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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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성수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20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와 센슈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하며 상해 지역 공작 책임자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및 한인 청년 포섭 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순국 26년 만에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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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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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 | 1910년 1월 1일 |
사망 | 1988년 9월 24일 (78세) |
직업 | 법조인 |
분야 | 법학 |
학력 | |
최종 학력 | 주오 대학 법학부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대법원 판사 헌법재판소 재판관 |
생애 | |
주요 활동 | 사법파동 당시 대법원장 민복기에게 사표를 제출 유신헌법에 의해 임명된 대법원 판사직 사퇴 |
기타 | |
종교 | 천주교 |
세례명 | 요셉 |
2. 생애
한성수는 1920년 8월 18일 평북 신의주 고진면 낙청동에서 한일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정규는 신의주 일대의 부호였으며, 어릴 적 한성수의 집안은 부유하였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한성수는 1934년 3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성수의 조부는 1919년 한재 때 정주 지역 이재민들에게 구호양곡을 지원하고,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오산학교 재단에 거금을 희사한 자선사업가이자 교육독지가였다. 또한 이승훈과 함께 오산학교 재단 이사로 활동하는 등, 한성수의 집안은 오산학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오산학교는 애국청년들과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한 민족학교였으며, 이곳에서 받은 민족교육은 훗날 한성수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순국하게 되는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한성수는 1941년 일본 센슈 대학 경제학과에 유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 철산군 반탁운동의 주역이었던 정봉일의 딸 정숙저와 결혼하였다. 전수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읽다 발각되어 정학을 맞기도 하는 등, 한성수의 유학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1944년 초,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한성수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일제는 1943년 조선인학도특별지원병령을 발표하여 한국 청년학생들을 전선으로 내몰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후방에서 민족지성의 저항력을 말살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학교를 다녔던 한성수도 예외 없이 강제동원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2. 2. 일본 유학과 학병 징집
3. 항일 독립운동
1944년 1월 20일, 한성수를 비롯한 학병들은 평양50부대에 강제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주로 평남북 출신으로, 전선에 배치된 후 일본군을 탈출하자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성수는 영어 실력을 활용해 미군으로 탈출하고자 남양군도 배치를 희망했지만,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1944년 2월 13일, 학병들은 군용열차를 타고 평양을 출발해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인근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치중대(輜重隊)로, 한성수는 이곳에서 탈출을 계획했다. 1944년 3월 26일, 한성수는 오건(吳健), 이종무와 함께 세 번의 시도 끝에 야간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 과정에서 세 사람은 헤어졌고, 한성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로 갔다. 오건과 이종무는 보계수용소(寶鷄收容所)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1945년 5월 석방되어 한국광복군 제2지대로 입대하였다.
한성수의 탈출은 이 지역 학병 탈출 중 첫 번째 사례였다. 이후 박영록(朴永祿), 백정갑(白正甲), 윤영무(尹永茂), 이영길(李永吉), 노능서(魯能瑞), 김우전(金祐銓), 장준하(張俊河), 윤경빈(尹慶彬), 석근영(石根英), 김유길(金柔吉) 등 많은 한인 학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했다. 한성수가 속했던 서주 치중대에서는 학병 50명 중 22명이 탈출을 감행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이들의 탈출은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이었으며, 광복군에 합류하기까지 무수한 난관을 거쳐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한성수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제3지대는 중일전쟁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안휘성 부양에 위치하여 만주나 한반도로 침투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피난 수도였던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염원을 안고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정규군을 조직하여 대일전에 투입하고자 하였으나, 국외 활동이라는 한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8년간의 피난 시기를 끝내고 충칭에 안착한 1940년에 와서야 자체 정규군인 국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국광복군 창설 당시에는 총사령부만으로 조직되었으나,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총사령부와 3개 지대로 편제된 군사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충칭에 총사령부와 제1지대가 있었고, 시안에 이범석 지대장의 제2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제3지대는 김학규 장군이 당시 최전선이었던 안휘성 부양에 파견되어 한인 청년들을 대대적으로 초모한 결과 창설된 부대였다.
한성수는 광복군 입대 후, 광복군 대원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설치된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에 입교하였다. 한광반은 안휘성 부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광복군 제3지대가 설치 운영한 임시 훈련소였다. 제3지대는 지하공작을 통해 적 점령지구 내 한인 청년들을 포섭, 초모하였고, 1944년에 접어들면서 초모된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 탈출병들이 부양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자 이들을 교육, 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훈련 내용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이 중심이었으며, 특히 정신 교육은 지대장 김학규 등이 한국 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혁 및 건국 강령 등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진행하였다. 한성수는 180cm에 가까운 건장한 체격과 온화한 성품,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동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944년 10월 22일, 한광반 제1기 졸업생 48명은 졸업과 더불어 중국군 소위 임명장을 받았다. 한성수를 비롯한 12명은 현지에 남아 3지대의 기간 요원이 되어 적 후방 활동 및 초모 공작을 수행하였다. 초모 공작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새로운 인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임무였으며, 1945년 3월 말 임시정부 군무부 보고에 따르면 3지대의 초모 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1944년 11월 하순, 한성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로부터 상해를 비롯한 화남지역 공작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는 일본군을 탈출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적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는 위험한 임무였다. 한성수의 주요 임무는 상해에서 한인 청년들을 초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한성수는 홍순명, 김영진 등과 함께 상해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무전통신 작전을 수행하고, 일본군 내 한인 장병들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진행했다. 광복군의 초모 활동은 1단계로 적 점령지역에 잠입하여 거점을 마련하고, 2단계로 한인 청년을 포섭하며, 3단계로 포섭된 인원을 광복군 지역으로 인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 한인사회를 친일적인 색채로 바꾸어 놓았고, 항일 정서를 말살했다. 친일 한인들은 일본군 특무기관, 헌병대 등의 지휘 하에 상호감시체제를 구축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침투를 철저히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성수는 박윤석, 허암 등 1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을 포섭하고 박윤석의 집에 공작 거점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성수는 초모 공작 3개월 후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첫 대상자는 상해의 한인 갑부 손창식이었는데, 그는 일본군 비호 하에 군수품을 납품하고 조선 청년들의 일본군 입대를 부추기던 친일파였다. 한성수는 이상일이라는 가명으로 손창식을 방문하여 군자금 제공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오히려 이 만남으로 인해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손창식은 1932년 민족주의단체에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된 경험이 있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신했다. 그는 상해거류조선인회와 계림회의 간부를 역임하며 일본군에 적극 협조했고, 징병제 실시 기념행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패망 후 손창식은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전범 군사 법정에 회부되었는데, 한성수의 체포 배경에는 손창식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1945년 3월 13일, 한성수는 상해에서 한인 부호 손창식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려다 동지 홍순명, 김영진, 박윤석, 허암 등과 함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체포 후 일본 헌병들은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특히 한성수는 일본군 탈출 경력 때문에 더욱 잔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광복군 관련 기밀을 발설하지 않았다.
이후 한성수는 일본군 7330부대 임시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 혹심한 고문으로 업힌 채 출두한 한성수는 법정에서 일본어 사용을 거부하고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라고 답변하며 재판장의 질문에 당당하게 맞섰다. 또한 대동아전쟁에 대한 질문에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라고 답하며 일본의 패전을 확신했다.
일본군 군법회의는 한성수에게 광복군 공작책임자이자 일본군 탈출, 분적이적군기밀누설(奔敵利敵軍機密漏泄)과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함께 체포된 홍순명, 김영진 등은 3년 이상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한성수는 남경 일본육군형무소로 이송된 후 1945년 5월 13일 참수형(斬首刑)을 당했다. 이는 한국광복군 공작책임자로 일본군을 탈출하고 군법회의에서도 일제에 강력하게 항거했던 한성수에 대한 불법적인 처형이었다.
한성수의 처형 소식을 들은 김학규 지대장은 전이호 대원에게 밀고자 처단을 지시했으나, 전이호가 상해로 출발하기 전 8.15 광복을 맞이했다.
한성수의 유해는 일본 동경 우천사(祐天寺)에 방치되었다가 순국 26년 만인 1971년 11월 20일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여기에는 학병 출신으로 태평양전쟁에서 희생된 한인의 유골 봉환 운동을 벌이던 정기영 등의 노력이 있었다. 유해는 부산 청룡동산 공원묘역을 거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한성수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1.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 합류
1944년 1월 20일, 한성수를 비롯한 학병들은 평양50부대에 강제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주로 평남북 출신으로, 전선에 배치된 후 일본군을 탈출하자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성수는 영어 실력을 활용해 미군으로 탈출하고자 남양군도 배치를 희망했지만,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1944년 2월 13일, 학병들은 군용열차를 타고 평양을 출발해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인근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치중대(輜重隊)로, 한성수는 이곳에서 탈출을 계획했다. 1944년 3월 26일, 한성수는 오건(吳健), 이종무와 함께 세 번의 시도 끝에 야간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 과정에서 세 사람은 헤어졌고, 한성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로 갔다. 오건과 이종무는 보계수용소(寶鷄收容所)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1945년 5월 석방되어 한국광복군 제2지대로 입대하였다.
한성수의 탈출은 이 지역 학병 탈출 중 첫 번째 사례였다. 이후 박영록(朴永祿), 백정갑(白正甲), 윤영무(尹永茂), 이영길(李永吉), 노능서(魯能瑞), 김우전(金祐銓), 장준하(張俊河), 윤경빈(尹慶彬), 석근영(石根英), 김유길(金柔吉) 등 많은 한인 학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했다. 한성수가 속했던 서주 치중대에서는 학병 50명 중 22명이 탈출을 감행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이들의 탈출은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이었으며, 광복군에 합류하기까지 무수한 난관을 거쳐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3. 2. 한국광복군 활동
한성수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제3지대는 중일전쟁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안휘성 부양에 위치하여 만주나 한반도로 침투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피난 수도였던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염원을 안고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정규군을 조직하여 대일전에 투입하고자 하였으나, 국외 활동이라는 한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8년간의 피난 시기를 끝내고 충칭에 안착한 1940년에 와서야 자체 정규군인 국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국광복군 창설 당시에는 총사령부만으로 조직되었으나,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총사령부와 3개 지대로 편제된 군사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충칭에 총사령부와 제1지대가 있었고, 시안에 이범석 지대장의 제2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제3지대는 김학규 장군이 당시 최전선이었던 안휘성 부양에 파견되어 한인 청년들을 대대적으로 초모한 결과 창설된 부대였다.
한성수는 광복군 입대 후, 광복군 대원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설치된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에 입교하였다. 한광반은 안휘성 부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광복군 제3지대가 설치 운영한 임시 훈련소였다. 제3지대는 지하공작을 통해 적 점령지구 내 한인 청년들을 포섭, 초모하였고, 1944년에 접어들면서 초모된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 탈출병들이 부양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자 이들을 교육, 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훈련 내용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이 중심이었으며, 특히 정신 교육은 지대장 김학규 등이 한국 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혁 및 건국 강령 등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진행하였다. 한성수는 180cm에 가까운 건장한 체격과 온화한 성품,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동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944년 10월 22일, 한광반 제1기 졸업생 48명은 졸업과 더불어 중국군 소위 임명장을 받았다. 한성수를 비롯한 12명은 현지에 남아 3지대의 기간 요원이 되어 적 후방 활동 및 초모 공작을 수행하였다. 초모 공작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새로운 인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임무였으며, 1945년 3월 말 임시정부 군무부 보고에 따르면 3지대의 초모 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3. 3. 상해지역 적 후방 공작활동
1944년 11월 하순, 한성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로부터 상해를 비롯한 화남지역 공작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는 일본군을 탈출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적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는 위험한 임무였다. 한성수의 주요 임무는 상해에서 한인 청년들을 초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한성수는 홍순명, 김영진 등과 함께 상해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무전통신 작전을 수행하고, 일본군 내 한인 장병들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진행했다. 광복군의 초모 활동은 1단계로 적 점령지역에 잠입하여 거점을 마련하고, 2단계로 한인 청년을 포섭하며, 3단계로 포섭된 인원을 광복군 지역으로 인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 한인사회를 친일적인 색채로 바꾸어 놓았고, 항일 정서를 말살했다. 친일 한인들은 일본군 특무기관, 헌병대 등의 지휘 하에 상호감시체제를 구축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침투를 철저히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성수는 박윤석, 허암 등 1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을 포섭하고 박윤석의 집에 공작 거점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성수는 초모 공작 3개월 후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첫 대상자는 상해의 한인 갑부 손창식이었는데, 그는 일본군 비호 하에 군수품을 납품하고 조선 청년들의 일본군 입대를 부추기던 친일파였다. 한성수는 이상일이라는 가명으로 손창식을 방문하여 군자금 제공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오히려 이 만남으로 인해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손창식은 1932년 민족주의단체에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된 경험이 있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신했다. 그는 상해거류조선인회와 계림회의 간부를 역임하며 일본군에 적극 협조했고, 징병제 실시 기념행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패망 후 손창식은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전범 군사 법정에 회부되었는데, 한성수의 체포 배경에는 손창식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3. 4. 체포와 순국
1945년 3월 13일, 한성수는 상해에서 한인 부호 손창식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려다 동지 홍순명, 김영진, 박윤석, 허암 등과 함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체포 후 일본 헌병들은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특히 한성수는 일본군 탈출 경력 때문에 더욱 잔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광복군 관련 기밀을 발설하지 않았다.이후 한성수는 일본군 7330부대 임시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 혹심한 고문으로 업힌 채 출두한 한성수는 법정에서 일본어 사용을 거부하고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라고 답변하며 재판장의 질문에 당당하게 맞섰다. 또한 대동아전쟁에 대한 질문에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라고 답하며 일본의 패전을 확신했다.
일본군 군법회의는 한성수에게 광복군 공작책임자이자 일본군 탈출, 분적이적군기밀누설(奔敵利敵軍機密漏泄)과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함께 체포된 홍순명, 김영진 등은 3년 이상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한성수는 남경 일본육군형무소로 이송된 후 1945년 5월 13일 참수형(斬首刑)을 당했다. 이는 한국광복군 공작책임자로 일본군을 탈출하고 군법회의에서도 일제에 강력하게 항거했던 한성수에 대한 불법적인 처형이었다.
한성수의 처형 소식을 들은 김학규 지대장은 전이호 대원에게 밀고자 처단을 지시했으나, 전이호가 상해로 출발하기 전 8.15 광복을 맞이했다.
한성수의 유해는 일본 동경 우천사(祐天寺)에 방치되었다가 순국 26년 만인 1971년 11월 20일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여기에는 학병 출신으로 태평양전쟁에서 희생된 한인의 유골 봉환 운동을 벌이던 정기영 등의 노력이 있었다. 유해는 부산 청룡동산 공원묘역을 거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한성수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사후
4. 1. 유해 봉환
4. 2. 추서 및 평가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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