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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텐블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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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퐁텐블로궁은 프랑스 일드프랑스 지역에 위치한 궁전으로, 12세기부터 프랑스 왕들의 거주지 및 사냥터로 사용되었다. 프랑수아 1세 시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되었으며, 앙리 2세, 앙리 4세, 루이 14세 등 여러 왕들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특히 퐁텐블로궁의 장식은 '퐁텐블로파'로 불리는 예술가들의 활동을 통해 프랑스 매너리즘 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1981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프랑스 르네상스 및 제정 시대의 화려한 예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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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텐블로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퐁텐블로 성
퐁텐블로 성
위치퐁텐블로, 센에마른주, 프랑스
유네스코 세계유산 명칭퐁텐블로 궁전과 공원
유네스코 지정 번호160
유네스코 지정 기준(ii), (vi)
유네스코 지역유럽 및 북미
개요
프랑스어 명칭Château de Fontainebleau
로마자 표기Syato de Pongtenbeullo
설명파리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랑스 왕궁
지정세계유산 (1981년)
역사
설명다양한 프랑스 군주들의 거주지
건축
특징다양한 건축 양식의 조화
일반 정보 (일본어)
일본어 명칭퐁텐블로 궁전과 정원
일반 정보 (한국어)
한국어 명칭퐁텐블로 궁

2. 역사

퐁텐블로는 12세기 후반 루이 7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고, 토마스 베켓이 왕을 위해 예배당을 봉헌하면서 역사에 등장한다.[5] 이후 필리프 2세루이 9세에게 사랑받는 거주지가 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궁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건축가 질 르 브레통은 남쪽 문인 Porte Dorée(황금문)를 포함하여 Cour Ovale(타원형 안뜰)의 건물 대부분을 건립했고,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이 초빙되었다. 로소 피오렌티노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프랑수아 1세의 화랑은 1522년에서 1540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프랑스 최초의 대규모 장식 화랑이었다.[5]

퐁텐블로라는 이름을 부여한 샘, 퐁텐 벨-오


"퐁텐블로"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물의 샘"을 의미하는 "퐁텐 벨-오"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성에서 멀지 않은 영국 정원에 위치한 자연 담수 샘이다.[5]

앙리 2세와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은 건축가 필리베르 드 로름과 장 불랑을 통해 궁전을 확장했다. 특히,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와 니콜로 델'아바테 등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무도회장을 장식했다. 앙리 2세 사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은 종교 전쟁에 대비하여 샤토 주변에 해자를 파는 등 보안을 강화했다.

앙리 4세는 퐁텐블로 궁전에 가장 많은 증축을 한 왕으로 기록된다. 그는 타원형 안뜰을 확장하고, 새로운 파사드를 개조하여 건축적 조화를 이루었으며, 관청 정원(Cour des Offices)을 건설했다. 또한, 디아나 갤러리와 사슴 갤러리를 건설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테니스 코트인 대형 ''주 드 폼''을 추가했다.[10][11] 클로드 몰레가 조성한 정원에는 길이 1200미터의 대운하가 만들어졌다.

루이 13세는 퐁텐블로에서 태어나고 세례를 받았으며, 장 안드루에 뒤 세르소에게 말굽 계단을 재건축하도록 했다. 루이 14세앙드레 르 노트르루이 르 보에게 대형 파테르를 프랑스식 정원으로 재설계하도록 하고, 연못 중앙에 정자를 지었다. 그는 또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등 외국 손님들을 맞이했다. 표트르 1세는 퐁텐블로를 방문했으나, 프랑스식 사냥과 궁전의 규모에 만족하지 못했다.[12][13]

루이 15세는 궁정 사람들을 위한 숙소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정원과 건물을 지었다. 앙주 자크 가브리엘은 분수 정원과 잉어 연못을 따라 새로운 날개를 건설했고, 국왕 자문 회의를 위한 새로운 회의실이 당대 주요 화가들에 의해 장식되었다. 루이 16세 역시 궁전에 추가 공사를 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한 터키 스타일의 살롱과 게임 룸, 아라베스크 스타일의 ''부두아''가 만들어졌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가구는 경매에 팔렸지만, 건물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를 군사 학교로 사용하고, 교황 비오 7세와의 만남 장소로 활용했다. 그는 퐁텐블로를 자신의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아파트들을 엠파이어 스타일로 재단장했다. 1814년,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퇴위하고, 근위대 군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샤를 10세는 퐁텐블로에 머물렀지만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루이 필리프 1세는 일부 방을 복원하고 재장식했다. 나폴레옹 3세는 퐁텐블로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관습을 재개하고, 많은 방들을 복원했으며, 새로운 극장을 건설했다. 황후 외제니는 중국 박물관을 만들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퐁텐블로는 프로이센군에 점령되었고, 군 본부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에는 대통령들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여러 국빈들이 방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예술 학교가 설립되었고, 1927년에는 국립 박물관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에 점령되었고, 전쟁 후에는 나토 본부로 사용되었다.

샤를 드 골 대통령 시절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졌고, 1981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15년에는 중국 박물관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6]

2. 1. 중세 시대 (12세기)

루이 7세는 12세기 후반 퐁텐블로 지역의 오래된 성을 사용했다.[5] 1169년에는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영국 사제 토마스 베켓이 루이 7세를 위해 예배당을 봉헌했다.[7] 퐁텐블로는 필리프 2세와 루이 9세가 사랑하는 거주지였다.

퐁텐블로 궁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137년 루이 7세 치하에서 이루어졌지만, 아마도 필리프 1세 (1060년~1108년) 치세에 부르고뉴 공국에서 가티네 지역이 병합되면서 더 일찍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부한 사냥감과 주변 숲의 많은 샘물 때문에 프랑스 왕들의 여름 별장과 사냥터가 되었다.

최초의 샤토는 사각형의 "돈존" 또는 성채, 즉 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타워였다. 3층 높이였으며, 약 50제곱미터의 면적을 차지했다. 하단 벽은 3미터, 상단 벽은 1미터 두께였으며, 돌로 만들어졌고, 북쪽과 남쪽으로 창문이 있었으며,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왕은 중간층에 거주했다. 원래 타워는 이후 스타일에 맞춰 재건되었으며, 여전히 타원형 안뜰의 일부이다.[6]

루이 7세는 성 가까이에 있는 탁발 수도회인 삼위일체 수도회의 수도원 건설을 후원했다.[7]

2. 2. 르네상스 시대 (16세기)

프랑수아 1세 (1494–1547)의 통치 시대에 소박했던 중세 시대의 성은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건축가 질르 르 브르통에게 새로운 궁전을 짓도록 의뢰했는데, 그는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 정문인 쿠르 오발(Cour Ovale), 즉 타원형 안뜰을 만들었다. 그는 한쪽 면에 원래의 중세 성채를 보존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기념비적인 건물인 포르트 도레(Porte Dorée), 즉 황금 문을 추가했다. 북쪽에는 르네상스식 계단이 있는 또 다른 건물인 포르티크 드 세를리오(Portique de Serlio)를 지어 왕실 아파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8]

1528년경부터 프랑수아 1세는 Galerie François I|프랑수아 1세 갤러리프랑스어를 건설하여 자신의 아파트에서 삼위일체교회 예배당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건축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와 피렌체 출신 화가 로소 피오렌티노를 이탈리아에서 불러와 새로운 갤러리를 장식하도록 했다. 1533년에서 1539년 사이에 로소 피오렌티노는 왕을 찬양하는 벽화로 갤러리를 채웠으며, 이 벽화는 부조로 된 회반죽 장식과 가구 제작자 프란체스코 스치벡 다 카르피가 조각한 ''람브리''로 장식되었다. 또 다른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 (프랑스에서는 "프리마티체"라고 불림)는 나중에 갤러리 장식에 합류했다. 회화와 조각의 정교한 혼합은 최초의 퐁텐블로 파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데 기여했다.[9] 프랑수아 1세의 문장인 불꽃에 둘러싸인 도롱뇽은 그가 대 갤러리에 의뢰한 각 그림 옆에서 발견된다.[9]

1540년경 프랑수아 1세는 성에 또 다른 주요 시설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삼위일체교단의 재산에서 매입한 성 동쪽 부지를 사용하여 넓은 안뜰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각형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북쪽으로는 각료관, 동쪽으로는 페라레 관, 남쪽으로는 새로운 율리시스 갤러리가 있는 관으로 둘러싸였다. 성은 파빌리온과 프랑스 최초의 동굴 정원이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 양식의 새로운 공원으로 둘러싸였다.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는 율리시스 갤러리를 위해 더욱 기념비적인 벽화를 제작했다.[8]

필리베르 드 로름이 제작한 백마정원(Courtyard of Cheval Blanc)의 오리지널 말굽형 계단 (1559)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한 후, 앙리 2세는 샤토를 계속 확장했다. 국왕과 그의 부인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은 건축가 필리베르 드 로름과 장 불랑을 이 작업에 참여시켰다. 그들은 하부 정원의 동쪽 날개를 확장하고 말굽 모양의 계단으로 장식했는데, 이 계단은 나중에 확장되어 샤토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의 주요 프로젝트는 새로운 왕실 아파트의 입구로 설계된 타원형 정원이었다. 그들은 프란시스 1세가 원래 계획했던 로지아를 코퍼 천장이 있는 살 데 페트(Salle des Fêtes), 즉 대형 무도회장으로 개조했다. 분수 정원과 연못을 마주하고 있었다. 새로운 무도회장의 장식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의 벽화와 정교한 스투코 조각으로 특징지어졌다. 매너리즘 화가 프리마티초와 니콜로 델'아바테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9]

앙리 2세가 마상 시합 사고로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이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세 아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진행했다. 그녀는 프리마티초를 새로운 왕실 공공 사업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오늘날 벨 슈미네(Belle Cheminée)의 날개로 알려진 부분을 설계했는데, 정교한 굴뚝과 두 개의 대칭 계단으로 유명하다. 1565년, 종교 전쟁으로 인한 보안 조치로, 그녀는 또한 샤토 주변에 해자를 파서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9]

2. 3. 부르봉 왕조 시대 (17-18세기)

앙리 4세는 프랑수아 1세 이후 퐁텐블로 궁전에 가장 많은 증축을 한 왕이다. 그는 티베르(Tiber)와 룩셈부르크(Luxembourg)라는 두 개의 파빌리온을 건설하여 타원형 안뜰을 서쪽으로 확장했다. 1601년부터 1606년까지 생사튀르냉 예배당(chapel of Saint-Saturnin)을 포함하여 안뜰 주변의 모든 파사드를 개조하여 건축에 더 큰 조화를 이루게 했다. 동쪽에는 새로운 기념비적인 돔형 정문인 세례소 문(Porte du Baptistère)을 건설했다. 1606년에서 1609년 사이에는 부엌과 궁정 관리의 거주지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안뜰인 관청 정원(Cour des Offices) 또는 앙리 4세 구역(Quartier Henry IV)을 건설했다. 디아나 갤러리(Gallery of Diana)와 사슴 갤러리(Gallery of Deer)라는 두 개의 새로운 갤러리가 건설되어 디아나의 오래된 정원을 둘러쌌다. 그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테니스 코트인 대형 ''주 드 폼''을 추가했다.[10][11]

두 번째 퐁텐블로 파 화가와 장식가 그룹이 내부 작업에 착수했다. 건축가 마르탱 프레미네는 화려한 삼위일체 예배당(chapel of the Trinity)을 만들었고, 화가 앙브루아즈 뒤부아와 투생 뒤브뢰유는 살롱을 위한 일련의 영웅적인 그림을 그렸다. 중앙 건물인 라 벨 슈미네(La Belle Cheminée)의 이름을 딴 새로운 별채가 대형 연못 옆에 지어졌다.

앙리 4세는 성 주변의 공원과 정원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만든 여왕의 정원 또는 디아나의 정원은 중앙에 디안느 분수가 있는 궁전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샤토 드 아네에서 훈련받은 앙리 4세의 정원사 클로드 몰레는 고대 조각상으로 장식되고 길로 분리되어 큰 사각형으로 나뉜 대형 화단인 파테르를 만들었다. 토마소 프란치니는 디아나 분수와 동굴을 만들었으며, 마리 드 메디치를 위해 룩셈부르크 정원에 있는 메디치 분수를 디자인했을 수도 있다. 남쪽에는 앙리가 소나무, 느릅나무, 과일나무를 심은 공원을 조성하고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자신의 대운하를 건설하기 60년 전에 길이 1200미터의 대운하를 만들었다.[10]

루이 13세는 퐁텐블로 궁전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으며, 부친 앙리 4세가 시작한 공사를 이어갔다. 그는 삼위일체 예배당의 장식을 완성했고, 궁정 건축가 장 안드루에 뒤 세르소에게 필리베르 드 로름이 설계했던 말굽 계단을 재건축하도록 했다. 이 계단은 이후 백마 정원(Cour de Cheval Blanc)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사후, 미망인인 오스트리아의 안은 프리마티스가 설계한 분수 정원(Court of the Fountain) 옆, 여왕 모후의 날개(Aile des Reines Mères) 내의 아파트를 재단장했다.[12]

루이 14세는 다른 군주보다 퐁텐블로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매년 여름 말과 가을 초에 그곳에서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궁전 외관에는 거의 변화를 주지 않았지만, 그의 연인 마담 드 맹트농을 위해 새로운 아파트를 짓고, 앙드레 샤를 불의 주요 작품으로 가구를 비치했으며, 프랑수아 1세 갤러리 아래에 있던 오래된 목욕탕 아파트를 철거하여 왕족들을 위한 새로운 아파트를 만들었다. 또한 왕의 아파트도 일부 개조했다. 건축가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사슴 갤러리와 다이애나 갤러리 옆에 새로운 날개를 건설하여 궁정에 더 많은 생활 공간을 제공했다. 그는 공원과 정원에 큰 변화를 주었다. 앙드레 르 노트르루이 르 보에게 대형 파테르를 프랑스식 정원으로 재설계하도록 의뢰했으며, 앙리 4세가 큰 연못 옆에 지었던 매달린 정원을 없애고, 대신 르 보가 설계한 정자를 연못 중앙의 작은 섬에 지었다.

루이 14세는 왕관을 포기한 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를 포함하여 많은 외국 손님을 그곳에서 맞이했다. 1657년 11월 10일, 크리스티나는 궁전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말의 관리자이자 연인으로 알려진 잔 린알도 몬알데스키|잔 린알도 몬알데스키sv 후작이 적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배신했다고 의심하여, 자신의 하인들을 시켜 궁전의 홀에서 그를 쫓아가 칼로 찔러 죽였다. 루이 14세는 궁전에서 그녀를 만나 살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녀가 여행을 계속하도록 허락했다.

1717년 5월 19~20일, 루이 14세 사망 후 섭정 시대 동안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가 퐁텐블로의 손님으로 방문했다. 그를 위해 사슴 사냥과 연회가 열렸지만, 대표단의 회원들이 나중에 출판한 회고록에 따르면 표트르는 프랑스식 사냥을 싫어했고, 다른 프랑스 왕실 거주지에 비해 궁전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퐁텐블로의 일상도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는 와인보다 맥주를 선호했고(직접 가져오기도 했다) 프랑스 궁정과는 달리 일찍 일어나는 것을 좋아했다.[12][13]

루이 15세의 개조 프로젝트는 루이 14세의 그것보다 더 야심 찼다. 그는 엄청난 수의 궁정 사람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기 위해 1737~38년에 사슴 갤러리의 동쪽에 콘시에르주리 정원(Cour de la Conciergerie) 또는 왕자 정원(Cour des Princes)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원을 지었다. 백마 정원(Cour du Cheval Blanc)에서는 율리시스 갤러리의 날개가 헐리고 1738~1741년과 1773~74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새로운 벽돌과 돌 건물로 대체되어 파빌리온과 소나무 동굴 쪽으로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750년에서 1754년 사이, 루이 15세는 콩코르드 광장과 쁘띠 트리아농을 설계한 건축가 앙주 자크 가브리엘에게 분수 정원과 잉어 연못을 따라 새로운 날개를 건설하도록 의뢰했다. 오래된 파빌리온 데 포엘(Pavilion des Poeles)은 철거되고 크림색 돌로 지어진 그로 파빌리온(Gros Pavilion)으로 대체되었다. 이 건물 내부에는 국왕과 왕비를 위한 호화로운 새 아파트가 만들어졌다. 국왕 자문 회의를 위한 새로운 회의실은 프랑수아 부셰, 샤를 앙드레 반 로, 장 밥티스트 마리 피에르, 알렉시스 페로트를 포함한 당대의 주요 화가들이 장식했다. 벨 슈미네(Belle Cheminée)의 날개 1층에는 훌륭한 작은 극장이 만들어졌다.

루이 16세 또한 그의 궁정 사람들을 위한 더 많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궁전에 추가 공사를 했다. 프랑수아 1세 갤러리 옆에 새로운 건물이 건설되었다. 이 건물은 1층에 큰 새 아파트와 1층에 여러 개의 작은 아파트를 만들었지만, 프란시스 1세 갤러리의 북쪽 창문을 막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아파트는 개조되었고, 1777년에는 그녀를 위해 터키 스타일의 살롱이, 1786-1787년에는 게임 룸이, 아라베스크 스타일의 ''부두아''가 만들어졌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6년에 퐁텐블로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14]

2. 4. 프랑스 혁명과 제정 시대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퐁텐블로 궁전은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모든 가구는 경매에 팔렸다. 건물은 센에마른주의 중앙 학교가 점유했다가 1803년 나폴레옹이 군사 학교를 설치했다.[10] 1804년 교황 비오 7세가 나폴레옹 황제 대관을 위해 로마에서 퐁텐블로로 와서 나폴레옹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궁전을 자신의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와 황후를 위해 아파트들은 새로운 엠파이어 스타일로 재가구 및 장식되었다. 쿠르 뒤 슈발 블랑(Cour du Cheval Blanc)은 쿠르 도뇌르(Cour d'Honneur), 즉 명예의 안뜰로 이름이 바뀌었다. 안뜰을 마주보는 한쪽 날개인 알 드 페라르(Aile de Ferrare)는 철거되어 장식용 철제 울타리와 문으로 대체되었고, 궁전의 정면이 보이게 되었다. 막시밀리앙 조제프 위르토 조경 설계사에 의해 디안의 정원과 소나무 정원은 다시 심어지고 영국식 정원으로 바뀌었다.

1812년에서 1814년 사이, 퐁텐블로 궁전은 교황 비오 7세를 위한 매우 우아한 감옥 역할을 했다. 1810년 11월 5일, 성의 예배당은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미래의 나폴레옹 3세의 세례식에 사용되었으며, 나폴레옹은 그의 대부로, 황후 마리 루이즈는 그의 대모로 참석했다.[10]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4일, 원수 , 베르티에, 르페브르의 압력으로 퐁텐블로에서 퇴위했다. 4월 20일, 자살 시도에 실패한 후, 그는 명예의 안뜰에 모인 근위대 군인들에게 감정적인 작별을 고했다. 백일천하 기간 동안, 그는 1815년 3월 20일에 퐁텐블로에 들렀다.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쓴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의 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진정한 왕의 거처, 세기의 집. 엄격하게 건축적인 궁전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잘 생각되고 완벽하게 적합한 거처였다. 그것은 확실히 유럽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자리 잡은 궁전이었다.프랑스어

2. 5. 복고 왕정 ~ 제2제정 시대 (19세기)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샤를 10세는 퐁텐블로 궁전에 머물렀지만 궁전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루이 필리프 1세는 더 적극적으로, 일부 방을 복원하고 다른 방은 자신의 시대 스타일에 맞게 재장식했다. 근위대 홀과 식기 갤러리는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무도회장 아래의 기둥 홀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그는 세브르 국립 제조소에서 제작한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추가했다.[14]

나폴레옹 3세는 퐁텐블로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특히 여름철에 퐁텐블로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관습을 재개했다. 사슴의 갤러리와 같은 많은 역사적인 방들은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으며, 황제와 황후의 취향에 맞게 개인 아파트가 재장식되었다. 사용하지 않는 건물 공간에 수많은 손님용 아파트가 마련되었다. 18세기에 지어진 궁전의 오래된 극장은 1856년 벨 슈미네(Belle Cheminée) 별관에서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다. 1854년에서 1857년 사이에 건축가 엑토르 르퓌엘은 루이 16세 양식의 새로운 극장을 건설했으며, 이곳에서 파리의 극장 유명 배우들이 황제의 손님들을 위해 연극의 일부를 공연했다.[14]

그로 파빌리온(Gros Pavilion) 1층에는 황후 외제니가 작지만 풍성한 박물관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1861년 샴 국왕으로부터 받은 선물과 베이징의 원명원 약탈 당시 가져온 예술 작품이 전시되었다. 또한 프란츠 자버 빈터할터, 조각가 샤를 앙리 조제프 코르디에를 포함한 현대 예술가들의 그림도 전시되었다. 그 옆, 루이 15세 별관에는 황제가 집무실을 마련했고, 황후는 래커 살롱을 만들었다. 이곳은 퐁텐블로의 왕족 거주자들이 마지막으로 만든 공간이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제2 제국이 멸망하고, 샤토는 폐쇄되었다.[14]

2. 6. 제3공화국 이후 (19세기 말-현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이던 1870년 9월 17일, 프로이센군이 퐁텐블로궁을 점령했고, 1871년 3월까지 프리드리히 카를 공이 군 본부로 사용했다.[15] 전쟁 후, 건물 두 채는 알자스독일에 병합되면서 그 지역을 떠나야 했던 응용 포병 학교의 본부가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들의 거처로 가끔 사용되었으며, 세르비아의 국왕 알렉산드르 1세 (1891), 그리스의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 (1892), 벨기에레오폴 2세 (1895), 스페인의 국왕 알폰소 13세 (1913)를 비롯한 국빈들을 맞이했다. 1920년 6월 26일에는 마지막 왕족 거주자였던 외제니 황후가 방문하기도 했다.

1913년 8월 20일, 주요 건물의 외관이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처음으로 보호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23년, 이곳은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예술 및 음악 학교인 미국 예술 학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1927년에는 국립 박물관이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 1856년에 불탔던 벨 슈미네 날개의 상층부는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40년 6월 16일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고, 11월 10일까지, 그리고 1941년 5월 15일부터 10월 말까지 다시 점령되었다. 전쟁 후, 궁의 일부는 서방 연합의 본부가 되었고, 이후 1966년까지 나토의 연합군 중앙 유럽/연합군 최고 사령부 유럽의 본부가 되었다.

샤를 드 골 대통령과 그의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 아래 1964년에서 1968년 사이에 궁의 전반적인 복원이 이루어졌다. 198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프랑스 문화부가 왕실 마구간을 매입하여 복원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는 제2제국 시대에 나폴레옹 3세가 건설한 궁의 극장 복원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아부다비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그 대가로 극장은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셰이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극장은 2014년 4월 30일에 개관했다.[15]

2015년 3월 1일, 궁의 중국 박물관이 전문 도둑들에게 강탈당했다. 그들은 오전 6시경에 침입했고, 경보와 비디오 카메라에도 불구하고 7분 만에 시암 정부가 나폴레옹 3세에게 선물한 시암 왕관의 복제품, 티베트의 만다라, 건륭제 (1736–1795) 치세의 에나멜 키메라를 포함하여 컬렉션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물건 약 15개를 훔쳐 갔다.[16]

3. 건축

퐁텐블로궁은 12세기부터 프랑스 왕들의 사랑받는 거주지였다. 루이 7세가 이 지역의 오래된 성을 사용했고, 토마스 베케트가 왕을 위해 예배당을 봉헌했다. 필리프 2세루이 9세도 퐁텐블로를 즐겨 찾았다.

현재 퐁텐블로궁의 건축 체계는 프랑수아 1세 때 시작되었다. 그는 건축가 질 르 브레통에게 남쪽 문인 Porte Dorée(황금문)를 포함한 Cour Ovale(타원형 안뜰)의 건물 대부분을 짓게 했다. 또한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초대했다. 로소 피오렌티노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프랑수아 1세 갤러리는 1522년에서 1540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프랑스 최초의 대규모 장식 갤러리였다.

르네상스 미술은 퐁텐블로를 통해 프랑스에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앙리 2세 시대에는 축제 홀(Salle des Fêtes)이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와 니콜로 델라바테에 의해 장식되었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퐁텐블로의 님프"도 퐁텐블로 궁전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 시대에는 건축가 필리베르 드 로름과 장 뷔랭에 의해 궁전이 크게 확장되었다. 앙리 4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왕의 중정"과 그 옆의 디안 드 푸아티에의 갤러리와 "수사슴의 갤러리"를 설치하여 서재로 사용했다. 이 시기 "제2 퐁텐블로파"가 탄생했지만, 제1파만큼 실험적이지는 않았다. 앙리 4세는 정원에 1200m 길이의 운하를 만들고 나무를 심었다.

필리프 4세, 앙리 3세, 루이 13세가 퐁텐블로궁에서 태어났고, 필리프 4세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1685년에는 루이 14세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낭트 칙령을 폐지했다.

3. 1. 주요 건축물


  • 중세 시대 성채(돈존): 12세기에 지어진 타원형 안뜰의 일부이다.[8]
  • 포르트 도레(Porte Dorée, 황금문): 질 르 브레통이 건축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기념비적인 건물이다.[8]
  • 포르티크 드 세를리오(Portique de Serlio): 질 르 브레통이 건축했으며 르네상스식 계단이 있어 왕실 아파트로 접근할 수 있다.[8]
  • 프랑수아 1세 갤러리: 로소 피오렌티노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르네상스 양식의 갤러리이다. 1533년에서 1539년 사이에 로소 피오렌티노는 왕을 찬양하는 벽화로 갤러리를 채웠으며, 이 벽화는 부조로 된 회반죽 장식과 가구 제작자 프란체스코 스치벡 다 카르피가 조각한 ''람브리''로 장식되었다.[9]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도 갤러리 장식에 참여했다. 프랑수아 1세의 문장인 불꽃에 둘러싸인 도롱뇽이 갤러리에 의뢰된 각 그림 옆에 있다.[9]
  • 무도회장(Salle des Fêtes): 앙리 2세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와 니콜로 델 아바테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앙리 2세의 이니셜인 'H'와 디안 드 푸아티에의 상징인 초승달 그림이 있다.[17] 19세기에 루이 필리프 왕은 천장의 코퍼 디자인을 복사한 나무 바닥을 추가했다.[18]
  • 벨 슈미네(Belle Cheminée) 날개: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가 설계했으며 정교한 굴뚝과 두 개의 대칭 계단이 특징이다.[9]
  • 생 사튀르냉 예배당: 앙리 4세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코퍼 천장과 돔으로 장식되어 있다. 앙리 2세의 문장인 도롱뇽이 아치석을 장식하고 있다.[22]
  • 세례소 문(Porte du Baptistère): 돔형 정문이다.[10]
  • 관청 정원(Cour des Offices) 또는 앙리 4세 구역(Quartier Henry IV): 부엌과 궁정 관리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10]
  • 디아나 갤러리(Gallery of Diana)와 사슴 갤러리(Gallery of Deer): 디아나의 오래된 정원을 둘러싸고 있다.[10]
  • 대형 주 드 폼(실내 테니스 코트):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테니스 코트이다.[10]
  • 삼위일체 예배당: 마르탱 프레미네가 설계했으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 말굽 계단: 필리베르 드롬이 설계했으며, 장 안드루에 뒤 세르소가 재건축했다.
  • 그로 파빌리온(Gros Pavilion): 앙주 자크 가브리엘이 설계했으며 국왕과 왕비의 아파트와 왕립 의회 회의실을 포함하고 있다.
  • 나폴레옹 3세 극장: 엑토르 르퓌엘이 설계했으며 루이 16세 양식이다.

4. 내부

퐁텐블로 궁전 내부는 12세기 후반 루이 7세 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토마스 베켓이 예배당을 봉헌하기도 했다. 필리프 2세와 루이 9세도 이곳을 애용했다.

현재 모습은 프랑수아 1세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건축가 질 르 브레통이 남문 등을 건축했고, 세바스티아노 세르리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초청되었다. 로소 피오렌티노가 제작한 프레스코화는 프랑스 최초의 대규모 장식 갤러리로, 르네상스 미술이 프랑스에 전래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앙리 2세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는 필리베르 드 로름과 장 뷔랭에게 궁전 확장을 맡겼다. 앙리 4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중정과 갤러리를 설치하고, 정원에 운하를 만드는 등 대대적인 건축 정비를 통해 "제2 퐁텐블로파"를 탄생시켰다.

필리프 4세, 앙리 3세, 루이 13세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필리프 4세는 사망했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낭트 칙령을 폐기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러시아의 표트르 1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7세 등 여러 왕족과 교황비오 7세, 호찌민도 이곳에 머물렀다.

1980년대부터 퐁텐블로 궁전 내부는 미술관으로 공개되었으며, 황후의 중국 박물관(1863), 나폴레옹 1세 박물관(1986), 회화 갤러리(1998), 가구 갤러리(2009)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Boud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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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침실

4. 1. 주요 공간

Galerie François Ier프랑스어는 프랑스 르네상스 장식의 초기이자 가장 훌륭한 예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1528년 왕의 아파트와 타원형 안뜰, 트리니타리안 수도원의 대 예배당 사이의 통로로 시작되었으나, 1531년 프랑수아 1세는 이를 왕실 아파트의 일부로 만들었다. 1533년부터 1539년 사이, 로소 피오렌티노 또는 프리마티초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 출신 예술가와 장인들이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장식했다.[8] 통로 하단 벽은 이탈리아 가구 제작의 대가인 프란체스코 스치벡 다 카르피의 작품으로, 프랑스 문장과 왕의 문장인 도롱뇽으로 장식되었다.[9] 상단 벽은 풍부하게 조각된 스투코로 된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으며, 왕의 미덕을 나타내기 위해 신화적 장면을 묘사했다.

프랑수아 1세 갤러리
창가 쪽반대편



무도회장(Salle des Fêtes)은 원래 프랑수아 1세가 만든 열린 통로였으나, 1552년경 앙리 2세가 높은 창문과 화려한 코퍼 천장으로 폐쇄하고 축하와 무도회를 위한 방으로 바꾸었다.[17] 앙리 2세의 이니셜 'H'와 그의 애인 디안 드 푸아티에의 상징인 초승달 그림이 장식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7] 19세기에 루이 필리프 왕은 천장 디자인을 복사한 정교한 나무 바닥을 추가했다.[18] 동쪽 끝에는 기념비적인 벽난로가 있는데,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가 로마 원본을 복사하여 제작한 두 개의 사티로스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17] 방 동쪽 끝 위에는 음악가 갤러리가 있다. 벽과 기둥의 프레스코는 1552년부터 프리마티초의 그림을 따라 니콜로 델 아바테가 그렸다.[19] 무도회장의 정원 쪽에는 ''수확'', ''불카누스(Vulcan, 신화)|불카누스]]가 비너스(Venus, 신화)|비너스]]의 요청에 따라 사랑을 위한 무기를 제조하는 모습'' 등이, 타원형 안뜰 쪽에는 ''바쿠스(Bacchus)의 잔치'', ''아폴론(Apollo)과 뮤즈(Muses)가 파르나소스 산(Mount Parnassus)에 있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20]

생 사튀르냉 예배당(chapel of Saint-Saturnin)은 무도회장 뒤편에 있다. 하부 예배당은 원래 12세기에 지어졌으나, 프랑수아 1세 시대에 화려한 코퍼 천장과 돔으로 완전히 재건되었다.[22] 1546년에 거의 완공되었으며, 앙리 2세의 문장인 도롱뇽이 아치석을 장식하고 있다.[22] 1554년 앙리 2세 시대에 건축가 필리베르 드 로름이 두 개의 높은 대리석 기둥으로 지탱되는 새로운 오르간 로프트를 건설했다. 루이 필리프 1세의 딸 오를레앙의 마리 공주(1813–1839)가 디자인하고, 세브르에서 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19세기에 설치되었다.[23]

왕의 계단은 1748년과 1749년에 설치되었으며, 프랑수아 1세 시대에 왕의 총애를 받던 안 드 피슬뢰 에탕프 공작 부인의 침실이 있던 공간에 자리 잡았다. 건축가 앙주-자크 가브리엘이 설계했으며, 초기 방의 많은 장식 요소를 사용했다. 벽 상단은 타원형과 직사각형 패널로 나뉘어 알렉산더 대왕의 사랑 이야기를 묘사한 장면이 있으며, 프리마티초의 여성 조각상으로 틀이 잡혀 있다. 동쪽 벽은 재건축 동안 파괴되었으며, 19세기에 아벨 드 푸졸의 그림으로 대체되었다.

마리 드 메디치부터 외제니 황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모든 여왕과 황후들이 여왕의 침실에서 잠을 잤다. 침대 위 화려한 천장은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을 위해 가구 제작자 기욤 누아예가 1644년에 만들었으며, 그녀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이 방은 1746년부터 1747년까지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에 의해 로코코 양식으로 재장식되었다. 벽난로 장식도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다. 문은 아라베스크 디자인으로 되어 있으며, 1787년에 설치된 문 위의 조각된 패널과 마찬가지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만들어졌다. 침대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지만, 혁명과 그녀의 처형 이후인 1797년에 도착하여 혁명 직후 샤토 가구 판매를 면했다. 대신 나폴레옹의 아내인 조제핀 황후와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가 사용했다. 벽은 1805년에 꽃과 새 디자인의 장식용 섬유 덮개를 받았고, 1968년부터 1986년까지 원래의 직물을 모델로 복원되었다. 방의 가구는 모두 제1제국 시대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두아(Boudoir)는 여왕의 침실 옆에 있으며, 1786년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방은 프랑스 혁명 직전의 장식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 고대 로마 양식에서 영감을 받아 섬세하게 그려진 아라베스크, 카메오, 꽃병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방은 게임룸을 제작했던 것과 동일한 예술가와 장인 팀에 의해 만들어졌다. 설계는 건축가 피에르 루소(1751–1829)가 맡았고, 나무 패널은 라플라스가 조각했으며, 미셸 위베르 부르주아와 루이 프랑수아 투제가 그림을 그렸다. 장 시몽 베르텔레미가 그린 천장화는 오로라와 천사 그룹을 묘사한다. 가구는 장 앙리 리즈네르가 이 방을 위해 디자인했으며, 최고급 재료를 사용했다. 원통형 책상과 테이블을 포함한 일부 원본 가구가 남아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게임 룸은 1786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제1 제국 시대에 유행했던 아라베스크 스타일의 주목할 만한 예시이다. 벽은 회색조와 단색 묘사로 덩굴 식물, 흐르는 로브를 입은 여성, 무용수 등으로 채워져 있다. 같은 디자인이 마호가니 문에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방은 현재 엠파이어 스타일로 가구가 비치되어 있다.

1808년 나폴레옹은 앙리 4세부터 루이 16세까지 프랑스 왕들의 옛 침실에 자신의 즉위실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시대에는 왕의 침대가 프랑스 왕권의 상징이었고, 궁정 사람들은 침대 옆을 지나갈 때 경례를 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이 과거 프랑스 군주국들과의 연속성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조각된 나무 천장, 나무 판넬 하단 부분, 문 대부분은 루이 13세 시대에 만들어졌다. 즉위실 바로 위 천장은 루이 14세 통치 말기에 만들어졌다. 루이 15세는 새로운 벽난로, 벽난로 근처의 조각된 나무 메달리온 등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여왕의 침실 천장과 일치하도록 천장을 흰색으로 칠하고 금박을 입혔으며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이니셜과 제국 독수리가 새겨진 기장을 추가했다. 즉위실 주변의 장식은 원래 1804년 자코브-데스말테르가 생클루 성을 위해 디자인했으며, 1804년에 만들어진 왕좌 자체는 튈르리 궁에서 가져온 것이다. 벽난로는 원래 필리프 드 샹페뉴가 그린 루이 13세의 초상화로 장식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동안 불에 탔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로베르 르페브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로 대체했다. 1834년, 루이 필리프 왕은 나폴레옹의 그림을 치우고 샹페뉴 학파의 화가가 그린 루이 13세의 다른 그림으로 대체했다.

회의실은 프랑스 왕들과 나중에는 황제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가 가장 가까운 고문들과 만났던 곳으로, 왕좌의 방과 가까웠다. 원래는 프랑수아 1세의 사무실이었으며, 덕과 고대 영웅들을 묘사한 프리마티초의 그림이 있는 나무 패널로 장식되었다. 루이 14세 때 방이 확장되었고, 장식가인 클로드 오드랑도 같은 주제를 따랐다. 이 방은 건축가 앙주 자크 가브리엘에 의해 1751년에서 1754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재장식되었으며, 미덕을 묘사한 아케이드와 나무 패널, 장바티스트 마리 피에르와 카를 반 로가 그린 계절과 원소의 알레고리가 있었다. 아치형 천장의 다섯 점의 그림은 프랑수아 부셰의 작품으로, 사계절과 태양이 여행을 시작하여 밤을 쫓아내는 모습을 묘사한다. 1773년 루이 15세가 방의 정원 쪽에 반원형 로톤다를 추가했으며, 루이 장 프랑수아 라그르네가 그린 천장화에는 자녀들에게 둘러싸인 영광이 묘사되어 있다. 이 방은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회의실로 사용되었으며, 가구는 그 시대의 것이다.

1804년, 나폴레옹은 기존의 왕실 아파트와는 별도로 궁 안에 자신의 아파트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프랑수아 1세 갤러리 옆, 루이 16세를 위해 1786년에 만들어진 6개의 방으로 구성된 공간을 차지하여 엠파이어 스타일로 재단장했다. 이전 아파트에는 드레스룸(''cabinet de toilette''), 서재, 도서관, 욕실이 있었다.

1808년부터 나폴레옹은 침실을 왕의 이전 화장실로 옮겼다. 이 방에서 침대 오른쪽에 있는 커튼 뒤에 숨겨진 문을 사용하여 나폴레옹은 바로 자신의 개인 서재나 1층 사무실로 갈 수 있었다. 원래 장식의 대부분은 루이 16세 시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벽은 프리데릭-시몽 뫼치가 하얀색 바탕에 황제의 상징을 금색으로 칠했다. 황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침대는 엠파이어 스타일의 정점을 이루며, 황제의 독수리로 장식되고 영광, 정의, 풍요를 나타내는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황제는 살랑두르에서 레지옹 도뇌르 십자 모양의 특별한 카펫을 만들었다. 방 천장의 그림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루이 18세에 의해 추가되었다. 장-바티스트 레뇨가 그린 그림은 '왕의 관용이 정의의 과정을 멈추는 것'을 나타내는 알레고리이다.

나폴레옹의 '''개인 살롱''' 또는 '''서재'''는 단순하게 가구와 장식이 되어 있었다. 1814년 황제가 퇴위 서명을 한 것은 이 방에 전시된 작은 테이블 위였다. 황제의 작고 소박한 '''욕실'''에는 단순한 면 커튼으로 둘러싸인 주석 처리된 구리 욕조가 있었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또한 발을 담글 수 있는 니스 칠한 금속 욕조도 있었다.

교황 및 여왕 모후의 아파트는 여왕 어머니와 그로 파빌리옹의 날개 1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대관식을 위해 파리로 가는 길에 그곳에 머물렀던 교황 비오 7세의 1804년 방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는 1812년부터 1814년까지 나폴레옹의 면밀한 감시하에 원치 않게 그곳에 다시 머물렀다.[24]

원래는 앙리 2세의 침실로 설계되었지만, 암살 이후 그의 미망인인 여왕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와 오스트리아의 안의 아파트가 되었다. 또한 루이, 그랑 도팽, 루이 14세의 장남의 집이기도 했다. 18세기에 루이 15세의 딸들이 사용했고, 그 다음에는 루이 16세의 형제인 프로방스 백작이 사용했다. 제1제정 시대에는 나폴레옹의 형제인 루이 보나파르트와 그의 아내인 황후 조세핀의 딸인 여왕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사용했다. 루이 필리프 통치 기간에는 그의 장남인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가 사용했다. 제2제정 시대에는 나폴레옹 1세의 양조카인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가 사용했다. 1859-1861년에 복원되었으며, 그 후 높은 지위의 손님들에게 사용되었다. 원래는 두 개의 아파트였으며, 입주자에 따라 수년에 걸쳐 분리되거나 합쳐졌다.

리셉션 살롱은 루이 13세의 아내이자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의 침실로 들어가는 앞방이었다. 이 방에는 7개의 구획으로 나뉜 금박 조각 천장이 있으며, 태양과 알려진 행성, 군사 트로피를 위한 작은 구획이 있다. 이 천장은 나중에 파괴된 샤토의 일부인 파빌리옹 데 포엘르에 있는 앙리 2세의 침실을 위해 1558년에 앙브루아즈 페레가 만들었다. 안은 그것을 방으로 옮겨 펠리컨을 포함한 그녀 자신의 상징으로 장식했다. 방의 나무 패널은 아마도 같은 시대의 것일 것이다. 침실의 장식은 1650년대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천장의 구획에 있는 그로테스크한 그림이 포함되어 있으며, 샤를 에라르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참나무 잎과 푸티가 특징인 풍성하게 조각된 나무 패널, 미네르바로 분장한 오스트리아의 안과 풍요의 화신으로 분장한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의 문 위의 그림은 모두 질베르 드 세브의 작품이다.

트리니티 예배당은 트리니타리안 수도원의 옛 예배당을 대체하기 위해 프랑수아 1세 통치 말기에 시작되었다. 이 예배당은 앙리 2세 시대에 완공되었지만, 1608년까지 장식이 없었다. 조각가 바르텔레미 트렘블레는 스투코와 조각으로 천장의 아치를 만들었다. 화가 마르탱 프레미네는 천장과 벽에 프레스코를 디자인하였다. 프레미네의 중앙 아치 그림은 하느님의 출현부터 노아방주를 띄우는 모습(관람석 위), 수태고지까지 인간의 구원을 묘사했다. 1613년에서 1619년 사이에 프레미네와 트렘블레는 예배당 측면의 창문 사이에 스투코 프레임에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들을 추가했다. 트리니티 예배당은 파리의 생트 샤펠과 다른 왕실 예배당과 마찬가지로, 왕과 그의 가족이 앉는 상부 섹션 또는 관람석과 별도의 입구가 있었고, 나머지 궁정이 배치되는 하부가 있었다. 1628년부터 측면 예배당은 철제 문과 조각된 나무 패널로 장식되었고, 피렌체 조각가 프란체스코 보르도니가 대리석 제단 작업을 시작했다. 장 드부아 (장로)가 그린 제단 위의 성 삼위일체 그림은 1642년에 추가되었다. 1741년에 왕실 관람석이 확장되었고, 화려한 단철 발코니가 왕실 관람석과 음악가와 미사를 읊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더 단순한 발코니 사이에 추가되었다. 1779년 루이 16세 치하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된 프레미네의 그리스도 생애를 묘사한 프레스코는 같은 주제의 새로운 그림으로 대체되었다. 1725년 9월 5일, 이 예배당에서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1810년 11월 4일에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고,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 루이 필리프 국왕의 아들은 1837년 5월 30일에 이곳에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 공작부인과 결혼했다.

근위병의 방(Salle des Gardes)은 항상 왕의 침실 옆에 위치해 있었다. 근위병의 방은 샤를 9세 통치 기간에 지어졌다. 1570년대부터 남은 원래 장식의 흔적이 있다. 19세기에는 루이 필리프가 이 방을 살롱으로 개조하여 천장의 디자인을 반영한 이국적인 목재의 새로운 나무 바닥과 기념비적인 벽난로(1836)로 재장식했다. 나폴레옹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 홀은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디아나 갤러리는 길이 80미터(242.4피트)의 복도로, 현재 책장이 놓여 있으며, 17세기 초 앙리 4세에 의해 왕비가 산책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졌다. 앙브루아즈 드 부아와 그의 작업장에서 1605년부터 시작된 아치형 천장의 그림들은 사냥의 여신 디아나 신화의 장면들을 묘사했다. 19세기 초, 갤러리는 폐허가 되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이곳을 자신의 제국의 업적을 기리는 갤러리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1814년까지 복도는 재건되었지만, 나폴레옹이 실각했을 때 제국에 관한 그림 연작은 시작되지 않았다. 왕정이 복원된 후, 루이 18세는 갤러리를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완성했다. 나폴레옹의 연작을 위해 준비된 그림 액자를 사용하여 메리조제프 블롱델과 아벨 드 퓌졸이 디아나 여신에 대한 새로운 연작을 완성했다. 1853년부터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복도는 도서관으로 바뀌었고, 장바티스트 모제스가 그린 말 탄 앙리 4세의 대형 초상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림이 제거되었다. 1861년에 갤러리 입구 근처에 놓인 커다란 지구본은 튈르리 궁전에 있는 나폴레옹의 집무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국 박물관은 연못 근처의 ''그로 파빌리온'' 1층에 위치해 있으며, 황실 거주지였던 시절에 샤토 내에서 마지막으로 장식된 방 중 하나였다. 1867년, 황후 외제니는 1861년 시암 국왕이 황제에게 보낸 사절단이 선물한 물품과 1860년 영불 연합군이 중국으로 파병하여 베이징 인근 원명원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가져온 기타 물품을 포함하는 자신의 아시아 미술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이 방들을 개조했다. 현관에 전시된 물품에는 시암 국왕이 기증한 두 개의 왕실 가마가 있는데, 하나는 왕을 위해, 다른 하나는 여왕을 위해 (커튼이 달린) 디자인되었다. 박물관의 두 살롱 내부에는 17세기 중국 병풍에서 가져온 옻칠된 검은색과 금색 나무 패널로 벽의 일부가 덮여 있으며, 골동품 도자기 꽃병을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케이스도 있다. 전시된 기타 물품으로는 중국 원명원에서 가져온 부처가 들어있는 티베트 , 나폴레옹 3세에게 기증된 시암 왕실 대관 등이 있다. 살롱은 아시아와 유럽의 가구와 예술품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 중국 박물관 외에도 황후는 1868년 루이 15세 관 1층, 황제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옻칠 패널과 아시아 미술품으로 장식된 작은 사무실인 옻칠 살롱을 만들었다. 이곳은 제국의 몰락과 샤토가 박물관으로 최종 변모하기 전에 장식된 마지막 방이었다.

퐁텐블로 궁에서는 콘서트, 연극 및 기타 공연이 궁정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루이 15세 치세 이전에는 궁의 여러 방에서 공연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벨-슈미네(Belle-Cheminée) 별관에 극장이 건설되었다. 이 극장은 건축가 가브리엘에 의해 재건되었지만 185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미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는 너무 작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854년에는 루이 14세 별관의 가장 동쪽 끝에 새로운 극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 극장은 건축가 엑토르 르퓌엘이 루이 16세 양식으로 설계했으며, 베르사유 궁전 오페라 극장과 쁘띠 트리아농의 여왕의 극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새로운 극장은 파르테르(parterre)에 400석, 2개의 발코니, 말굽 모양의 박스를 갖추고 있었으며, 1856년에 완공되었다. 이 극장에는 원래의 무대 기계 장치와 많은 오리지널 세트가 보존되어 있다. 극장는 제2제국이 끝나고 폐쇄되었으며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2007년에 아부다비 정부에서 1,000만 유로를 지원하여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대가로 극장은 셰이크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14년 4월 30일에 개관했다.[15]

나폴레옹 1세 박물관은 1986년 명예의 안뜰 오른쪽에 있는, 제1제국 시대의 왕자들이 사용했던 공간에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나폴레옹 가족의 초상화 갤러리, 훈장과 장식물,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 사용된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제국의 식탁에서 사용된 자기와 장식품, 그리고 황제의 아들인 로마 왕나폴레옹 2세의 요람, 장난감 및 기타 기념품이 소장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군사 원정 기념품 컬렉션도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텐트와 가구, 그리고 그가 원정 시 가지고 다녔던 실용적인 물품들이 재현되어 있다.

5. 정원

앙리 4세는 프랑수아 1세 이후 그 어떤 왕보다도 퐁텐블로 궁에 많은 증축을 했으며, 특히 정원과 공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궁전 북쪽에는 카트린 드 메디치가 만든 여왕의 정원 또는 디아나의 정원이 있었고, 중앙에는 디아나 분수가 있었다. 앙리 4세는 정원사 클로드 몰레를 시켜 고대 조각상으로 장식되고 길로 분리된 큰 사각형 화단인 파테르를 만들었다. 토마소 프란치니는 디아나 분수와 동굴을 만들었는데, 그는 마리 드 메디치를 위해 룩셈부르크 정원의 메디치 분수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남쪽에는 앙리 4세가 소나무, 느릅나무, 과일나무를 심은 공원을 조성하고,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대운하를 건설하기 60년 전에 길이 1200m의 대운하를 만들었다.[10][11]

루이 13세는 부친이 시작한 공사를 이어갔으며, 그의 사후 오스트리아의 안은 분수 정원 옆 여왕 모후의 날개 내 아파트를 재단장했다.[12]

루이 14세는 퐁텐블로에서 매년 여름 말과 가을 초에 사냥을 즐겼다. 그는 앙드레 르 노트르루이 르 보에게 대형 파테르를 프랑스식 정원으로 재설계하도록 했고, 앙리 4세가 만든 매달린 정원을 없애고 르 보가 설계한 정자를 연못 중앙 섬에 지었다.

루이 15세는 궁정 사람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기 위해 1737~38년에 사슴 갤러리 동쪽에 콘시에르주리 정원(왕자 정원)을 지었다. 루이 16세 또한 궁정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더 만들었으며,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6년에 퐁텐블로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14]

5. 1. 주요 정원

퐁텐블로 정원은 3세기에 걸친 프랑스 조경술을 보여준다. 프랑수아 1세가 궁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주변을 정형 정원으로 둘러쌌다. 16세기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조각상으로 가득한 프랑스 르네상스 정원을 조성했다. 앙리 4세는 정원을 대폭 확장했다. 1606년부터 1609년 사이에 앙리 4세는 인근 플뢰리앙비에르 궁에 있는 것과 유사한 길이 1200m의 대운하를 건설했다. 루이 14세앙드레 르 노트르에게 18세기 말에 뚜렷한 고전적인 프랑스식 정형 정원을 조성하도록 의뢰했다. 나폴레옹 1세의 제1제정 시대 동안, 왕실 조경가인 막시밀리앵 조제프 위르토는 구불구불한 길과 그림 같은 나무 숲이 있는 영국식 풍경 정원을 만들었다.[26]

'''파르테르(Parterre)'''

궁전 반대편, 프랑수아 1세의 정원 부지에 앙리 4세는 대규모 정형 정원 또는 파르테르를 조성했다. 1660년에서 1664년 사이에 루이 14세의 수석 정원사였던 앙드레 르 노트르루이 르 보는 기하학적 디자인과 회양목 울타리로 경계를 이루고 화려한 화단으로 채워진 길로 파르테르를 더욱 웅장하게 재건했다. 그들은 또한 운하의 머리에 폭포로 둘러싸인 레 카스카데(Les Cascades)라는 분지를 추가했다. 르 노트르는 운하 길을 따라 그늘 나무를 심었고, 운하와 평행하게 느릅나무가 늘어선 넓은 길을 조성했다.

루이 14세의 분수는 그의 통치 이후 제거되었다. 19세기에 카스카데는 고전 조각 작품으로 장식되었다. 1817년에는 중앙 분지에 대형 장식 분수가 설치되었다. 고대 로마 조각상 "티베르"의 청동 복제품이 1988년 원형 분지에 설치되었다. 이 조각상은 이전에 분지를 장식했던 16세기 조각상을 대체했다. 1664년 마티유 레스파냐델의 스핑크스 조각상 2개가 대운하의 난간 근처에 배치되어 있다.

'''디아나 정원(Garden of Diana)'''

디아나 정원은 앙리 4세 통치 기간에 조성되었으며, 왕과 왕비의 개인 정원으로 그들의 방 창문에서 보였다. 디아나 분수는 원래 정원 중앙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다른 날개로 둘러싸여 사무실이 있었고, 나중에는 루이 14세 치하에서 오랑제리가 있었다. 그 건물과 다른 건물인 옛 재상관은 19세기에 철거되어 정원의 크기가 두 배로 늘어났다.

17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정원은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식 정형 양식으로, 곧게 뻗은 길로 직사각형 화단으로 나뉘어 분수를 중심으로 조각상, 장식 식물, 화분에 담긴 감귤 나무로 장식되었다. 나폴레옹 1세 치하에서는 구불구불한 길과 그림 같은 풍경으로 묶인 나무가 있는 영국식 조경 정원으로 바뀌었고, 루이 필리프 치하에서는 확장되었다. 제3공화국 시대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중앙 분수는 이탈리아 분수 제작의 거장 토마소 프란치니가 제작했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파리의 뤽상부르 정원에 있는 메디치 분수가 있다. 어린 사슴과 함께 사냥의 여신 디아나의 청동상은 1684년 마를리의 다른 왕실 저택을 위해 켈러 형제가 만들었다. 이 작품은 교황 바오로 4세가 앙리 4세에게 선물한 고대 로마 조각상인 베르사유의 다이아나의 복제품이며,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602년 바르텔레미 프리어가 만든 분수의 원본 조각상은 궁전 내부의 사슴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분수 주변의 사냥개와 사슴 조각은 피에르 비아르 르네가 제작했다.

'''잉어 연못(Carp pond)'''

4ha 면적의 궁전 옆에 있는 큰 연못은 앙리 4세 시대에 처음 잉어가 채워졌으며, 궁정 사람들이 보트 파티를 즐기고, 식탁에 오르는 물고기를 얻고, 즐거움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26] 17세기의 궁전에 대한 묘사에는 손님들이 잉어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중 일부는 엄청난 크기에 달했으며, 백 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호수 중앙의 섬에 있는 작은 팔각형 집인 에탕 파빌리온(Pavillon de l'Ètang)은 루이 14세 시대에 추가되었고, 나폴레옹 1세 때 재건되었으며, 그의 이니셜로 장식되어 있다.

'''영국식 정원(English garden)'''

이 정원은 원래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소나무 정원으로 조성되었다. 퐁텐블로 궁전과 가까운 잉글리쉬 가든의 가장 먼 구석에는 프랑수아 1세의 원래 정원의 유일한 잔재가 남아있다. 프랑스 정원에 세워진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의 동굴로, 아틀라스 조각상 4개로 장식되었다.

나폴레옹의 조경 건축가인 막시밀리앵 조제프 위르토의 지휘 아래, 이 정원 부분은 구불구불한 길과 이국적인 나무가 있는 영국식 공원으로 개발되었다. 여기에는 카탈파, 튤립나무, 회화나무, 루이지애나산 사이프러스 나무를 심고, 그림 같은 시냇물과 고대 바위를 도입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이 정원에는 고대 로마 원본의 17세기 청동 복제품 2개가 있는데, 바로 ''보르게세 검투사''와 ''죽어가는 갈리아인''이다.

정원에서 나무 커튼을 지나면 벨-오 분수 또는 "퐁텐 벨-오"("아름다운 물의 샘")로 이어진다. 이 분수는 17세기에 궁전과 정원의 이름이 되었다. 이 분수는 1891년에 팔각형 분지로 재건되었고, 헤라 또는 "벨-오의 나이아스"의 고전적인 조각상이 근처에 추가되었다. 1980년대에는 정원에 더 현대적인 예술을 도입하기 위해, 궁전의 역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신화적 인물들의 조각상 그룹이 분수 주변에 배치되었다.[27]

'''대운하'''

앙리 4세는 1606-1609년에 길이 1200m의 대운하를 만들었다.

6. 퐁텐블로파

프랑스 르네상스 말기, 퐁텐블로 궁전의 장식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최고의 예술가와 장인들을 참여시켰다. 그들이 창조한 회화와 장식 스타일은 퐁텐블로파로 알려졌으며, 약 1530년부터 1610년까지의 시기를 아우른다. 이는 프랑스식 북부 매너리즘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28]

퐁텐블로파의 매너리즘 양식은 장 쿠쟁 (노년), 조각가 장 구종과 제르맹 필롱, 그리고 화가이자 초상화가인 장 쿠에의 아들 프랑수아 클루에 등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6. 1. 특징

퐁텐블로 궁전의 내장과 정원은 프랑스에 이탈리아의 매너리즘을 도입하여 프랑스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16세기 프랑스의 매너리즘 양식의 실내 장식은 "퐁텐블로파"로 알려져 있다. 퐁텐블로 양식은 조각, 금속 공예, 회화, 회반죽 장식, 목공을 조합하고, 야외 정원에는 도안화된 화단의 파르테르 등을 도입했다.[28] 퐁텐블로 양식에서는 우의적인 그림이 회반죽 몰드에 사용되었고, 아라베스크그로테스크가 사용되었으며, 테두리는 마치 가죽이나 종이처럼 절단면이 말려 올라간 형태로 마감되었다.[28]

퐁텐블로에서 여성미의 표현은 "매너리즘"적이다. 작고 깨끗한 얼굴과 긴 목, 과도하게 긴 몸통이나 사지, 작고 높은 위치에 있는 가슴 등과 같은 특징은 후기 고딕의 미의 표현으로 거의 회귀하고 있다.[28]

퐁텐블로에서의 새로움은 세련된 섬세한 조각의 의장에 있으며, 이것들은 감정가와 예술가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퐁텐블로파에 의한 조각을 통해 이 새로운 스타일은 안트베르펜을 필두로 독일, 마침내 런던까지 파급되었다.[28]

6. 2. 주요 예술가

프랑스 르네상스 말기, 퐁텐블로 궁전의 장식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최고의 예술가와 장인들이 참여했다. 그들이 창조한 회화와 장식 스타일은 퐁텐블로파로 알려졌으며, 약 1530년부터 1610년까지의 시기를 아우른다. 이는 프랑스식 북부 매너리즘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28]
제1 퐁텐블로파:1531년,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 로소 피오렌티노는 1527년 로마 약탈로 대부분의 재산을 잃은 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궁전 내부 작업을 했다. 1532년에는 또 다른 이탈리아 예술가인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볼로냐 출신)가 합류했다. 로소 피오렌티노는 1540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의 조언에 따라 니콜로 델 아바테(모데나 출신)는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에 의해 1552년 프랑스로 초청되었다.

이 "퐁텐블로 제1파"의 작품들은 광범위한 스투코 (몰딩과 액자)와 프레스코의 사용, 그리고 정교하고 (종종 신비로운) 알레고리신화적 도상 체계가 특징이다. 그로테스크, 스트랩워크, 아모르와 같은 르네상스 장식 모티프가 흔하며, 어느 정도의 에로티시즘도 나타난다.

제1 퐁텐블로파의 주요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다:

예술가설명
로소 피오렌티노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
니콜로 델 아바테
쥐스트 드 쥐스트 (c.1505–1559)프랑스-이탈리아 조각가이자 에처
루카 페니 (c.1500/1504–1556)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스키베크 다 카르피 (1557년경 사망)이탈리아 가구 제작자
벤베누토 첼리니 (1500–1570)이탈리아 조각가, 금세공인, 은세공인


제2 퐁텐블로파:위그노 전쟁 중인 1584년부터 1594년까지 궁전 내부 작업은 중단되었다. 앙리 4세는 왕위에 오르자, 퐁텐블로 건물을 개조했다. 이들은 때때로 "퐁텐블로 제2파"로 불린다.

제2 퐁텐블로파의 주요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다:

예술가출생
앙브루아즈 드부아 (c.1542–1614)플랑드르
투생 드브뢰유 (c.1561–1602)
마르탱 프레미네 (1567–1619)


7. 한국과의 관계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했다.[1] 2011년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되었지만, 대한민국과 프랑스 간 문화재 반환 문제는 계속 논의되고 있다.[2]

8. 유산 및 현재

1981년, 퐁텐블로궁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15] 퐁텐블로 궁전 내부는 1980년대부터 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4개의 박물관으로 나뉜다.

박물관 이름개관 연도
황후의 중국 박물관1863년
나폴레옹 1세 박물관1986년
회화 갤러리1998년
가구 갤러리2009년



1921년에는 미국 음악원(American Conservatory)이, 1923년에는 미술 학교가 루이 15세 관에 개교했다.[31]

참조

[1] 웹사이트 Fontainebleau http://www.collinsdi[...] 2014-09-24
[2] 서적 Fontainebleau - Mille and d'histoire de France Editions Talendier 2020
[3] 웹사이트 Fontainebleau, the royal castle near Paris https://www.parisdig[...] Paris Digest 2018-09-08
[4] 웹사이트 Palace and Park of Fontainebleau http://whc.unesco.or[...]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21-10-10
[5] 문서 History Plaque on the Fountain 2024-01
[6] 서적 Fontainebleau- Milles anes d'histoire de France 2020
[7] 서적 Fontainebleau- Milles anes d'histoire de France
[8] 서적 Fountainebleau, True Abode of Kings and Palace of the Ages
[9] 서적
[10] 웹사이트 Histoire de la salle de jeu de paume de Fontainebleau https://web.archive.[...] 2007-03-19
[11] 웹사이트 Cercle du jeu de paume de Fontainebleau https://web.archive.[...] 2020-04-29
[12] 서적 Взгляд из Европы: французские авторы XVIII века о Петре I. Саратов 2003
[13] 서적 Journal de la régence.
[14] 서적 Napoléon III et le Second Empire
[15] 뉴스 Coup de Theatre à Fontainebleau http://www.lefigaro.[...] Le Figaro 2014-04-25
[16] 뉴스 Le Figaro 2015-03-02
[17] 서적 2023
[18] 서적 2023
[19] 서적 2023
[20] 서적 2023
[21] 서적 2023
[22] 서적 2023
[23] 웹사이트 The chapelle basse Saint-Saturnin https://web.archive.[...] Palace of Fontainebleau 2016-02-23
[24] 서적 2023
[25] 서적 2023
[26] 서적 2023
[27] 문서 Information plaque on the fountain 2024-01
[28] 웹사이트 Oxford Dictionary of Art http://www.enotes.co[...]
[29]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5-05
[30] 서적 建築物・様式ビジュアルハンドブック 株式会社エクスナレッジ
[31] 웹사이트 FONTAINEBLEAU SCHOOLS OF MUSIC AND FINE ARTS/ LES ÉCOLES D'ART AMÉRICAINES DE FONTAINEBLEAU https://fontaineblea[...]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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