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통일노동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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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은 1948년 폴란드 노동자당(PPR)과 폴란드 사회당(PPS)의 통합으로 결성된 폴란드의 집권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PZPR은 1989년 민주화 운동 이전까지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며, 사회주의 건설과 공산주의 확산을 목표로 했다. 당은 민주집중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당 간부가 모든 권력을 행사했으며, 경제 개혁 실패와 사회 불안으로 인해 1980년대 말 몰락했다. 1990년 1월 해산되었으며, 당의 주요 인물들은 폴란드 공화국 사회민주당(SdRP)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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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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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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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PZPR |
창립 | 1948년 12월 21일 |
해산 | 1990년 1월 30일 |
기관지 | 트리부나 루두 (인민의 소리) |
본부 | 바르샤바, Nowy Świat 6/12, 00-497 |
지도부 | |
초대 서기장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
마지막 서기장 |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 |
정치 |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1956년까지) 좌익 민족주의 |
정치적 위치 | 극좌 |
국제 조직 | 코민포름 (1948–1956) |
슬로건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조직 | |
회원수 | 3,000,000 명 (1980년대 추정) |
청년 조직 | 폴란드 청년 연맹 (1948–1956) 폴란드 사회주의 청년 연맹 (1976–1990) |
준군사 조직 | ORMO (1989년까지) |
관련 단체 | |
국가 | 민족통일전선 (1948–56) 민족통일전선 (1956–83) 민족재건애국운동 (1982–89) |
기타 정보 | |
합병 대상 | 폴란드 노동자당 폴란드 사회당 |
후계 정당 | 폴란드 사회민주 연합 폴란드 공화국 사회민주주의 폴란드 공산당 (2002) (법적 후계자는 아님) |
국가 | 인터내셔널가 |
2. 역사
폴란드 공산당(KPP)은 1918년 2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SDKPiL)과 폴란드 사회당(PPS) 좌파가 합쳐져 만들어진 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KPRP)이 전신이다. 1925년 KPP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극좌 노선과 친소 성향으로 국민들에게 외면받아 비합법 소수 정당에 머물렀다. 1938년 코민테른 지령으로 해체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에 망명했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
1942년 숙청을 피한 당원들이 폴란드 노동자당(PPR)을 결성, 나치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저항 운동을 펼쳤다. 1944년 소련군이 폴란드에 진입하면서 해방된 지역의 정권당으로 등장했고, 1948년 12월 PPR과 PPS가 합당하여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이 되었다.
1948년 후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국내파 지도자들은 "우익적 민족주의 편향"을 이유로 쫓겨났고, 스탈린주의 경향이 강화되어 사실상 일당 독재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1956년 포즈난 폭동을 계기로 지도부가 교체되고 고무우카가 복귀하면서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었다.
1989년 2월, 독립 자율 관리 노동조합 '연대'(이하 "연대")와 원탁 회의를 개최, 같은 해 6월 폴란드 최초의 자유 선거에서 대패하여 "연대"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듬해인 1990년 당명을 "폴란드 공화국 사회민주당"으로 바꾸고, 1991년 의회 선거에서는 정당 연합 "민주 좌익 연합"(SLD)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SLD는 1999년 4월 정당화)
2. 1. 창당 배경
1948년 12월 15일부터 21일까지 바르샤바 공과대학교 본관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폴란드 노동자당(PPR)과 폴란드 사회당(PPS)이 통합하여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이 창당되었다.[6] PPS는 친공산주의 동조자들에게 장악되었고, 통합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당에서 추방되었다. "우익-민족주의적 일탈" 혐의를 받은 PPR 구성원들도 추방되어, 사실상 PPR이 PPS를 흡수한 형태였다.새 당은 PPR 당원 약 100만 명과 PPS 당원 약 50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최고위직은 PPR 당원들이 차지했다.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야쿠프 베르만, 요제프 치란키에비치 등이 정치국에 포함되었고, 이들은 소련 모델에 따라 국가 기구 고위직을 겸임했다.
"우익-민족주의적 일탈"은 폴란드 스탈린주의자들이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소련의 개입에 반대했던 주요 활동가들을 상대로 사용한 정치 선전 용어였다. 요제프 스탈린은 1948년 볼레스와프 비에루트와 야쿠프 베르만에게 고무우카와 그 추종자들을 제거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사회주의자의 25% 이상이 권력에서 제거되거나 추방되었다.

2. 2. 스탈린주의 시기 (1948-1956)
1948년 12월, 폴란드 노동자당(PPR)과 폴란드 사회당(PPS)이 통합하여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이 창당되었다. 이는 사실상 PPR이 PPS를 흡수한 것으로, 친공산주의 동조자들이 PPS를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한 결과였다.[6] PZPR은 PPR의 약 100만 명, PPS의 약 50만 명의 당원을 포함하였으며, 당의 최고위직은 PPR 출신들이 차지했다.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야쿠프 베르만 등이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들은 동시에 국가 기구의 고위직을 겸임했다.블라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폴란드 국내 문제에 대한 소련의 개입에 반대했던 인사들은 "우익-민족주의적 일탈"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되었다. 요제프 스탈린은 1948년에 비에루트와 베르만에게 압력을 가해 고무우카와 그 추종자들을 권력에서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1949년 4월, PZPR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는 문화와 과학 분야에 대한 "이념 공세"를 강화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NKVD 요원이자 강경 스탈린주의자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1948년부터 1956년까지 PZPR의 초대 사무총장으로서 공산주의를 강요하고 억압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비밀 재판을 통해 비톨트 필레츠키를 포함한 많은 정권 반대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대부분의 사형 선고에 직접 서명했다.
1956년 모스크바에서 비에루트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폴란드에서 스탈린주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독살 또는 자살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1949년 11월, PZPR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는 혁명적 경계심을 강화하고 우익 민족주의적 일탈과의 투쟁을 지속할 것을 결의했다. 이 회의에서 고무우카와 그의 측근들은 당과 국가 기능에서 제거되었다.
1953년 11월, PZPR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비밀 회의에서는 공공 보안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PZPR 지도부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테러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을 찾고 있음을 시사했다.
2. 3. 고무우카 시기 (1956-1970)

1956년 3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직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가 열려 볼레슬라프 비에루트를 기렸다. 이 회의에서 예지 알브레히트와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다. 비에루트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PZPR 지도부는 '나토린'과 '푸와비안'이라는 두 파벌로 나뉘었다. 나토린 파벌은 고무우카 해빙에 반대했으며, 프란치셰크 유즈비악, 빅토르 크로시에비츠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푸와비안 파벌은 폴란드 사회주의의 더 큰 자유화를 추구했으며, 포즈난 6월 사건 이후 블라디슬라프 고무우카를 당 제1서기로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 로만 잠브로프스키와 레온 카스만이 주요 인물이었다. 두 파벌은 1950년대 말에 사라졌다. 결국 중도주의자 에드바르트 오하프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1956년 7월, PZPR 중앙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에서 나토린과 푸와비 파벌이 다시 충돌했다. 나토린 파벌은 1956년 포즈난 시위를 반혁명적 행위로 보았고, 푸와비 파벌은 이를 경제적 성격의 대중 시위로 보았다.
1957년 10월, PZPR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체회의에서 고무우카는 당의 약점의 주요 원인으로 수정주의와 청산을 지적했다. 당원 검증 결의안이 통과되어 1958년 5월까지 전체 당원 및 후보 207,000명(15.5%)이 당에서 제명되었다. 1960년대 고무우카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지식인(특히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에 대한 박해를 지지했다. 1958년 7월, PZPR 중앙위원회 서기국 회의에서 교회에 대한 정책과 관련하여 서한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교회와의 새로운 대결 국면이 시작되었다. 10월 이후의 종교 정책 자유화는 전술적 조치에 불과했다.[8]
처음에는 개혁으로 인기가 높았고 ''고무우카 해빙''으로 알려진 시대를 시작했지만, 소련의 압력을 받았다. 고무우카는 1968년 바르샤바 조약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에 참여했다. 또한 학생들을 박해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했으며, 반 시온주의 선전 캠페인을 선동했다.
1960년 1월, PZPR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당 최고 직위에 많은 인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예지 모라프스키의 중앙위원회 서기 자리는 리샤르트 스트셸레츠키가 차지했다. 10월 변화의 적극적인 참여자들을 숙청함으로써 핵심 직위에서 인적 교체가 이루어졌다.
1963년 7월, PZPR 중앙위원회 제13차 전체회의는 이념적 문제에 집중했다. 고무우카는 "문화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위협은 수정주의라고 여기며, 서구에 대한 파괴적인 매력과 무분별한 비판을 비난했다.
1964년 6월, PZPR 제4차 대회는 소위 소규모 안정화를 강화했다. 고무우카는 향후 경제 계획을 제시하고, 분열 활동에 대해 중국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비판했다. 에우게니우시 쉬르와 프란치셰크 바니올카가 정치국의 새로운 멤버가 되었다. 1964년 말, PZPR에는 160만 명 이상의 당원이 있었다.
1967년 5월, PZPR 중앙위원회 제8차 전체회의에서 제논 클리슈코는 예술가들에게 사회주의 승리를 위한 영웅과 "일하는 사회주의적 접근"을 홍보하도록 호소했다.
1968년 7월, PZPR 중앙위원회 제12차 전체회의에서 에드바르트 오하프는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대한 항의로 정치국 및 중앙위원회 위원직에서 사임했다. 11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이 참석한 PZPR 제5차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제시되었다. 미에치스와프 모차르는 정치국 부위원 및 중앙위원회 서기 직만 유지했다.
1969년 6월, 당 통제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1968년이 PZPR의 새로운 후보자 수에서 기록적인 해였다고 보고되었다. 1968년 12월 31일 현재, PZPR에는 210만 명의 당원 및 후보가 있었다.
1970년 12월, 조선소 노동자들과의 피의 충돌로 인해 고무우카는 사임하고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당 지도부를 이어받았다.
2. 4. 기에레크 시기 (1970-1980)

1960년대 후반,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개인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하고 당의 젊은 기술 관료 계파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1970년 말 경제 상황에 대한 폭동이 일어나자 기에레크는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를 당 제1서기로 교체했다.[9] 기에레크는 경제 개혁을 약속하고 산업 현대화와 소비재 가용성 증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시행했으며, 이는 주로 해외 차관을 통해 이루어졌다.[10]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를 비롯한 서방 정치인들과의 좋은 관계는 서방의 원조와 차관을 받는 촉매가 되었다.
1971년 12월 6일부터 11일까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6차 대회가 열렸으며, 100만 명의 공산당원을 대표하는 1,804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역동적인 발전"과 "폴란드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프로그램이 채택되었다. 동시에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권력 구조에서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제2 폴란드 공화국 시대에 폴란드 공산당에서, 그리고 이후 폴란드 노동자당에서 활동했던 구세대는 사라졌다. 그 자리는 스탈린주의 폴란드 청년 연합에서 경력을 시작한 "젊은이"들이 차지했다. 기에레크는 자신의 지지자들로 정치국을 채우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11]
PZPR의 당원 수는 빠르게 증가하여, 1970년에는 230만 명의 당원이 있었다. 이루어진 많은 변화는 소련의 패턴을 따랐으며, 기에레크는 "우리 당의 자리는 소련 공산당과 함께하며,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자리는 소련과 함께한다"고 선언했다. 1972년 가을, 폴란드 인민 공화국 국무원은 보수 측면에서 국가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을 특권화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973년 봄, 폴란드 청년 사회주의 연맹이 설립되었으며, PZPR의 지도 아래 운영되는 이 조직은 청소년을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신으로 교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74년, 당 간부를 교육하기 위해 PZPR 중앙위원회에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 문제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74년 2월 4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차 전국 회의에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 30주년 교육을 위한 노동자들의 위대하고 보편적인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삶의 질은 개선되지 않았다.
1975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7차 대회가 열렸다. 기에레크는 정치국의 프로그램 보고서인 "사회주의 건설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 국가의 더 높은 품질의 작업과 생활 조건"을 발표했다.
1976년 12월 1일부터 2일까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 회의가 "제7차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대회의 사회 경제 프로그램의 일관된 이행, 관리 효율성 향상을 위해"라는 슬로건으로 열렸다.
1978년 1월 9일에서 10일까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2차 전국 회의가 "업무 품질 및 생활 조건 개선 프로그램의 일관된 이행, 선도 정당의 권력 강화 및 국가의 도덕적, 정치적 통일성 심화를 위해"라는 슬로건으로 열렸다.
1970년대 초 폴란드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지만, 폴란드 경제는 1973년 석유 파동 동안 흔들리기 시작했고, 1976년에는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졌다. 1976년 6월 시위에서 새로운 시위가 발생했고, 강제로 진압되었지만, 계획된 가격 인상은 중단되었다.[12] 높은 대외 부채, 식량 부족, 구식 산업 기반으로 인해 1980년에 새로운 경제 개혁이 강요되었다. 다시 한번, 가격 인상은 특히 그단스크 조선소와 슈체친 조선소에서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했다. 기에레크는 연대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파업 권리를 인정해야 했다. (그단스크 협정).
2. 5. 야루젤스키 시기 (1981-1989)
1981년 2월 11일, 야루젤스키는 폴란드 총리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린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제1서기인 스타니스와프 카니아가 사임했고, 중앙위원회는 180:4의 투표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후임으로 선출하여 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게 했으며, 이로써 제1서기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과 행정부의 최고위직에 군인이 증가했다.솔리다리티 탄압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소련 총리인 니콜라이 티호노프에게 이 계획을 제시했다. 1981년 12월 13일, 야루젤스키는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82년, 야루젤스키는 공산주의자들이 위성 정당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했던 조직인 국민통일전선을 민족 부흥 애국 운동으로 재활성화했다.
1985년, 야루젤스키는 총리와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하고, 대통령직에 해당하는 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이 되었으며, 그의 권력은 "LWP" 장군과 폴란드 인민군의 하급 장교로 구성된 그의 측근에 집중되고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988년 12월 20일부터 21일까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체회의의 첫 번째 부분이 개최되었지만, 회의는 1월 중순까지 중단되었다. 야루젤스키는 심각한 국가 상황에 공동 책임을 지는 반대 세력의 일부를 포섭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면서, 계획된 원탁회의에 반대하는 "강경파"로 간주되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5명 중 6명의 활동가를 제거했다. 얀나우스 레이코프스키 등이 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 승진했다.
1989년 1월 16일부터 18일까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체회의의 두 번째 부분이 개최되었다. 반대 세력과의 합의 계획을 비판하는 발언에 직면하여, 미오도비치의 발언이 가장 심했는데, 야루젤스키는 자신의 사임뿐만 아니라 라코프스키 총리, 키슈차크 장관, 시비츠키 장관, 그리고 정치국 위원 치이레크와 바르치코프스키의 사임을 위협했다. 이 상황에서, 원탁회의 반대자들은 준비된 행동 계획이나 유력한 지도자가 없었기에 추가적인 저항을 포기했다. 정권은 이 사건을 자국의 목적에 이용했고, 이틀 후 치오세크는 마조비에츠키와 오르줄릭 신부와의 대화에서 중앙위원회 회의에서의 분쟁을 철권 통치를 복원하려는 쿠데타 시도로 제시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야루젤스키의 "개혁적" 팀이 당의 교조주의자들에 의해 대체될 수 있으므로, 반대 세력에게 너무 높은 요구를 하지 않도록 제안했다.
2. 6. 민주화와 PZPR 해산 (1989-1990)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폴란드에서 정치 개혁을 자극했고, 1988년 12월, 파업 이후 폴란드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은 연대 지도자들에게 회담을 요청해야 했다.[13]1989년 2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94차례의 폴란드 원탁 회담에서 13개의 실무 그룹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13]
이 협상은 새로 창설된 양원제 입법부에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는 데 합의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국가 원수이자 행정 수반 역할을 할 새로운 대통령 직책을 만들었다. 연대는 또한 합법적인 조직으로 선언되었다. 다음 폴란드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하원에서 65%의 의석을 얻었지만, 확보된 의석으로 과반수를 얻을 수 없었다. 반면 자유롭게 경쟁한 상원 100석 중 99석은 연대 지지 후보가 차지했다. 야루젤스키는 대통령 투표에서 1표 차이로 승리했다.[13]
야루젤스키는 레흐 바웬사를 설득하여 연대를 공산주의자들과 "대연정"에 포함시키는 데 실패했고,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사무총장직에서 사임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두 동맹 정당은 오랫동안 유지해 온 동맹을 깨고 야루젤스키로 하여금 1948년 이후 폴란드 최초의 비공산주의 총리인 연대의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임명하게 했다. 야루젤스키는 1990년 폴란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고, 12월에 바웬사가 그의 뒤를 이었다.[13]

1990년 1월부터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의 붕괴는 불가피해졌다. 전국적으로 당 재산의 도난과 기록 보존을 막기 위해 당사 점거가 시작되었다. 1990년 1월 29일, 당을 재건하기 위한 제11차 대회가 열렸다. 결국,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은 해산되었고, 일부 당원들은 두 개의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 정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1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받았는데, 이는 모스크바 차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30만 달러는 좌파 신문인 ''트리뷰나''를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고, 20만 달러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직원 퇴직금으로, 50만 달러는 러시아에 반환되었으며, 20만 달러는 차관을 분할 상환하는 데 사용되었다.[13]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전 활동가들은 폴란드 공화국 사회민주주의(SdRP)를 설립했고, 주요 조직자들은 레셰크 밀레르와 미에치슬라프 라코프스키였다. 사회민주주의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승계하고 재산 분할을 돕는 역할을 했다. 1980년대 말까지는 주로 관리 재산과 RSW 회사 '프레스-북-트래픽'으로부터 상당한 수입을 올렸으며, 이 회사는 특별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당비 수입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수입의 30%에 불과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해산과 사회민주주의 창설 이후, 나머지 활동가들은 폴란드 공화국 사회민주주의 연합(USdRP)을 결성했고, 이는 폴란드 사회민주연합과 7월 8일 운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차관은 폴란드의 정치에서 논란을 일으켰고 1년 동안의 수사를 초래했다. 결국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13]
1990년 말, 옛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에 속했던 재산 인수를 놓고 Sejm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3000개 이상의 건물과 부지가 재산에 포함되었으며, 그 중 거의 절반이 법적 근거 없이 사용되었다. 인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재산이 약탈과 사회 전체가 모은 국고 보조금에 기초하여 건설되었다고 주장했다. 사회민주주의 반대자들은 이 재산이 당비로 조성되었다고 주장하며, 당시 재산을 관리하던 사회민주주의에 재산 상속을 요구했다. 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개인 재산과 계좌는 의회 위원회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13]
1990년 11월 9일, Sejm은 "구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에 속했던 재산의 취득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부동산을 국고가 최종적으로 인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92년까지 주로 지방 정부에 의해 부동산의 일부만 인수되었고, 나머지 부동산에 대한 법적 분쟁은 2000년까지 이어졌다. 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개인 재산과 자금은 사실상 사라졌다. 사회민주주의 의원의 발표에 따르면, 당 재산의 90~95%는 퇴직금으로 배정되거나 사회 지원을 위해 기부되었다.[13]
3. 프로그램 및 목표
1989년까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은 독재 권력을 행사했으며, 비대해진 관료 기구, 군대, 비밀 경찰, 그리고 경제를 통제했다.[1] 당의 주요 목표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전 세계에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1]
서류상으로는 당은 민주집중제를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당국의 민주적 임명, 의사 결정 및 활동 관리를 전제로 했다.[1] 이러한 당국은 주요 기관의 정책과 구성을 결정했지만, 규정에 따르면 5~6년마다 열리는 총회 구성원들의 책임이었다.[1] 회기 사이에는 지역, 군, 구 및 작업 위원회가 당 회의를 개최했다.[1] PZPR의 가장 작은 조직 단위는 사업장, 학교, 문화 기관 등에서 기능하는 기본 당 조직(FPO)이었다.[1]
PZPR에서 주요 역할을 한 것은 전문 정치인, 또는 주요 국가 기관, 사회 단체 및 노동 조합을 관리하도록 추천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소위 "당의 핵심"이었다.[1] PZPR 발전의 절정기(1970년대 말)에는 350만 명 이상의 당원이 있었다.[1] 중앙위원회 정치국, 사무국 및 지역 위원회는 중앙 부처에서 작은 국영 및 협동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름에 '국가'가 들어가는 모든 조직 내에서 당 내의 주요 직책을 임명했는데, 이는 노멘클라투라 시스템이라고 불렸다.[1] 경제의 특정 분야, 예를 들어 농업에서는 노멘클라투라 시스템이 PZPR의 승인과 그 동맹국인 연합인민당(농업 및 식품 생산), 민주당(무역 공동체, 소규모 기업, 일부 협동 조합)에 의해 통제되었다.[1] 폴란드 계엄령이 시작된 후, 이들과 다른 정당들을 조직하기 위해 국가 부흥 애국 운동이 창설되었다.[1]
4. 구조
도(voivodeship) 당 조직의 최고 법적 권한은 도 회의였으며, 회의 기간 동안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도 위원회였다. 당의 현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 위원회는 집행부를 선출했다. 도 회의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와 협의하여 공식적으로 최소 1년에 한 번 소집되었다. 도 위원회 전체 회의는 최소 2개월마다, 집행 회의는 주 1회 소집되었다.[14]
실제로 도 회의 및 도 위원회 전체 회의 개최 빈도는 법적 기준에서 벗어나 더 적게 개최되었다. 폴란드 각 지방의 도 당 회의 및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도 위원회 전체 회의의 날짜와 주요 주제는 일반적으로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의 날짜 및 주제와 연관되었다. 이 회의들은 주로 중앙 위원회의 결의와 결정을 지방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할애되었다. 도 위원회는 독자적인 회의 계획을 수립하는 데 있어 자유가 없었다. 민주적 중앙집권제의 원칙에 따라, 주도권은 최고 기관의 결의 및 명령을 이행하는 데에만 발휘될 수 있었다.[14]
도 당 조직과 그 권한의 종속성은 또한 그 활동이 거의 전적으로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 위원회로부터 받은 보조금으로 재정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되었다. 당비는 수입의 10%를 넘지 않았다.[15]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도 회의 사이의 도 위원회 활동은 공식적으로 감사 위원회(이 회의에서 선출)에 의해 통제되었다. 처음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도 위원회의 예산 집행 및 회계만 검토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 활동 범위가 확대되어 당원증 관리, 기밀 문서 보안, 당에 접수된 불만 사항 처리 등을 포함했다. 수행된 검사 건수가 체계적으로 증가했으며, 위원회의 작업은 더욱 계획적이고 공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5. 역대 지도자
(1892–1956)

(1906–1989)

(1905–1982)

(1913–2001)

(1927–2020)

(1923–2014)
(1926–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