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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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프로이센은 발트해 연안에 위치했던 역사적 지역으로, 13세기 튜턴 기사단이 프로이센인을 정복한 후 프로이센 공국으로 시작되었다. 1701년 프로이센 왕국에 편입되었고,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본토와 분리된 월경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로 분할되었다. 현재 북부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주, 남부는 폴란드의 바르미아-마주리주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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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로이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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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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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동프로이센 |
로마자 표기 | Oseuteupeuroiseun |
소속 | 프로이센 |
존속 기간 | 1772년–1829년, 1878년–1945년 |
건립 | 설립 (1772년 1월 31일) |
해체 | 해체 (1945년 8월 1일) |
수도 | 쾨니히스베르크 |
주요 사건 1 | 프로이센 주로 통합 (1829년 12월 3일) |
주요 사건 2 | 프로이센 주에서 분리, 자치주 복원 (1878년 4월 1일) |
이전 국가 | 프로이센 공국 |
후신 국가 1 | 클라이페다 지역 |
후신 국가 2 | 마리엔베르더 (지역) |
후신 국가 3 | 폴란드 제2공화국 |
후신 국가 4 | 국민 통합 임시 정부 |
후신 국가 5 | 소비에트 연방 |
면적 | 36,993km² (1905년 기준) |
인구 | 2,030,174명 (1905년 기준) |
정치 구역 | 굼비넨 쾨니히스베르크 알렌슈타인 (1905년부터) 서프로이센 (1922년–1939년) 지헤나우 (1939년부터) |
현재 국가 |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
국가 | "동프로이센의 노래" (1930년—1945년) |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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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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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통계 | |
1905년 인구 | 2,025,741명 |
1939년 인구 | 2,490,000명 |
1939년 면적 | 37,047km² |
1939년 인구 밀도 | 54.1명/km² |
2. 역사
동프로이센은 역사적으로 복잡한 변천 과정을 겪었다.
원래 이 지역에는 발트인의 한 갈래인 프로이센인이 살고 있었다. 튜턴 기사단이 프로이센인을 몰아내고 프로이센 공국을 건국했고, 1701년부터 프로이센 왕국에 속했다. 1773년 프로이센 왕국의 주(州)인 오스트프로이센 주가 되었다. 1829년부터 1878년까지는 이웃 베스트프로이센(서프로이센)과 합쳐져 프로이센 주를 이루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서프로이센 지역이 폴란드 회랑으로 되어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됨에 따라, 오스트프로이센은 독일 본토와 분리된 월경지가 되었다. 북부의 메멜란트 지역이 1923년 리투아니아에 강제 점령되어 제외되었지만, 전쟁 전 베스트프로이센(서프로이센)에 속했던 마리엔베르더, 엘빙 등의 지역이 오스트프로이센에 속하게 되어 '서프로이센 관구'를 이루었다.[16][17][18]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개신교를 믿는 폴란드 사람들(Mazurzy)이 오스트프로이센과 베스트프로이센에 많이 살았는데, 국제 연맹은 이 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이 많이 사는 곳을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귀속시킬지 여부에 대해 주민 투표를 벌였다. 그 결과 주민 대부분이 독일에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리투아니아가 1923년에 행한 메멜란트 점령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리투아니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어 메멜란트를 반환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1945년 동프로이센은 북부는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SFSR 칼리닌그라드주), 남부는 폴란드 영토로 분할되었다. 동프로이센에 살던 독일인 주민은 대부분 추방당했고, 메멜란트는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소련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 어느 정도 복구하였다.
2. 1. 고대 ~ 중세
원래 이 지역에는 발트인의 한 갈래인 프로이센인이 살고 있었다. 13세기, 독일 기사단이 프로이센인을 정복하고 튜턴 기사단 국가를 건설하였다.[68] 독일인들의 동방 식민 운동으로 독일계 주민이 증가하였다. 프레골랴 강 어귀의 항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프로이센)(한자 동맹 도시)는 호박 등 유역의 물자를 집산하여 발트해를 통해 교역하는 이 지역의 중심 도시로 번영하였다.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의 부추김으로, 튜턴 기사단은 13세기에 프로이센을 점령하고 정복한 구 프로이센인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도원 국가를 건설하였다.[6] 지역 구 프로이센어(북부)와 폴란드어(남부) 지명은 점차 독일어화되었다. 독일인 인구가 대다수가 되면서 수 세기 동안 프러시아인들은 독일화되었고, 소수 민족으로는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이 있었다.
독일 기사단은 마리엔부르크에 마리엔부르크 성을 짓고 본거지를 삼았다. 농민과 슬라브인들은 종종 독일 기사단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합군이 튜턴 기사단을 패배시켰다. 1440년 반 튜턴 기사단 프로이센 동맹이 설립되었고, 이 지역의 여러 도시와 귀족들이 동맹에 가입하였다.[6] 1454년 동맹의 요청에 따라 카지미에시 4세 국왕은 이 지역 전체를 폴란드에 편입시키는 법령에 서명하였다.[7]

튜턴 기사단의 패배는 1466년 13년 전쟁을 끝낸 토룬 제2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 폴란드에 대한 포메라니아/포메렐리아의 회복이 확인되었고, 바르미아도 폴란드의 일부로 확인되었으며,[8] 둘 다 더 큰 폴란드 지역인 왕립 프로이센과 대폴란드를 구성하였다. 역사적인 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도 튜턴 기사단이 보유한 봉토이자 보호령으로서 "하나이고 불가분적인" 폴란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9]
1525년, 독일 기사단장이자 호엔촐레른가의 알브레히트는 개신교로 개종하고, 세속의 "프로이센 공"이 되어 독일 기사단 국가의 동프로이센에 프로이센 공국을 건설하였다. 1569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들은 알브레히트의 아들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618년 프로이센의 관리자였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가 사망했다. 막시밀리안이 죽자 알브레히트의 계보가 단절되었고,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넘어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형성했다. 1655년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을 이용하여 폴란드 왕국에 대한 봉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스웨덴과 연합하고 베흘라우 조약, 라비아우 조약, 올리바 조약 등 후속 조약을 통해, 선제후이자 공작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60년 폴란드 국왕의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주권을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2. 2. 프로이센 공국 시대
1525년, 튜턴 기사단장 알브레히트가 개신교로 개종하고 튜턴 기사단의 프로이센 지부를 세속화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을 건국하였다.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공작이 되었으며, 프로이센의 충성 서약에 따라 폴란드 왕관의 봉신이 되었다.[9]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들은 1569년 정신적으로 허약한 알브레히트의 아들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618년 프로이센의 관리자이자 튜턴 기사단 대장관이었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가 사망하면서 알브레히트의 계보가 단절되었고,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넘어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형성했다. 1655년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을 이용하여 폴란드 왕국에 대한 봉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스웨덴과 연합하고 베흘라우 조약, 라비아우 조약, 올리바 조약 등 후속 조약을 통해, 선제후이자 공작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60년 폴란드 국왕의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주권을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쾨니히스베르크(Królewiec|크루레비에츠pl)에서 폴란드로부터의 지역 분리를 강하게 반대했다.[10] 도시의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에서 연합이 결성되었으나,[10]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그의 군대는 도시에 진입하여 도시의 반 선제후 반대파 지도자인 히에로니무스 로트를 납치하고 투옥했다.[10] 절대주의적 선제후는 프로이센의 귀족 계층도 진압했다.
2. 3. 프로이센 왕국 시대
166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올리바 조약 등의 조약을 통해 동프로이센을 폴란드 왕국의 종주권에서 해방시켰다.[10] 쾨니히스베르크(폴란드어: Królewiec)에서는 폴란드로부터의 분리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10]1701년, 대선제후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여, 프로이센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다. 호엔촐레른가의 주요 영토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지만, 동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범위 밖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신하인 선제후도 왕이 될 수 있었다.
1709년~1711년의 대북방 전쟁 전염병 발생과 기근으로 동프로이센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했으며,[11] 구 프로이센어 사용자들도 이때 마지막으로 사망했다.[12]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동프로이센 재건을 이끌었다. 1724년 폴란드인, 자모기티아인 및 유대인이 소 리투아니아에 정착하는 것을 금지하고, 지역의 민족 구성을 바꾸기 위해 독일 식민지를 시작했다.[13] 잘츠부르크 대주교구에서 추방된 프로테스탄트들이 동프로이센에 정착했다.
1772년, 프리드리히 2세는 제1차 폴란드 분할에서 서프로이센을 병합하여 브란덴부르크와 동프로이센을 연결했다. 이듬해 동프로이센 주(1773년 – 1829년)와 서프로이센 주로 변경했다. 또한, 가톨릭 인구가 많은 왕령 프로이센의 속령인 바르미아가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었다.
1829년, 동프로이센 주와 서프로이센 주가 합병하여 프로이센 주(1829년 - 1878년)가 되었다.
2. 4. 독일 제국 시대
1871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다른 지역들과 함께 동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67] 1878년 4월 1일, 프로이센 주는 동프로이센 주와 서프로이센 주로 다시 분리되었다.[67]1885년부터 1890년까지 베를린의 인구는 20% 증가했고, 브란덴부르크와 라인란트는 8.5%, 베스트팔렌은 10% 증가한 반면, 동프로이센은 0.07% 감소했고 서프로이센은 0.86% 감소했다. 이는 동프로이센 시골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루르 지역과 베를린의 확장되는 산업 중심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오스트플루흐트」 참조).
1900년 이 주의 인구는 1,996,626명이었으며, 종교 구성은 개신교 1,698,465명, 로마 가톨릭 269,196명, 유대인 13,877명이었다. 하프로이센 방언이 동프로이센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바르미아에서는 고프로이센이 사용되었다. 마주르인, 쿠르셰니키,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의 수는 독일화 과정으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했다.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이 주의 남부(마주리아와 바르미아)에 집중되어 있었고, 20세기 초 모든 독일 지리 아틀라스는 동프로이센의 남부를 폴란드어 사용 지역으로 표시했으며 당시 폴란드어 사용자 수는 300,000명으로 추산되었다.[15] 쿠르셰니키는 쿠르슈 해협 주변 지역에 거주했으며,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하는 프로이센인은 북동쪽(리투아니아 미노르)에 집중되어 있었다. 옛 프로이센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독일화되었고 옛 프로이센어는 18세기에 사라졌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참전하면서 동프로이센은 전쟁터가 되었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제국 독일군의 대부분이 서부 전선으로 향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군은 초기에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라스텐부르크와 굼비넨을 점령하는 등 초기 성공을 거두었으나,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와 1915년 마주리 호수 제2차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후퇴했다. 이후 독일군은 러시아 영토로 진격했다.
러시아군의 첫 번째 침략 이후, 대다수의 민간인은 서쪽으로 피난했고, 수천 명의 민간인이 러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양측 군대의 민간인에 대한 처우는 대체로 질서정연했지만, 아프슈방겐 학살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7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이 지역은 재건축되어야 했다.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친정을 시작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그 결과, 주변국과의 마찰을 빚어 비스마르크 체제를 붕괴시키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침략해 온 러시아군에 대해 독일군이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했다. 독일은 전선을 동프로이센 밖으로 밀어냈지만, 동프로이센의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복구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67]
2. 5.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프로이센은 러시아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전쟁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서프로이센 지역이 폴란드 회랑으로 되어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됨에 따라, 동프로이센은 독일 본토와 분리된 외지가 되었다. 북부의 메멜란트 지역은 1923년에 리투아니아에게 강제 점령되어 제외되었지만, 전쟁 전 서프로이센에 속했던 마리엔베르더, 엘빙 등의 지역이 동프로이센에 속하게 되어 ''서프로이센 관구''(管區)를 이루었다.[16][17][18]1918년-1919년 독일 혁명으로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하고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동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자유주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소련 전쟁 중 폴란드 제2공화국이 패배 직전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1920년 7월 11일 동서프로이센과 남동프로이센에서 동프로이센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는 해당 지역이 폴란드에 합류할지, 아니면 바이마르 독일 동프로이센 주에 남을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투표 결과, 96.7%의 주민들이 독일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67]
1923년,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지역이었던 클라이페다 영토(메멜란트)는 리투아니아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주민 투표 없이 리투아니아에 강제 병합되었다.
동프로이센 | 1910년 면적 (km2) | 영토 비율 | 1910년 인구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편입 지역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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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당 지역: | 37,002 km2 | 100% | 2,064,175 | 다음 지역으로 분할됨: | |
폴란드 | 565 km2 | 2% | 2% | 포메라니아 주 (Działdowo 지역) | 1918년 이전 Nidzica 군과 Działdowo를 포함하여 약 2만 7천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지역의 일부; Ostróda 군의 일부 지역(Dąbrówno 근처), Groszki, Lubstynek, Napromek, Czerlin, Lewałd Wielki, Grzybiny 주변 지역(약 4786명 거주). 자체 주를 형성하기에는 너무 작아서, 이 지역은 전간기 포메라니아 주에 편입되었다. |
리투아니아 | 2,828 km2 | 8% | 7% | 클라이페다 주 | |
동프로이센 | 33,609 km2 | 90% | 91% | 동프로이센 |
2. 6. 나치 독일 시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집권 이후, 동프로이센에서 반대파 정치인들은 박해받았고 신문들은 폐간되었다. 1928년부터 동프로이센 나치당을 이끌었던 에리히 코흐(Erich Koch)는 1932년부터 이 지역을 통치했다. 오토 브라운 하우스(Otto-Braun-House)는 징발되어 돌격대(SA) 본부가 되었고, 돌격대는 이곳을 이용해 반대파들을 투옥하고 고문했다. 제국 의회의 공산당 의원이었던 발터 쉬츠(Walter Schütz)는 이곳에서 살해되었다.[20] 이 시기는 지역 농업의 집단화 노력과 당 내외 비판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대응으로 특징지어졌다.[21] 그는 또한 주로 농업 지역인 이 지역의 대규모 산업화에 대한 장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21]1932년 지역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는 이미 정적들을 테러하기 시작했다. 1932년 7월 31일 밤,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사회민주당 본부인 오토 브라운 하우스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공산당 정치인 구스타프 자우프(Gustav Sauf)가 사망했고, 사회민주당 신문 ''쾨니히스베르거 폴크츠아이퉁(Königsberger Volkszeitung)''의 편집장인 오토 위르가치(Otto Wyrgatsch)와 독일 국민당(German People's Party) 정치인 막스 폰 바르펠트(Max von Bahrfeldt)가 중상을 입었다. 라익스바너 회원들이 폭행당했고, 뢰첸(Lötzen)의 라익스바너 회장인 쿠르트 코찬(Kurt Kotzan)은 1932년 8월 6일에 살해되었다.[22][23]
전쟁 전 마지막으로 치러진 경쟁 선거였던 1933년 3월 독일 연방 선거에서 동프로이센 주민들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당에 압도적인 표를 던졌다.
농지 개량 프로젝트와 도로 건설에 집중하는 공공 자금 지원 비상 구호 프로그램을 통해, 동프로이센을 위한 "에리히 코흐 계획(Erich Koch Plan)"은 이 지역을 실업에서 해방시켰다고 주장했다. 1933년 8월 16일 코흐는 히틀러에게 이 지역에서 실업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고, 이는 제국 전역에서 찬사를 받았다.[24] 사실, 에리히 코흐 계획은 나치당의 일자리 창출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발터 펑크(Walther Funk)와 국민계몽선전부(Reich Ministry of Public Enlightenment and Propaganda)가 조직한 연출된 선전 행사였고, 동프로이센은 농업 경제로 인해 이미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코흐의 산업화 계획은 라익스바우어른퓌러(Reichsbauernführer)이자 농업장관이었던 리하르트 발터 다레(Richard Walther Darré)와 갈등을 빚었다. 신파교(Neopaganist) 시골 로맨티스트였던 다레는 농업적인 동프로이센에 대한 그의 비전을 관철하고 싶어했다. 그의 "란트" 대표들이 코흐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자, 코흐는 그들을 체포했다.[25]
1938년 나치는 지역 지명의 약 3분의 1을 변경하여 프로이센 고대어는 물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 프로이센에 정착한 이주민과 난민들로부터 유래한 폴란드어 또는 리투아니아어 이름들을 제거하거나 독일화하거나 단순화했다. 가우라이터(Gauleiter)이자 오버프레지덴트(Oberpräsident)인 에리히 코흐(Erich Koch)가 발표한 법령에 따라 1938년 7월 16일까지 1,500개 이상의 지명이 변경될 것을 명령받았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시작한 일이었다.[26] 나치 독일의 통치자들과 협력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사망하거나 해방될 때까지 수감되었다.
1939년 독일의 리투아니아 최후통첩 이후, 클라이페다 지역은 다시 동프로이센에 통합되었다.
1939년, 나치 독일은 메멜 지방을 동프로이센에 병합했다. 같은 해, 폴란드가 폴란드 회랑 할양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때 동프로이센은 독일군의 출격 기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결과, 독일은 서프로이센을 사실상 지배했고, 동프로이센은 다시 독일 본토와 연결되었다.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모든 나치 독일 점령 지역에 살던 나치 독일 법령에 의해 폴란드인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폴란드 총독부로 이주했다. 독소전 개시와 함께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 교외에 "총통대본영"이 설치되었고, 히틀러는 동부 전선에 가까운 이곳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는 소련 적군이 동프로이센 공세를 펼친 1945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동프로이센 주민 260만 명(1939년 당시) 중 200만 명 이상이 독일 서부로 피난했고(:en:Evacuation of East Prussia), 남은 사람들도 전후 시베리아로 보내져 독일인 추방이 이루어졌다.
2. 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동프로이센은 소련과 폴란드에 분할되었다. 북부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으며(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SFSR 칼리닌그라드주), 남부는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47] 쾨니히스베르크는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동프로이센에 살고 있던 독일인 주민은 대부분 추방당하였다.[46]폴란드 정부 대표들은 1945년 5월 23일 동프로이센 남부의 민정을 공식적으로 인계받았다.[47] 그 후,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지역 출신 폴란드 이주민들과 남부 폴란드 출신 우크라이나인들 및 렘코인들(비스와 작전에서 추방됨)이 이 지역에 정착했으며, 처음에는 마주리 지역으로 조직되었고, 나중에 1947년 올슈틴 주로 대체되었다.
전쟁 전 주민들은 폴란드화된 독일인으로 간주되었고, 전국적으로 재폴란드화 정책이 추진되었다.[48] 이러한 "토착민" 대부분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서독으로 이주하기로 선택했다.[49] 지역 지명은 폴란드 지명 결정 위원회에 의해 폴란드식으로 바뀌었지만,[50] 대부분의 경우 역사적인 폴란드식 이름의 복원이었다.
1950년 12월 폴란드 인구 조사에서는 1939년 8월 기준 거주지를 기록하였다. 1945년 폴란드 영토가 된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전쟁 전 기준)의 1950년 인구는 다음과 같다.
1939년 국경 내 지역: | 인구 | 비율 |
---|---|---|
원주민(1939년 나치 독일 시민) | 134,702 | 15.90% |
크레스(소비에트 연방)에서 강제 이주된 폴란드인 | 172,480 | 20.36% |
소련을 제외한 해외 폴란드인 | 5,734 | 0.68% |
바르샤바에서 이주한 사람들 | 22,418 | 2.65% |
바르샤바 지역 | 158,953 | 18.76% |
비아위스토크 지역과 수드비아 | 102,634 | 12.11% |
전쟁 전 폴란드 포메라니아 | 83,921 | 9.90% |
포즈난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7,371 | 0.87% |
카토비체 지역(동상실레시아) | 2,536 | 0.30% |
우치에서 이주한 사람들 | 1,666 | 0.20% |
우치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6,919 | 0.82% |
키엘체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20,878 | 2.46% |
루블린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60,313 | 7.12% |
크라쿠프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5,515 | 0.65% |
르제슈프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47,626 | 5.62% |
1939년 거주지 불명 | 13,629 | 1.61% |
1950년 12월 총 인구 | 847,295 | 100.00% |
동프로이센의 지형은 북쪽으로 갈수록 평평해지고 남쪽으로 갈수록 구릉이 많은 완만한 평야와 작은 언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지역은 대륙성 습윤 기후를 보였는데, 특히 소리투아니아와 남부의 고지대인 마주리 지역에서 두드러졌으며, 북서쪽 해안 지방은 해양성 기후에 가까웠다.[27]
1939년 기준, 동프로이센은 4개의 관구로 나뉘어 있었다.
1950년 거주자의 80% 이상이 이 지역의 새로운 거주자였으며, 20% 미만만이 1939년에도 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었다.
1946년 4월, 동프로이센 북부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식 주가 되었고, 클라이페다 지방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쾨니히스베르크는 미하일 칼리닌을 기념하여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고, 이 지역은 칼리닌그라드주로 명명되었다. 1948년 8월 24일부터 10월 26일 사이에 총 4만 2,094명의 독일인이 이 주에서 소비에트 점령 지역(후에 동독이 됨)으로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독일인들은 1949년 11월과 1950년 1월에 떠났다.[52]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과 쿠르슈인들 또한 쿠르슈 해협 주변 지역에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동프로이센 철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적군으로부터 도망쳤지만, 남아 있던 쿠르슈인들은 이후 소련에 의해 추방되었다.
독일 인구 추방 후, 이 지역 북부에는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그리고 우크라이나인들이 정착했다. 이 지역의 소련 지역에서는 독일 역사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모든 독일 지명은 새로운 러시아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이 외딴 지역은 외국인에게 폐쇄된 군사 지역이었으며, 소비에트 시민들도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1967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명령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성의 잔해가 철거되었다.
3. 지리
북서쪽으로는 발트 해와 접해 있으며, 비스툴라 갯벌과 쿠론 갯벌은 각각 비스툴라 석호와 쿠론 석호를 발트 해와 분리하고 있다. 삼비아 반도(Samland|잠란트de)는 이 두 석호 사이에 발트 해로 돌출되어 있다. 동프로이센의 대부분의 강들은 두 석호로 흘러들었는데, 프레골랴 강(Pregel|프레겔de), 파슬렌카 강(Passarge|파사르게de), 그리고 프로흘라드나야 강(Frisching|프리슁de)은 비스툴라 석호로, 네만 강(Memel|메멜de)과 미니야 강(Minge|밍게de)은 쿠론 석호로 흘러들었다.[27]
동프로이센의 북동쪽에서는 네만 강의 왼쪽 지류인 셰슈페 강(Scheschuppe|셰슈페de)이 러시아 제국과의 경계를 이루었고, 오늘날에는 칼리닌그라드주와 리투아니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클라이페다주(Memelland|메멜란트de)는 네만 강 북쪽의 동프로이센 지역이었다. 쿠론 석호와 네만 강 하류 인근에는 광대한 부분적으로 배수된 습지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해수면 아래에 있었다.[27]
더 남쪽으로 가면 구릉이 많아지고 습지는 줄어들며 호수가 많아진다. 동쪽, 현대 폴란드-러시아 국경 근처에는 프로이센 귀족들의 유명한 사냥터였던 로민카 숲(Rominter Heide|로민터 하이데de)이 있었다. 숲의 동쪽 끝에는 비슈티티스 호(Wystiter See|비스티터 제de)가 있으며, 남쪽에는 Seesker Höhen|제스커 회엔de이 있다. 프레골랴 강의 지류인 앙그라파 강(Angerapp|앙게라프de)은 마주리 호수 지대의 북쪽 끝에 있는 맘리 호(Mauersee|마우어제de)에서 발원한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는 면적이 113.8km2인 슈니아르드비 호(Spirdingsee|슈피르딩제de)였다.[27]
프레골랴 강의 수많은 지류의 발원지는 동프로이센 남부에 있었는데, 그중 가장 긴 강인 리나 강(Alle|알레de)은 남쪽의 폴란드 의회 왕국과의 국경에 거의 이르렀고, 남부 바르미아와 이 지역 중앙부를 북쪽으로 구불구불 흘러갔다. 남쪽 지역에서는 강들이 남쪽으로 흘러 나레프 강과 비스툴라 강으로 흘러든다. 동프로이센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312m의 딜레프스카 고라(Kernsdorfer Höhe|케른스도르퍼 회에de)로, 서프로이센과의 국경 근처 남서부에 위치해 있었다.[27]
4. 행정구역
관구 소재지 면적 (km2) 시 군 쾨니히스베르크 관구 쾨니히스베르크 13,147 1 13 굼빈넨 관구 굼빈넨 9,397 2 10 알렌슈타인 관구 알렌슈타인 11,547 1 9 서프로이센 관구 마리엔베르더 2,956 1 5
각 관구는 여러 개의 시와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자세한 내용은 각 관구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4. 1. 쾨니히스베르크 관구
쾨니히스베르크 관구의 주도는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칼리닌그라드)였다. 쾨니히스베르크 시는 1946년에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시군 | 문장 | 소재지 | 비고 |
---|---|---|---|
쾨니히스베르크 시 Königsberg (Stadt) | ![]() | 주도(州都)이자 관구청 소재지 | |
잠란트 군 Landkreis Samland | 피쉬하우젠 Fischhausen | 필라우, 크란츠, 노이쿠렌, 라우셴 등의 소읍이 있었음 | |
라비아우 군 Kreis Labiau | 라비아우 | ||
벨라우 군 Kreis Wehlau | 벨라우 | ||
하일리겐바일 군 Kreis Heiligenbeil | ![]() | 하일리겐바일 | |
프로이시쉬 아일라우 군 Kreis Preußisch Eylau | 프로이시쉬 아일라우 | ||
바르텐슈타인 군 Landkreis Bartenstein (Ostpr.) | ![]() | 바르텐슈타인 | 1927년까지는 프리틀란트 군(Kreis Friedland) |
게르다우엔 군 Kreis Gerdauen | ![]() | 게르다우엔 | |
라스텐부르크 군 Kreis Rastenburg | 라스텐부르크 | 괴를리츠 마을에 히틀러의 본부인 볼프샨체가 있었음 | |
하일스베르크 군 Kreis Heilsberg | 하일스베르크 | ||
브라운스베르크 군 Kreis Braunsberg | 브라운스베르크 | ||
프로이시쉬 홀란트 군 Kreis Preußisch Holland | 프로이시쉬 홀란트 | ||
모룽겐 군 Kreis Mohrungen | ![]() | 모룽겐 |
700년 역사 동안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적이 없던 중세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1944년 영국 왕립 공군 폭격 사령부의 두 차례 공습으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첫 번째 공습은 1944년 8월 26일/27일 밤에, 두 번째 공습은 사흘 후인 8월 29일/30일 밤에 이루어졌다. 윈스턴 처칠은 잘못된 정보로 "현대화된 방어가 철저한 요새"라고 믿고 파괴를 명령했다.
가우라이터 에리히 코흐는 1944년 동부 전선이 동프로이센 국경에 접근할 때까지 독일 민간인의 탈출을 지연시켰다. ''최종 승리'' 나치 선전은 군사 상황의 실제 상태에 대해 체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서쪽으로 피난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후퇴하는 베어마흐트 부대와 빠르게 진격하는 붉은 군대에게 따라잡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1944년 10월 네머스도르프 학살과 조직적인 강간에 대한 소식은 민간인들에게 공포와 절망을 불러일으켰다. 탈출 선박인 ''빌헬름 구스트로프'', ''고야'', ''제너럴 폰 슈테우벤''이 (소련 잠수함에 의해) 침몰하면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4월 9일, 4일간의 치열한 쾨니히스베르크 전투 이후 쾨니히스베르크는 항복했다. 전시 폭격, 주 방어를 위한 전투, 붉은 군대의 학대, 기아, 추위, 질병으로 인해 약 3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5]
그러나 당시 주로 여성, 어린이, 노인으로 구성되었던 독일 주민 대부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탈출의 일부로 붉은 군대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 "1940년 220만 명이었던 인구는 1945년 5월 말 19만 3천 명으로 감소했습니다."[43][44]
4. 2. 굼빈넨 관구
관구청 소재지는 굼빈넨(현재의 구세프)이었다.시군 | 문장 | 소재지 | 비고 |
---|---|---|---|
굼빈넨 군 Kreis Gumbinnen | 굼빈넨 | 굼빈넨이 관구청 소재지. | |
인스터부르크 시 Insterburg (Stadt) | 1902년에 인스터부르크 군에서 분리, 시 승격 | ||
인스터부르크 군 Landkreis Tilsit | 인스터부르크 시 | ||
틸지트 시 Stadt Tilsit | 1896년 틸지트 군에서 분리, 시 승격 | ||
틸지트-라그니트 군 Landkreis Tilsit-Ragnit | 라그니트 Ragnit | 1922년 틸지트 군과 라그니트 군이 합병되어 성립 | |
아이니히더룽 군 Landkreis Elchniederung | ![]() | 하인리히스발데 Heinrichswalde | 1938년까지는 니더룽 군 |
필칼렌 군 Kreis Pillkallen | 필칼렌 | 1938~45년 사이에는 슐로스베르크(군). 시르빈트는 1945년까지 독일 최동단 마을이었음. | |
에벤로데 군 Landkreis Ebenrode | 에벤로데 | 1938년까지는 스탈루푀넨(Stallupönen). | |
안게라프 군 Landkreis Angerapp | ![]() | 안게라프 | 1938년까지는 다르케멘(Darkehmen). |
안게르부르크 군 Kreis Angerburg | ![]() | 안게르부르크 | |
골다프 군 Kreis Goldap | 골다프 | 로민터 숲(Rominter Heide)이 위치함. | |
올레츠코 군 Kreis Oletzko | 올레츠코 | 1939~45년 사이 트로이베르크(Treuburg). | |
4. 3. 알렌슈타인 관구
관구청 소재지는 알렌슈타인이었다.[47]시군 | 문장 | 소재지 | 비고 |
---|---|---|---|
알렌슈타인 시 Allenstein (Stadt) | 알렌슈타인 | 관구청 소재지. 1910년 알렌슈타인 군에서 분리, 시 승격 | |
알렌슈타인 군 Landkreis Allenstein | ![]() | 알렌슈타인 시 | |
오스터로데 군 Kreis Osterode | 오스터로데 | ||
나이덴부르크 군 Kreis Neidenburg | ![]() | 나이덴부르크 | |
뢰셀 군 Kreis Rößel | 비쇼프스부르크 Bischofsburg | ||
오르텔스부르크 군 Kreis Ortelsburg | 오르텔스부르크 | ||
젠스부르크 군 Kreis Sensburg | 젠스부르크 | ||
뢰첸 군 Kreis Lötzen | 뢰첸 | ||
요하니스부르크 군 Kreis Johannisburg | 요하니스부르크 | ||
리크 군 Kreis Lyck | 리크 |
4. 4. 서프로이센 관구
관구청 소재지는 마리엔베르더(현재의 크비드진)였다.[74] 1939년 5월 17일 당시 면적은 2927.21km2, 인구는 301,808명이었다.
시군 | 문장 | 소재지 | 면적[74] | 인구 (1939년)[74] | 비고 |
---|---|---|---|---|---|
마리엔베르더 군 Kreis Marienwerder | 마리엔베르더 | 525.57km2 | 44,813 | 마리엔베르더가 관구청 소재지. | |
엘빙 시 Elbing (Stadt) | 30.75km2 | 85,952 | 1874년 엘빙 군에서 분리, 시 승격 | ||
엘빙 군 Landkreis Elbing | ![]() | 엘빙 시 | 483.59km2 | 28,149 | |
마리엔부르크 군 Landkreis Marienburg (Westpr.) | 마리엔부르크 | 225.67km2 | 39,073 | 13세기 튜튼 기사단이 건설한 마리엔부르크 성이 있음. | |
슈툼 군 Kreis Stuhm | 슈툼 | 622.96km2 | 40,453 | ||
로젠베르크 군 Landkreis Rosenberg (Westpr.) | 로젠베르크 | 1038.67km2 | 63,368 |
5. 주민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주민의 83.8%는 신교, 15%는 가톨릭, 0.5%는 유대교를 믿었다.[73] 1939년 기준, 인구의 85%는 독일인이었고, 나머지는 폴란드인, 쿠르셰니에키, 리투아니아인이었다.
1950년 12월 폴란드 인구 조사에서는 1939년 8월 기준 거주지를 기록하였다. 1939년 9월과 1950년 12월 사이에 태어난 아동의 경우, 어머니의 전쟁 전 거주지를 기준으로 기록되었다. 이 자료 덕분에 전후 인구의 전쟁 전 지리적 기원을 재구성할 수 있다. 1945년 폴란드 영토가 된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전쟁 전 기준)에는 1950년 12월 다음과 같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1939년 국경 내 지역: | 인구 | 비율 |
---|---|---|
원주민(1939년 나치 독일/단치히 자유시 시민) | 134,702 | 15.90% |
크레스 (소련)에서 강제 이주된 폴란드인 | 172,480 | 20.36% |
소련을 제외한 해외 폴란드인 | 5,734 | 0.68% |
바르샤바(1919~1939)에서 이주한 사람들 | 22,418 | 2.65% |
바르샤바(1919~1939) 지역 (마조비에) | 158,953 | 18.76% |
비아위스토크(1919~1939) 지역과 수드비아 | 102,634 | 12.11% |
전쟁 전 폴란드 포메라니아(1919–1939) | 83,921 | 9.90% |
포즈난(1921~1939)에서 이주한 사람들 | 7,371 | 0.87% |
카토비체(1920~1939) (동상실레시아) | 2,536 | 0.30% |
우치에서 이주한 사람들 | 1,666 | 0.20% |
우치(1919~1939)에서 이주한 사람들 | 6,919 | 0.82% |
키엘체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20,878 | 2.46% |
루블린(1919~1939)에서 이주한 사람들 | 60,313 | 7.12% |
크라쿠프(1919~1939)에서 이주한 사람들 | 5,515 | 0.65% |
제슈프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 | 47,626 | 5.62% |
1939년 거주지 불명 | 13,629 | 1.61% |
1950년 12월 총 인구 | 847,295 | 100.00% |
1950년 거주자의 80% 이상이 이 지역의 새로운 거주자였으며, 20% 미만만이 1939년에도 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소위 원주민,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 시민권자였고 1945년 이후 폴란드 시민권을 부여받음)이었다. 전체 주민의 20% 이상은 소련이 합병한 크레스 (동부 폴란드) 지역에서 추방된 폴란드인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동프로이센 바로 옆에 위치한 인근 지역 출신(마조비에, 수드비아, 포들라스키에, 전쟁 전 폴란드 포메라니아(1919–1939) 출신이 약 44%), 남부 폴란드 출신(약 16%)이었다.
1946년 4월, 동프로이센 북부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식 주가 되었고, 클라이페다 지방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6월, 이 주에는 11만 4,070명의 독일인과 4만 1,029명의 소비에트 시민이 등록되었으며, 미등록자는 알 수 없다. 같은 해 7월, 쾨니히스베르크는 미하일 칼리닌을 기념하여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고, 이 지역은 칼리닌그라드주로 명명되었다. 1948년 8월 24일부터 10월 26일 사이에 총 4만 2,094명의 독일인이 이 주에서 소비에트 점령 지역(후에 동독이 됨)으로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독일인들은 1949년 11월(1,401명)과 1950년 1월(7명)에 떠났다.[52]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과 쿠르슈인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동프로이센 철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적군으로부터 도망쳤지만, 남아 있던 쿠르슈인들은 이후 소련에 의해 추방되었다. 1955년 쿠르슈 사주에는 219명만이 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독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어 반독일적 차별의 원인이 되었다. 소련 당국은 쿠르슈인들을 파시스트로 간주했다. 이러한 차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1958년 서독으로 이주했고, 현재 대다수의 쿠르슈인들이 서독에 거주하고 있다.
독일 인구 추방 후, 이 지역 북부에는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그리고 우크라이나인들이 정착했다. 이 지역의 소련 지역에서는 독일 역사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모든 독일 지명은 새로운 러시아식 지명으로 바뀌었고, 돔노보와 탈파키와 같이 역사적인 폴란드식 지명을 기반으로 한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만 역사적 지명이 사용되었다. 이 외딴 지역은 외국인에게 폐쇄된 군사 지역이었으며, 소비에트 시민들도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1967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명령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성의 잔해가 철거되었다.
6. 주가(州歌)
Land der dunklen Wälder und kristall’nen Seen|어두운 숲과 수정같은 호수의 땅de은 헤르베르트 브루스트(1900–1968)가 작곡하고 에리히 하니히호퍼(1908–1945)가 작사했다.
:Land der dunklen Wälder
:Und kristallnen Seen,
:Über weite Felder
:Lichte Wunder gehn.
:Starke Bauern schreiten
:Hinter Pferd und Pflug;
:Über Ackerbreiten
:Streicht der Vogelzug.
:Und die Meere rauschen
:Den Choral der Zeit.
:Elche stehn und lauschen
:In die Ewigkeit.
7. 현대의 동프로이센
1946년 4월, 동프로이센 북부는 "쾨니히스베르크스카야 주(Kyonigsbergskaya Oblast)"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식 주가 되었고, 클라이페다 지방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역사적인 도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는 미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을 기념하여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로 개명되었고, 이 지역은 칼리닌그라드주(Kaliningrad Oblast)로 명명되었다.[52]
독일 인구 추방 후, 이 지역 북부에는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정착했다. 소련은 이 지역에서 독일 역사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모든 독일 지명은 새로운 러시아식 지명으로 바뀌었고, 돔노보(Domnovo)와 탈파키(Talpaki)와 같이 역사적인 폴란드식 지명을 기반으로 한 몇 가지 예외만 있었다. 이 외딴 지역은 외국인에게 폐쇄된 군사 지역이었으며, 소비에트 시민들도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1967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소비에트의 집"을 건설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 성(Königsberg Castle)의 잔해가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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