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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페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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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폰페이섬은 미크로네시아 연방에 속한 섬으로, 멜라네시아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이 기원전 1000년경부터 정착했다. 1528년 유럽인에 의해 처음 기록되었으며, 스페인, 독일, 일본, 미국의 통치를 거쳐 1986년 독립했다. 폰페이섬은 열대 우림 기후이며, 폰페이어를 사용하고 샤카오 의식과 난마돌 유적으로 유명하다. 현재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수도 팔리키르가 위치하며, 국제공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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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페이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일반 정보
섬 이름폰페이
다른 이름포나페
위치태평양
군도세냐빈 제도
면적334 제곱킬로미터
해안선 길이알려진 바 없음
최고 고도782 미터
최고봉난라우드 산
소속 국가미크로네시아 연방
행정 구역폰페이 주
최대 도시콜로니아
도시 인구6,074 명 (2010년 기준)
인구36,832 명 (2020년 기준)
시간대UTC+11
지리
지형화산섬
기후열대 우림 기후
강수량연간 약 7,600 밀리미터
행정
폰페이 주
지방 자치체키티
콜로니아
마돌레니무
네트
기타
언어폰페이어

2. 역사

폰페이섬의 역사는 여러 시대로 구분되며, 각 시대는 폰페이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폰페이 원주민들은 과거의 사건을 "독일 시대" 또는 "스페인 이전"과 같이 지칭하기도 한다.[11]

기간연도
스페인 이전 시대1825–1886
스페인 시대1886–1899
독일 시대1899–1914
일본 시대1914–1945
미국 시대1945–1986
독립 시대1986년 이후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폰페이섬은 유럽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528년1529년 두 차례에 걸쳐 스페인의 사베드라가 섬을 목격했는데, 이것이 폰페이섬 또는 그 주변 섬에 관한 유럽인의 최초 기록으로 여겨진다. 1595년에는 키로스가 폰페이섬을 방문하여 섬에 다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19세기 초부터 폰페이섬은 포경선과 상선의 보급 기지로 사용되면서 유럽과 미국의 배들이 자주 방문했다. 1855년에는 연간 100척이 넘는 배가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잦은 방문은 섬 주민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1836년에는 팔콘 호 사건으로 다수의 주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선원들로부터 전해진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 등의 질병은 섬 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1854년의 천연두 유행 때는 반년 만에 2,000~3,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820년대 10,000명이 넘었던 섬의 인구는 1850년대 후반에 약 2,000명까지 감소했다.

1886년 스페인은 현재의 콜로니아 지역을 산티아고 데 라 아센시온이라 명명하고 정청을 설치하여 폰페이섬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 통치는 전염병 유행과 족장 제도와의 갈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98년 미서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폰페이섬을 포함한 카롤린 제도의 권익을 독일에 매각했다.

독일은 코프라 산업 진흥 등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을 펼쳤지만, 점차 전통을 부정하고 강제 노동을 법제화하는 등 통제를 강화했다. 이에 1910년 소케스 반란이 일어났지만, 독일은 방호 순양함 "엠덴"을 출동시켜 진압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일본이 폰페이섬을 무혈 점령했고, 1920년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전기, 수도, 학교, 병원 등 근대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농업과 어업을 중심으로 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추진했다. 1922년 남양청 지청 설치 후 많은 일본인이 폰페이섬으로 이주하여 1945년 종전 시점에는 13,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거주했다. 1940년부터 일본 해군이 폰페이에 수비대를 주둔시켰고, 태평양 전쟁 중에는 미국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식량 자급이 가능하여 종전까지 비교적 평온한 상황을 유지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국의 점령이 시작되었고, 1947년 유엔의 신탁 통치령으로 미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동물원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경제적 원조만 제공하고 산업 육성을 통한 자립 지원은 하지 않았다. 1965년 미크로네시아 의회가 발족되었고, 1978년 연방 구성, 1979년 헌법 제정을 거쳐 1986년 11월에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1. 원주민 시대 (1825년 이전)

기원전 1000년경 멜라네시아에서 사람들이 항해하여 이주해 온 것이 폰페이 섬의 가장 오래된 주민으로 여겨진다. 섬의 남동부 마타라니움에 있는 난마돌 유적 주변에서는 기원 전후의 거주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500년대부터 난마돌이 건설되기 시작하여, 1200년경부터 1600년경까지 이 지역에서 Saudeleur Dynasty|샤우텔레울 왕조영어가 번성했다. 그 후에는 네치, 우, 마타라니움, 키치, 소케스의 다섯 왕국(wehi)으로 나뉘어 각기 난마르키라고 불리는 족장 계통, 그리고 나니켄이라고 불리는 부족장 계통에 의해 통치되었다. 난마르키 등의 위계 제도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으며, 각 족장은 각 지역에서 오늘날에도 권세를 가지고 있다.[1]

2. 2. 사우델레우르 왕조 시대 (1100년경 ~ 1628년경)

폰페이 전설에 따르면, 사우델레우르 왕조의 통치자들은 외국 출신이었다. 사우델레우르의 중앙 집권적이고 절대적인 통치 형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점점 더 압제적으로 변해갔다고 묘사된다. 자의적이고 가혹한 요구를 하고, 폰페이 신들을 모독한다는 평판은 폰페이인들 사이에 원한을 심었다.[11][12][13] 이소켈켈의 침략으로 사우데루 왕조는 막을 내렸고, 그 후 더 분권화된 ''나흐눔와르키'' 체제가 들어섰다.[11][12][13]

2. 3. 부족 시대 (1628년경 ~ 1885년경)

폰페이 전설에 따르면, 폰페이에 처음으로 정부를 세운 사우데루 통치자들은 외국 출신이었다. 사우데루의 중앙 집권적 절대 통치 형태는 폰페이 전설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점점 더 압제적으로 변해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의적이고 가혹한 요구와 폰페이 신들을 모독한다는 평판은 폰페이인들 사이에 원한을 심었다. 사우데루 왕조는 또 다른 반신화적인 외국인인 이소켈켈의 침략으로 끝났으며, 그는 사우데루 통치를 오늘날 존재하는 더 분권화된 ''나흐눔와르키'' 체제로 대체했다.[11][12][13]

폰페이의 역사적 사회는 5개의 부족, 다양한 씨족 및 하위 씨족으로 고도로 구조화되었으며, 각 부족은 두 명의 주요 족장이 이끌었다. 부족은 봉건적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이론적으로 "모든 토지는 정기적인 조공을 받고 절대적인 통치를 행사하는 족장에게 속했다." 족장이 내린 처벌에는 죽음과 추방이 포함되었다. 부족 간 전쟁에는 약탈, 가옥 및 카누 파괴, 포로 살해가 포함되었다.[11] 스페인 이전의 인구 추정치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11]

2. 4. 유럽인 접촉 (16세기 ~ 19세기)

1529년 9월 14일, 스페인의 항해사 알바로 데 사아베드라 세론이 누에바에스파냐로 돌아가는 길에 폰페이섬을 발견했다.[14] 그는 이 섬을 '산 바르톨로메'라고 지도에 표기했으며, 현지인들이 문신을 자주 했기 때문에 폰페이섬과 주변 섬들을 '로스 핀타도스'(스페인어로 "그려진 사람들")라고 불렀다.[11] 1595년 12월 23일, 스페인 선박 '산 제로니모'를 지휘하던 페드루 페르난데스 드 케이로스가 폰페이섬을 방문했지만, 상륙하지는 않았다.[11][15]

1825년 9월 10일, 호주 선원 존 헨리 로우가 자신의 바크선 '존 불'을 타고 폰페이섬에 도착했지만, 원주민 카누의 추격을 받아 상륙하지 못했다.[11] 1828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러시아 탐험가 표도르 리트케는 자신의 배 '세냐빈'을 이끌고 폰페이, 안트, 파킨 섬 그룹에 이름을 부여하고 탐험했다. 섬 주민들의 적대감으로 상륙에는 실패했지만, 원주민들이 배에 탑승하여 교역이 이루어졌고, 짧은 어휘집과 지도가 제작되었다.[11] 리트케 탐험대의 일원인 F.H. 폰 키틀리츠는 난 마돌 유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11]

1832년 1월 3일, 바크선 '페루'의 J.H. 이글스턴 선장은 폰페이섬을 발견했을 때, 이미 그의 해상 지도에는 "어센션 섬"으로 표시되어 있었다.[11] 이후 고래잡이와 무역선들이 폰페이섬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스웨덴 프리깃함 ''Eugenie''의 기록에 따르면, 곧 "해안에 불량배, 탈옥수, 탈영병의 대규모 식민지가 형성"되었다.[11]

1837년 12월, 로마 가톨릭 사제인 루이 데지레 메그레 신부가 호놀룰루에서 폰페이섬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했지만, 7개월 만에 실패하고 1838년 7월 29일 발파라이소로 떠났다.[16] 그의 일행 중에는 폰페이에 남아 후손을 남긴 "여러 망가레바인과 타히티인"이 있었다.[11] 1852년, 뉴잉글랜드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폰페이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여 섬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겼다.[11]

1854년 이후, 천연두 유행으로 인해 폰페이섬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11]

미국 남북 전쟁 중인 1865년 4월 1일, 남부 연합 해군의 ''CSS 셰넌도어''는 폰페이섬에서 4척의 미국 고래잡이 배를 기습하여 파괴했다. 현지 왕인 나나니에리키는 이 작전으로 얻은 전리품을 받았다.[17]

2. 5. 스페인 통치 시대 (1886년 ~ 1899년)

1870년대 타국의 영향력 증대를 우려한 스페인폰페이를 비롯한 카롤린 제도의 지배를 강화하고 교역권 확보를 도모했다. 독일은 이에 반발하여, 1885년에 전함을 파견하여 폰페이의 영유를 선언했다. 이에 대해 교황 레오 13세의 중재로 스페인과의 화해가 성립되어, 독일은 그 대가로 이 해역에서의 교역권과 어업권을 얻었다.[1]

1886년 스페인은, 현재의 콜로니아 지역을 산티아고 데 라 아센시온(Santiago de la Ascension)이라고 명명하고, 정청을 설치하여 정식 영유를 선언했다. 이로써 폰페이의 100년에 걸친 외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성급한 식민지 정책 확립을 도모했지만, 앞서 언급한 전염병 유행 등의 불안정한 사회 상황과 전통적인 족장 제도와의 갈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1]

2. 6. 독일 통치 시대 (1899년 ~ 1914년)

독일은 폰페이섬을 통치하던 기간 동안 토지 소유권에 큰 변화를 주었다. 1907년부터는 모든 토지를 봉건 제도 대신 개인에게 나눠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 때문에 추장의 경제적 이득이 줄었고, 전통에 따라 첫 수확물을 바치는 정도만 남았다.[11]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세금도 내야 했는데, 돈 대신 부두나 도로 건설 같은 공공사업에 1년에 15일 동안 일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 의무는 소케스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소케스섬에서 도로 건설 중 일어난 불복종 사건으로 시작된 이 반란은 9명이 살해되고, 36명의 소케스 반란군이 체포 및 재판을 받았으며, 15명이 처형되고, 다른 사람들은 독일령 팔라우 제도 바벨다오브로 추방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11~12년 독일 인구 조사에 따르면 폰페이인 3,190명, 중앙 캐롤라인인 585명, 멜라네시아인 279명이 있었다. 많은 외딴 섬 주민들은 태풍 피해로 인해 고향 섬에서 폰페이섬(주로 소케스섬)으로 이주해 왔다.[11]

2. 7. 일본 통치 시대 (1914년 ~ 1945년)

1914년 10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4척의 함선을 폰페이에 입항시켜 무혈 점령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국제 연맹은 일본에 위임 통치를 맡겼고, 일본은 캐롤라인, 마셜, 마리아나 제도 (미국 소유의 제외) 및 자오저우만과 함께 폰페이를 통치하게 되었다. 1920년에는 국제 연맹에 의해 일본의 위임 통치(C식 위임 통치)가 인정되었다.[18] 일본의 점령 정책은 이전의 지배와는 달리 동화 정책을 취했지만, 섬 주민에게 일본 국적은 주어지지 않았다 (혼인은 별도).

위임 통치 하에서 근대적인 전기, 수도, 학교, 병원 등 인프라가 확충되었고, 농업과 어업을 중심으로 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이 추진되었다. 1922년 남양청 지청이 설치되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폰페이에 정착했고, 1945년 종전 시점에는 13,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팔라우, 사이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1940년 일본 해군은 폰페이에 처음 수비대를 주둔시켰고, 태평양 전쟁 개전 후 1942년에는 본격적인 경비대를 배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수비대는 나이토 준 대위 휘하의 약 2,000명의 일본 해군(IJN)과 와타나베 마사오 중장 휘하의 5,984명의 일본 육군(IJA)으로 구성되었다.[18] 이들은 서쪽의 트럭 섬(추크 섬)에 있던 해군 기지의 방어를 담당했다.

미국군은 1944년 2월 15일 대규모 공습을 시작으로 5월까지 폰페이를 공격했고, 콜로니아 시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폰페이는 섬 건너뛰기 상륙 작전에서 미국 해군에 의해 우회되었다.[18] 이 섬은 USS ''매사추세츠'', USS ''앨라배마''와 같은 전함에 의해 여러 차례 포격을 받았으며, USS ''카우펜스''에서 발진한 공습도 있었다. 트럭 기지가 공습으로 기능을 상실하고 주 전장이 마리아나, 필리핀으로 옮겨진 같은 해 6월 이후, 폰페이는 수송이 끊겼지만, 선어와 고구마 등 식량을 자급할 수 있었고 큰 공격을 받지 않아 종전까지 1년여 동안 비교적 평온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 국민들은 미국 해군에 의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2. 8. 미국 신탁통치 시대 (1945년 ~ 1986년)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점령이 시작되었고, 1947년 유엔의 신탁 통치령으로 미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1] 폰페이는 팔라우, 야프, 트럭(추크)과 함께 네 개의 구획으로 구분된 지역의 중심으로서, 초기부터 정청이 설치되었다. 미국의 통치 방침은 "zoo theory(동물원 이론)"라고 조롱받는 것처럼, 경제적인 원조는 했지만, 산업 육성에 의한 자립 지원은 하지 않았다.[1]

1965년, 미국은 유엔의 요청을 받아, 미크로네시아 의회의 발족을 인정했다.[1] 초창기 의회는 마리아나, 마셜, 팔라우를 포함한 형태로 사이판에서 개최되었으며, 폰페이로 옮겨온 것은 1977년의 일이다.[1] 1978년에는 현재의 4개 주에서 연방을 구성, 1979년에는 헌법이 제정되어 자치 정부가 탄생했다.[1] 1986년 11월에 독립한 이후, 폰페이는 연방의 수도 기능을 가지고 있다.[1]

2. 9. 독립 이후 (1986년 ~ 현재)

1986년 11월 폰페이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수도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3. 지리

5개의 '독립 부족'의 경계를 보여주는 폰페이의 상세 지도


세냐빈 제도(폰페이와 인접한 두 개의 환초)


폰페이 섬은 미크로네시아 연방에서 가장 크고 높은 섬으로, 최고점은 난라우 산(해발 772m 또는 782m)이다. 섬에는 폰페이 로리, 폰페이 부채꼬리, 폰페이 파랑새, 긴부리 흰눈썹새 등 4종의 고유종을 포함한 수십 종의 조류가 서식한다. 폰페이 별새는 최근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육상 파충류는 몇 종의 도마뱀이 유일하며, 원래 포유류는 박쥐뿐이었다. 돼지, 쥐, 개 등이 도입되어 돼지는 야생화되었다. 석호에는 물고기, 연체동물, 거북이 등 다양한 해양 생물이 서식한다.

폰페이 섬은 북위 6도 54분, 동경 158도 14분에 위치하며, 에서 남동쪽으로 약 1700km 떨어져 있다. 평균 직경 약 24km의 원형 섬으로, 해안선은 굴곡이 많다. 보초가 발달해 석호 내 25개의 작은 섬들과 함께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면적은 330km2로, 미크로네시아에서 , 바벨다오브 섬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

섬 중앙에는 미크로네시아 연방 최고봉인 나나라우트 산(Nahnalaud, 798m)과 응히네니 산(Ngihneni, 791m)이 솟아 있다. 섬에는 40여 개의 강과 여러 폭포(케프로이 폭포, 리투투니아프 폭포 등)가 있다. 해안선은 대부분 맹그로브 숲으로, 백사장은 없다. 남서쪽 10km 지점에는 안츠 환초, 북서쪽 30km 지점에는 파킨 환초가 있어 다이빙 명소로 알려져 있다.

2021년 기준 인구는 36,832명이다. 콜로니아, 네트, 우, 마돌레니임(마트레니임), 키티, 소케스(쇼케슈, 쇼카시)의 6개 지구로 나뉜다. 가장 큰 시가지는 콜로니아로, 1989년까지 연방 수도였다. 2021년 현재 주도는 콜로니아이다. 얍 주 주도도 콜로니아이지만, 철자가 다르다(Colonia). 현재 수도 팔리키르는 콜로니아 남서쪽 8km 지점 소케스 지구에 있다.

시차는 협정 세계시(UTC)+11로, 한국보다 2시간 빠르다.

3. 1. 기후

폰페이는 열대 우림 기후 지역에 속한다. (쾨펜: ''Af'')[19]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습한 곳 중 하나로, 해안을 따라 있는 마을의 연평균 강수량은 4775mm이며, 특정 산악 지역에서는 연간 약 약 762.00cm의 강수량을 기록한다.[20]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평균 최고 기온 (°C)약 30.0°C약 30.0°C약 30.0°C약 30.0°C약 30.0°C약 30.0°C약 30.0°C약 30.6°C약 30.6°C약 30.6°C약 30.6°C약 30.0°C약 30.0°C
평균 최저 기온 (°C)약 22.8°C약 23.9°C약 23.9°C약 22.8°C약 22.8°C약 22.8°C약 21.7°C약 21.7°C약 21.7°C약 21.7°C약 22.8°C약 22.8°C약 21.7°C
평균 강수량 (mm)약 30.73cm약 25.91cm약 35.56cm약 44.70cm약 49.28cm약 42.16cm약 43.69cm약 41.40cm약 40.39cm약 41.15cm약 40.39cm약 42.42cm약 477.01cm

[32]

연평균 기온은 거의 27~28℃, 하루 최저 기온은 23℃, 최고 기온은 31℃ 정도이다. 해안부의 콜로니아에서의 평균 연 강수량은 4,900mm, 강수일은 평균 304일이다. 세계 1위로 꼽히는 태평양의 매쿼리 섬의 강우일수 평균 307일에 이어 세계 2위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다우 지역이다. 내륙부에서는 연 강수량이 9,000~10,000mm에 달한다고 한다. 1월부터 3월까지는 약간 강수량이 적어지지만, 연중 고르게 강우가 있으며 덥고 습하다. 습도는 연중 78~91%이다. 7월부터 11월은 동 또는 남동쪽, 12월부터 3월에는 북동쪽의 무역풍이 우세하다. 7월부터 10월까지는 태풍 발생 지역이지만, 크게 발달하여 접근하는 경우는 적어 심각한 피해는 드물다.

3. 2. 행정 구역

폰페이 섬 자치구 지도


폰페이 섬의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다.

  • 키티: 남서부. 안트 환초 포함.
  • 콜로니아: 북부.
  • 마돌레님: 동부.
  • 네트: 본섬 북/중앙부. (이전에는 북부 해안에 있는 주도인 콜로니아 포함)
  • 소케스: 북서부. 파킨 환초와 국가 수도인 팔리키르 포함.
  • 우: 북동부.

4. 인구

2010년 폰페이 주의 인구는 약 36,196명이었다. 인구 대다수는 스스로를 폰페이 원주민이라고 생각하지만, 폰페이는 미크로네시아 연방(FSM) 내 다른 어떤 섬보다도 인종적으로 다양하다. 이는 1세기가 넘는 외국의 식민 지배로 인해 스페인, 독일, 일본, 차모로, 필리핀, 미국, 호주, 기타 서유럽인들이 유입되었고, 국가 정부의 수도가 위치하여 다른 세 주(야프, 추크, 코스라에) 출신의, 각기 다른 민족적, 문화적 기원을 가진 수백 명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 구성에는 폰페이 주 내 여러 지역의 외딴 섬들 출신 민족도 포함되어 있어, 오스트랄라시아 태평양 섬 주민들이 섞여있어 폰페이 섬은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용광로가 되었다.

미크로네시아계 주민이 많다. 과거에는 카나카인이라고 불렸지만, 약간 멸칭으로 사용된 경위로 인해 현재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폰페이인(Pohnpeian)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캐롤라인인(Carolinian)이라는 호칭은 드물다. 2000년 조사에서는 폰페이섬 주민의 출생지는 폰페이 주 91%,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다른 주 4%, 다른 태평양 섬 2%, 필리핀 1%, 미국 1%로 나타났다.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평상시 생활에서는 폰페이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2000년 조사에서 모국어는 폰페이어 72%, 영어 4%였다. 이 외에 추크어, 핑겔라프어, 모킬어 등이 사용된다. 전쟁 전에 태어난 사람은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수는 줄어들고 있다. 일본어에서 차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생활 용어도 적지 않다(예: dawasi 수세미, kiuhri 오이, sispando 브래지어[31]; 폰페이어#차용어도 참조).

5. 언어

공식 영어와 일본어로 된 폰페이 국제공항 여행객을 위한 표지판.


폰페이어(이전 명칭: "포나페어")와 그 방언은 폰페이의 토착어이다. 미크로네시아 연방 정부는 폰페이어를 지방 언어로도 사용한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섬에서 사용된다. 미크로네시아계 주민이 많다. 민족으로는 과거에는 카나카인이라고 불렸지만, 약간 멸칭으로 사용된 경위로 인해 현재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폰페이인(Pohnpeian)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캐롤라인인(Carolinian)이라는 호칭은 드물다.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평상시 생활에서는 폰페이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쟁 전에 태어난 사람은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수는 줄어들고 있다. 일본어에서 차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생활 용어도 적지 않다(예: dawasi タワシ|수세미일본어, kiuhri キューリ|오이일본어, sispando 〈브래지어〉 등[31]). 폰페이어#차용어도 참조.

2000년 조사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내용
폰페이섬 주민의 출생지
모국어



이 외에 추크어, 핑겔라프어, 모킬어 등이 사용된다.

6. 문화

미크로네시아 연방에서 유일한 대학인 미크로네시아 대학교 본부가 파이에스(팔리키르 조금 앞)에 있으며, 분교는 콜로니아에 있다. 섬 내에는 8년제 초등학교가 공립 30개교, 사립 6개교가 있으며, 고등학교는 공립 3개교, 사립 4개교가 있다.[31]

카바( Piper methysticum|파이퍼 메티스티컴mi)를 폰페이에서는 샤카오(사카오, Sakau)라고 부르며,[31] 이 뿌리를 두들겨 짜낸 즙을 돌려 마시는 샤카오 의식이 유명하다. 원래는 다양한 의식에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민중에게 널리 음용되며, 콜로니아를 비롯한 수많은 샤카오 바가 있다. 진정 작용이 있어 졸음을 유발한다.[31]

콜로니아 서쪽의 포라키에트 지역에는 독일 통치 시대에 카핀가마랑기 환초에서 이주해 온 폴리네시아계 사람들의 집락인 카핀가마랑기 마을이 있다. 이곳의 목각 등의 민예품이 유명하다.[31]

주식은 이지만, 토란, 얌 등의 고구마류도 자주 먹는다. 일본 통치 시대의 영향으로 생선을 회로 먹는 식문화도 일반적이다.[31]

7. 교육

폰페이주 교육부가 공립학교를 운영한다.[28]

공립 고등학교는 다음과 같다:[28]


  • 난페이 기념 고등학교(별칭 키티 고등학교)
  • 마돌리니엠 고등학교
  • 넷에 위치한 폰페이 아일랜드 센트럴 스쿨(구 태평양 아일랜드 센트럴 스쿨)


사립 학교는 다음과 같다:

  • 칼바리 크리스찬 아카데미 (콜로니아 소재)[28]
  • 오와 크리스찬 고등학교 (마돌리니엠 소재)[28]
  • 자비의 성모 가톨릭 고등학교 (콜로니아 소재)[29]
  • 제칠일 안식일 고등학교 (넷 소재)[28]
  • 폰페이 가톨릭 학교


고등 교육기관으로는 미크로네시아 연방 대학교가 있으며, 4개 주에 각각 주 캠퍼스를 두고 수도 팔리키르에 국립 캠퍼스를 두고 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 대학교 시스템은 또한 야프섬에 있는 수산 해사 연구소(FMI)를 포함한다.

섬 내에는 공립 30개교, 사립 6개교의 8년제 초등학교와 공립 3개교, 사립 4개교의 고등학교가 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에서 유일한 대학인 미크로네시아 대학교 본부가 파이에스(팔리키르 조금 앞)에 있으며, 분교는 콜로니아에 있다.

8. 교통

폰페이 국제공항 활주로와 폰페이 항구를 소케스 능선에서 바라본 모습


폰페이 국제공항(IATA 코드 PNI)은 본섬 북쪽 해안에서 떨어진 데게틱이라는 작은 섬, 콜로니아 근처에 있다. 폰페이 국제공항은 콜로니아 북서쪽의 타카치크 섬에 있으며, 콜로니아 시가지와는 매립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대일본항공의 비행정요코하마항과 연결되었지만, 현재는 유나이티드 항공의 아일랜드 호퍼 노선으로, (추크 경유)에서 주 3편, 호놀룰루에서 주 3편이 운항하며, 괌에서 출발하여 괌으로 돌아가는 야간 운행편이 주 1회 있다.

주 내의 다른 섬으로는 연방 정부가 운항하는 약 3개월에 한 번의 선박편으로 물자를 수송하고 있다. 그 외, 미국 서해안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 화물선도 여러 회사가 폰페이를 경유하고 있다.

섬 내를 일주하는 도로는 총 연장 85km로, 1986년에 정비가 완료되었다. 대중교통은 없지만, 합승 택시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9. 스포츠

미크로네시아 연방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일원이며, 현재 IOC 집행위원회 위원인 제임스 토빈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시작으로 4년마다 하계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고 있으며, 육상, 수영, 역도 종목에 선수들이 참가하고 있다. 폰페이 출신 선수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엘리아스 로드리게스 마라톤 선수로, 시드니 올림픽에서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대표하여 출전했다. 로드리게스는 마라톤에서 꼴찌를 했지만, 수만 명의 관중들의 응원을 받았으며, 그의 마지막 바퀴를 위해 폐막식이 지연될 정도로 수백만 명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그의 경기를 지켜보았다.[22]

폰페이 주 축구팀은 세계 최연소 국가대표팀 감독인 영국인 폴 왓슨의 지도를 받으며 인근 괌을 순회하며 지역 팀과의 경기에서 1승을 거두었다.[23] 연례 2023 미크로네시아 풋살컵은 왓슨의 주도로 섬에서 개최되었다.

10. 폰페이를 배경으로 한 작품

H. P. 러브크래프트와 다른 작가들의 여러 크툴루 신화 이야기에서 폰페이섬(Pohnpei)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러브크래프트와 헤이즐 헤일드의 "영겁의 저편"[24]에서 폰페이섬은 난마돌의 유적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 유적은 이미 에이브러햄 메리트의 잃어버린 종족 이야기인 ''달의 연못''의 배경으로 사용되었고, 이 섬들은 난-마탈(Nan-Matal)이라고 불린다.[25]

폰페이섬은 윌라드 프라이스의 청소년 모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남해 모험''(1952)에서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며, 할 헌트와 로저 헌트가 등장한다.[26]

"포나페(Ponape)"라고도 표기되는 폰페이섬은 BC 우즈가 집필한 인기 블로그 ''Dunce Upon A Time''에서 "마이크"의 고향 섬으로 언급된다.[27]

참조

[1] 웹사이트 Rainfall Climatology for Pohnpei Islands, Federated States of http://www.weriguam.[...] 2022-03-03
[2] 간행물 Nature Conservancy Magazine 2015-02
[3] 논문 Proto-Micronesian Reconstructions: 2 2003
[4] 논문 Earliest direct evidence of monument building at the archaeological site of Nan Madol (Pohnpei, Micronesia) identified using 230Th/U coral dating and geochemical sourcing of megalithic architectural stone 2016-11
[5] 서적 Micronesian Legends https://books.google[...] Bess Press 2012-01-01
[6] 서적 The Lelu Stone Ruins (Kosrae, Micronesia): 1978–81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Research https://books.google[...] Social Science Research Institute,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2011-12-31
[7] 서적 Prehistoric Architecture in Micronesi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1-12-31
[8] 서적 Micronesic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Guam 2011-12-31
[9] 서적 Upon a Stone Altar: A History of the Island of Pohnpei to 189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2-01-01
[10] 서적 Place Names of Pohnpei Island: Including And (Ant) and Pakin Atolls https://books.google[...] Bess Press 2011-12-31
[11] 서적 The Native Polity of Ponape https://books.google[...]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2012-01-01
[12] 서적 Lost City of Stone: The Story of Nan Madol, the "Atlantis" of the Pacific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11-12-31
[13] 간행물 Lost in the Weeds: Theme and Variation in Pohnpei Political Mythology Center for Pacific Islands Studies, School of Hawaiian, Asian & Pacific Studies, University of Hawaiʻi at Mānoa 2011-12-31
[14] 서적 The Pacific Basin: A History of its Geographical Explorations The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15] 간행물 Conflicto hispano-alemán 1885
[16] 서적 Faith in Paradise St. Paul Publishing
[17] 문서 CSS Shenandoah
[18] 웹사이트 Japanese garrisons on the by-passed Pacific Islands 1944–1945 https://warfare.gq/d[...] 1999–2000
[19]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chinci.co[...] 2015-01-16
[20]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weriguam.[...] 2014-11-08
[21] 웹사이트 Weatherbase: Historical Weather for Pohnapei, 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http://www.weatherba[...] Weatherbase 2011-11-24
[22] 웹사이트 G'Bye, Mates https://www.latimes.[...] 2000-10-02
[23] 뉴스 Micronesia to Mongolia: A coaching quest https://www.fifa.com[...] 2013-12-23
[24] 웹사이트 Out of the Aeons http://www.hplovecra[...] 2014-07-16
[25] 문서 they had set forth for the Nan-Matal, that extraordinary group of island ruins clustered along the eastern shore of Ponape in the Carolines
[26] 웹사이트 "south sea adventure" in a sentence – south sea adventure sentence examples – ichacha.net sentence maker https://eng.ichacha.[...] 2018-02-22
[27] 웹사이트 The Micronesian Elvis http://www.dunceupon[...] Dunce Upon A Time 2007-08-30
[28] 웹사이트 Higher Education in the 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http://www.fsmembass[...] 2018-02-23
[29] 웹사이트 Come Visit Us http://olmchs.edu.fm[...] 2018-02-23
[30] 웹사이트 Green Travel Guide to Micronesia – How to Visit Sustainably https://ecofriendlyt[...] 2021-07-16
[31] 웹사이트 New Pohnpeian-English Online Dictionary http://www2.hawaii.e[...] 2022-09-06
[32] 웹인용 Weatherbase: Historical Weather for Pohnapei, 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http://www.weatherba[...] Weatherbase 20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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