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타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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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타격군은 프랑스의 핵무력으로, 1950년대부터 개발되어 공중, 육상, 해상 기반의 핵무기를 운용해왔다. 1954년 프랑스 제4공화국 시기 핵무장 결정 이후, 샤를 드 골 대통령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부터 독립적인 핵 억지력을 구축하여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려 했다. 프랑스의 핵 억지력은 가치 보복 전략을 기반으로, 잠재적 적대국의 인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공격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현재는 공중 기반 전력으로 다소 라팔 전투기와 ASMP-A 미사일을, 해상 기반 전력으로 탄도 미사일 잠수함을 운용하며, 과거에는 지상 기반 미사일도 운용했으나 현재는 폐기되었다. 핵무기 보안은 헌병대가 담당하며, 대통령은 엘리제 궁 지하 벙커의 지휘소를 통해 핵무기 통제 및 위기 관리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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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타격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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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유형 | 핵무기 |
전략 | 핵 억지력 |
별칭 | Force de dissuasion (억지력) Force de frappe (타격력) |
역사 | |
설립 | 1954년 |
구성 | |
공군 | 공군 전략 항공대대 |
해군 | 해군 전략 해양대대 |
지휘 | |
대통령 | 에마뉘엘 마크롱 |
국방부 장관 |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
참모총장 | 티에리 뷔르카르 |
역대 핵 실험 | |
제라부아즈 블루 | 1960년 2월 13일 |
제라부아즈 블랑슈 | 1960년 4월 1일 |
제라부아즈 루즈 | 1960년 12월 27일 |
베릴 | 1961년 5월 1일 |
앙브루아즈 | 1962년 4월 25일 |
에렉테 | 1962년 6월 2일 |
팔라스 | 1966년 6월 5일 |
알데바란 | 1966년 7월 2일 |
레굴루스 | 1966년 9월 9일 |
카노푸스 | 1968년 8월 24일 |
프로시온 | 1968년 9월 8일 |
코리건 | 1970년 5월 15일 |
센토르 | 1970년 5월 30일 |
안드로메드 | 1970년 7월 3일 |
오리온 | 1970년 7월 25일 |
리겔 | 1971년 6월 4일 |
아크투루스 | 1971년 6월 19일 |
폴룩스 | 1971년 7월 2일 |
카펠라 | 1972년 6월 11일 |
베가 | 1972년 7월 2일 |
데네브 | 1972년 7월 21일 |
아타이르 | 1973년 5월 25일 |
알골 | 1973년 6월 16일 |
안타레스 | 1973년 7월 28일 |
플레아데스 | 1974년 6월 8일 |
알데바란 | 1974년 6월 28일 |
아셰르나 | 1974년 7월 17일 |
베로니카 | 1974년 9월 25일 |
시리우스 | 1975년 5월 30일 |
알마크 | 1975년 6월 27일 |
페가수스 | 1975년 7월 24일 |
폼알하우트 | 1975년 9월 5일 |
크시 | 1976년 5월 20일 |
오메가 | 1976년 6월 19일 |
에타 | 1976년 7월 2일 |
델타 | 1976년 12월 11일 |
알파 | 1977년 5월 25일 |
베타 | 1977년 6월 24일 |
감마 | 1977년 7월 12일 |
엡실론 | 1977년 12월 3일 |
카파 | 1978년 4월 27일 |
람다 | 1978년 5월 27일 |
뮤 | 1978년 6월 22일 |
이오타 | 1978년 11월 15일 |
테타 | 1979년 5월 29일 |
제타 | 1979년 6월 26일 |
에타 | 1979년 7월 25일 |
크시 | 1979년 11월 29일 |
2파 | 1980년 4월 25일 |
오미크론 | 1980년 5월 29일 |
람다 | 1980년 6월 27일 |
타우 | 1980년 12월 4일 |
웁실론 | 1981년 4월 23일 |
시그마 | 1981년 5월 29일 |
로 | 1981년 6월 26일 |
파이 | 1981년 11월 20일 |
키 | 1982년 4월 22일 |
프사이 | 1982년 5월 27일 |
오메가 | 1982년 6월 24일 |
2 키 | 1982년 12월 2일 |
2 프사이 | 1983년 4월 28일 |
2 오메가 | 1983년 5월 26일 |
3 키 | 1983년 6월 23일 |
안타레스 | 1984년 5월 16일 |
카펠라 | 1984년 6월 27일 |
데네브 | 1984년 11월 15일 |
알타이르 | 1985년 5월 21일 |
포말하우트 | 1985년 6월 26일 |
알골 | 1985년 12월 5일 |
베가 | 1987년 5월 13일 |
프로시온 | 1987년 6월 11일 |
폴룩스 | 1987년 11월 26일 |
시리우스 | 1988년 5월 11일 |
페가수스 | 1988년 6월 8일 |
아크투루스 | 1988년 12월 2일 |
플레아데스 | 1989년 5월 16일 |
알마크 | 1989년 6월 13일 |
미자르 | 1989년 12월 7일 |
베타 | 1990년 5월 16일 |
감마 | 1990년 6월 13일 |
델타 | 1990년 12월 12일 |
입실론 | 1991년 5월 15일 |
제타 | 1991년 6월 14일 |
세타 | 1991년 12월 11일 |
이오타 | 1992년 5월 14일 |
카파 | 1992년 6월 18일 |
람다 | 1992년 12월 2일 |
뮤 | 1993년 5월 13일 |
크시 | 1993년 6월 10일 |
오미크론 | 1995년 10월 3일 |
파이 | 1995년 10월 21일 |
로 | 1995년 12월 27일 |
시그마 | 1996년 6월 3일 |
타우 | 1996년 6월 27일 |
웁실론 | 1996년 12월 5일 |
2. 역사
프랑스의 핵무장 결정은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행정부 시기인 프랑스 제4공화국 시대인 1954년에 이루어졌다.[3] 1958년 샤를 드 골 대통령은 집권 후, 소련이나 다른 외국의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고, 미국이 지나치게 지배한다고 여겼던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부터 독립적인 완전한 ''핵 억지력''(Force de Frappe) 개념을 구체화했다. 프랑스는 소련의 서유럽 침공 시, 베트남 전쟁에 갇혀 미국에 대한 소련의 보복을 두려워한 미국이 서유럽의 동맹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드 골은 프랑스가 자국의 방어를 외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
''핵 억지력''의 전략적 개념은 가치 보복 전략으로, 잠재적 적대국의 인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다(상호 확증 파괴). 이 원칙은 프랑스에서 ''약자에서 강자로의 억제''(dissuasion du faible au fort)라고 불렸다. 피에르 마리 갈루아 장군은 "가장 비관적인 가정하에 프랑스 핵 폭격기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파괴할 수 있다. 프랑스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5]
당시 프랑스의 핵 태세는 상호 확증 파괴 및 대규모 보복과 같은 다른 정책들과 유사점을 보였다. 민간인 공격 정책은 당시 핵 정책과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국가들이 파괴된 도시 수로 핵 능력을 언급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수소 폭탄의 강력함 때문에 군사력과 인구 밀집 지역 목표의 실질적 차이는 불분명하다. 프랑스 전략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핵무기가 아닌 도발에도 선제 핵 공격 옵션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1960년 알제리에서 첫 핵무기 실험을 실시했고,[7] 1964년 일부 핵무기가 실전 배치되었다. 1968년에는 첫 수소 폭탄 실험을 남태평양 실험장에서 실시했다.
드 골의 핵 억지력 비전은 미국과 소련의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와 동일했다. 이 구성 요소에 대한 작업은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드 골 집권 후 가속화되었다.
2. 1. 핵무장 결정 배경
프랑스의 핵무장 결정은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행정부 시절인 1954년에 내려졌다.[3] 1958년 집권한 샤를 드 골 대통령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로부터 독립적인 완전한 핵 억지력 개념을 구체화했다. 특히 프랑스는 소련의 서유럽 침공 시 베트남 전쟁에 갇힌 미국이 동맹국을 돕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드 골은 프랑스가 자국의 방어를 외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핵 억지력''의 전략적 개념은 가치 보복 전략으로, 잠재적 적대국의 인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 원칙은 프랑스에서 ''약자에서 강자로의 억제''라고 불리며, 드 골은 "10년 안에 우리는 8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될 것이다. 8억 명의 프랑스인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8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가볍게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피에르 마리 갈루아 장군은 "프랑스 핵 폭격기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파괴할 수 있다. 프랑스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5]
마르크 드 조이버 제독은 저서 ''핵 평화''(1975)에서 억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침략하면 핵 수준에서 대응할 것을 미리 경고한다. 내 미사일 중 일부가 귀하의 집에 도달하여 파괴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니 노력을 포기하고 좋은 친구로 남아 있자."[6]
프랑스의 핵 태세는 상호 확증 파괴 및 대규모 보복과 유사했지만, 핵무기가 아닌 도발에도 선제 핵 공격 옵션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는 1960년 첫 핵무기 실험을 실시했고,[7] 1964년에는 일부 핵무기가 실전 배치되었다. 1968년에는 첫 수소 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드 골의 ''핵 억지력'' 비전은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를 갖추는 것이었고, 이 작업은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드 골 집권 후 가속화되었다.
2. 2. 핵 억지력 전략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행정부 시절인 1954년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 프랑스를 핵무기로 무장하려는 결정이 내려졌다.[3] 1958년 집권한 샤를 드 골 대통령은 소련이나 다른 외국의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고, 미국이 지나치게 지배한다고 여겨졌던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부터 독립적인 완전한 ''핵 억지력''(Force de Frappe) 개념을 구체화했다.[1] 프랑스는 베트남 전쟁에 갇혀 미국에 대한 소련의 보복을 두려워한 미국이 서유럽의 동맹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드 골은 프랑스가 자국의 방어를 외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핵 억지력''의 전략적 개념은 가치 보복 전략으로, 잠재적 적대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다(상호 확증 파괴). 이 원칙은 프랑스 정치 논쟁에서 ''약자에서 강자로의 억제''(dissuasion du faible au fort)라고 불리며, 드 골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10년 안에 우리는 8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될 것이다. 8억 명의 프랑스인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8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가볍게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만약 8억 명의 프랑스인이 있다면 말이다.[4]
피에르 마리 갈루아 장군은 "가장 비관적인 가정하에 프랑스 핵 폭격기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5]
프랑스 해군 마르크 드 조이버 제독은 저서 ''핵 평화''(La paix nucléaire, 1975)에서 억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귀하와 싸울 의사는 없지만, 침략하면 귀하의 규모에 맞는 유일한 신뢰할 수 있는 수준, 즉 핵 수준에서 대응할 것을 미리, 최대한 명확하게 경고한다. 귀하의 방어 수단이 무엇이든, 적어도 내 미사일 중 일부가 귀하의 집에 도달하여 귀하가 익히 아는 파괴를 초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귀하의 노력을 포기하고 좋은 친구로 남아 있자.[6]
당시 프랑스의 핵 태세는 상호 확증 파괴 및 대규모 보복과 같은 당시의 다른 정책과 유사점을 보였다. 프랑스 정부가 자국의 정책을 다른 나토 회원국 전략과 다르다고 진지하게 고려했는지, 아니면 대중의 발언이 프랑스 국민의 사기와 신뢰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민간인을 공격하는 정책은 당시의 전형적인 핵 정책에서 크게 벗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국가들이 파괴된 도시의 수로 핵 능력을 언급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수소 폭탄은 매우 강력하여 높은 민간인 사상자와 관련된 부수적 피해가 불가피하므로, 군사력을 목표로 하는 것이 인구 밀집 지역을 목표로 하는 것과 의미 있게 다른 결과를 낼지는 불분명하다. 프랑스 전략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핵무기가 아닌 도발에도 대응하여 선제 핵 공격 옵션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1960년 알제리에서 첫 번째 핵무기 실험을 실시했고[7], 1964년에는 일부 프랑스 핵무기가 실전 배치되었다. 1968년에는 첫 번째 수소 폭탄 실험을 남태평양 실험장에서 실시했다.
드 골의 ''핵 억지력'' 비전은 미국과 소련이 모두 배치한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와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성 요소에 대한 작업은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으며, 드 골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가속화되었다.
2. 3. 핵무기 개발 및 배치
프랑스를 핵무기로 무장하려는 결정은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행정부 시기인 1954년에 내려졌다.[3] 1958년 집권한 샤를 드 골 대통령은 미국이 지나치게 지배한다고 여겼던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부터 독립적인 ''핵 억지력''(Force de Frappe) 개념을 구체화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전쟁에 갇힌 미국이 소련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서유럽 동맹국을 돕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드 골은 프랑스가 자국의 방어를 외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핵 억지력''의 전략적 개념은 가치 보복 전략으로, 잠재적 적대국의 인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다(상호 확증 파괴). 이 원칙은 프랑스에서 ''약자에서 강자로의 억제''(dissuasion du faible au fort)라고 불렸으며, 드 골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피에르 마리 갈루아 장군은 "가장 비관적인 가정하에 프랑스 핵 폭격기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5]
프랑스 해군 마르크 드 조이버 제독은 저서 ''핵 평화''(La paix nucléaire, 1975)에서 억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랑스의 핵 태세는 상호 확증 파괴 및 대규모 보복과 유사했지만, 핵무기가 아닌 도발에도 선제 핵 공격 옵션을 포함한다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프랑스는 1960년 알제리에서 첫 번째 핵무기 실험을 실시했고[7], 1964년에는 일부 핵무기가 실전 배치되었다. 1968년에는 첫 번째 수소 폭탄 실험을 남태평양 실험장에서 실시했다.
드 골의 ''핵 억지력'' 비전은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를 포함했으며, 이 구성 요소에 대한 작업은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드 골 집권 후 가속화되었다.
2. 4. 핵 전력 변천사
프랑스를 핵무기로 무장하려는 결정은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행정부 시기인 프랑스 제4공화국 시대 1954년에 내려졌다.[3] 1958년 집권한 샤를 드 골 대통령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부터 독립적인 완전한 핵 억지력(Force de Frappe) 개념을 구체화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전쟁에 갇힌 미국이 소련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서유럽을 돕지 않을 것을 우려했고, 드 골은 프랑스가 자국 방어를 다른 국가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핵 억지력의 전략적 개념은 가치 보복 전략으로, 잠재적 적대국의 인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다(상호 확증 파괴). 이 원칙은 프랑스에서 ''약자에서 강자로의 억제''(dissuasion du faible au fort)로 불렸다.
피에르 마리 갈루아 장군은 "가장 비관적인 가정하에 프랑스 핵 폭격기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5]
프랑스 해군 마르크 드 조이버 제독은 저서 ''핵 평화''(La paix nucléaire, 1975)에서 억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프랑스의 핵 태세는 상호 확증 파괴 및 대규모 보복과 유사했지만, 민간인 공격 정책은 당시 핵 정책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국가들이 파괴된 도시 수로 핵 능력을 언급하는 것은 일반적이었고, 수소 폭탄의 강력함 때문에 군사력을 목표로 하는 것과 인구 밀집 지역을 목표로 하는 것의 차이는 불분명하다. 프랑스 전략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핵무기가 아닌 도발에도 선제 핵 공격 옵션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1960년 알제리에서 첫 핵무기 실험을 실시했고[7], 1964년 일부 핵무기가 실전 배치되었다. 1968년에는 첫 수소 폭탄 실험을 남태평양 실험장에서 실시했다.
드 골의 핵 억지력 비전은 미국과 소련의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와 동일했다.
3. 구성 요소
샤를 드 골 대통령의 비전에 따라, 프랑스 핵전력은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로 구성되었다.
프랑스 해군은 해상 전략 핵 전력(Force Océanique Stratégique)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때 6척의 원자력 탄도 미사일 잠수함을 운용했다. 2022년까지 프랑스 해군을 위해 건조된 10척의 SSBN은 다음과 같다.
함급 | 함명 | 취역 기간 | 탑재 미사일 | 비고 |
---|---|---|---|---|
레두타블급 잠수함 (6척) | 랑플렉시블'' (S 615) 등 | 1971년 ~ 2008년 | 16기의 M4 IRBM | 마지막 함 2008년 퇴역 |
트로피옹급 (4척) | 르 트로피옹 (S 616), 르 테메레르 (S 617), 르 비질랑 (S 618), 르 테리블 (S 619) | 1997년 ~ 현재 | 16기의 M51 SLBM[9] |
프랑스 해군 항공대(아에로나발)는 핵무장 항공기를 운용해 왔으며, 라팔 F3 전투기를 R91 ''샤를 드골''에 탑재하고 있다.
1971년 8월, 프랑스 공군 알비옹 공군 기지 200에 사일로 기반의 S2 중거리 탄도 미사일 18기가 배치되면서 프랑스 핵전력의 육상 기반 구성 요소가 시작되었다.[7] 그러나, IRBM인 아프-생-크리스톨 공군기지 200은 1996년에 폐쇄되었고, 미사일은 폐기되었다. ''플루통'' 및 ''아데스''와 같은 단거리 미사일을 장비한 모든 프랑스 육군 부대는 해산되었으며, 미사일은 폐기되었고, 핵분열성 핵 물질은 재활용되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는 더 이상 지상 배치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프랑스 해군과 프랑스 공군이 사용하는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 보호와 준비 태세를 보장하는 것은 헌병대의 5개 특수 부서 중 하나인 핵무기 보안 헌병대(프랑스어: Gendarmerie de la sécurité des armements nucléaires, GSAN)의 역할이다.[14]
엘리제 궁전 지하 벙커에 위치한 주피터 지휘소는 프랑스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위기 상황을 관리하고, 다른 정부 기관 및 군 지휘소, 외국 정부와 항상 연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통신 및 방어 수단을 갖추고 있다.
3. 1. 공중 기반 전력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행정부 시절인 1954년에 프랑스는 핵무장 결정을 내렸다.[3] 1958년 집권한 샤를 드 골 대통령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부터 독립적인 핵 억지력을 구체화했다.[1] 프랑스는 베트남 전쟁에 갇힌 미국이 서유럽 동맹국을 돕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드 골은 프랑스가 자국 방어를 외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프랑스의 핵 억지력 전략은 가치 보복 전략으로, 잠재적 적대국의 인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다(상호 확증 파괴). 이는 '약자에서 강자로의 억제'로 불리며, 드 골은 "10년 안에 우리는 8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4] 피에르 마리 갈루아 장군은 "프랑스 핵 폭격기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파괴할 수 있다. 프랑스는 러시아 도시 10곳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5]
프랑스는 1960년 첫 번째 핵무기 실험을 실시했고,[7] 1964년에는 일부 핵무기가 실전 배치되었다. 1968년에는 첫 번째 수소 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드 골의 핵 억지력 비전은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를 갖추는 것이었다. 1955년 창설된 프랑스 공군의 전략 항공 사령부(CFAS)는 쉬드 아비아시옹 보투르 IIB 폭격기 40대를 운용했다.[5] 1956년 5월, 다소 미라주 IV 폭격기가 필요하게 되었고,[5] 1964년 10월에 실전 배치되었다. 미라주 IV는 AN-11 폭탄, AN-22 폭탄, ASMP 미사일을 탑재했으며 1996년에 퇴역했다.
1973년부터 2003년까지 CFAS는 SEPECAT 재규어를 운용하여 AN-52 핵폭탄을 사용했다. 총 100대가 1972년부터 1982년까지 제작되었다. AN-52는 1991년에 비활성화되었다.
미라주 2000N은 1988년에 실전에 배치되었으며, 중력 폭탄, ASMP 및 ASMP-A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 미라주 2000N은 2011년 기준으로 다소 라팔 F3로 대체되고 있었다.
프랑스 공군은 ASMP-A 중거리 공대지 미사일 54기를 TNA (공중 핵탄두)와 함께 보유하고 있다.[10] 이 미사일들은 2018년 다쏘 미라주 2000N을 완전히 대체한 다쏘 라팔 B에 탑재된다.[11]
해군 항공대는 다쏘 라팔 M (CATOBAR 항공모함 탑재기)에서 ASMP-A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다. 이 항공기들은 랑디비지오 해군 기지와 항공모함 ''샤를 드 골''에 배치된다. 라팔 M은 미국 해군 항공모함에서도 운용할 수 있도록 인증되었다.[12]
핵미사일 위치는 기밀이다. 타격 항공기의 항속 거리는 KC-135와 에어버스 A330 MRTT 공중 급유 항공기에 의해 연장된다.
3. 2. 해상 기반 전력
샤를 드 골 대통령의 비전에 따라,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로 구성된 프랑스 핵전력의 해상 기반 구성 요소는 1971년 12월 첫 번째 탄도 미사일 잠수함인 원자력 잠수함 ''르 레두타블''의 취역과 함께 실전 배치되었다.[8] 이 잠수함은 초기에는 미국의 폴라리스 미사일과 유사한 16기의 M1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탑재했다.이후 프랑스 핵전력의 해상 기반 구성 요소는 4척의 잠수함으로 확장되었으며, 이 중 1척은 항상 순찰을 돈다.[8] 1985년부터는 노후화된 잠수함을 대체하여 각각 16개의 미사일 발사관을 갖추고 더 진보된 프랑스 M45 미사일을 탑재한 새로운 잠수함이 도입되었다. 2010년 9월 20일에는 미국의 트라이던트 II와 유사한 M51 미사일로 무장한 ''르 테리블''이 실전 배치되었다.
프랑스 해군은 해상 전략 핵 전력(Force Océanique Stratégique)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때 6척의 원자력 탄도 미사일 잠수함을 운용했다. 2022년까지 프랑스 해군을 위해 건조된 10척의 SSBN은 다음과 같다.
함급 | 함명 | 취역 기간 | 탑재 미사일 | 비고 |
---|---|---|---|---|
레두타블급 잠수함 (6척) | 랑플렉시블'' (S 615) 등 | 1971년 ~ 2008년 | 16기의 M4 IRBM | 마지막 함 2008년 퇴역 |
트로피옹급 (4척) | 르 트로피옹 (S 616), 르 테메레르 (S 617), 르 비질랑 (S 618), 르 테리블 (S 619) | 1997년 ~ 현재 | 16기의 M51 SLBM[9] |
프랑스 해군 항공대(아에로나발)는 1962년부터 다소 에탕다르 IV를 클레망소급 항공모함에 탑재하여 핵무장 항공기를 운용해 왔다. 1978년에는 다소 슈퍼 에탕다르가 실전 배치되어 에어-솔 모옌 포르테 (ASMP) 핵 미사일을 통해 원거리 핵 공격 능력을 갖추었다. 2010년부터는 업그레이드된 ASMP-A 핵 미사일로 무장한 라팔 F3 전투기를 R91 ''샤를 드골''에 탑재하고 있다.
3. 3. 지상 기반 전력 (폐기)
샤를 드 골 대통령의 ''핵 억지력'' 비전은 공중, 육상 및 해상 기반 무기와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1] 1971년 8월, 프랑스 공군 알비옹 공군 기지 200에 사일로 기반의 S2 중거리 탄도 미사일 18기가 배치되면서 프랑스 핵전력의 육상 기반 구성 요소가 시작되었다.[7] 이후 이동식 단거리 ''플루통'' 미사일과 ''아데스'' 미사일로 보강되었다.[7] 이 미사일들은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서독 침공에 대비하여 프랑스군과 함께 서독의 프랑스 점령 지역에 배치될 수 있었다.프랑스 군은 재래식 무기로는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서유럽 전면 침공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단거리 핵 미사일을 "최후의 경고"(프랑스어: ultime avertissement)로 활용했다. 이는 침략자에게 추가적인 진격은 핵 아마겟돈을 촉발할 것이라는 점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74년에 도입된 ''플루통'' 미사일은 1993년에 퇴역하여 폐기되었고,[7] 후속 미사일인 ''아데스'' 미사일은 1990년대 초에 제한적으로 생산된 후 1995년에 군에서 철수하여 무기고에 보관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미사일들을 모두 제거하기로 결정했고, 마지막 ''아데스'' 미사일은 1997년 6월 23일에 해체되었다.
알비옹 고원에 배치된 프랑스 고정식 S3 IRBM은 소련 붕괴 이후 노후화되어 1999년에 폐쇄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핵 삼각 체제의 육상 미사일 전력은 제거되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는 더 이상 지상 배치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IRBM인 아프-생-크리스톨 공군기지 200은 1996년에 폐쇄되었고, 미사일은 폐기되었다. ''플루통'' 및 ''아데스''와 같은 단거리 미사일을 장비한 모든 프랑스 육군 부대는 해산되었고, 미사일은 폐기되었으며, 핵분열성 핵 물질은 재활용되었다.
3. 4. 핵무기 보안
프랑스 해군과 프랑스 공군이 사용하는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 보호와 준비 태세를 보장하는 것은 헌병대의 5개 특수 부서 중 하나인 핵무기 보안 헌병대(프랑스어: Gendarmerie de la sécurité des armements nucléaires, GSAN)의 역할이다.[14] 1964년에 창설된 GSAN은 군대부의 감독을 받으며 핵무기 보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14]GSAN의 주요 임무는 정부가 모든 핵전력 및 무기를 통제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GSAN은 자체 부대와 기동 헌병대 분대 등 헌병대의 다른 부대에서 임시로 지휘를 받는 부대로 구성되어 핵무기 부품 수송을 보호한다.[15]
3. 5. 지휘 통제
엘리제 궁전 지하 벙커에 위치한 주피터 지휘소는 프랑스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위기 상황을 관리하고 다른 정부 기관, 군 지휘소 및 외국 정부와 항상 연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통신 및 방어 수단을 갖추고 있다. 이 벙커는 가짜 전쟁 기간인 1940년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1978년에 이곳에 지휘소를 설치했다.4. 관련 문서
- 프랑스 핵 억지력
- 전략 항공 전력
- 전략 해양 전력
- 프랑스와 대량 살상 무기
참조
[1]
서적
Bombers of the West
Charles Scribner's and Sons
[2]
뉴스
France to reduce nuclear arsenal, warns of Iran danger
http://www.afp.com/e[...]
2008-03-21
[3]
서적
Bombers of the West
Charles Scribner's and Sons
[4]
서적
Forces aériennes stratégiques: histoire des deux premières composantes de la dissuasion nucléaire française
Economica
[5]
서적
Bombers of the West
Charles Scribner's and Sons
[6]
웹사이트
Les Redoutable : Histoire d'une aventure technique, humaine et stratégique
http://www.meretmari[...]
[7]
뉴스
France Explodes Her First A-Bomb in a Sahara Test
https://select.nytim[...]
2010-11-05
[8]
웹사이트
FAS.org
https://fas.org/nuke[...]
[9]
학술지
French nuclear forces, 2019
2019-01-02
[10]
웹사이트
Le président Hollande dévoile les capacités nucléaires françaises
https://www.opex360.[...]
2023-12-04
[11]
웹사이트
French Air Force retires the Mirage 2000N – Alert 5
https://alert5.com/2[...]
2023-12-04
[12]
웹사이트
Specifications of the Rafale-M, The Only Non-US Fighter To Ever Take Off From a US Aircraft Carrier
https://www.internat[...]
2023-12-04
[13]
웹사이트
https://www.defense.[...]
2021-02-22
[14]
학술지
French nuclear deterrence policy, forces and future
https://www.frstrate[...]
2019-01-01
[15]
뉴스
French National Gendarmerie
http://www.fiep.org/[...]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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