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키비-케코넨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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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시키비-케코넨 원칙은 핀란드가 소련과의 관계에서 취한 외교 정책으로, 1947년 파리 조약과 1948년 우호협조상호원조협약에 기반한다. 이 원칙은 핀란드의 군사력 제한, 영토 할양, 소련의 해군기지 조차, 핀란드 영토 통과 접근권 보장, 전쟁 배상금 지불 등을 포함했다. 핀란드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동구권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서방권과의 관계는 제한받았다. 이 정책은 소련의 핀란드 내정에 대한 개입, 서방권과의 소원한 관계, 핀란드 침공 계획 등으로 비판받았으며, 소련의 붕괴 이후 핀란드는 이 원칙을 폐기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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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키비-케코넨 원칙 | |
---|---|
개요 | |
유형 | 대외 정책 |
관련 국가 | 핀란드 |
목표 | 소련과의 신뢰 구축 및 관계 유지 핀란드의 독립 유지 |
특징 | 중립 외교 소련의 이익 존중 서방과의 관계 유지 |
역사적 배경 | |
명칭 유래 |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핀란드 대통령의 외교 정책 우르호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 시기에 구체화 및 발전 |
주요 사건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의 대소 관계 설정 냉전 시대 핀란드의 외교 노선 |
주요 내용 | |
핵심 원칙 | 핀란드는 소련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음 소련의 안보 이익을 존중 핀란드의 중립성을 유지하며 서방과의 관계도 유지 |
파시키비 라인 | 파시키비 대통령의 대소 관계 개선 노력 소련과의 신뢰 구축을 위한 정책 |
케코넨 시대 | 케코넨 대통령 시기에 더욱 강화된 대소 외교 핀란드의 중립 외교 노선 확립 |
영향 및 평가 | |
긍정적 평가 | 핀란드의 독립 유지에 기여 소련과의 관계 안정화 경제 발전 및 서방과의 교류 유지 |
비판적 평가 | 소련에 대한 지나친 의존 핀란드의 자주성 훼손 국내 정치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증대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우르호 케코넨 |
기타 | |
관련 용어 | 핀란드화 (Finlandization) 냉전 |
2. 배경
1947년 2월 조인된 파리 평화조약에서 핀란드와 소련은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서 결정된 바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가했다.
- 핀란드 방위군의 군비 제한.
- 페차모 등 핀란드의 북극 연안 지역의 소련으로의 할양.
- 헬싱키 근교 포르칼라 반도를 소련이 50년간 해군기지로 조차. (1956년 조기 반환)
- 핀란드 영토에 대한 소련의 자유로운 통과 접근권 보장.
- 핀란드는 소련에게 전쟁배상금 3억 황금 달러(1952년 물가로 5.7억달러) 지불.[1]
3. 전개
핀란드는 1948년 4월 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협약을 맺었다.[8] 이 조약에 의해 핀란드는 "독일 또는 그 동맹"(즉 NATO)이 핀란드를 ''경유하여'' 핀란드 또는 소련을 공격할 때 소련과 함께 방어전에 나설 의무가 있었다. 또한 동시에 이 협약은 핀란드의 강대국간 분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해 주었다.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은 1955년, 1970년, 그리고 1983년에 20년씩 연장되었다.[7] 이 협약에 의해 핀란드는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보존하고 동구권에 가입하지 않는 등 대내정치적 독립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NATO를 비롯한 서방권에 가맹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른 대외정책도 종종 소련에 의한 제한을 받았다.[8]
4. 비판
파시키비-케코넨 원칙은 "선린 관계의 의례"로 여겨지며 현대 핀란드인들에게 비판받는다. 양국은 군사적으로 대비했지만, 양자 무역 틀 안에서 국제 무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정책은 케코넨 대통령 개인과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그는 "소련과의 관계 보증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나 굴라크 열도처럼 명시적으로 반소련적인 영화나 작품은 공공 및 비공식적인 검열을 받았지만, 정치적 자유는 다른 방식으로 강제 제한되지 않았다.
소련은 핀란드를 중립국이 아닌 "중립국 지향" 국가로 여겼다. 케코넨은 핀란드 내정에 대한 주권을 대체로 유지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같은 국제 문제에서 핀란드의 입장은 종종 모호하거나 소련에 우호적이었다. 1977년 아에로플로트 투폴레프 Tu-134 납치 사건에서 소련 대사가 정부 회의에 난입한 것은 핀란드 정부가 소련 간섭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4] 케코넨은 정규 외교 채널 대신 KGB 지부장을 통해 소련과 소통했다. 소련은 핀란드 공산당[5]과 핀란드 중앙당의 케코넨 지지파 ''K-linja'' 등 다른 정당 내 소련 우호적 인맥을 통해 핀란드 정치에 개입했다.
소련군은 전쟁 시 탈린에서 헬싱키를 침공하기 위한 별도 부대를 대기시켰다.[6] 이 계획은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후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에 의해 남겨질 때까지 최신 상태로 유지되었다.
이 정책은 서방 세계에서 거의 존중받지 못했다. 서방 외교 정책 관계자들과 군사 요원들은 이 정책을 모르거나 처음부터 실패했다고 추정했다. 영국 군 장교들은 핀란드에 소련군이 얼마나 주둔하는지 질문했고,[4] 핵무기는 핀란드 목표물을 향해 조준되었으며,[6] 소련 침공에 대한 핀란드 저항은 실패할 것이라는 가정이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반공주의적인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자금을 지원하여 핀란드 정부와 서방 정보기관 간 은밀한 협력이 있었다. 이 당은 주요 정당이자 종종 정부를 이끌었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친소련적으로 바뀌었고, 많은 급진 좌파가 다른 정당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SIGINT 비행을 통해 소련 레이더 네트워크를 탐색하고 소련 핵실험 감지를 위한 지진 데이터를 제공하는 등 군사 정보 협력도 있었다.
4. 1. 당대의 비판
당대 핀란드인들은 파시키비-케코넨 원칙이 우호적 관계의 "전례"가 되는 경향을 비판하곤 했다. 양국은 모두 군사적으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교역은 쌍변무역의 형태로 활발했다. 또한 이 외교원칙이 케코넨 대통령 개인과 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비판 대상이었다. 케코넨은 자신이 "소련과의 관계를 담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이용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압했다. 정치적 자유는 그렇게 억압적으로 제한당하지는 않았지만, 표현의 자유 면에서는 반소적인 내용이 노골적인 작품들(예: 1962년 영화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 전면적인 검열이 가해졌다.[9]후대에 이루어진 비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주로 핀란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련은 핀란드의 의사를 제대로 존중할 의사가 없었다는 요지에서 이루어지는 비판들이다.
- 소련은 핀란드를 중립국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중립하려고 노력하는 국가"라고 여겼다. 케코넨은 소련이 핀란드의 대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성공적으로 차단했지만,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같은 국제 문제에 있어서는 애매하거나 친소적인 입장을 취해야 했다. 1977년 소련 여객기 하이잭 사건은 이것을 더욱 예증한다. 이 사건에서 소련 대사가 핀란드 내각을 휘저으며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핀란드의 소련 개입 차단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4] 케코넨은 정상적인 외교 라인 대신 KGB 주재관을 통해 소련과 대화했다.
- 소련은 전쟁이 날 경우 언제라도 헬싱키로 들이닥칠 수 있도록 에스토니아 탈린에 별개의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 파시키비-케코넨 외교 정책은 서방권에 대해서는 거의 배려를 하지 못했다. 서방권의 외교 및 군사 인사들은 이 정책을 아예 알지 못하거나, 알았을 경우 시작부터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했다.
- 서방권 정보 기관들도 핀란드에서 공작을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핀란드 사회민주당 당내 우파의 반소주의를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군사정보적 협력도 이루어졌는데, 핀란드는 서방권이 소련의 레이더망을 정찰하기 위한 SIGINT 비행을 하는 것을 허용했고, 소련의 핵실험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진파 자료를 서방권에 제공했다.
4. 2. 후대의 비판
당대 핀란드인들은 파시키비-케코넨 원칙이 우호적 관계의 "전례"가 되는 경향을 비판하곤 했다. 양국은 모두 군사적으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교역은 쌍변무역의 형태로 활발했다. 또한 이 외교원칙이 케코넨 대통령 개인과 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비판 대상이었다. 케코넨은 자신이 "소련과의 관계를 담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이용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압했다. 정치적 자유는 그렇게 억압적으로 제한당하지는 않았지만, 표현의 자유 면에서는 반소적인 내용이 노골적인 작품들(e.g. 1962년 영화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 전면적인 검열이 가해졌다.[9]후대에 이루어진 비판의 요지는, 핀란드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련은 핀란드의 의사를 제대로 존중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 소련은 핀란드를 중립국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중립하려고 노력하는 국가"라고 여겼다. 케코넨은 소련이 핀란드의 대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성공적으로 차단했지만,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같은 국제 문제에 있어서는 애매하거나 친소적인 입장을 취해야 했다. 1977년 소련 여객기 하이잭 사건에서 소련 대사가 핀란드 내각을 휘저으며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핀란드의 소련 개입 차단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케코넨은 정상적인 외교 라인 대신 KGB 주재관을 통해 소련과 대화했다. 하지만 소련은 케코넨을 통하지 않아도 핀란드 정치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소련의 지원금을 받는 핀란드 공산당이 그런 개입 경로들 중 하나였고,[10] 다른 정당들 안에도 친소파 파벌들을 두어 그들과 접촉했다. 중앙당의 케코넨 지지파인 K계파도 중앙당 당내 친소파였다고 할 수 있다.
- 소련은 전쟁이 날 경우 언제라도 헬싱키로 들이닥칠 수 있도록 에스토니아 탈린에 별개의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 핀란드 침공 계획은 언제나 개정을 거듭해 최신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이 핀란드 침공용 부대는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한 뒤에야 사라졌다.
- 파시키비-케코넨 외교 정책은 서방권에 대해서는 거의 배려를 하지 못했다. 서방권의 외교 및 군사 인사들은 이 정책을 아예 알지 못하거나, 알았을 경우 시작부터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견지에서 서방권은 핀란드가 소련의 침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핀란드를 표적으로 한 핵무기를 장전시켜 두고 있었다.
- 서방권 정보 기관들도 핀란드에서 공작을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핀란드 사회민주당 당내 우파의 반소주의를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군사정보적 협력도 이루어졌는데, 핀란드는 서방권이 소련의 레이더망을 정찰하기 위한 SIGINT 비행을 하는 것을 허용했고, 소련의 핵실험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진파 자료를 서방권에 제공했다.
5. 청산
1990년에서 1991년 사이 소련 붕괴 정국에서 핀란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핀란드는 1947년과 1948년 조약들에서 가해진 제한사항들 중 핵무기 보유 금지 조항을 제외한 다른 사항들을 모두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노르딕 국가들과 더불어 미하일 고르바초프 반대 쿠데타에 우려를 표시했다. 그리고 발트 3국의 독립을 비공식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동시에 핀란드는 소련-핀란드 상호원조조약을 일반 협력교역 조약으로 대체하면서, 러시아와 동등한 관계가 되면서도 우호는 유지하려고 했다. 현재 핀란드는 러시아로 통하는 교역로로서 자신들의 가치를 홍보하고 있다. 또 러시아에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가 잃었던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도 확실히 하면서(일부 동의하지 않는 국민들도 있으나), 양국의 우호적 관계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있다.[1]
1991년 소련 쿠데타에 대한 우려에 동참하여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발트 독립을 비공식적으로 장려했다.[1]
핀란드는 러시아에 계속 전쟁 이후 할양된 이전 핀란드 영토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지 않겠다고 안심시켰으며 (소수 의견이 있지만), 러시아-EU 관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점점 더 긴장될 때까지 좋은 양자 관계의 중요성을 계속 재확인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립 정책은 영구적으로 폐기되었다. 2022년 4월 18일, 산나 마린 총리는 여당과 야당의 지지를 받아 나토 가입을 발표했으며, 이는 2023년 4월 4일 핀란드의 나토 가입으로 이어졌다.[1]
참조
[1]
웹사이트
Finlandia, la 'crisis' que otros añoran
http://www.publico.e[...]
2016-06-04
[2]
서적
Linjamiehet: Paasikivi-seuran historia
https://finna.fi/Rec[...]
Tammi
2005
[3]
백과사전
Finland - The postwar period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2017-11-08
[4]
문서
Kylmän sodan kujanjuoksu.
[5]
웹사이트
Finland's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 1940-1986
http://www.loyno.edu[...]
2017-11-08
[6]
웹사이트
Suomen avainkohteet olivat ydinaseiden maaleina kylmän sodan aikana
https://www.is.fi/ul[...]
201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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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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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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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서
Kylmän sodan kujanjuoksu.
[10]
웹인용
Finland's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 1940-1986
http://www.loyno.edu[...]
20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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