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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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인 남씨는 조선 성종의 후궁으로, 의령 남씨 출신이다. 효령대군의 증손녀인 어머니를 두었으며, 1480년에서 1490년 사이에 숙의로 봉해졌다. 성종 사후 연산군과 간통하였으며, 중종 연간에 귀인이 되었다. 1527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중종은 이를 용납했다. 월산대군의 며느리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효혜공주의 재산을 관리하다가 1531년에서 1536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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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남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귀인 남씨 |
한자 표기 | 貴人 南氏 |
로마자 표기 | Gwiin Namssi |
작위 | 성종의 후궁 |
혼인 및 자녀 정보 | |
배우자 | 성종 |
자녀 | 없음 |
가문 정보 | |
아버지 | 남흔 |
어머니 | 전주 이씨 |
가문 | 의령 남씨 |
생몰 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미상 (1531년~1536년 사이) |
2. 생애
본관은 의령으로, 감찰(監察) 남흔(南忻)의 딸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증손녀인 전주 이씨이다.[10][11][12] 정확한 입궁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80년(성종 11년)에서 1490년(성종 21년) 사이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봉해졌다.[13]
1495년 남편 성종이 사망한 후에도 궁궐에 머물렀으나, 연산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돌았다.[14][4] 1506년(연산군 12년) 관련 기록에도 여전히 숙의로 언급된다.[5]
중종 즉위 이후 귀인(貴人)으로 진봉된 것으로 보이며[15][6][7], 1527년(중종 22년)에는 행실 문제를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7] 중종은 남씨가 자순대비를 모시기 위해 궁에 머무는 것이라며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8][9]
말년에는 월산대군의 며느리이자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가깝게 지내며, 어머니를 일찍 여읜 효혜공주와 그 딸 선옥(善玉)을 돌보는 데 관여했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효혜공주가 사망한 1531년과 파평현부인이 사망한 1536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2. 1. 초기 생애
본관은 의령이다. 아버지는 감찰(監察) 남흔(南忻)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효령대군의 증손녀이다.[11][12] 귀인 남씨는 남흔의 첫째 또는 셋째 딸로 전해진다.[10] 아버지 남흔은 아내 이씨의 증조부인 효령대군의 첩 매화(梅花)와 간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외방으로 부처(付處, 죄인을 외딴 곳이나 변방으로 보내 거주하게 하던 형벌)되기도 했다.[11]언제 성종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남씨가 입궁(入內)한 이후 아버지 남흔이 승정원 우승지에 제수되면서 논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3] 최초 봉작은 종2품 숙의(淑儀)였으며[13], 이는 대략 1480년(성종 11년)에서 1490년(성종 21년) 사이로 추정된다.[13] 입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492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 뒤인 1495년에는 남편 성종과 사별했다.
성종 사후에는 자순대비와 함께 궁중의 이어소(移御所,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곳)에 머물렀다.[14] 그러나 당시 임금이었던 연산군과 간음하였다는 소문이 궁궐 안팎으로 퍼졌다.[4] 1506년(연산군 12년) 연산군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에는 남씨가 여전히 숙의(淑儀)로 언급되어 있다.[5]
이후 중종이 즉위한 뒤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된 것으로 보인다.[15][6][7] 1527년(중종 22년) 사헌부로부터 행실이 간사하고 은밀히 사주(使嗾, 남을 부추겨 못된 짓을 하게 함)하여 세력을 만든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7] 중종실록 22년 5월 18일 기록에 따르면, 사헌부는 상소에서 "남귀인(南貴人) 같은 이는 간사스러워 은총이 있는 곳이면 번번이 따라 붙어 은밀히 사주(使嗾)해서 성세(聲勢)를 조장하니, 어찌 궁중에 오래 거처하게 하여 가정(家政)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종은 "남귀인은 선왕의 후궁이고 자전(정현왕후)을 받듦으로 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론(輿論)이 이러하다면 반드시 스스로 처신할 것이다.”라고 답하며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8][9]
말년에는 월산대군의 며느리이자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모녀처럼 각별하게 지냈다. 효혜공주가 어려서 어머니 장경왕후를 잃자 파평현부인과 함께 딸처럼 길렀으며, 효혜공주가 딸 선옥(善玉)을 낳고 산후병으로 1531년에 사망하자 윤씨와 함께 선옥을 돌보며 효혜공주의 재산을 관리했다. 임종을 앞두고 남씨는 파평현부인에게 효혜공주의 재산을 넘겨주며 선옥이 장성하면 돌려주라고 당부했다.
파평현부인 또한 1536년에 사망하면서 효혜공주의 재산을 자신의 아들 계림군과 다른 며느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재산 분배에 불만을 품은 며느리들이 문정왕후에게 하소연했다. 이 일로 문정왕후의 미움을 산 계림군은 결국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귀인 남씨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효혜공주가 사망한 1531년과 파평현부인이 사망한 1536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2. 입궁과 성종의 후궁 시절
본관은 의령이고, 감찰(監察) 남흔(南忻)의 딸이다.[10] 어머니 전주 이씨는 효령대군의 증손녀이다.[11][12]언제 성종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녀가 입궁한 이후 아버지 남흔이 승정원 우승지에 제수되었고 이 일로 논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3] 대략 1480년(성종 11년)에서 1490년(성종 21년) 사이에 후궁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최초 봉작은 숙의(淑儀)였다.[13]
2. 3. 성종 사후
1495년 남편 성종이 사망한 후에도 궁궐에 남아 자순대비와 함께 이어소에서 지냈다.[4] 그러나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소문이 궁궐 안팎으로 퍼졌으며[4], 1506년(연산군 12년) 연산군과의 간음 기록에는 숙의(淑儀)로 나타난다.[14][5]중종 대에는 귀인(貴人)으로 진봉된 것으로 보인다.[15][6][7] 1527년(중종 22년)에는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는 남씨가 "간사스러워 은총이 있는 곳이면 번번이 따라 붙어 은밀히 사주(使嗾)해서 성세(聲勢)를 조장하니, 어찌 궁중에 오래 거처하게 하여 가정(家政)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7] 라며 궁궐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종은 "남귀인은 선왕의 후궁이고, 자전(정현왕후)을 받들기 위해 궁중에 머무는 것이다. 여론이 이러하니 스스로 처신할 것이다"[8][9] 라고 답하며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귀인 남씨는 월산대군의 며느리이자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모녀처럼 가깝게 지냈다. 효혜공주가 어려서 어머니 장경왕후를 잃자, 파평현부인 윤씨와 함께 딸처럼 길렀다. 1531년 효혜공주가 딸 선옥(善玉)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파평현부인 윤씨와 함께 선옥을 돌보며 효혜공주의 재산을 관리했다. 임종 직전, 남씨는 파평현부인 윤씨에게 효혜공주의 재산을 넘겨주며 선옥이 성장하면 돌려주라고 당부했다.
파평현부인 윤씨는 임종하면서 효혜공주의 재산을 자신의 아들 계림군과 다른 며느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재산 분배에 불만을 품은 며느리들이 문정왕후에게 이를 알렸고, 문정왕후는 계림군을 질책했다. 이 일로 문정왕후의 미움을 산 계림군은 훗날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귀인 남씨는 효혜공주가 사망한 1531년과 파평현부인 윤씨가 사망한 1536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4. 중종 시대
연산군 시절 숙의(淑儀)였던 남씨는 중종 즉위 이후 '''귀인'''(貴人)으로 진봉된 것으로 추정된다.[15][6][7] 실제로 중종실록에는 '남귀인'이라는 호칭으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6][7]1527년(중종 22년) 5월 18일, 사헌부는 남귀인이 간사하게 행동하며 정현왕후(자전)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려 궁중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7] 사헌부는 남귀인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종은 "남귀인은 선왕(성종)의 후궁으로서 돌아갈 곳이 있지만, 자전(정현왕후)을 받들기 위해 궁중에 머무는 것이다. 여론이 이러하다면 스스로 처신할 것이다"라고 답하며 사헌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8][9]
남귀인은 월산대군의 며느리이자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모녀처럼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장경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남귀인은 파평현부인과 함께 어린 효혜공주를 친딸처럼 돌보았다. 1531년(중종 26년) 효혜공주가 딸 선옥(善玉)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남귀인은 파평현부인과 함께 선옥을 양육하며 효혜공주의 재산을 관리했다. 임종 직전에는 파평현부인에게 효혜공주의 재산을 넘겨주며, 선옥이 장성하면 돌려주라고 유언했다.
남귀인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효혜공주가 사망한 1531년과 파평현부인이 사망한 1536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2. 5. 효혜공주와의 관계
월산대군의 며느리이자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와는 모녀처럼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효혜공주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자, 귀인 남씨는 파평현부인 윤씨와 함께 효혜공주를 친딸처럼 돌보며 길렀다.이후 효혜공주가 딸 선옥(善玉)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귀인 남씨는 다시 파평현부인과 함께 어린 선옥을 돌보고 효혜공주가 남긴 재산을 관리했다. 귀인 남씨는 임종 직전, 파평현부인에게 효혜공주의 재산을 맡기면서 훗날 선옥이 성장하면 돌려주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파평현부인 역시 세상을 떠나면서 효혜공주의 재산을 자신의 아들인 계림군과 다른 며느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재산 분배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며느리들이 문정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문정왕후는 계림군을 불러 꾸짖었다. 이 일로 문정왕후의 미움을 사게 된 계림군은 결국 을사사화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었다.
2. 6. 사망
월산대군의 며느리이자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어머니와 딸처럼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효혜공주가 어려서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자, 귀인 남씨는 파평현부인 윤씨와 함께 효혜공주를 딸처럼 길렀다.1531년 효혜공주가 딸 선옥(善玉)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귀인 남씨는 파평현부인 윤씨와 함께 손녀 선옥을 돌보며 효혜공주가 남긴 재산을 관리하였다. 임종을 앞두고는 파평현부인 윤씨에게 효혜공주의 재산을 넘겨주면서, 훗날 선옥이 장성하면 돌려주라고 부탁하였다.
효혜공주가 사망한 해는 1531년이고, 파평현부인 윤씨가 사망한 해는 1536년이므로, 귀인 남씨는 1531년에서 1536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파평현부인 윤씨는 임종하면서 효혜공주의 재산을 자신의 아들인 계림군과 다른 며느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재산 분배에 불만을 품은 며느리들이 문정왕후에게 하소연했고, 문정왕후는 계림군을 불러 꾸짖었다. 이 일로 문정왕후의 미움을 사게 된 계림군은 결국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3. 가족 관계
귀인 남씨의 아버지는 남흔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증손녀인 전주 이씨이다. 그녀의 가계는 당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언니의 아들인 조카 윤내는 성종의 딸 경휘옹주와 혼인하였고, 남동생 남섭원 역시 성종의 딸 휘정옹주와 혼인하였다. 또한 사촌인 남치원도 성종의 딸 경순옹주와 혼인하는 등 왕실과 여러 겹의 혼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숙모는 연산군의 비인 폐비 신씨의 언니이기도 하다.[2]
3. 1. 본가
wikitext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남윤(南倫) | |
조모 | 교하 노씨(交河 盧氏) | 노물재의 딸, 노사신의 누이, 소헌왕후의 조카 |
아버지 | 남흔(南炘) | 1451 ~ 1492 |
외조부 | 춘양군 이내(李徠) | 1434 ~ ?, 효령대군의 손자, 보성군의 3남 |
외조모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
어머니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
언니 | 윤승세(尹承世)의 처 | |
조카 | 영원위(鈴原尉) 윤내(尹鼐) | 성종의 9녀 경휘옹주와 혼인 |
언니 | 김상(金祥)의 처 | [2] |
남동생 | 남조원(南調元) | [2] |
남동생 | 남응원(南應元) | [2] |
남동생 |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 | 성종의 10녀 휘정옹주와 혼인[2] |
숙부 | 남경(南憬) | |
숙모 | 거창 신씨(居昌 慎氏) | 신승선의 딸, 폐비 신씨의 언니 |
사촌 |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 | 성종의 5녀 경순옹주와 혼인 |
3. 2. 왕가(시가)
참조
[1]
간행물
남흔(南忻)
http://encykorea.aks[...]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2019-01-26
[2]
웹사이트
남흔
https://terms.naver.[...]
國朝人物考
2019-01-26
[3]
문서
承政院右承旨南忻暴卒. 特賜米, 豆幷二十碩, 正布十五匹, 紙六十卷, 油席三及棺槨. 【史臣曰 忻本綺紈子弟, 放浪不檢, 嘗坐奸妻曾祖孝寧大君侍兒配外, 後其女選入爲淑儀, 及拜承旨., 物議紛然, 臺諫無駁之者. 時權景祐爲司諫, 與忻比隣, 鄭錫堅謂人曰 豈料景祐, 亦以酒食之私廢公義乎. 景祐聞之, 笑而受責 】
朝鮮王朝実録
1487-08-03
[4]
문서
成宗後宮南氏, 亦在大妃移御所, 頗見寵幸, 醜聲聞外.
朝鮮王朝実録
1506-09-02
[5]
문서
人言, 『王烝成宗淑儀南氏, 恐醜聲聞外, 故有是敎』
朝鮮王朝実録
1506-08-05
[6]
문서
大妃遣南貴人, 致奠于殯殿.
朝鮮王朝実録
1515-03-19
[7]
문서
如南貴人, 傾邪側媚, 恩寵所在, 輒自附麗, 陰行指嗾, 助張聲勢, 豈可以久處宮掖, 以亂家政哉.
朝鮮王朝実録
1527-05-18
[8]
문서
南貴人則先王後宮, 自有歸處, 然以侍奉慈殿, 故在此焉. 若有物論如此則必當自處也.
朝鮮王朝実録
1527-05-18
[9]
웹사이트
귀인 남씨
https://terms.naver.[...]
斗山百科
2019-01-29
[10]
서적
의령남씨족보
[11]
문서
의금부에 전지하여 효령대군의 첩 매화와 간통한 남흔을 추국하여 아뢰라고 하다
성종실록
1480-05-11
[12]
문서
효령대군 → 보성군 → 춘양군 → 이씨 부인 → 귀인 남씨
[13]
문서
남흔(南炘)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첩 매화(梅花)와 간통하여 외방에 정배되었으나, 후에 그 딸이 숙의로 뽑혀 들어가 승지에 제배되었다고 한다. 남흔이 간통 사건으로 부처된 것이 [[1480년]]이니 그 딸이 숙의로 간택된 것도 그 이후가 될 것이다. 남흔이 다시 등용된 [[1482년]], 늦어도 그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등용된 [[1490년]] 이전에는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14]
문서
조선왕조실록 중종 1권, 1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9월 2일(무인) 2번째 기사.
[15]
문서
조선왕조실록 중종 21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3월 19일(병자)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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