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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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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원전 51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통치했다. 그녀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언에 따라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나, 권력 투쟁 끝에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지원하며 로마와의 관계를 맺었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자결했다. 그녀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문화,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다양한 건축 사업을 통해 고대 이집트의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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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재위 기간
기본 정보
클레오파트라 7세의 조각상
클레오파트라 7세의 조각상 (알테스 박물관, 베를린)
통치자클레오파트라 7세
재위 시작기원전 51년
재위 종료기원전 30년
이전 통치자프톨레마이오스 12세
이후 통치자프톨레마이오스 15세
왕조
왕조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생과 사망
출생기원전 69년 12월 또는 70년 초
사망기원전 30년 8월 10일 또는 12일
사망 장소알렉산드리아
사망 원인에 물림 (추정)
가족 관계
아버지프톨레마이오스 12세
어머니클레오파트라 5세 또는 알려지지 않음
배우자프톨레마이오스 13세 (기원전 51년 – 기원전 47년)
프톨레마이오스 14세 (기원전 47년 –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기원전 37년 – 기원전 30년)
자녀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기타 정보
신전덴데라

2. 즉위와 초기 통치

고대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다스리던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는 딸인 클레오파트라가 그녀의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자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죽을 당시 유언을 남겼다.[2] 기원전 52년 5월 31일 클레오파트라는 현재 덴데라하토르 신전에 남겨진 글로 알 수 있듯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섭정이 되었다.[3] 두에인 W. 롤러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기원전 51년 3월 22일 이전에 사망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조앤 플레처는 기원전 51년 3월 7일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그랜트는 그 해 5월쯤 늦게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했다고 본다.[4]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51년 3월 22일에 여왕으로서 처음으로 일을 했는데,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신 몬수의 중재자로 숭배하는 황소신 부키스 상을 세우려고 테베 근처 헤르몬티스로 갔다.[5]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종속국이라고 생각한 로마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죽음을 기원전 51년 6월 30일 또는 8월 1일까지 듣지 못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 사실을 덮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4]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을 수도 있는데,[6] 결혼을 정말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51년 8월 29일쯤부터 공식 문서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단독 통치자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 기록은 이때부터 남동생을 공동 통치자로 거부했다는 증거가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왕위를 물려받은 직후 가뭄과 저지대 나일강 홍수로 인한 식량 부족 및 기근 문제, 무장한 도둑 패거리의 공격 등 여러 문제와 위기를 맞닥뜨렸다. 한편으로는 '가비니아니'라고 불린 군사 집단의 무질서한 행동도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본래 로마 장군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이끌던 군대로, 대개 게르만족과 갈리아족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가비니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고 그의 딸 베레니케 4세를 권력에서 제거한 뒤 새로운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 그에게 가비니아니들을 용병으로 주었다. 그러나 가비니아니들은 곧 이집트 현지에 동화되며 로마의 의도와는 벗어난 행동들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영악한 재정 관리자이기도 했던 클레오파트라는 결국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전임자들이 이뤄낸 부의 창출을 능가하며, 세금 수입과 외국 무역 등을 합하여 국가 수입을 1년에 12,000 달란트까지 끌어올렸다. 그렇지만 한편 그는 아버지가 진 빚을 물려받았고 기원전 48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도착할 때 쯤에는 로마 공화정에 1,750만 드라크마를 빚졌다.

기원전 50년 시리아 속주의 프로콘술이었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그의 가장 나이가 많은 두 아들을 이집트로 보냈다. 이 행위는 가비니아니들과 협상을 하여 그들을 로마 군단으로 복귀시킨 뒤, 당시 병력 수요가 절실하던 시리아 지역 내 파르티아인들과의 전선에 투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비니아니들은 비불루스의 아들들을 고문하고 살해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환관 섭정인 포테이노스 같은 클레오파트라 궁정 내의 고위 관료들의 은밀한 장려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행동은 클레오파트라가 가비니아니들을 재판을 기다리는 죄인들로서 비불루스에게 보내게끔 하였다. 젊은 여왕의 재빠른 행동에도 불구하고, 비불루스는 죄인들을 그녀에게 돌려보냈으며, 로마 원로원이 직접적으로 다뤄야할 로마의 문제에 개입한 사실에 대해 여왕을 비판하였다. 훗날 카이사르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편에 선 비불루스는 이때 카이사르가 그리스에 해군 함대를 상륙시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임무에 실패하면서 궁극적으로 폼페이우스를 추적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가도록 허용하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가 기원전 51년에 11세의 남동생과의 공동 통치를 거부했음에도,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대표적으로 자신의 스승이자 재산들을 관리하던 포테이노스 등의 강력한 동맹들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를 포함하여 로마인들은 처음에 그를 왕좌의 배후 세력으로 여겼다. 클레오파트라에 반대하던 세력들에는 유능한 군 지휘관 아킬라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또 다른 스승인 키오스의 테오도토스가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동맹을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렇지만 기원전 50년 가을경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분쟁에서 우세를 가지면서 그녀보다 앞서 그의 이름으로 문서에 서명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49년에 그의 첫 번째 즉위 연도가 설정되었다.[7]

2. 1.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권력 투쟁

3.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관계



기원전 49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아버지 폼페이우스를 위해 군사 원조를 요청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맞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 중이었다.[9] 갈리아 전쟁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 도하 후 폼페이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그리스로 몰아냈다.[9]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에게 배 60척과 병사 500명을 보냈다.[9] 루카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폼페이우스에 의해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테베 지역으로 물러났다.[9] 기원전 48년 봄, 클레오파트라는 아르시노에 4세와 함께 이집트 침공 병력을 모았다.[9]

그리스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격돌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했다.[9]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은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권력 기반으로 삼는 것을 두려워했고,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48년 9월 28일 살해당했다.[9]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보냈지만, 카이사르는 슬픔과 분노를 표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화해를 촉구했다.[10]

카이사르는 로마에 대한 빚 1,750만 드라크마를 요구했으나, 포테이노스는 카이사르가 떠나면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했다.[13]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의 요구를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13]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다.[13] 디오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매력적인 옷을 입고 재치와 언변으로 카이사르를 매혹시켰다고 기록했다.[11]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침대 자루 안에 들어가 궁으로 몰래 들어갔다고 설명했다.[11]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누이가 카이사르와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폭동을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군중을 진정시키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언장을 공개하며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공동 상속자로 지명했다.[12] 카이사르는 아르시노에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키프로스를 다스리도록 했다.[12]

포테이노스는 이 협정이 클레오파트라에게 유리하다고 판단, 아킬라스에게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공격하도록 했다.[13] 카이사르는 항구의 배를 불태웠고, 불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일부까지 번졌다.[14] 포테이노스는 카이사르에게 처형당했다.[15] 아르시노에 4세는 아킬라스를 죽이고 군대 사령관이 되었다.[15] 가니메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중재자로 초대한 후 아르시노에 4세 군대에 합류시켰다.[15]

기원전 47년, 카이사르의 군대가 도착했다.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와 에돔의 안티파테르가 이끄는 병력이었다.[16] 나일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익사했고, 가니메데스는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토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처형당했다. 아르시노에 4세는 로마에서 열린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전시되었다.[17]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이를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다.[17] 그녀는 기원전 47년 6월 23일 카이사리온을 낳았다.[20]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20]

카이사르의 임기는 기원전 48년 종료되었다.[18]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독재관 선출을 도왔다.[18]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세웠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계속 거주했다.[18]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나일강을 유람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낭만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19] 수에토니우스는 이 여행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는데, 탈라메고스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19] 카이사르는 지리학에 매료되어 나일강의 근원을 발견하고 싶어했을 수 있다.[19]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4월경 이집트를 떠났다.[21]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2세 문제 해결이 필요했을 수도 있지만,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21] 그는 루피오 휘하의 군단을 이집트에 남겼다.[21]

3. 1. 카이사리온 출생과 로마 방문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멤피스의 세라페이온에 있는 석비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서 태어난 걸로 추정된 카이사리온은 기원전 47년 6월 23일에 태어났다. 알렉산드리아인들은 카이사리온이라는 이름을 선호했다.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침묵했으나, 사적으로는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들이 있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자신의 혈통이며 카이사르가 아버지라는 공식적인 선언을 반복하여 내세웠다. 또한 그녀는 카이사르를 숭배하기 위해 케사리움 사원을 알렉산드리아 항구 근처에 지었다.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기원전 46년 후반 로마를 방문하여 호티 카이사리스 내 카이사르의 빌라에 묵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에게 '로마인들의 친구이자 동맹'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키케로는 클레오파트라를 오만하다고 평가했다. 소시게네스는 율리우스력 계산을 도왔다. 기원전 46년 9월 25일 카이사르 포룸에 세워진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는 클레오파트라 황금상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으려 했으나, 카이사르의 유언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주요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갔고,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하고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로 세울 계획을 꾸몄다.

4.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관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 원정에서 승리한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흉내 낸 열병식을 거행했다. 그는 디오니소스 복장을 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아르메니아 왕족을 포로로 바쳤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이집트 여왕과 그 백성들이 로마의 전통 의례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김나시온에서 열린 행사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로 분장하고 자신을 왕중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왕중왕으로 선포했다.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의 왕으로,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왕으로,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크레타와 키레네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소식을 로마에 보고하여 영토 소유권 승인을 요청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 했고, 안토니우스 지지 집정관들은 보고 공개를 막았다.

기원전 32년 주조된 데나리우스. 앞면에는 다이아뎀을 쓴 클레오파트라의 흉상과 "CLEOPATRA[E REGINAE REGVM]FILIORVM REGVM" 라틴어 글귀, 뒷면에는 "ANTONI ARMENIA DEVICTA" 글귀와 안토니우스의 흉상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드리아 봉헌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수년간 치열한 선전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비난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마법에 홀린 인물로 묘사하며 맞섰다. 이러한 상호 비방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문학부터 현대 대중매체에 이르기까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4. 1. 알렉산드리아 봉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 원정에서 승리한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흉내 낸 열병식을 거행했다. 그는 디오니소스 복장을 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아르메니아 왕족을 포로로 바쳤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이집트 여왕과 그 백성들이 로마의 전통 의례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김나시온에서 열린 행사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로 분장하고 자신을 왕중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왕중왕으로 선포했다.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의 왕으로,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왕으로,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크레타와 키레네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소식을 로마에 보고하여 영토 소유권 승인을 요청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 했고, 안토니우스 지지 집정관들은 보고 공개를 막았다.

알렉산드리아 봉헌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수년간 치열한 선전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비난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마법에 홀린 인물로 묘사하며 맞섰다. 이러한 상호 비방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문학부터 현대 대중매체에 이르기까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5. 악티움 해전과 몰락

소 옥타비아누스로 묘사된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약 BC 30년에 제작


기원전 33년 1월 1일,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가 동방의 여왕에게 로마의 자유와 권위를 넘기려 한다고 비난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선언하며 옥타비아누스를 깎아내리려 했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 측 지지자들이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그중 한 명은 옥타비아누스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무장한 인원들과 함께 상원으로 들어가 집정관들을 고발했고, 이에 겁을 먹은 안토니우스 편 집정관과 200명 이상의 상원의원들이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 측에 합류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만의 로마 상원을 설립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군사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클레오파트라는 800척의 해군 선박 중 200척을 지원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을 우려한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클레오파트라를 군사 작전에서 배제할 것을 설득했지만,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전쟁 자금 지원과 오랜 통치 기간을 들어 반론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를 그리스에서 막는 것이 이집트를 방어하기 쉽다고 판단하여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안토니우스의 요청을 거절했다. 클레오파트라의 강경한 태도는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같은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기원전 32년 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사모스섬과 아테네로 여행을 떠났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소 옥타비아에게 공식 이혼 선언을 보내라고 설득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입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장의 일부 내용을 공개하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선전에 활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자신의 마우솔레움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31년 집정관에 선출되어 법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는 안토니우스에게 선전포고를 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지지 하락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2/31년에 주조된 다이아뎀을 쓴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이 새겨진 헤미오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보다 더 많은 병력과 함선을 보유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선원들은 잘 훈련된 반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선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방어를 위해 이탈리아 공격을 포기하게 했고, 파트라이에 겨울 사령부를 설치한 후 암브라키코스만 남쪽 악티움으로 이동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을 이집트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여러 왕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헤로데 1세는 클레오파트라와의 분쟁과 지진 피해 수습으로 지원하지 못했고, 나바테아 왕국의 말리쿠스 1세의 지지도 잃었다. 기원전 31년 여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소규모 접전에서 패배했고, 안토니우스의 변절자들은 계속 발생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집트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해전을 주장했다.

폼페이에 있는 마르쿠스 파비우스 루푸스의 집에 그려진 클레오파트라를 베누스 게네트릭스로, 카이사리온을 큐피드로 묘사한 폼페이양식 그림, 기원전 1세기 중엽 제작


기원전 31년 9월 2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의 해군과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 함대가 충돌하면서 악티움 해전이 발발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함에 승선해 함대 후방을 지휘했는데, 이는 전투 도중 클레오파트라의 군사 지휘 간섭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바람을 타고 해전의 주요 전장을 지나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전략적 후퇴를 감행했다. 버스타인은 이 행동이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악티움 봉쇄를 뚫으면서 최대한 많은 함대를 보전하기 위한 계획이었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올라탔고 둘은 전장을 탈출해 타이나론으로 이동했다. 안토니우스는 3일간의 항해에서 클레오파트라를 피해 다녔다. 악티움 해전은 9월 3일 아침까지 계속되었고, 안토니우스 휘하 군단장, 병사, 동맹국 군주들의 대규모 탈영 및 투항이 있었다.

폼페이의 기우세페 2세(Giuseppe II)의 집에 그려진 다이아뎀을 쓴 클레오파트라가 독극물을 마셔 자결하는 모습과 다이아뎀을 쓴 카이사리온이 클레오파트라의 뒤에 서있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 기원후 1세기 초 제작


옥타비아누스가 아테네를 점령하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파라이토니온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키레네로,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향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군사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사원을 약탈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옥타비아누스 측의 선전일 수 있다.

안토니우스에 의해 키레네의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루시우스 피나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토니우스의 전령을 처형한 뒤,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전향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안토니우스는 자결 직전까지 갔으나 참모들이 자결을 막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는 은둔하기 위한 오두막을 파로스 섬에 지었다. 그는 이 오두막에 "티모네이온()"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악티움 해전 이후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배신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조언했던 헤로데 1세는 로도스섬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자신의 왕위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이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헤로데 1세의 언변과 충심에 감명을 받은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 1세가 유대에서 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로 인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더욱 고립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에게 이집트 왕위를 넘겨주려고 준비하던 기원전 31년 늦여름부터 안토니우스를 골칫거리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에게 적대적 존재로 인식되었던 그녀는 왕위를 카이사리온에게 물려주고 그녀의 함대와 함께 지중해에서 홍해로 이동한 뒤 인도를 포함한 이집트 외부의 항구로 이동해 회복의 기회를 도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바테아 왕국의 말리쿠스 1세가 그녀가 촉발시킨 자신과 헤로데 1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복수로 옥타비아누스의 편이었던 시리아 총독 퀸투스 디디우스의 조언대로 그녀의 함대를 불태워버리면서 이러한 계획은 실패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탈출할 수 없었고 이집트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협상을 진행해야만 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들의 선전일 가능성이 높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이 시기에 죄수들과 자신의 시중들에게도 다양한 독들의 효력을 실험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상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에페보스(군대 훈련을 받는 청소년)로 진급시켰다. 이것은 기원전 31년 9월 21일 콥토스의 석주에 새겨진 부조와 더불어 그녀가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토니우스는 연대의 의미로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를 동시에 에페보스로 진급시켰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로도스섬에 주둔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전령과 연락들을 각각 보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만 답변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녀의 아이들이 이집트를 상속받고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황금 홀, 왕관과 왕좌를 선물로 바쳤고 나중에 돈을 추가로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분신자살을 한 후 이미 건설중인 그녀의 무덤에 자신의 모든 보물들을 묻어버리겠다고 협박하자 그의 사절 티르소스()를 그녀에게 보냈다. 티르소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안토니우스를 죽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에게서 불결한 의도를 의심하고 그를 매질한 후 옥타비아누스에게 되돌려보냈다.

최종적으로 어떠한 결과도 얻지 못한 긴 협상 끝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봄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침공했다. 그는 그를 환대하고 그의 군대의 보급을 해결해 준 그의 새로운 동료 헤로데 1세를 만나기 위해 페니키아의 프톨레마이스로 이동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남쪽으로 이동해 펠루시온을 점령했고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키레네에서 동쪽으로 진군해 파라이토니온 근처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격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했다. 안토니우스는 복귀해 도시의 히포드롬 밖에서 지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기원전 30년 8월 1일 안토니우스의 해군 함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고 기병대 또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측근들과 함께 그녀의 무덤에 숨었고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이 자결했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받고 절망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복부를 칼로 찔러 53세의 나이에 자결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으로 이송되었을 때 아직 살아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에게 안토니우스는 동료 로마인들의 결투에서 명예롭게 죽었고 옥타비아누스의 측근 가이우스 프로쿨레이우스()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프로쿨레이우스는 사다리를 이용해 그녀의 무덤으로 들어왔고 그녀가 보물들과 함께 무덤에서 자결할 수 없도록 무덤에 감금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왕궁으로 호송되기 전 그녀의 무덤 안에 안토니우스의 시신을 보존처리하고 매장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5. 1. 죽음

옥타비아누스가 아테네를 점령하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파라이토니온에 상륙했다. 둘은 각각 다른 길로 향했는데, 안토니우스는 더 많은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키레네로,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에서 승리했다고 거짓으로 알리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항해했다. 이 시기 클레오파트라의 재정 상황은 기록이 상충되어 명확하지 않지만, 군사 지출을 위해 사원을 약탈했다는 기록은 옥타비아누스 측의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

안토니우스에 의해 키레네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루시우스 피나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승전 소식을 듣고 안토니우스의 전령을 처형한 뒤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전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자결 직전까지 갔으나 참모들이 막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는 파로스 섬에 "티모네이온()"이라는 은둔용 오두막을 지었다. 로도스섬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만난 헤로데 1세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신의 왕위를 포기한다고 밝혔으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 1세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허락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더욱 고립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늦여름부터 안토니우스를 골칫거리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카이사리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대와 함께 지중해에서 홍해로 이동하여 인도 등 이집트 외부 항구로 이동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나바테아 왕국의 말리쿠스 1세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를 불태우면서 실패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루이 고피에가 그린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누스'', 1787년 작


귀도 카냐치가 그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1658년 작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에페보스(군대 훈련을 받는 청소년)로 진급시키고,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를 에페보스로 진급시켰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전령을 보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만 답변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이들의 이집트 상속과 안토니우스의 이집트 망명 생활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며 황금 홀, 왕관, 왕좌를 선물로 바쳤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결 후 무덤에 보물을 묻겠다고 협박하자 사절 티르소스()를 보냈고, 티르소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토니우스를 죽이라고 조언했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를 매질해 옥타비아누스에게 돌려보냈다.

긴 협상 끝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침공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펠루시온을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했으나, 안토니우스는 도시 밖에서 옥타비아누스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기원전 30년 8월 1일 안토니우스의 해군 함대와 기병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무덤에 숨어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이 자결했다는 서신을 보냈고, 절망한 안토니우스는 자결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으로 이송되었을 때 살아있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무덤에 감금한 후 알렉산드리아 왕궁으로 호송되기 전 안토니우스의 시신을 보존처리하고 매장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베네데토 젠나리가 그린 ''클레오파트라''', 1674–1675년 작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해 클레오파트라의 세 아이들의 신변을 확보했다. 티투스 리비우스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나는 개선행렬에 끌려나가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녀의 삶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첩자를 통해 3일 뒤 로마로 이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듣고 자결을 준비했다. 그녀는 개선행렬에 끌려나가 로마인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원전 30년 8월, 39세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자결했다. 고대 사가들은 그녀의 시중 에리아스와 카르마도 함께 자결했다고 기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우스 옆에 묻어주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주치의 올림포스()는 그녀의 죽음 방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독사 공격설 외에도 독을 주입하는 도구를 사용했다는 설을, 카시우스 디오는 바늘로 독을 주입했다는 설을, 스트라본은 독 연고를 발랐다는 설을 제시한다. 그녀의 몸에는 바늘로 낸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구멍 상처들이 있었다.

다이아뎀을 쓴 나체의 클레오파트라가 남근 위에 앉은 채 나일악어를 타고 있는 부조가 새겨진 로마 기름 등잔 조각, 디 박물관 소장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상이집트로 보내 피신시키려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된 16살의 카이사리온은 기원전 30년 8월 29일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처형되기 전까지 약 18일 동안 이집트 왕을 역임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레이오스 디디모스의 조언에 따라 카이사리온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죽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했고, 이집트는 아이깁투스라는 이름으로 8월 31일 로마의 속주로 병합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멸망은 헬레니즘 문명의 멸망을 의미했다.

기원전 27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고 로마 제국의 원수정을 시작하며 첫 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하게 되었지만 이집트에 거주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 양식의 대관식이나 아피스 황소 숭배와 거리를 두었지만, 이집트 사원에서 고대 이집트의 신들에게 제사를 바치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를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영지로 두고, 로마 원로원의 개입을 차단했으며, 에퀴테스를 아이깁투스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6. 클레오파트라 치하의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치하의 이집트는 마케도니아 왕국전제군주제를 채택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전제군주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 북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존재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아도코이들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점령하고 점령지들에 이러한 지배체제를 전파했다. 고전기 그리스 (기원전 480년~기원전 336년)에는 민주주의부터 과두제까지 다양한 정치 체제들을 가진 폴리스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폴리스들은 헬레니즘 그리스(기원전 336년~기원전 146년)와 로마 시대 후반기까지 이러한 정치 체제를 유지했다. 이들은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헬레니즘 군주제들의 정치체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치세 초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셀레우코스 제국과 시리아 지역의 통치권을 두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왕국은 이집트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그녀는 선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차지했었던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분지를 점령하고 싶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명목상으로 그녀의 왕국에서 유일한 입법자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의 로마인 동료 퀸투스 카스켈리우스()에게 면세권을 하사하는 파피루스에 의하면, 그녀는 그녀의 왕국 내 행정적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무세이온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헬레니즘 세계의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모았고, 이들은 이집트에 살면서 면세의 혜택을 받았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왕국의 대사제였으며 이집트 신화에서 묘사된 세상의 멸망을 막는 제사와 의례를 주관했다. 그리스 식민시들과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도시들의 다문화주의를 고려하면,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의 신을 믿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제의를 주관해야 했다. 그리스인들이 정부 행정의 고위직을 차지했지만 이집트 고왕국 시기부터 존재했던 필경사들이 실무 행정을 주관했다. 비록 왕국 법정의 몇몇 법관들이 그녀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의 내전 당시 살해당하긴 했지만 많은 법관들이 그녀의 아버지의 치세 당시부터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정부 아래 봉사했던 20개 이상의 지역들의 지사들의 이름들이 파피루스 기록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인들과 이집트인들이었다.

그리스인들과 이집트인들이라는 두 개의 법적으로 규정된 신분이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사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리아, 나우크라티스, 프톨레마이오스 헤르메이우의 도시국가들에 거주했다. 이 '폴리스'들에 거주하는 완전한 시민들은 이집트인 토착민들과의 혼인이 금지되었다. (이 폴리스들 외부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과 혼인이 가능했다.) 토착 이집트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와 관습을 버리고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그들의 신들을 그리스어로 부르고 그리스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면 그리스인들로 규정될 수 있었다. 토착 이집트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치세에 이르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대에 복무하는 것에서 배제되었고, 빈자리는 클레루키아로 불리는 토지를 가진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로 채워졌다. 기원전 3세기 후엽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의 치세에 이르면 이들은 마케도니케 팔랑크스 병사들로 재도입되었다. 이집트로의 그리스 디아스포라가 기원전 2세기에 멈췄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비율은 더 증가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대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에 대적할 만한 부를 소유한 지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주들은 법적으로 이집트의 모든 땅을 자신의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이집트 경제의 모든 부문은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중앙 정부의 계획 아래 관리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대부분의 인구는 농업 경제에 주로 종사했다. 나일강의 연년 주기로 찾아오는 홍수는 작물의 이례적인 산출량을 이끌었고, 특히 밀, 보리, 올리브의 산출량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의 아주 풍요로운 흙 덕분에, 이집트의 식량은 많은 잉여분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잉여 식량들은 지중해의 많은 제국들로 수출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수입물과 수출물에 많은 관세를 매겼고 다양한 상품들의 물가를 통제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주화에 높은 환율을 책정했고, 식물성 기름, 의류 제작 산업들을 국가가 독점했고, 농부들이 작물들의 농경 주기에 그들의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강제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포함해서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와 이러한 것들을 완벽히 실행하기 위한 세부 정책들의 효율성은 현실보다 이상에 가까웠다. 클레오파트라와 많은 전임자들은 그들의 집권 초기에 그들의 신민들이 그들을 착취하는 주지사들로 인한 광범위한 경제적 부패로 인해 정부에 지고 있는 사적 빚들을 모두 청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착취는 노동자들이 종종 국가가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때까지 진행된 총파업을 결성하도록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집권 초창기에, 주지사들은 기근과 가뭄기에 빈곤한 농민들에게 세금을 걷는 방식으로 이들을 착취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러한 포악한 조치를 축소시켰고 왕실 미곡창에 비축한 곡물을 분배하는 구휼 조치를 도입했다.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51년–30년, 40 드라크마, 알렉산드리아에서 주조; 앞면: 다이아뎀을 두른 클레오파트라의 흉상 부조; 뒷면: 벼락 위에 앉아있는 독수리와 함께 새겨진 명문 "ΒΑΣΙΛΙΣΣΗΣ ΚΛΕΟΠΑΤΡΑΣ(바실리세스 클레오파트라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클레오파트라는 금전 문제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주화의 가치를 절하시켜야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재위 기간 당시에 주조된 금화는 알려져 있지 않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튀로스의 치세 이후부터 없어졌던 동화가 다시 사용되었으며 그녀의 집권 말기에 은본위제가 대략 40% 정도 절하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집권 당시 주조된 동전들은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이집트 지역을 포함해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칼키스, 페니키아의 트리폴리, 유대의 아슈켈론, 리비아의 키레나이카 등 다양한 지역들에서 유입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재위 기간에 주조된 동전들에는 매년마다 만들어진 동전들이 포함되어있다. 그것들에는 일반적으로 그녀와 함께 있는 이시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어떤 동전들은 그녀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를 지배한 여왕 아르시노에 2세 당시 만들어진 동전들을 모방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주조한 동전들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새겨진 ''데나리우스''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화폐는 비로마인 여왕이 라틴어 문구가 새겨진 고대 로마의 화폐에 나타난 첫 화폐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해안 지구 근처에 그녀의 정치적 동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헌정하는 케사리온 신전을 건설했다. 신전의 입구 양 옆에는 200톤의 장밋빛 화강암 오벨리스크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기원전 13/12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기념물들을 세웠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19세기에 뉴욕과 런던으로 배치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유대인들에게 망명 허가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친유대인 정책들에 맞춰 알렉산드리아에 시나고그를 건립했다. 도시는 그녀와 그녀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내전으로 인해 경기장과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와 같은 많은 건축물들의 수리와 재건축이 필요했다. 루카누스가 클레오파트라가 왕궁을 보수했다고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나 왕궁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했는지는 확실하게 검증된 바가 없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처럼 궁전 구역에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는 공사를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이어 무덤 공사를 완공시켰다. 클레오파트라의 궁전과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에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은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과 후대 로마 황제들의 무덤 양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오늘날 이집트 케나 근처에 있는 덴데라 신전의 건축을 재개했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공물을 하토르이히 신에게 바치는 부조들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이시스호루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차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데이르 엘메디나에 있는 하토르-이시스 신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민중문자가 동시에 적혀 있고 그녀가 몬수를, 카이사리온이 아문-라 신을 섬기는 모습이 새겨진 화강암 석주를 세웠다. 아르만트에 있는 몬수 사원은 아문-라로 묘사된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의 탄생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그 예로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거대한 기둥들이 있는 정교한 파사드키오스크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에 의해 건축된 에드푸 신전필론 정면 입구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의 작은 조상을 수호하는 화강암 호루스 석상 2개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헤르메이우에 있는 이시스 여신에게 헌정된 사원의 건축은 클레오파트라의 주지사 칼리마코스가 감독하였다.

6. 1. 경제와 행정

클레오파트라 치하의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 북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존재했고, 아케메네스 제국 점령 이후 디아도코이들에 의해 전파된 전제군주제를 채택했다. 고전기 그리스 (기원전 480년~기원전 336년)에는 민주주의부터 과두제까지 다양한 정치 체제들을 가진 폴리스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헬레니즘 그리스로마 시대 후반기까지 이러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며 헬레니즘 군주제들에 영향을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치세 초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셀레우코스 제국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분지를 점령하고 싶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명목상 유일한 입법자였으며, 왕국 내 행정적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무세이온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헬레니즘 세계의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을 모았고, 이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왕국의 대사제였으며 이집트 신화에서 묘사된 세상의 멸망을 막는 제사와 의례를 주관했고, 고대 그리스의 신을 믿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제의도 주관해야 했다. 이집트 고왕국 시기부터 존재했던 필경사들이 실무 행정을 주관했고, 많은 법관들이 그녀의 아버지 치세부터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정부 아래 봉사했던 20개 이상의 지역들의 지사들의 이름들이 파피루스 기록에 보존되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사회는 그리스인들과 이집트인들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리아, 나우크라티스, 프톨레마이오스 헤르메이우의 도시국가들에 거주했고, 이 '폴리스'들에 거주하는 완전한 시민들은 이집트인 토착민들과의 혼인이 금지되었다. 토착 이집트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면 그리스인으로 규정될 수 있었다. 토착 이집트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치세에 이르러 군대 복무에서 배제되었고, 빈자리는 클레루키아로 불리는 토지를 가진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로 채워졌다. 기원전 3세기 후엽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의 치세에 이르면 이들은 마케도니케 팔랑크스 병사들로 재도입되었다. 그리스 디아스포라가 기원전 2세기에 멈췄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비율은 더 증가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대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에 대적할 만한 부를 소유한 지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주들은 법적으로 이집트의 모든 땅을 자신의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이집트 경제의 모든 부문은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중앙 정부의 계획 아래 관리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대부분의 인구는 농업 경제에 주로 종사했다. 나일강의 연년 주기로 찾아오는 홍수는 작물의 이례적인 산출량을 이끌었고, 특히 밀, 보리, 올리브의 산출량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의 아주 풍요로운 흙 덕분에, 이집트의 식량은 많은 잉여분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잉여 식량들은 지중해의 많은 제국들로 수출되었다. 지배자들은 수입물과 수출물에 많은 관세를 매겼고 다양한 상품들의 물가를 통제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주화에 높은 환율을 책정했고, 식물성 기름, 의류 제작 산업들을 국가가 독점했고, 농부들이 작물들의 농경 주기에 그들의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강제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포함해서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와 이러한 것들을 완벽히 실행하기 위한 세부 정책들의 효율성은 현실보다 이상에 가까웠다. 클레오파트라와 많은 전임자들은 그들의 집권 초기에 그들의 신민들이 그들을 착취하는 주지사들로 인한 광범위한 경제적 부패로 인해 정부에 지고 있는 사적 빚들을 모두 청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착취는 노동자들이 종종 국가가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때까지 진행된 총파업을 결성하도록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집권 초창기에, 주지사들은 기근과 가뭄기에 빈곤한 농민들에게 세금을 걷는 방식으로 이들을 착취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러한 포악한 조치를 축소시켰고 왕실 미곡창에 비축한 곡물을 분배하는 구휼 조치를 도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클레오파트라는 금전 문제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주화의 가치를 절하시켜야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재위 기간 당시에 주조된 금화는 알려져 있지 않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튀로스의 치세 이후부터 없어졌던 동화가 다시 사용되었으며 그녀의 집권 말기에 은본위제가 대략 40% 정도 절하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집권 당시 주조된 동전들은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이집트 지역을 포함해 다양한 지역들에서 유입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재위 기간에 주조된 동전들에는 매년마다 만들어진 동전들이 포함되어있고, 일반적으로 그녀와 함께 있는 이시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어떤 동전들은 아르시노에 2세 당시 만들어진 동전들을 모방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주조한 동전들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새겨진 ''데나리우스''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화폐는 비로마인 여왕이 라틴어 문구가 새겨진 고대 로마의 화폐에 나타난 첫 화폐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해안 지구 근처에 케사리온 신전을 건설했다. 신전의 입구 양 옆에는 200톤의 장밋빛 화강암 오벨리스크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기원전 13/12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기념물들을 세웠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19세기에 뉴욕과 런던으로 배치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유대인들에게 망명 허가를 갱신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시나고그를 건립했다. 도시는 그녀와 그녀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내전으로 인해 경기장과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와 같은 많은 건축물들의 수리와 재건축이 필요했다. 루카누스가 클레오파트라가 왕궁을 보수했다고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나 왕궁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했는지는 확실하게 검증된 바가 없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처럼 궁전 구역에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는 공사를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이어 무덤 공사를 완공시켰다. 클레오파트라의 궁전과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에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은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과 후대 로마 황제들의 무덤 양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오늘날 이집트 케나 근처에 있는 덴데라 신전의 건축을 재개했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공물을 하토르이히 신에게 바치는 부조들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이시스호루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차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데이르 엘메디나에 있는 하토르-이시스 신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민중문자가 동시에 적혀 있고 그녀가 몬수를, 카이사리온이 아문-라 신을 섬기는 모습이 새겨진 화강암 석주를 세웠다. 아르만트에 있는 몬수 사원은 아문-라로 묘사된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의 탄생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그 예로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거대한 기둥들이 있는 정교한 파사드키오스크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에 의해 건축된 에드푸 신전필론 정면 입구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의 작은 조상을 수호하는 화강암 호루스 석상 2개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헤르메이우에 있는 이시스 여신에게 헌정된 사원의 건축은 클레오파트라의 주지사 칼리마코스가 감독하였다.

6. 2. 종교와 문화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전통 신앙과 고대 그리스의 신을 믿는 고대 그리스 종교 제의를 융합하여 다문화적인 종교 정책을 펼쳤다. 그녀는 이집트 신화에서 묘사된 세상의 멸망을 막는 제사와 의례를 주관하는 대사제였다. 덴데라 신전에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하토르이히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부조가 있는데, 이는 이시스호루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차용한 것이다. 데이르 엘메디나에 있는 하토르-이시스 신전에는 고대 그리스어민중문자가 동시에 적혀 있고 그녀가 몬수를, 카이사리온이 아문-라 신을 섬기는 모습이 새겨진 화강암 석주가 세워져 있다. 아르만트에 있는 몬수 사원은 아문-라로 묘사된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의 탄생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모습으로 개조되었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거대한 기둥들이 있는 정교한 파사드키오스크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에 의해 건축된 에드푸 신전필론 정면 입구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의 작은 조상을 수호하는 화강암 호루스 석상 2개를 세웠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중심으로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다. 헬레니즘 세계의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모여들어 면세 혜택을 받으며 연구에 매진했다.

6. 3. 건축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해안 근처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헌정하는 케사리온 신전을 건설했다. 신전 입구에는 200톤의 장밋빛 화강암 오벨리스크들이 세워졌으며, 기원전 13/12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기념물들을 세웠다. 이 오벨리스크들은 19세기에 뉴욕과 런던으로 옮겨졌다. 덴데라 신전에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하토르이히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부조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이시스호루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차용해 만들어졌다.

데이르 엘메디나에 있는 하토르-이시스 신전에는 고대 그리스어민중문자가 동시에 적혀 있고, 그녀가 몬수를, 카이사리온이 아문-라 신을 섬기는 모습이 새겨진 화강암 석주가 세워졌다. 아르만트에 있는 몬수 사원은 아문-라로 묘사된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의 탄생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모습으로 개조되었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거대한 기둥들이 있는 정교한 파사드키오스크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건축한 에드푸 신전필론 정면 입구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의 작은 조상을 수호하는 화강암 호루스 석상 2개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헤르메이우에 있는 이시스 여신에게 헌정된 사원의 건축은 클레오파트라의 주지사 칼리마코스가 감독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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