼호 원년) 쇼호 어국 그림이 제작되었을 때 마쓰마에 번이 제출한 자번령 지도에는 「쿠나시리」, 「에토로후」, 「우루푸」 등 39개의 섬들이 그려져 있었다. 1715년(쇼토쿠 5년) 마쓰마에 번주는 에도 막부에 「십주도, 당태, 쿠릴 열도, 감찰가」는 마쓰마에 번령이라고 보고했다. 1731년(교호 16년) 쿠나시리·에토로후의 수장 등이 마쓰마에 번주를 방문하여 헌상품을 보냈다.

1754년(호레키 4년) 도토 아이누 영역의 최동단에서는 마쓰마에 번 가신의 지행지로서 쿠나시르 섬 외에도 에토로후 섬이나 우루푸 섬을 포함하는 쿠나시리 장소가 열렸고, 쿠나시리 섬의 토마리에 교역 거점 및 번의 출장 기관으로서 운상옥이 설치되었다. 운상옥에서는 주민의 무육 정책으로서 '''옴샤''' 등도 행해졌다.

1773년(안에이 2년) 상인 히다야가 쿠나시리 장소에서의 교역을 청부하게 되었고, 1788년(텐메이 8년) 대규모의 시메카스 제조를 시작하자 그 노동력으로 아이누를 고용하게 되었다. 시메카스는 생선을 삶은 후 어유를 짜낸 찌꺼기를 건조시켜 만든 비료로, 주로 청어가 원료로 사용되지만 쿠나시리에서는 연어, 송어가 사용되었다.

164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탐험선 「카스트리쿰 호」가 에토로후 섬과 우루푸 섬을 발견하고 앗케시 만에 기항했다. 북방에서는 러시아가 북쿠릴 열도(슘슈 군이나 무시르 군) 즉 쿠릴 아이누의 영역까지 남진하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이에 대항하여 1784년(텐메이 4년)부터 에조지 조사를 실시했고, 1786년(텐메이 6년) 최상 도쿠나이에게 우루푸 섬까지의 쿠릴 열도를 답사하게 했다.

쿠릴 아이누는 북쿠릴 열도에서 저항했지만, 러시아인에게 무력 제압된 후 모피세 등의 중과세를 부과받아 경제적으로 고통받았다. 일부 쿠릴 아이누는 러시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도토 아이누의 영역인 우루푸 섬이나 에토로후 섬 등으로 남하했다. 이러한 쿠릴 아이누의 보고에 의해 일본 측도 러시아가 북쿠릴 열도에 침출하고 있는 현상을 감지했고, 북방 경계의 중요성을 설파한 『아카에조 풍설고』 등이 저술되었다.[2]

5. 2. 관련 작품

; 소설

  • 마에카와 야스오 『마인의 바다』(1969년)
  • 후나토 요이치 『에조지 벳켄』(1995년)


; 장편시

  • 신타니 유키 『놋카마푸의 언덕에 불타올라라』(놋카마푸에서 행해진 주모자 처형을 주제로 함)

참조

[1] 문서 ウィマムとは藩主や役人にお目見えすること。
[2] 웹사이트 厚岸町の歴史 https://www.akkeshi-[...] 北海道厚岸町 1993年3月発行 厚岸町要覧「厚岸町歴史物語」 2018-01-31
[3] 웹사이트 知床日誌 http://www.lib.nara-[...]
[4] 웹사이트 1789年クナシリ・メナシの戦い https://www.city.nem[...] 根室市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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