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울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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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 방울 규칙은 20세기 미국에서 아프리카 혈통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흑인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규범으로, 인종 차별과 백인 우월주의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규칙은 1910년 테네시주에서 시작되어 여러 주에서 법제화되었으며, 1967년 흑백결혼금지법 폐지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방울 규칙은 미국 내 인종 혼합과 관련된 사회적, 문화적, 법적 문제를 야기했으며, 다른 국가의 인종 분류 방식과 비교하여 그 독특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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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울 규칙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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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종 분류 규칙 |
정의 | 단 한 방울의 "유색인자" 혈통이라도 있으면 해당 인종으로 간주하는 법률 및 사회적 관습 |
다른 이름 | 한 방울 원칙 한 방울 규칙 일방 혈통 규칙 추정적 백인 지위 |
역사 | |
기원 | 미국 |
시기 | 17세기 ~ 현재 |
관련 법률 | 버지니아 인종적 완전성 법 (1924년) 기타 인종 분류 관련 법률 |
영향 | 인종 차별 심화 사회적 불평등 인종 정체성 형성 |
적용 대상 | |
주요 대상 | 아프리카계 미국인 |
기타 | 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기타 소수 인종 |
사회적 영향 | |
사회적 지위 | 인종적 소수자로 분류 |
법적 권리 | 제한 또는 차별 |
문화적 영향 | 인종 정체성 및 사회 관계 형성 |
비판 및 논란 | |
문제점 | 인종적 편견 강화 사회적 불평등 심화 개인의 정체성 결정권 침해 |
반대 의견 | 인종적 분류의 부당성 개인의 자유와 평등 강조 과학적 근거 부족 |
현대적 관점 | |
현재 상황 |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사회적 영향은 여전히 존재 |
관련 연구 | 인종 정체성 연구 사회학 연구 법학 연구 |
2. 역사
한방울 규칙은 미국 역사 속 인종 관계의 변화 과정에서 등장했다. 남북전쟁 이후 짐 크로 법으로 대표되는 인종 분리 정책이 강화되고, 1920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북부 대이동으로 인종 갈등이 심화되면서, '흑인'의 정의를 명확히 하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 여러 남부 주들을 중심으로 '한 방울의 피'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한방울 규칙이 법제화되었다. 이 규칙은 1967년 연방대법원의 ''러빙 대 버지니아'' 판결로 법적 효력을 잃었으나, 사회문화적으로는 여전히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42]
2. 1.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북 전쟁 이전 북아메리카에서는, 혼혈인이라도 유럽인과 신체적 특징이 유사하면 같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던 남아메리카와 달리 혼혈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전쟁 이전 버지니아주에서는 혼혈 자유인(자유 흑인)이 아프리카계 혈통을 8분의 1 또는 4분의 1 미만으로 가졌을 경우 법적으로 백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6] 많은 경우, 혼혈인의 외모, 사회적 관계, 공동체 내에서의 역할 수행 여부가 문서화된 조상 기록보다 인종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이를 통해 다수 문화에 흡수되기도 했다.미국의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과 그의 노예였던 샐리 헤밍스의 관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샐리 헤밍스 자신은 4분의 3이 백인 혈통이었으며, 제퍼슨의 아내 마사 웨일스 제퍼슨의 이복 자매였다. 제퍼슨은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여섯 명의 혼혈 자녀를 두었으며, 이 중 네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7] 당시 버지니아 법에 따르면, 이 자녀들은 8분의 7이 유럽 혈통이었으므로 자유인이었다면 법적으로 백인이 될 수 있었지만, 노예 신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노예 신분이었다. 제퍼슨은 1822년에 두 명의 자녀가 사실상 탈출하도록 허용했고, 1826년 유언을 통해 나머지 두 자녀를 해방시켰다.[7] 해방된 네 자녀 중 세 명은 성인이 되어 백인 사회에 편입되었고, 그 후손들은 스스로를 백인으로 정체화하며 살아갔다.
남북 전쟁 이전 시기, 혼혈인에 대한 법적 기준은 주마다 달랐다. 예를 들어, 1822년 버지니아주 법은 멀라토(다인종)로 법적으로 정의되기 위해서는 최소 4분의 1(조부모 한 명에 해당) 이상의 아프리카계 조상을 가져야 한다고 명시했다.[6] 사회적 수용과 개인의 정체성은 역사적으로 인종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31년 냇 터너의 반란 이후 버지니아 주 의회는 자유 흑인에 대한 제한을 강화했지만, 엄격한 '한 방울 규칙'을 법제화하는 것은 피했다. 1853년 트래비스 H. 에페스가 한 방울 규칙과 유사한 법안을 제안했을 때, 의원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혼혈 관계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법안이 기존 백인 사회 구성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반대했다. 당시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의 한 신문 기고자는 이러한 법이 통과될 경우 "많은 사람들이 백인으로 여겨지고 실제로 그렇더라도... 자유 흑인의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6] 이러한 이유로 버지니아에서 한 방울 규칙이 법제화된 것은 훨씬 후인 1924년이었다.
멜룬전은 식민지 시대 버지니아에서 자유민 신분이었던,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계 조상을 둔 다인종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이다.[19] 이들은 켄터키와 테네시의 변경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후손들은 수십 년에 걸쳐 법적으로 "백인"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통혼하며 점차 주류 백인 사회에 동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2. 2. 남북전쟁 이후와 20세기 초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노예는 해방되었지만, 다수의 흑인은 남부에 머물렀고 백인들은 짐 크로 법으로 대표되는 인종 차별 정책을 강화했다. 공공시설, 교육시설, 대중교통 등 모든 영역에서 인종 분리가 시행되었다.[42] 1920년대 남부 흑인들이 북부 산업도시로 이주하면서 북부에서도 인종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누구를 흑인으로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한방울 규칙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42]남북전쟁 이전 버지니아주에서는 아프리카계 혈통이 8분의 1 또는 4분의 1 미만인 혼혈 자유인은 법적으로 백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6] 외모, 사회적 관계, 공동체 내 역할 등이 문서화된 조상 기록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과 노예 샐리 헤밍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유럽계 혈통이 8분의 7이었으므로, 만약 자유인이었다면 법적으로 백인이 될 수 있었지만, 노예 신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노예가 되었다.[7] 이들 중 성인이 된 일부는 백인 사회에 편입되었고, 그 후손들은 스스로를 백인으로 정체화했다.[7]
19세기 후반 남부 주들은 인종 차별을 법제화하려 했지만,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기 위한 명확한 인종 정의를 내리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89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헌법 회의에서 조지 D. 틸먼은 "완전한 백인은 한 명도 없다"며, 엄격한 인종 정의가 가져올 혼란과 불의를 경고하며 한방울 규칙 도입에 반대했다.[20] 그는 이미 사회적으로 백인으로 받아들여지는 혼혈 가문들이 많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러한 법이 "끝없는 소송, 스캔들, 공포, 반목, 유혈 사태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0]
그러나 20세기 초 우생학과 인종 순수주의 개념이 부상하면서 한방울 규칙은 법으로 명문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남부 백인 민주당원들이 정치 권력을 되찾고 짐 크로 법을 통해 흑인의 권리를 제약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연도 | 주 |
---|---|
1910 | 테네시주, 루이지애나주 |
1911 | 텍사스주, 아칸소주 |
1917 | 미시시피주 |
1923 | 노스캐롤라이나주 |
1924 | 버지니아주 (1924년 인종 통합법) |
1927 | 앨라배마주, 조지아주 |
1930 | 버지니아주 (기존 1/16 기준 폐지) |
1931 | 오클라호마주 |
다른 주들(플로리다주, 인디애나주, 켄터키주, 메릴랜드주, 미주리주, 네브래스카주, 노스다코타주, 유타주) 역시 기존의 혈통 비율 기준(예: 1/16, 1/32)을 사실상 한방울 규칙과 동일하게 운영하도록 수정했다.[23] 1930년 미국 인구조사국은 남부 입법부의 압력으로 멀라토 분류를 폐지했고, 이로 인해 혼혈인들은 오직 흑인 또는 백인으로만 분류되었다.
시인 랭스턴 휴스는 1940년 회고록에서 "미국에서는 '흑인'이라는 단어가 혈관에 아프리카 혈통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갈색이다"라고 쓰며 당시의 경직된 인종 분류를 비판했다.[12] 이 규칙은 다양한 조상을 가진 혼혈인들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무시하고 이들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일괄 분류함으로써, 그들의 다양한 유산을 지워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오늘날 정확한 조상 추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 내에서는 미국 원주민 혈통을 가졌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지만, DNA 검사 결과는 아프리카계 다음으로 유럽계 조상이 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13] 다만, 조상 DNA 검사 자체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있다.[14][15][16]
버지니아에서는 1924년 인종 통합법 제정과 함께 통계청장 월터 플레커가 한방울 규칙을 강력하게 적용했다.[25] 그는 "백인과 흑인처럼 물질적으로 다른 두 인종은 상위 인종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가까이 살 수 없다"고 주장하며,[25] 혼혈 가정을 당사자 통보 없이 흑인으로 재분류하고, 미국 원주민으로 정체성을 가진 이들마저 기록상 흑인으로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플레커의 이러한 조치는 버지니아 원주민 부족들이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다. 다만 버지니아 법에는 '포카혼타스 예외'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버지니아의 명문가(FFV) 중 다수가 식민지 시대 인물인 포카혼타스와 존 롤프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예외 조항에 따라, 16분의 1 이하의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고조부모 한 명에 해당)을 가진 개인은 백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칼 벤데첸 대령은 "일본인의 피 한 방울이라도" 가진 사람은 강제 수용소 수용 대상이라고 말했는데,[17] 이는 한방울 규칙과 유사한 논리가 다른 소수 인종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67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러빙 대 버지니아'' 판결을 통해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한 버지니아 법을 위헌으로 판결했고, 이로써 법의 근간이 되었던 한방울 규칙 역시 위헌임이 선언되었다.[42] 이 판결로 한방울 규칙은 법적 효력을 상실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백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혼혈 아동을 주로 개인의 비백인 조상과 연관 짓는 경향이 일반적인 반면,[1][18] 흑인 사회 내에서는 최근 몇 년간 다인종 정체성을 더 많이 인정하는 추세이다.[1][18]
2. 3. 아메리카 원주민
식민지 시대 이전, 그리고 전통적인 공동체에서는 '혈통'의 정도로 소속을 결정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친족 관계, 혈통 및 가족 관계를 기준으로 부족 신분을 결정했으며, 1934년 미국 정부가 인디언 재조직법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혈통법을 사용하지 않았다.[8]그러나 19세기의 인디언 이주와 관련된 많은 토지 양도 조약에서는 유럽인과 원주민 조상을 둔 혼혈 후손에게 조약으로 양도된 토지나 일시금의 몫을 받도록 규정하면서, 자격 요건으로 필요한 부족 조상의 정도를 명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규정이 일반적으로 한 방울 규칙을 적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별 청구인의 조상을 확인하는 과정은 복잡했고 종종 사기가 발생하기도 했다.[9]
부계 사회 부족 중에서는 오마하와 같이, 역사적으로 오마하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남성 시민에 의해 정식으로 입양되어야만 공식적으로 오마하 부족에 속할 수 있었다.[10] 현대 관행에서 시민권과 부모에 관한 부족 법률은 국가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
1904년과 1919년 사이, 미국 흑인 인디언을 포함한 부족 구성원들은 루이지애나의 치티마차 부족에서 부족 제명되었고, 그들의 후손은 그 이후로 부족 구성원 자격을 박탈당했다.[11]
2. 4. 20세기와 현대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노예제가 폐지되었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은 짐 크로우 법 등을 통해 남부 주들을 중심으로 강화되었다. 1920년대 남부 흑인들이 북부 산업도시로 이주하면서 북부에서도 인종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누구를 '흑인'으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세기에 들어 '피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한방울 규칙이 등장하여 법제화되기 시작했다.[42]한방울 규칙은 20세기 초 남부의 여러 주에서 법률로 명문화되었다.
주 | 연도 |
---|---|
테네시 | 1910년 |
루이지애나 | 1910년 |
텍사스 | 1911년 |
아칸소 | 1911년 |
미시시피 | 1917년 |
노스캐롤라이나 | 1923년 |
버지니아 | 1924년 (1924년 인종 통합법) |
앨러배마 | 1927년 |
조지아 | 1927년 |
오클라호마 | 1931년 |
이러한 법제화 이전에도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인종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 때문에 입법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189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인종 정의에 대한 논의 중 조지 D. 틸먼이 "이 회의장에는 완전한 백인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라며, "과거의 흑인 혈통 흔적 때문에 결혼을 무효화하는 것은 잔인한 불의이자 끝없는 소송과 스캔들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20] 이는 당시에도 인종적 순수성 개념의 허구성과 한방울 규칙 적용의 비합리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은 전통적으로 혈통보다는 친족 관계를 통해 부족 구성원을 결정했으나, 1934년 미국 정부의 인디언 재조직법 도입 이후 혈통 기준(blood quantum)을 사용하게 되었다.[8] 이는 한방울 규칙과는 다르지만, 정부 정책에 의해 혈통 중심의 정체성 규정이 강화된 사례이다. 한편, 20세기 초 루이지애나주의 치티마차 부족에서는 미국 흑인 인디언을 포함한 일부 부족 구성원들이 제명되는 사건도 발생했다.[11]
한방울 규칙은 백인 우월주의를 유지하려는 의도 아래 주로 아프리카계 혈통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시인 랭스턴 휴스는 1940년 회고록에서 "미국에서는 '흑인'이라는 단어가 혈관에 아프리카 혈통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며, 자신과 같이 다양한 조상을 가진 혼혈인들이 단순히 '흑인'으로 분류되는 현실을 꼬집었다.[12] 이러한 규칙은 혼혈인들의 다양한 조상을 지우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과정에서 칼 벤데첸 대령이 "일본인의 피 한 방울이라도" 가진 사람을 수용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례도 있어, 한방울 규칙과 유사한 논리가 다른 소수 인종 집단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7]
버지니아주에서는 통계청장 월터 플레커가 1924년 인종 통합법을 강력히 시행하며 한방울 규칙을 적용하는 데 앞장섰다.[25] 그는 "백인과 흑인처럼 다른 두 인종은 상위 인종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가까이 살 수 없다"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주장을 펼치며, 혼혈 가족이나 심지어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정체화했던 이들까지 강제로 '흑인' 또는 '유색인종'으로 재분류했다.[25] 루이지애나주의 나오미 드레이크 역시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26] 이러한 인종차별적 법률과 행정 조치는 1967년 연방대법원이 러빙 대 버지니아 사건에서 인종 간 결혼 금지법과 함께 버지니아 인종 통합법 및 한방울 규칙에 기반한 법률들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42]
법적 효력은 사라졌지만, 한방울 규칙의 영향력은 현대 미국 사회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사회학적으로 많은 백인들은 여전히 혼혈인을 주로 비백인 조상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1][18] 반면, 흑인 사회 내에서는 이중 인종 정체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지만[1], 흑인 권력 운동 등 일부에서는 정치적 연대를 위해 가시적인 아프리카계 조상을 가진 이들을 '흑인'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니키 칸나의 연구에 따르면, 많은 혼혈인들이 주변(흑인과 백인 모두)의 시선 때문에 스스로를 흑인으로 인식하는 '반사된 평가' 메커니즘을 통해 한방울 규칙이 사회적으로 영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37]
20세기 후반 이후 DNA 분석 기술의 발달로 인구 집단의 유전적 구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는 PBS 다큐멘터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 시리즈를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조상 구성을 대중에게 알렸다. 유전자 연구 결과, 상당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유럽계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비율은 개인마다 다양하게 나타났다.[13][32] 마크 D. 슈리버의 2002년 연구에 따르면, 스스로를 흑인으로 인식하는 미국인의 평균 백인 조상 비율은 18%에 달하며, 약 10%는 50% 이상의 백인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3] 반대로 백인으로 인식하는 미국인의 평균 흑인 조상 비율은 0.7%였으며, 약 70%는 아프리카계 조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었다.[33] 이러한 결과는 미국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인종 간의 혼혈이 꾸준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특히 대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지역별 인종 혼합 비율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33]
그러나 트로이 더스터[14]나 생물 식민주의에 관한 원주민 위원회(IPCB)[36] 등은 유전자 검사의 한계를 지적한다. 특정 유전자 마커가 특정 인종 집단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며, Y-염색체나 mtDNA 검사만으로는 전체 조상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14][16] 특히 소수 민족 집단의 경우, 질병이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 가능성, 데이터 부족 등으로 인해 정확한 조상 추적에 어려움이 따른다.[14][15][16][35] 따라서 유전자 검사 결과만으로 개인의 복잡한 인종적 정체성이나 유산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3. 다른 국가의 사례
'한방울 규칙'은 노예제가 존재했던 식민 시대 미국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발전한 인종 분류 방식이다. 이러한 규칙은 남부의 노예 문화와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노예 해방 및 재건 시대를 거치며 형성되었다. 19세기 후반, 남부 백인들은 정치적 권력을 되찾고 백인 우월주의를 강화하면서 짐 크로우법을 통해 법적인 인종 차별을 확립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소량의 아프리카 혈통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흑인'으로 분류하는 '한방울 규칙'이 자리 잡게 되었다.
반면, 미국 외 다른 국가들에서는 역사적으로 미국과 다른 방식으로 인종을 분류해왔다. 예를 들어 식민 시대 스페인 아메리카에서는 외모, 알려진 조상, 사회경제적 지위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혼혈 후손을 분류하는 복잡한 체계가 존재했다. 이는 단순히 혈통만을 기준으로 삼는 '한방울 규칙'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J. B. 버드 교수에 따르면, 카리브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콜린 파월과 같은 인물을 혼혈 혈통을 반영하여 크리올로 묘사할 것이며, 벨리즈에서는 그의 밝은 피부색 때문에 "고급 크리올"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28] 이처럼 미국의 '한방울 규칙'은 보편적인 기준이 아니며, 다른 문화권에서는 인종을 인식하고 분류하는 방식에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3. 1. 라틴 아메리카
식민 시대의 스페인 아메리카에서는 많은 군인과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들을 아내로 삼았으며, 원주민 출신 스페인 여성은 항상 소수였다. 식민지 주민들은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백인의 혼혈 후손을 외모와 알려진 조상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식별하는 정교한 분류 및 카스트 제도를 개발했다. 이러한 인종적 카스트는 조상이나 피부색뿐만 아니라 개인의 재정 상태나 계급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는 어떤 아프리카 조상이라도 있으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역사적인 '한방울 규칙'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이러한 인종 문화적 차이는 브라질, 콜롬비아, 파나마 및 기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수십만 명의 어두운 피부 이민자들에게 인종 정체성 충격을 야기했다. 많은 이들이 고국에서는 흑인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종종 흑인으로 간주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이들은 미국의 흑인 정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느꼈다. 때때로 백인과 흑인 미국인들은 그들의 피부색 때문에 차별할 수 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아프로 라틴계 이민자들이 자신의 흑인성을 부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동시에 이민자들은 피부가 밝은 라틴계가 스페인어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지배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대다수의 라틴 아메리카인은 아프리카 또는 아메리카 원주민 조상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도, 미국의 인종 분류에 따라 '백인에서 흑인으로 변해야 하는' 추가적인 부담을 느끼는 것은 많은 이민자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보스턴에서 일했던 어두운 피부의 파나마 출신 이민자 이바넷 모데스틴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힘들다고 토로했다. "매일 설명해야 하는 날이 있습니다."[27]
J. B. 버드 교수는 라틴 아메리카 외에도 보이는 아프리카 조상이 있으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역사적 개념을 거부하는 지역이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카리브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콜린 파월과 같은 인물을 혼혈 혈통을 반영하여 크리올로 묘사할 것이며, 벨리즈에서는 그의 밝은 피부색 때문에 "고급 크리올"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28]
3. 2. 브라질
미국과 달리 브라질에서는 인종을 분류할 때 유전자형보다는 표현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외모가 백인으로 보이면 다른 인종의 조상이 일부 있더라도 백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어떤 아프리카 조상이라도 있으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역사적인 '한방울 규칙'과는 다른 방식이다.[28] 브라질에는 외모상 백인도 흑인도 아닌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파르두(메스티소 또는 물라토)'라는 인종 범주가 존재한다.
브라질 지리 통계 연구소(IBGE)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브라질 사람들은 자신의 인종을 정의할 때 주로 피부색(73.8%)과 가족 출신(61.6%)을 고려한다고 답했다. 신체적 특징(머리카락, 입, 코 등)도 53.5%가 중요한 기준으로 꼽았다. 그 외에 문화와 전통(24.9%), 경제적 기원이나 사회 계층(13.5%), 정치적 또는 이념적 선택(2.9%)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96%는 자신의 인종을 식별할 수 있다고 답했는데, 이는 브라질 사람들이 인종 개념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통념과는 다른 결과이다.[30]
이러한 복잡한 인종 인식은 실제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유명 축구 선수 호나우두는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론 조사 기관 Datafolha의 조사 결과 브라질 국민의 64%는 그를 파르두로 여긴다.[29] 반면, 배우 카밀라 피탄가는 스스로를 흑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브라질 국민의 27%만이 그녀를 흑인으로 간주했다.[29] 이는 브라질 사회에서 인종 정체성이 개인의 인식과 사회적 인식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3. 푸에르토리코
스페인 식민지 시대 동안, 푸에르토리코는 '레글라 델 사카르'(Regla del Sacares) 또는 '그라시아스 알 사카르'(Gracias al Sacares)와 같은 법률을 가지고 있었다. 이 법률에 따르면, 흑인 조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지난 4세대 동안 각 세대마다 최소 한 명의 백인 조상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법적으로 백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따라서 백인 혈통이 알려진 흑인 조상을 일부 가진 사람들은 백인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한방울 규칙'과는 정반대의 방식이었다.[31]
4. 현대 미국의 인종 혼합
20세기 후반 DNA 분석 기술의 발달은 미국 내 인종 혼합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유전적 계보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인종 및 민족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인구 집단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PBS에서 방영된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의 프로그램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 시리즈는 이러한 유전자 연구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저명한 인물들의 조상을 추적하며 SNP에 초점을 맞춘 자가 염색체 DNA 검사 결과를 활용했다.[16] 프로그램 전문가들은 미국 인구의 인종 구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32]
-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58%는 최소 12.5% (1/8, 증조부모 한 명에 해당)의 유럽 혈통을 가짐.
-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19.6%는 최소 25% (1/4, 조부모 한 명에 해당)의 유럽 혈통을 가짐.
-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1%는 최소 50% (1/2, 부모 한 명에 해당)의 유럽 혈통을 가짐. (게이츠 본인도 총 51%의 유럽 혈통을 가진 것으로 밝혀짐)
-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5%는 최소 12.5% (1/8, 증조부모 한 명에 해당)의 미국 원주민 혈통을 가짐.
2002년,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의 분자 인류학자 마크 D. 슈리버는 스스로를 백인 또는 흑인으로 인식하는 미국인들의 인종 혼합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33] 슈리버는 미국 25개 지역에서 3,000명을 표본으로 삼아 자가 염색체 유전자 구성을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구분 | 평균 아프리카계 혈통 비율 | 평균 유럽계 혈통 비율 | 비고 |
---|---|---|---|
스스로를 백인으로 인식하는 경우 | 0.7% | - | * 전체 백인의 약 70%는 아프리카계 혈통 없음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유럽 이민자 후손 영향) * 아프리카계 혈통이 있는 백인(약 30%)의 경우, 평균 2.3%의 아프리카계 혈통 보유 |
스스로를 흑인으로 인식하는 경우 | - | 18% | * 약 10%는 50% 이상의 유럽계 혈통 보유 |
슈리버의 연구는 미국 내 흑인이 백인보다 인종적으로 더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초기 식민지 시대의 긴밀한 생활 및 노동 환경(흑인과 백인 계약 노동자 및 노예 간의 결합),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자유 혼혈인의 이주, 그리고 노예제 하에서의 강압적인 관계 등 복합적인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다.[19][34] 백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 자녀는 자유인 신분을 가졌으며, 이는 자유 흑인 가족의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1790년에서 1810년 사이 상부 남부 지역 자유 흑인 가족의 80%는 식민지 시대 버지니아에서 백인 여성과 아프리카 남성의 결합에서 비롯된 후손으로 추정된다.[19]
또한 슈리버는 지역별로 인종 혼합 비율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이주 패턴과 역사적 정착 과정의 차이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 시애틀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유럽계 혈통 비율이 평균 25% 이상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대이동 시기에 남부(루이지애나, 텍사스, 미시시피)에서 이주해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많았기 때문이다.[33]
그러나 이러한 유전자 검사에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트로이 더스터는 Y-염색체와 mtDNA 검사만으로는 부계와 모계를 제외한 다른 수많은 조상의 유산을 파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14] 그는 유전자 검사가 개인의 유산에 대한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으며, 슈리버의 연구나 게이츠의 프로그램 모두 이러한 한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14][35] 생물 식민주의에 관한 원주민 위원회(IPCB) 역시 "미국 원주민 마커"로 알려진 유전 표지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며,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36] 또한 초기 전염병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 가능성, 검사 참여 부족으로 인한 마커 식별의 한계 등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14][35]
한편, '한 방울 규칙'은 법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니키 칸나(Nikki Khanna)는 남부의 흑인 및 백인 성인들을 인터뷰한 연구에서, 많은 혼혈 응답자들이 주변 사람들(흑인과 백인 모두)이 자신을 흑인으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를 흑인으로 정체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반사된 평가(reflected appraisal)' 메커니즘을 통해 한 방울 규칙이 사회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37]
5. 사회적 영향
북아메리카에서는 혼혈인이라도 유럽인과 신체적 특징이 유사하면 같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던 남아메리카와 달리, 혼혈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많은 흑인들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노예를 해방시킨 북부조차 남부 흑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흑인들은 남부에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남부 백인들은 흑인 분리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공공시설, 교육시설, 대중교통 등 모든 시설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했다. 1920년대 남부 흑인들이 북부 산업도시로 이주하면서 북부에서도 인종 갈등이 심화되었고, 누구를 흑인으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한방울 규칙'이 등장하게 되었다.[42]
미국 남북 전쟁 이전 버지니아주에서는 혼혈 자유인(자유 흑인) 중 아프리카 혈통이 8분의 1 또는 4분의 1 미만일 경우 법적으로 백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6] 많은 혼혈인들은 외모, 사회적 관계, 공동체 내 역할 수행 여부에 따라 다수 문화(백인 사회)에 흡수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종적 지위에 의문이 제기될 경우, 문서화된 조상 기록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미국의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노예였던 샐리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여섯 명의 혼혈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샐리 헤밍스 자신은 4분의 3이 백인 혈통이었으며, 제퍼슨의 아내 마사 웨일스 제퍼슨의 이복 자매였다. 토머스 제퍼슨 재단(TJF)과 대부분의 역사가는 제퍼슨이 아내 사망 후 샐리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기록에 언급된 여섯 자녀(베벌리, 해리엇, 매디슨, 에스턴)의 아버지였다고 본다.[7] 이들 중 네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7] 당시 버지니아 법에 따르면, 8분의 7이 유럽 혈통인 이들은 자유인이었다면 법적으로 백인이었겠지만,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partus sequitur ventrem) 태어날 때부터 노예 신분이었다. 제퍼슨은 1822년 가장 나이가 많은 두 자녀의 탈출을 묵인했고(법적 해방은 주 의회 허가가 필요한 공개적 절차였기에 피하려 함), 1826년 유언장을 통해 가장 어린 두 자녀를 해방시켰다. 네 명 중 세 명은 성인이 되어 백인 사회로 들어갔고, 그 후손들은 스스로를 백인으로 정체화했다.
인종 차별은 19세기 후반 남부 연합의 모든 주에서 법적으로 채택되었지만, 초기 입법자들은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기 위해 법으로 인종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을 꺼렸다. 189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헌법 회의에서 반혼혈 법과 흑인의 재건 이후의 선거권 박탈을 위한 변화가 제안되었을 때, 조지 D. 틸먼은 한 방울 규칙 도입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법이 현재와 같이 제정된다면, 에이킨, 반웰, 콜턴, 오렌지버그의 존경받는 가족들은 현재 교류하고 동일시하는 사람들과 결혼할 권리를 박탈당할 것입니다. 적어도 100가족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회의장에는 완전한 혈통의 백인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모든 구성원은 일정 정도의 혼합된... 유색인 혈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흑인 혈통의 희미하고, 아마도 오래된 흔적에 대해 결혼을 무효화하거나 금지하려는 것은 잔인한 불의이며, 끝없는 소송, 스캔들, 공포, 반목, 유혈 사태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스캔들, 악의, 탐욕을 위한 문이 열릴 것입니다... 남자의 절반이라도 되는 사람은 아버지의 정당성이나 혈통의 순수성에 대해 어머니의 명예에 대한 공격을 막거나 복수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세상의 절반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20][21]
한 방울 규칙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법적으로 공식화되었다. 이는 남북 전쟁, 노예제 폐지, 그리고 재건 시대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남부의 백인 우월주의 회복과 짐 크로 법 제정, 그리고 20세기 우생학 및 인종 순수주의 사상의 부상과 관련이 깊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 백인 민주당원들은 옛 남부 연합 주에서 정치 권력을 되찾고 공공 시설을 통제하는 인종 차별 법과 1890년부터 1910년까지 대부분의 흑인과 가난한 백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기 위한 법과 헌법을 통과시켰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초기에는 이러한 주법에 대한 이의 제기를 기각했으며,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통해 "분리하되 평등하게" 원칙 하에 공공 시설의 인종 차별을 합법화했다.
짐 크로 법 시대(특히 1910-1930년)에 한 방울 규칙과 같은 저강하 법들이 제정되어, 아주 적은 비율의 흑인 조상이라도 가진 사람을 법적으로 흑인으로 규정했다.[3] 테네시주는 1910년에 이러한 "한 방울" 법을 채택했고, 루이지애나주가 곧 따랐다. 그 후 텍사스주와 아칸소주(1911), 미시시피주(1917), 노스캐롤라이나주(1923), 앨라배마주와 조지아주(1927), 버지니아주(1930)가 채택했다. 같은 기간 동안 플로리다주, 인디애나주, 켄터키주, 메릴랜드주, 미주리주, 네브래스카주, 노스다코타주, 유타주는 구 "혈액 분수" 법(예: 16분의 1, 32분의 1)을 법적으로는 유지했지만 사실상 한 방울 규칙과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수정했다.[23] 1865년 플로리다주는 이미 혼혈을 금지하고 "유색인"으로 정의되기 위한 흑인 조상의 비율(8분의 1 이상)을 명시하는 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22]
20세기 미국에서 한 방울 규칙은 주로 아프리카 혈통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으며, 이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백인 우월주의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깊었다. 시인 랭스턴 휴스는 1940년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불행하게도 나는 흑인이 아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흑인'이라는 단어가 혈관에 아프리카 아프리카 혈통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에서는 그 단어가 더 순수하다. 그것은 모든 아프리카인, 따라서 흑인을 의미한다. 나는 갈색이다."[12]
이 규칙 때문에 다양한 조상을 가진 많은 혼혈인들이 단순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분류되었고, 그들의 복잡한 조상 배경은 잊히거나 지워져 오늘날 정확한 조상 추적을 어렵게 만들었다.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의 후손 중 다수는 자신들에게 미국 원주민 혈통이 있다고 믿어왔다.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의 2006년 PBS 다큐멘터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 내 이러한 구전 역사를 다루었다. 그러나 DNA 검사 결과, 인터뷰 대상자 대부분(두 명 제외)은 아프리카 조상 다음으로 유럽인 조상이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13] 하지만 많은 비평가들은 조상 DNA 검사가 특히 소수 민족 집단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14][15][16]
제2차 세계 대전 중 칼 벤데첸 대령은 "일본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은 강제 수용소 수용 대상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7]
오늘날 미국에는 한 방울 규칙을 강제하는 법률은 없다. 1967년 연방대법원은 ''러빙 대 버지니아'' 판결에서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버지니아 법과 함께 한 방울 규칙에 기반한 법률들을 위헌으로 선언했다.[42]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이 개념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흑인 사회 내에서는 이 개념에 대한 수용도가 낮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복수 인종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추세지만, 연구에 따르면 백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복수 인종 아동을 주로 비백인 조상과 연관 짓는 경향이 일반적이다.[1][18]
미국 남북 전쟁 이전과 이후 모두, 외모상 백인과 구별하기 어렵고 대부분 백인 조상을 가진 혼혈인들은 법적으로 백인 주류 사회에 흡수되기도 했다. 주마다 기준은 달랐는데, 예를 들어 1822년 버지니아주 법은 멀라토(다인종)로 분류되려면 최소 4분의 1의 아프리카 조상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6] 버지니아의 이 기준은 1910년 16분의 1로 변경되었고, 1924년 인종 통합법이 제정된 1930년에는 이 기준마저 폐지되고 '조금이라도' 아프리카 조상이 있으면 법적으로 "유색인"(흑인)으로 분류하는 더 엄격한 한 방울 규칙이 적용되었다.
1831년 냇 터너의 반란 이후 버지니아 주 의회는 자유 흑인에 대한 제한을 강화했지만, 한 방울 규칙 제정은 피했다. 1853년 트래비스 H. 에페스가 제안했을 때, 의원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혼혈 관계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규칙이 백인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한 논평가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신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 방울 규칙이 채택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백인으로 여겨지고 실제로 그렇더라도, 유능한 관할 법원의 판결에 의해 곧바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 흑인의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6]
주 의원들은 이에 동의했고, 결국 1924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혼혈 가족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후에야 법이 통과되었다. 21세기 들어 개인들이 DNA 유전자 분석을 받으면서 이러한 숨겨진 혼혈 가족사가 다시 드러나고 있다.
멜룬전은 식민지 시대 버지니아에서 자유민이었던,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조상을 가진 다인종 가족 집단이다. 이들은 켄터키와 테네시 변경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그 후손들은 수십 년에 걸쳐 "백인"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결혼하는 경향을 보였다.[19] 이들의 후손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주류 문화에 동화되었다.
1930년 이전에는 눈에 띄는 유럽-아프리카 혼혈인들이 멀라토로 분류되거나 외모에 따라 흑인 또는 백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 남부 입법부의 로비로 인해 인구 조사국은 멀라토 분류를 폐지했다. 이로 인해 혼혈 인구에 대한 오랜 사회적 인식 기록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오직 흑인 또는 백인으로만 분류되었다.
한 방울 규칙의 이분법적 적용은 백인 공동체에서 성장한 대부분 유럽 혈통의 사람들, 그리고 혼혈이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자기 정체성을 무시했다. 특히 버지니아 주의 통계 등록관 월터 플레커는 1924년 버지니아 법을 악용하여 생명 기록을 변경하거나 파기하고, 가족 구성원을 인종 경계의 양쪽으로 나누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문서화된 연속성을 파괴했다. 그는 버지니아의 모든 사람을 백인 또는 흑인으로만 분류하도록 강제했으며, 특정 가족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인디언에서 흑인으로 재분류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흑인들이 인디언으로 "통과"하려 한다는 그의 의심 때문이었다. 1940년대까지 플레커[25]와 루이지애나 주의 나오미 드레이크[26]는 통계청장으로서 이러한 분류 작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세기 후반부터 버지니아 주는 8개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그 구성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이들 부족은 플레커의 기록 조작으로 인해 수십 년간 출생, 결혼, 사망 기록이 잘못 분류되어 연방 정부의 인정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혼혈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 후손의 경우, 버지니아의 한 방울 규칙은 16분의 1 이상의 인디언 혈통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이는 "포카혼타스 예외"로 알려져 있는데, 많은 영향력 있는 버지니아의 명문가(FFV)들이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원주민 포카혼타스와 그녀의 남편 존 롤프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버지니아 일반 의회는 16분의 1 이하의 인디언 "혈통"(고조부모 한 명 해당)을 가진 개인은 백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우생학자 매디슨 그랜트는 그의 저서 ''위대한 인종의 멸망''(1916)에서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혼혈은 인디언이고,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은 흑인이며... 세 유럽 인종 중 어느 하나와 유대인 사이의 혼혈은 유대인이다"라고 주장했다.[24] 그러나 부계 혈통을 따르는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예: 오마하족)은 백인 남성과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사이의 자녀를 백인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미국 내 다양한 민족 집단,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 내에서는 한 방울 규칙과 유사한 개념이 여전히 존재한다. 아프리카 조상이 있는 다인종 개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하든 상관없이 흑인 또는 비백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반대로, 흑인 권력 운동 시기 일부 흑인 지도자들은 정치적 기반 확대를 위해 가시적인 아프리카 조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흑인으로 포섭하려 하기도 했다.
미국은 노예제 사회였던 식민 시대부터 한 방울 규칙을 발전시킨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규칙은 남부 노예 문화와 남북 전쟁 이후 백인 우월주의를 회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강화되었다.
식민 시대 스페인 아메리카에서는 군인과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고,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백인의 혼혈 후손을 외모와 조상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하는 정교한 카스트 제도를 발전시켰다. 이 카스트는 조상이나 피부색뿐만 아니라 개인의 재정 상태나 사회 계급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이러한 인종 문화적 차이는 브라질, 콜롬비아, 파나마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어두운 피부의 이민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국에서는 흑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많은 이들이 미국 사회에서는 종종 흑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의 흑인 정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백인과 흑인 양쪽으로부터 차별을 경험하기도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아프로 라틴계 이민자들이 자신의 흑인성을 부정한다고 여기는 반면, 이민자들은 피부가 밝은 라틴계가 스페인어 미디어를 지배한다고 느낀다. 많은 라틴 아메리카 이민자들은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인종 정체성까지 바꿔야 하는 상황에 어려움을 느낀다. 파나마 출신 이민자 이바넷 모데스틴은 "매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27]
J. B. 버드 교수는 라틴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카리브해 대부분 국가에서도 미국의 한 방울 규칙과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카리브해 대부분 지역에서 콜린 파월은 혼혈 혈통을 반영하여 크리올로 묘사될 것이며, 벨리즈에서는 그의 밝은 피부색 때문에 "고급 크리올"로 불릴 수도 있다.[28]
6. 문화적 표현
찰스 W. 체스넛은 혼혈이며 북부에서 성장했고, 남북 전쟁 이후 남부 사회의 혼혈 문제에 관한 이야기와 소설을 썼다.
한 방울 규칙과 그 결과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뮤지컬 ''쇼 보트''(1927)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재건 시대가 끝나고 남부에서 인종 차별과 짐 크로우 법이 시행되던 1887년 미시시피 강 배를 배경으로 한다. 백인 남성 스티브는 백인으로 위장한 혼혈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남부 보안관에게 쫓기게 된다. 보안관은 스티브를 혼혈(miscegenation) 혐의, 즉 흑인 혈통을 가진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체포하려 한다. 위기에 처한 스티브는 아내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조금 삼킨다. 보안관이 도착하자 스티브는 "흑인 피가 있는 남자를 백인으로 볼 것이냐"고 묻는다. 보안관은 "이 지역에서는 흑인 피 한 방울이라도 있으면 당신은 흑인이다"라고 답한다. 이에 스티브는 "내 안에는 흑인 피가 한 방울 이상 있다"고 주장한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까지 더해지자 보안관은 스티브를 체포하지 않고 떠난다.[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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