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라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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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시 라잔(1583-1657)은 에도 시대 초기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과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후지와라 세이카의 영향을 받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도쿠가와 가문의 선생이 되었고, 쇼헤이코를 설립하여 유학 진흥에 기여했다. 라잔은 신유합일론을 주장하며 신토와 유교의 융합을 시도했고, 불교를 비판하는 등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 그의 사상은 막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쳤으며, 저서로는 『삼덕초』, 『춘감초』, 『일본통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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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라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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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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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야시 라잔 |
일본어 이름 | 林 羅山 |
출생 | 1583년 |
사망 | 1657년 3월 7일 |
사망 장소 | 에도 |
직업 | 역사가 철학자 정치 고문 작가 |
자녀 | 하야시 가호 (아들) |
주요 관심사 | 일본사 문학 |
지역 | 동양 철학 |
학파/전통 | 일본 유학 |
영향 | 주희 후지와라 세이카 |
시대 | 에도 시대 |
영향받은 인물 | 하야시 가호 아라이 하쿠세키 |
주요 저서 | 일본 왕대일람 |
가문 | 하야시 씨 |
주요 사상 | 일본의 세 가지 관점 |
다른 이름 | 라잔 도슌 라후시 유가오코 고초도 바이카무라 |
2. 일생
1583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수재로 알려졌고, 1595년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겐닌지에서 불교를 배웠지만, 승려가 되는 것은 거부하고 집에 돌아와 독학하며 주자학에 열중했다. 1604년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는데, 후지와라 세이카는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온 조선 성리학자 강항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후지와라는 라잔의 뛰어난 재능에 감명을 받아 1605년 제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를 추천했다. 이에야스는 23세의 젊은 라잔을 곁에 두고 도쿠가와 가문의 스승으로 삼았다. 라잔이 이에야스를 처음 만난 곳은 교토의 니조성이었다고 한다.
1607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경전을 가르쳤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스승이 되면서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 1635년 무가제법도의 기초를 만들었고, 다음 해에는 이세 신궁 참배 의례에도 참여했다.
1632년 우에노 시노부가오카(지금의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 공원 일대)에 학문소와 선성전(先聖殿) 등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쇼헤이코(昌平黌)의 기원이 되었다. 라잔의 쇼헤이코는 에도 시대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고, 유학을 장려한 에도 막부에 의해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훗날 쇼헤이코는 도쿄 대학의 모태가 되지만, 1871년 폐지되어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이후 다이가쿠노카미(大學頭)라는 칭호를 얻었고, 3대손 하야시 호코 때부터 라잔의 후손들은 대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을 책임졌다.
1656년 부인을 잃고 그녀를 애도하는 시 26수를 남겼다. 다음 해 메이레키 대화재로 집과 서고가 불타 없어졌고, 4일 후 세상을 떠났다. 하야시 라잔은 신토(神道)와 유교(儒敎)의 신앙 및 관습을 융합하려 했으며, 신토가 유교 사상의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형태라고 주장했다.[3]
아버지의 뒤를 이은 하야시 가호(林鵞峰)는 아버지의 원칙에 따라 일본 천황 연대기를 편집하여 1650년 7권짜리 『일본왕대일람(日本王代一覧)』을 완성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수석 학자였던 라잔의 후계자는 셋째 아들 가호였다. 라잔이 세상을 떠난 후, 가호는 아버지가 시작한 작업을 완료했으며, 1670년에는 『본조통감(本朝通鑑)』(『일본통사(日本通史)』) 310권을 출판하여 하야시 가문의 학문적 명성을 드높였다.[6]
라잔은 진무 천황과 황실 계보가 오태백을 통해 중국 왕족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2. 1. 출생과 성장
1583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수재로 알려졌고, 1595년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겐닌지에서 불교를 배웠지만, 승적에 오르는 것은 거부하고 집에 돌아와 독학하며 주자학에 열중했다.[14] 1604년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당시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끌려온 성리학자 강항의 영향을 받았다. 후지와라는 라잔의 영민함에 감명을 받아 1605년 제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를 천거했다. 이에야스는 23세 약관의 라잔을 곁에 두고 도쿠가와 가문의 선생으로 발탁했다. 이때 라잔이 이에야스를 알현했던 곳이 교토 니조성이라고 한다.[15] 1607년에는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17]2. 2. 도쿠가와 막부의 관료
1604년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큰 영향을 받은 하야시 라잔은, 1605년 스승의 추천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천거되어 도쿠가와 가문의 선생으로 발탁되었다. 교토 니조성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했으며, 약관 23세였다.[15]1607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경전을 가르쳤고, 1624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스승이 되면서 막부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15][19] 1635년 무가제법도 기초를 담당하고, 이듬해 이세 신궁 참배 예전에 참여하는 등 여러 제도와 의례 등의 규칙을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5]
1630년 쇼군 이에미쓰에게서 에도 우에노 시노부가오카(지금의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 공원 일대)에 토지를 하사받고, 1632년 학문소, 문고, 공자묘를 세워 "선성전"이라 칭했다. 이는 훗날 쇼헤이자카 학문소의 기초가 되었으며, 에도시대 유학의 총본산이자 에도 막부가 장려한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훗날 쇼헤이자카 학문소는 도쿄대의 원류가 되지만, 1871년에 폐지되었으므로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하야시 라잔의 자손들은 대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 책임을 맡았으며, 3대손 하야시 호코 때부터 다이가쿠노카미(大學頭)로 불렸다.
하야시 라잔은 초기 에도 막부의 토대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유학, 신토 외의 모든 것을 배척하고 주자학 발전과 유학의 관학화에 공헌했다.[16]
2. 3. 쇼헤이코 설립과 교육 활동
1604년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큰 영향을 받은 하야시 라잔은, 1605년 제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천거되었다. 이에야스는 23세의 젊은 라잔을 발탁하여 도쿠가와 가문의 스승으로 삼았다. 1607년에는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경전을 가르쳤고,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스승이 되면서 막부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635년에는 무가제법도의 기초를 담당하였고, 다음 해에는 이세 신궁 참배 예전에도 참여하였다.1632년 우에노의 시노부가오카(지금의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 공원 일대)에 학문소 및 선성전(先聖殿) 등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쇼헤이코(昌平黌)의 기원이 되었다.[3] 라잔의 쇼헤이코는 에도 시대 유학의 총본산이 되었고, 유학을 장려하는 에도 막부에 의해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훗날 쇼헤이코는 도쿄 대학의 원류가 되지만, 1871년에 폐지되었으므로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라잔은 쇼군이 제공한 토지에 세워진 에도(江戸)의 유교 학원인 쇼헤이코(후에 유시마 세이도(湯島聖堂)로 알려짐)의 학장(学長)이 되었다.[4] 이 기관은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하고 유지한 전국적인 교육 및 훈련 시스템의 정점에 있었다. 라잔은 "다이가쿠노카미(大学頭)"라는 명예직을 받았고, 이 직위는 그의 가문에 세습되었다. 세이도의 장 역시 하야시 가문에 세습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위계질서 안에서 "다이가쿠노카미"는 사실상 "국립대학교 총장"으로 번역된다.[4] 3대손인 하야시 호코 때부터 이후 라잔의 후손은 대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을 책임졌다.
2. 4. 말년
1656년 아내를 잃고 그녀를 애도하는 시 26수를 남겼다. 이듬해 메이레키 대화재로 집과 서고가 소실되었고, 그로부터 4일 후 사망하였다.[14] 서고 소실에 대한 충격과 낙담으로 수명이 줄었다고도 전해진다. 향년 75세였다. 묘소는 도쿄도 신주쿠구 이치가야야부시쵸에 있으며, 막부의 하야시 라잔 등용은 유학자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16]3. 학문과 사상
하야시 라잔은 주자학(朱子學)을 중심으로 육상산, 왕양명의 학문, 제자백가에서 일본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에 통달했다. 1607년, 2대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치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에도의 유교 학원인 쇼헤이코(昌平黌)(후에 유시마 세이도로 알려짐)의 학장이 되었다. 대학두(大学頭)라는 명예직을 받았으며, 이 직위는 그의 가문에 세습되었다.[4]
라잔의 사상은 유교적인 현세주의, 도덕주의, 그리고 일종의 합리주의를 특징으로 한다.[20] 특히 불교를 비판하고 신토와 유교를 융합하는 신유합일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치당심지신도를 설파하고, 일본 신화 속 삼종신기를 유교적인 삼덕의 상징으로 보았다.[20]
정치 이론가로서 하야시 라잔은 자신의 철학적, 실용적 사고가 에도 막부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는 것을 보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상은 18세기 말까지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잔은 사무라이를 교양 있는 통치 계급과 동일시하였고, 막부가 성립 초기 단계에서 군사 정권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8] 그의 철학은 사무라이 계급의 자기 계발을 장려했으며, "무예 없는 진정한 학문은 없고, 학문 없는 진정한 무예는 없다"는 경구는 그의 견해를 잘 보여준다.[8]
와타나베 테츠로는 라잔이 지구 구형설을 부정하는 등 과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시야가 좁으며, 쇄국과 함께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협소한 정신을 횡행하게 하여 오랫동안 일본인의 자유로운 사색을 방해했다고 비판했다.[28]
3. 1. 주자학 연구

하야시 라잔(임라산)의 학문은 한당(漢唐)의 구주(舊注)에서 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의 학에 이르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서 일본의 고전에도 통달하였으나, 주희(朱熹)(주자)의 학문(주자학(朱子學))이 그 중심이었다. 특히 스승 후지와라 세이카 사후에는 명확하게 주희의 이기론(理氣論, 태극이기의 논)의 입장에 섰다.[16][20] 라잔은 주자학자로서,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설파하고, 이법(理法)이 제현상(諸現象)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理性)이 정욕(情慾)을 지배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삼덕초(三德抄)』). 그리고 하늘(이기미분의 태극(太極))을 자연·인문의 일체의 사물에 내재화하고, 또한 하늘은 기(氣)에 의해 만상(萬象)을 창조하고, 이(理)에 의해 만상을 주재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 하늘의 작용, 즉 “천도(天道)”를 돕는 것이 바로 인도(人道)이며, 이 인도의 실천·이행이 “격물(格物)”로부터 시작된다고 설파했다.[16]
라잔의 인간론은, 인간은 천리(天理)를 받고 그 본성은 선(善)이나, 정욕 때문에 가려져 있어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학문에 의해 우주를 관통하는 이(理)를 궁극적으로 깨닫고, 수양(修養)에 의해 정욕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또한 만상을 관통하는 도덕적 속성을 생각하는 입장에 서서, 막번체제(幕藩体制)하의 신분 질서와 그곳에서의 실천 도덕을 형이상학(形而上学)적으로 기초지었다.[20] 『춘감초(春鑑抄)』에서는, 우주의 원리인 이(理)는 인간 관계에서는 신분으로 나타난다고 하여 상하정분의 이(上下定分の理)를 설파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身分制度)를 정당화하였는데, 이것은 막번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신분 질서 절대화의 이론이었다.[22] 라잔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서(序)”(질서·계열)를 유지하기 위해 “경(敬)”(겸손하고 속이지 않는 마음)과 그 구체적인 나타남인 “례(禮)”(예의·법도(法度))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설파하고, 지경(持敬, 마음속에 “경”을 계속 가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존심지경). 라잔은 우주의 원리인 이(理)를 궁극적으로 깨닫는다면 내면에는 경(敬), 외면에는 례(禮)로 나타난다고 설파하고, 경(敬)과 례(禮)가 인륜의 기본이며, 이(理)와 마음의 일체화를 설파했다(거경궁리).[21]
라잔의 주자학은 중국에서 직수입한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출병을 계기로 유입된 조선 주자학을 자각적·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24] 참고로, “라잔”이라는 호도 조선본의 『연평문답(延平問答)』에 유래하는 것이다.[25]
3. 2. 신분 질서 옹호
정치 이론가로서 하야시 라잔은 자신의 철학적, 실용적 사고가 막부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는 것을 보며 생을 마감했다. 하야시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18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발전은 부분적으로 라잔이 사무라이를 교양 있는 통치 계급과 동일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라잔은 막부가 성립 초기 단계에서 군사 정권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8] 또한 그의 철학은 사무라이 계급의 자기 계발을 장려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생애 동안 그리고 사후에도 점차 널리 퍼져나갔다.[8] 라잔의 다음과 같은 경구는 그의 견해를 잘 보여준다.:::"무예 없는 진정한 학문은 없고, 학문 없는 진정한 무예는 없다."[8]
하야시 라잔과 그의 가족은 도쿠가와 막부의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3. 신유합일론(神儒合一論)
하야시 라잔은 신토와 유교의 신앙 및 관습을 실용적으로 융합시켰다. 그는 신토가 유교 사상의 임시적이고 지역적인 형태이며, 신토 신사 의례를 유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이러한 사상 체계는 사무라이와 관료의 교육, 훈련, 시험 절차에 잘 반영되었다.라잔은 신도, 왕도, 유도(유교), 인도의 근본은 동일하며, 신은 마음・이치라고 하여 이치당심지신도(理致当心之神道)를 설파하고, 일본 신화 속의 삼종신기를 유교적인 지・인・용의 삼덕의 상징으로 보았다.[20] 또한, 이치당심지신도는 근세의 유가신도의 선구가 되었다.[16]
3. 4. 불교 비판
하야시 라잔은 불교가 피안(彼岸)주의에 입각하여 현세 인간 사회의 문제를 회피하고, 내세(來世)를 이야기하며 허망한 것을 말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불교의 도덕 무시와 불교 승려들에게서 보이는 부도덕함과 죄악 등을 비판하였다.[20]3. 5. 기타 학문적 관심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주자학(朱子學)을 중심으로 육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의 학문, 제자백가(諸子百家)에서 일본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에 통달했으며, "에도 시대 최초의 백과전서 편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5]
신불습합을 비판하며 쓴 『神道伝授』와 『本朝神社考』, 중국의 본초학을 소개하는 책 『多識編』, 병학 주석서인 『孫子諺解』, 『三略諺解』, 『六韜諺解』, 중국 괴기소설 안내서 『怪談全書』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26] 일본사에도 조예가 깊어, 일본의 국조로서 태백설에 관심을 가졌다.[20]
라잔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유교적인 현세주의, 도덕주의, 그리고 일종의 합리주의를 특징으로 한다.[20] 불교가 현세의 문제를 회피하고 내세를 이야기하며 허망한 것을 말한다고 비판하며, 불교 승려들의 부도덕과 죄악을 추궁했다.[20]
또한, 신도, 왕도, 유도, 인도의 근본은 동일하며, 신은 마음·이치라고 하는 이치당심지신도를 설파하고, 일본 신화 속 삼종신기를 유교적인 지·인·용의 삼덕의 상징으로 보았다.[20] 이치당심지신도는 근세 유가신도의 선구가 되었다.[16]
와타나베 테츠로는 라잔이 지구 구형설을 부정하는 등 과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시야가 좁으며, 유럽에서 근대적 사상가들이 등장하던 시대에 고대 중국의 이상으로 회귀하려 했다는 시대착오를 지적했다. 또한 라잔이 쇄국과 함께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협소한 정신을 횡행하게 하여 오랫동안 일본인의 자유로운 사색을 방해했다고 비판했다.[28]
4. 정치적 영향
정치 이론가로서 하야시 라잔은 자신의 철학적, 실용적 사고가 막부(바쿠후)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는 것을 보며 생을 마감했다. 하야시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18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발전은 부분적으로 라잔이 사무라이를 교양 있는 통치 계급과 동일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라잔은 막부가 성립 초기 단계에서 군사 정권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의 철학은 사무라이 계급의 자기 계발을 장려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생애 동안 그리고 사후에도 점차 널리 퍼져나갔다. 라잔의 견해를 보여주는 경구는 다음과 같다.[8]
:::"무예 없는 진정한 학문은 없고, 학문 없는 진정한 무예는 없다."
하야시 라잔과 그의 가족은 도쿠가와 막부의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58년 1월, 하야시 라잔의 후손이자 세습 다이가쿠노카미였던 하야시 아키라는 새롭게 강경해진 외세에 대처하는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천황의 자문을 구하는 막부 사절단을 이끌었다.[9] 이는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 천황의 자문을 적극적으로 구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러한 전환적인 제안의 가장 명백한 결과는 그 후 10년 동안 도쿄와 교토 사이를 오가는 사자의 수가 급증한 것이다. 19세기에 이 학자 관료는 정치적 변화를 관리하는 중요한 분수령에 서게 되었고, 라잔의 확립된 이론만을 지침으로 삼아 미지의 영역을 “규칙대로”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10]
5. 유산 및 평가
라잔의 업적은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역사 이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일부 일본 학자들에게 칭송받았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를 일본의 "근대 역사 연구의 창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11] 그의 연구는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아라이 하쿠세키는 더욱 객관적인 학자로 여겨진다.
6. 저서
하야시 라잔의 저술은 150권이 넘으며,[20] 하야시 가호와 그의 동생인 하야시 도코사이(林道孝斎일본어)에 의해 편찬, 편집되어 사후에 출판되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저서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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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徳抄|산토쿠쇼일본어 | |
春鑑抄|슌칸쇼일본어 | |
本朝通鑑|본조쓰간일본어 (日本通史|일본통사일본어) | |
寛永諸家系図伝|간에이쇼카케즈덴일본어 | 막부의 명령으로 편찬 주임으로 참여 |
本朝神社考|본조신샤코일본어 | |
神道伝授|신토덴주일본어 | |
多識編|다시키헨일본어 | |
孫子諺解|손시겐카이일본어 | |
怪談全書|가이단젠쇼일본어 | |
羅山文集|라잔분슈일본어 | |
羅山詩集|라잔시슈일본어 | |
神道秘伝折中俗解|신토히덴셋추조쿠카이일본어 | |
丙辰紀行|헤이신기코일본어 | 가마쿠라 등의 기행문 |
性理字義諺解|세이리지고겐카이일본어 | 北溪字義|홋케이자이중국어의 주석서 |
野槌|야쓰치일본어 | 徒然草|쓰레즈레구사일본어의 주석서 |
四書五経|시쇼고쿄일본어 도슌텐[29] | |
老子道徳経|로시도토쿠쿄일본어 林希逸|린키이쓰일본어 鬳齋|흠사이일본어 구의』 도슌텐 | |
林羅山文集|하야시 라잔 분슈일본어 (林羅山全集|하야시 라잔 전집일본어), 1918년 재발행 | |
羅山先生一集|라잔센세이잇슈일본어 (羅山先生詩集|라잔 선생 시집일본어), 1921년 재발행 |
라잔은 진무 천황과 황실 계보가 궁극적으로 오태보를 통해 중국 왕족의 분파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널리 출판하기에는 위험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神武天皇論|진무텐노론일본어 (神武天皇|진무 천황일본어에 대한 논문)이라는 사적인 저술에서 이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이례적인 주장은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반대에 부딪혔고, 그 결과 이러한 사상을 출판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7]
하야시 가호는 아버지의 원칙에 따라 편찬된 일본 천황 연대기인 日本王代一覧|니혼오다이이치란일본어을 편집하는 작업을 했다. 7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1650년에 완성되었다. 1670년, 하야시 가문의 학문적 명성은 가호가 本朝通鑑|본조쓰간일본어 310권을 출판하면서 더욱 빛났다.[6]
7. 가족
하야시 라잔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요절했다. 겐나 4년(1618년)에 셋째 아들 춘승(春勝)이, 간에이 원년(1624년)에 넷째 아들 수승(守勝)이 모두 교토에서 태어났다. 춘승은 아봉(鵞峰), 수승은 독경제(読耕斎)라는 호를 사용했다. 아봉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부에 봉직하여 대학두(大学頭)로 불리는 것을 허락받았고, 독경제도 막부에 등용되었다.[16] 아우로는 임영희가 있다.
8. 기타
- 8세 때, 어떤 낭인이 『태평기』를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는 이를 암송하였다. 한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아 사람들은 "이 아이의 귀는 주머니 귀다, 한번 들어간 것은 빠져나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0]
- 에도 성에 출사한 다이묘들이 각자 가져온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장부번주 모리 히데모토의 도시락에 연어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이때 라잔은 무사시 이와츠키번주 아베 시게쓰구 등과 함께 "희귀하다"라고 말하며 연어 조각을 조금씩 나눠 받았다고 한다.[31]
- 라잔은 게이안 4년(1651년)에 고미즈노오 상황이 갑자기 출가하여 법명을 엔죠라고 칭했을 때, 그 일을 "아아 교자의 아버지를 따르지 않다. 이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후년 무문이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자 할지라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평하고 있다.[32]
- 메이레키 2년(1656년)에 아내를 잃었을 때는 그 죽음을 애도하는 시 26수를 짓는 등, 애처가였다.
- 메이레키 3년 1월 18일(1657년 3월 2일)부터 사흘 밤낮에 걸친 메이레키 대화재(일명 "후리스데 화재")에서는, 라잔은 주변의 소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독서에 열중했으나, 간다의 자택에 불이 옮겨붙자 1월 19일(3월 3일), 읽던 책 한 권만 가지고 우에노 쪽으로 피했으나, 자택이 소실되고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장서도 모두 소실되었다는 말을 듣고 병이 들었다고 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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