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젠-서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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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젠-서프로이센은 1922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했던 프로이센의 주(Province)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로 편입된 지역을 제외한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일부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이 지역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대폴란드 봉기 이후 독일 영토로 남게 되었으며, 슈나이데뮐을 주도로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나치 독일 시기에는 브란덴부르크와 함께 통치되다가 1938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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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로이센은 비스툴라 강 하류와 발트 해 연안을 포괄하는 역사적 지역으로,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 왕국 병합, 폴란드 할양 등의 역사를 거쳐 현재는 폴란드에 속하며, 독일어, 폴란드어, 카슈브어 사용 인구가 공존했다.
포젠-서프로이센 | |
---|---|
일반 정보 | |
일반 명칭 |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지 |
국가 | 프로이센 |
하위 구역 |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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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슈나이데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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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시작 | 포젠 및 서프로이센에서 설립됨 |
시작 날짜 | 7월 1일 |
시작 연도 | 1920년/1922년 |
사건 1 | 브란덴부르크가 통치 |
사건 1 날짜 | 1934년 |
종료 | 브란덴부르크, 포메라니아, 실레시아로 나누어짐 |
종료 날짜 | 10월 1일 |
종료 연도 | 1938년 |
이전 국가 1 | 포젠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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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국가 2 | 서프로이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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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 국가 1 | 포메라니아주 (1815년 ~ 1945년) |
후계 국가 2 | 브란덴부르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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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 국가 3 | 실레시아주 |
통계 | |
통계 연도 | 1925년 |
면적 | 7695 |
인구 | 332,400 |
현재 위치 | |
오늘날 국가 | 폴란드 |
오늘날 지역 1 | Greater Poland |
오늘날 지역 2 | Lubusz |
오늘날 지역 3 | Pomerania |
오늘날 지역 4 | West Pomerania |
2. 명칭
상황에 따라 '''포젠-서프로이센 변경국'''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 이전까지 포젠-서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폴란드와 동포메라니아(포메라니아) 지역의 일부였다. 행정적으로는 포즈난, 그니에즈노, (1768년 이전 칼리시 보이보드십) 및 포메라니아 보이보드십의 일부였다.[1]
3. 역사적 배경
폴란드 제1차 분할(1772년)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병합된 지역에 서프로이센 주와 네체 지구를 설치했고,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 이후 남프로이센 주를 설치했다. 폴란드 제3차 분할(1795년)로 폴란드는 완전히 멸망했다.[1]
1807년 나폴레옹 전쟁 동안 이 지역은 나폴레옹의 종속국인 바르샤바 공국에 할양되었고, 단치히는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바르샤바 공국은 프로이센의 포젠 대공국, 러시아의 콩그레스 폴란드, 크라쿠프 자유시로 재분할되었다.[1]
포젠과 서프로이센은 독일 연방 밖에 있었고, 포젠은 형식적이나마 반자치 상태였다. 주민은 주로 가톨릭 교회를 믿고 폴란드어를 사용했으며, 서부 지역에는 개신교를 믿는 독일인 소수 민족이 있었다. 1848년 봉기 실패 후 포젠은 반자치 지위를 잃었고, 이후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베를린 정부의 게르만화 정책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반가톨릭 정책인 Kulturkampf|문화 투쟁de으로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1]
3. 1. 폴란드 분할과 프로이센의 지배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 이전까지 포젠-서프로이센을 구성했던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폴란드와 동 포메라니아(포메라니아) 지역의 일부였으며, 행정적으로는 포즈난, 그니에즈노, (1768년 이전 칼리시 보이보드십) 및 포메라니아 보이보드십의 일부였다.[1] 폴란드 제1차 분할(1772년)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병합된 포메라니아 및 대폴란드(그리고 쿠야비아) 지역에 각각 서프로이센 주와 네체 지구를 설치했다.[1]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 이후 남프로이센 주가 설치되었으며, 대폴란드의 나머지 부분을 포함한 다른 지역도 포함되었다.[1] 폴란드 제3차 분할(1795년)은 폴란드 국가의 존재를 완전히 종식시켰다.[1]
1807년 나폴레옹 전쟁 동안 남프로이센, 쿨머란트(서프로이센의 일부) 및 네체 지구의 일부는 새 실레시아 및 새 동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제국ru에 할양된 비아위스토크 주변 지역 제외) 나폴레옹의 종속국인 바르샤바 공국에 할양되었다.[1] 단치히 역시 서프로이센에서 분리되어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1] 프로이센 왕국에 남겨진 네체 지구의 일부는 서프로이센에 편입되었다.[1] 1815년 빈 회의 이후 바르샤바 공국은 프로이센의 포젠 대공국, 러시아의 콩그레스 폴란드 및 크라쿠프 자유시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러시아의 공동 보호령)로 재분할되었다.[1] 단치히는 서프로이센으로 반환되었다.[1] 포젠 대공국은 주로 이전 남프로이센과 네체 지구의 일부로 구성되었지만, 1807년 이전 서프로이센의 일부였던 쿨머란트도 포함했다.[1] 쿨머란트는 1817년 서프로이센으로 복귀했다.[1]
1829년 서프로이센과 동프로이센은 합병되어 프로이센 주를 형성했지만, 1878년 분리되었다.[1]
포젠과 서프로이센은 모두 독일 연방의 국경 밖에 있었으며, 포젠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반자치 상태였다.[1] 인구는 주로 가톨릭 교회 신자였고, 폴란드어를 사용했으며, 상당수의 개신교 독일 소수 민족은 주로 서부 지역에 정착했다.[1] 포젠은 실패한 1848년 대폴란드 봉기 이후 반자치 지위를 상실하고 포젠 주가 되었다.[1] 프로이센과 함께 이 지역들은 1867년 북독일 연방의 일부가 되었고,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1] 민족적 긴장은 베를린 정부의 게르만화 정책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이 제정한 반가톨릭 문화 투쟁de 조치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1]
3. 2. 나폴레옹 전쟁과 빈 회의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 이전까지 포젠-서프로이센을 구성했던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폴란드와 동 포메라니아 지역(포메라니아)의 일부였다. 1807년 나폴레옹 전쟁 동안 남프로이센, 쿨머란트(서프로이센의 일부) 및 네체 지구의 일부는 새 실레시아 및 새 동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제국]]에 할양된 비아위스토크 주변 지역 제외) 나폴레옹의 종속국인 바르샤바 공국에 할양되었다.[1] 단치히 역시 서프로이센에서 분리되어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1] 프로이센 왕국에 남겨진 네체 지구의 일부는 서프로이센에 편입되었다.[1]
나폴레옹 전쟁과 1815년 빈 회의 이후 바르샤바 공국은 프로이센의 포젠 대공국, 러시아의 콩그레스 폴란드 및 크라쿠프 자유시(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러시아의 공동 보호령)로 재분할되었다.[2] 단치히는 서프로이센으로 반환되었다.[2] 포젠 대공국은 주로 이전 남프로이센과 네체 지구의 일부로 구성되었지만, 1807년 이전 서프로이센의 일부였던 쿨머란트도 포함했다.[2] 쿨머란트는 1817년 서프로이센으로 복귀했다.[2]
3. 3. 독일 제국 시기 민족 갈등
포젠과 서프로이센 지역은 독일 연방의 국경 밖에 있었으며, 포젠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반자치 상태였다. 이 지역 인구는 가톨릭 교회 신자이고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었으며, 상당수의 개신교 독일인 소수 민족은 주로 서부 지역에 정착했다. 포젠은 1848년 대폴란드 봉기 실패 이후 반자치 지위를 상실하고 포젠 주가 되었다. 프로이센과 함께 이 지역들은 1867년 북독일 연방의 일부가 되었고,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민족적 긴장은 베를린 정부의 게르만화 정책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이 제정한 반가톨릭 Kulturkampf|문화 투쟁de 조치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4]
4.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의 성립과 발전
상황에 따라 '포젠-서프로이센 변경국'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1918년 대폴란드 봉기가 일어나면서, 프로이센에 병합되었던 지역이 폴란드 국가에 편입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로 인해 독일 행정부는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작은 서부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1922년 7월 1일 독일 ''오스트마르크'' 법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남은 지역에서 주가 창설되었다.
이후 남은 독일인들은 강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였고,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이 주 선거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프리드리히 폰 뷜로가 1933년 은퇴할 때까지 ''Oberpräsident''로 재임했고, 이후 한스 폰 마이봄, 빌헬름 쿠베, 에밀 슈튀르츠 등이 이 직책을 이어받았다. 포젠-서프로이센은 1938년 해산될 때까지 존속했으며, 그 영토는 인접한 슐레지엔,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로 분할되었다.
4. 1.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1918년에 대폴란드 봉기가 다시 일어났다. 이 봉기는 프로이센에 의해 병합되었던 지역을 재건된 폴란드 국가에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폴란드 군사 조직의 병력은 대폴란드 지역 대부분에서 독일 행정부를 몰아낼 수 있었고, 그 후 포젠 주지사(''Landeshauptmann'') 에른스트 폰 하이킹은 메제리츠로 퇴각해야 했다. 사실상 인접한 프로이센의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과의 국경에 있는 서쪽 지역, 주로 독일인이 정착한 지역만 통치했다.
독일군은 여러 ''자유군단'' 부대로 재편성되었고, 분계선이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통치의 기초가 되면서 폴란드군의 점령 지역은 제2 폴란드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독일 행정부의 정부 권력은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작은 서부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프로이센 주 정부는 이전 브롬베르크 감독관(''Regierungspräsident'') 프리드리히 폰 뷜로가 대표했으며, 그는 행정 본부를 슈나이데뮐로 이전했다. 1922년 7월 1일 독일 ''오스트마르크'' 법이 발효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남은 이전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작은 서부 지역에서 주가 창설되었다.
4. 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1918년에 대폴란드 봉기가 다시 일어났다. 이 봉기는 프로이센에 의해 병합되었던 지역을 재건된 폴란드 국가에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폴란드 군사 조직의 병력은 대폴란드 지역 대부분에서 독일 행정부를 몰아낼 수 있었고, 그 후 포젠 주지사(''Landeshauptmann'') 에른스트 폰 하이킹은 메제리츠로 퇴각해야 했다. 사실상 인접한 프로이센의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과의 국경에 있는 서쪽 지역, 주로 독일인이 정착한 지역만 통치했다.
독일군은 여러 ''자유군단'' 부대로 재편성되었고, 분계선이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통치의 기초가 되면서 폴란드군의 점령 지역은 제2 폴란드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독일 행정부의 정부 권력은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작은 서부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프로이센 주 정부는 이전 브롬베르크 감독관(''Regierungspräsident'') 프리드리히 폰 뷜로가 대표했으며, 그는 행정 본부를 슈나이데뮐로 이전했다. 1922년 7월 1일 독일 ''오스트마르크'' 법이 발효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남은 이전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작은 서부 지역에서 주가 창설되었다.
이전의 무력 충돌과 "잃어버린" 영토를 고려할 때, 남은 독일인들은 처음부터 강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였고, 민족 보수적인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이 주 선거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국가 자유주의적인 독일 인민당의 구성원이었던 프리드리히 폰 뷜로는 1933년 은퇴할 때까지 ''Oberpräsident''로 남아 있었고, 그 후 메제리츠 DNVP 정치인 한스 폰 마이봄이 그의 뒤를 이었다. DNVP가 나치 ''Gleichschaltung'' 과정에서 해산된 후, 폰 마이봄은 권력을 잃고 인접한 브란덴부르크의 나치 ''Oberpräsident''인 빌헬름 쿠베로 교체되었다. 부패로 악명 높았던 쿠베는 강력한 마틴 보어만의 장인인 나치 법학자 발터 부흐와 갈등을 겪은 후 해임될 때까지 두 주를 통치했다. 포젠-서프로이센은 1938년 해산될 때까지 나치 ''Oberpräsident'' 에밀 슈튀르츠 아래 브란덴부르크와 함께 통치되었으며, 그 영토는 인접한 슐레지엔, 포메라니아 및 브란덴부르크 주로 분할되었다.
4. 3. 나치 독일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1918년에 대폴란드 봉기가 다시 일어났다. 이 봉기는 프로이센에 의해 병합되었던 지역을 재건된 폴란드 국가에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폴란드 군사 조직의 병력은 대폴란드 지역 대부분에서 독일 행정부를 몰아낼 수 있었고, 그 후 포젠 주지사(''Landeshauptmann'') 에른스트 폰 하이킹은 메제리츠로 퇴각해야 했다. 사실상 인접한 프로이센의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과의 국경에 있는 서쪽 지역, 주로 독일인이 정착한 지역만 통치했다.독일군은 여러 ''자유군단'' 부대로 재편성되었고, 분계선이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통치의 기초가 되면서 폴란드군의 점령 지역은 제2 폴란드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독일 행정부의 정부 권력은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작은 서부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프로이센 주 정부는 이전 브롬베르크 감독관(''Regierungspräsident'') 프리드리히 폰 뷜로가 대표했으며, 그는 행정 본부를 슈나이데뮐로 이전했다. 1922년 7월 1일 독일 ''오스트마르크'' 법이 발효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남은 이전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작은 서부 지역에서 주가 창설되었다.
이전의 무력 충돌과 "잃어버린" 영토를 고려할 때, 남은 독일인들은 처음부터 강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였고, 민족 보수적인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이 주 선거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국가 자유주의적인 독일 인민당의 구성원이었던 프리드리히 폰 뷜로는 1933년 은퇴할 때까지 ''Oberpräsident''로 남아 있었고, 그 후 메제리츠 DNVP 정치인 한스 폰 마이봄이 그의 뒤를 이었다. DNVP가 나치 ''Gleichschaltung'' 과정에서 해산된 후, 폰 마이봄은 권력을 잃고 인접한 브란덴부르크의 나치 ''Oberpräsident''인 빌헬름 쿠베로 교체되었다. 부패로 악명 높았던 쿠베는 강력한 마틴 보어만의 장인인 나치 법학자 발터 부흐와 갈등을 겪은 후 해임될 때까지 두 주를 통치했다. 포젠-서프로이센은 1938년 해산될 때까지 나치 ''Oberpräsident'' 에밀 슈튀르츠 아래 브란덴부르크와 함께 통치되었으며, 그 영토는 인접한 슐레지엔, 포메라니아 및 브란덴부르크 주로 분할되었다.
5. 행정 구역
이름과는 달리 포즈난(Poznań)은 이 지역에 속하지 않았는데, 이는 재건된 제2 폴란드 공화국의 포즈난 주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포젠-서프로이센 주의 수도이자 Oberpräsident|오버프레지덴트de 감독관의 소재지는 슈나이데뮐(Schneidemühl)이었다. 주의 Landeshauptmann|란데스하우프트만de은 Landtag|란트타크de 의회에서 선출되었으며, 소재지는 메제리츠(Meseritz)에 남았다.
5. 1. 슈나이데뮐 감독관
이름과는 달리 포즈난(Poznań)은 이 지역에 속하지 않았는데, 이는 재건된 제2 폴란드 공화국의 포즈난 주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포젠-서프로이센 주의 수도이자 Oberpräsident|오버프레지덴트de 감독관의 소재지는 슈나이데뮐(피와)이었다. 주의 Landeshauptmann|란데스하우프트만de은 Landtag|란트타크de 의회에서 선출되었으며, 소재지는 메제리츠(미엔지제치)에 남았다.
5. 1. 1. 도시 행정 구역
이름과는 달리 포즈난(Poznań)은 더 이상 이 지역에 속하지 않았는데, 이는 재건된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대폴란드 포즈난 주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포젠-서프로이센'' 주의 수도이자 Oberpräsident|오버프레지덴트de 감독관의 소재지는 슈나이데뮐(Schneidemühl)이었다. 주의 Landeshauptmann|란데스하우프트만de은 Landtag|란트타크de 의회에서 선출되었으며, 소재지는 메제리츠(Meseritz)에 남았다.
5. 1. 2. 지방 행정 구역
이름과는 달리 포즈난(Poznań)시는 더 이상 이 지역에 속하지 않았는데, 이는 재건된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대폴란드 포즈난 주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포젠-서프로이센'' 주의 수도이자 Oberpräsident|오버프레지덴트de 감독관의 소재지는 슈나이데뮐(피와)이었다. 주의 Landeshauptmann|란데스하우프트만de은 Landtag|란트타크de 의회에서 선출되었으며, 소재지는 메제리츠(미엔지제치)에 남았다.
- 이전 포젠
- '''도시 행정 구역 (Stadtkreis|슈타트크라이스de)'''
- 슈나이뎀뮐 (이전 브롬베르크 지역)
- '''지방 행정 구역 (Landkreise|크라이제de)'''
- 봄스트 (이전 포젠 지역), 소재지 봄스트 (현재 바비모스트)
- 프라우슈타트 (이전 포젠 지역), 소재지 프라우슈타트 (현재 브슈호바)
- 메제리츠 (이전 포젠 지역), 소재지 메제리츠 (현재 미엔지제치)
- 네체크군 (이전 차르니카우군, 필레네군 및 콜마르군의 일부, 브롬베르크 지역), 소재지 쇤랑케 (현재 트르치안카)
- 슈베린 안 데어 바르테 (이전 포젠 지역), 소재지 슈베린 안 데어 바르테 (현재 스크비에르지나)
- 이전 서프로이센
- '''지방 행정 구역 (Kreise|크라이제de)'''
- 도이치크로네 (이전 마리엔베르더 지역), 소재지 도이치크로네 (현재 바우치)
- 플라토프 (이전 마리엔베르더 지역), 소재지 플라토프 (현재 즈워투프)
- 슐로하우 (이전 마리엔베르더 지역), 소재지 슐로하우 (현재 츠워후프)
6. 정치
프로이센 주 정부가 임명한 Oberpräsidentde(상임 대통령)은 주 차원에서 중앙 권한을 수행하고 하위 행정 수준에서 중앙 정책의 시행을 감독해야 했다.
주 차원의 공통 관심사(학교, 교통 시설, 병원, 문화 기관, 위생 시설, 감옥 등)와 관련하여, 각 주 내(때로는 각 정부 관할 구역 내)의 도시 및 농촌 구(''Kreise'')는 공동 자산을 가진 법인, 즉 Provinzialverbandde(지방 협회)를 형성했다. (정부 관할 구역 또는 더 작은 경우에는 Bezirksverbandde 또는 Kommunalverbandde, 즉 시 또는 지역 협회) 1875년부터 모든 주는 한편으로는 중앙 프로이센 권한에 기반을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 전체 또는 지역 전체의 자치 통치를 위한 상향식 법인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도시 및 농촌 구의 의회가 지방 의회(Provinziallandtagede; 지역 의회의 경우 Kommunallandtagede)의 대표를 간접 선출했다.
프로이센 군주제 종식 후, 1921년과 1922년에 최초로 주(또는 각 지역) 시민에 의해 지방 또는 지역 의회가 직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 의회는 지방 또는 지역 협회에 이관된 권한 내에서 입법을 했다. 새로운 주가 공식적으로 설립되기 전, 농촌 및 도시 구 의회는 Kommunallandtagde 포젠-서프로이센의 대표를 선출했으며, 이는 이전 포젠 및 서프로이센 지방 협회의 권한과 미래 포젠-서프로이센 영토 내의 시설 내에서 입법을 수행했다. 주가 공식적으로 형성된 후, 의회는 포젠-서프로이센의 지방 의회로 불렸으며, 지방 집행 기관(정부), 지방 위원회(Provinzialausschussde), 그리고 주의 수장인 Landeshauptmannde(주 지사)를 선출했다.[2]
6. 1. 역대 상임 대통령
재임 기간 | 이름 | 정당 | 비고 |
---|---|---|---|
1922년–1933년 | 프리드리히 폰 뷜로 | DVP | |
1933년–1934년 | 한스 폰 마이봄 | DNVP | |
1934년–1936년 | 빌헬름 쿠베 | NSDAP | 대행, 브란덴부르크 Oberpräsident|오버프레지덴트de |
1936년–1938년 | 에밀 슈튀르츠 | NSDAP | 브란덴부르크 Oberpräsident|오버프레지덴트de |
6. 2. 역대 주 지사
- 1922년–1933년: 요하네스 카스파리 (SPD)[1]
- 1933년–1938년: 헤르만 피빙 (NSDAP)[1]
7. 인구
연도 | 인구 | 비고 |
---|---|---|
1910년 | 309,200명 | 이후 이 지역의 일부가 된 지역 기준 |
1919년 | 326,900명 | |
1925년 | 332,400명 | |
1933년 | 470,600명 |
8. 폴란드인 소수 민족
베르사유 조약이 발효된 후, 지역 폴란드 소수 민족의 일부는 폴란드로 이주했다. 1925년에는 13,284명이 자신을 폴란드어를 사용하거나 독일어/폴란드어를 이중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이는 인구의 4.3%에 해당한다.[3] 바이마르 공화국의 모든 주 및 국회 선거에서 폴란드-가톨릭 인민당의 득표율은 약 3%로 안정적이었다.[3] 폴란드 소수 민족의 정착 중심지는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다.[3] 192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봄스트 (20.6%), 플라토프 (16.8%), 메제리츠 (5.8%) 지역에서 폴란드어 사용 인구(이중 언어 사용 포함)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3] 폴란드 소수 민족의 특별한 업적은 폴란드 사립 학교 네트워크를 설립한 것이다.[3]
참조
[1]
서적
Pommern
Siedler
1999
[2]
간행물
Der Große Brockhaus: Handbuch des Wissens in zwanzig Bänden
1928-1935
[3]
웹사이트
De Gruyter
https://www.degruyte[...]
2021-03-14
[4]
서적
Pommern
Siedler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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