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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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애왕후는 고려 경종의 왕비이자 목종의 어머니로, 섭정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김치양과의 관계와 관련된 사건으로 인해 실각한 인물이다. 태조의 손녀이자 성종의 누이인 헌애왕후는 경종 사후 섭정을 시작하여 김치양을 중용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강조의 정변으로 김치양과 아들이 처형되고 유배되었다. 이후 현종 즉위 후 숭덕궁에서 사망했으며, 묘는 유릉이다. 사서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나, 최근에는 북진 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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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애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고려의 왕후 |
재위 | 980년 ~ 981년 |
즉위 | 980년 |
이전 | 헌의왕후 |
이후 | 문덕왕후 |
작위1 | 고려의 왕태후 |
재위1 | 997년 ~ 1009년 |
즉위1 | 997년 |
이전1 | 신정왕태후 |
이후1 | 인예태후 |
섭정1 | 목종 (아들) |
섭정 유형1 | 섭정 군주 |
아버지 | 대종 |
어머니 | 선의왕후 |
배우자 | 경종 |
자녀 | 목종 (경종과의 사이에서) 이름 불명의 아들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
출생일 | 964년 |
출생지 | 황주, 고려 |
사망일 | 1029년 1월 20일 |
사망지 | 숭덕궁, 개성시, 고려 |
매장지 | 유릉 |
휘호 | 천추태후 (千秋太后) 헌애왕태후 (獻哀王太后, 현종이 올림) |
시호 | 응천계성정덕왕태후 (應天啓聖靜德王太后) |
가문 | 황주 황보씨 (공식) 왕 (부계 및 혼인) |
기타 정보 | |
한국어 | 헌애왕후 황보씨 (獻哀王后 皇甫氏) 헌애왕태후 (獻哀王太后) 천추태후 (千秋太后) |
2. 생애
태조의 손녀이자 왕욱과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복 형제로는 성종과 헌정왕후가 있으며, 외할머니인 신정왕후 황보씨의 성을 따라 황보씨가 되었다.
사촌 오빠인 경종의 제3왕비가 되어 왕송을 낳았으나, 981년 경종과 사별했다. 성종 즉위 후 태후가 되어 천추궁에 거주했으며, 목종 즉위 후에는 천추태후로 불렸다.
헌애왕후는 외척 김치양과 정을 통했는데, 이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궁궐에 혼란을 야기했다.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 보냈으나, 섭정이 된 헌애왕후는 김치양을 다시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에 임명하여 막대한 권한을 주었다.
헌애왕후는 서경을 우대하고, 김치양의 출신지 서흥에 성수사를 짓는 등 각지에 도관과 사찰을 건설했다. 1003년에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과 아들은 처형되고, 헌애왕후는 유배되었다. 목종은 폐위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 강조의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강조 등은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여, 헌애왕후는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헌애왕후는 황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1029년 왕궁으로 돌아와 숭덕궁에서 66세로 훙거했으며, 묘소는 유릉이다.
2. 1. 생애 초반
964년 대종과 선의왕후의 딸로 태어났다. 경종의 세 번째 왕비이자 목종의 어머니이며, 성종의 누이동생이고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의 언니이다.[2][3]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부모의 성인 왕씨나 유씨가 아니라, 왕실 풍습에 따라 할머니인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성을 따랐다. 경종과는 사촌 지간이었다.
아버지 대종과 어머니 선의왕후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머니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손에서 자랐다.[3] 어린 시절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 2. 왕후 책봉과 태후
경종 즉위 후, 여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경종의 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였는데, 당시 경종은 왕비가 여럿 있었지만 후사가 없어 고민이었다. 980년, 17세에 경종의 유일한 자손인 목종을 낳았다.[3]981년 남편 경종이 죽자, 2살에 불과하던 아들 왕송 대신 오빠인 개령군 왕치(성종)가 즉위하였다. 헌애왕후는 출궁하여 궁 밖에 머물렀다. 유교를 국교로 삼으려던 성종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에게도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였다.[3]
아들이 없던 성종은 외조카이자 헌애왕후의 아들인 왕송을 개령군에 봉하고 궁궐에 데려와 친아들처럼 양육하였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왕송(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고,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3]
2. 3. 김치양과의 관계
경종이 죽은 후 헌애왕후는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을 만나게 되었다.[4] 김치양의 본관은 동주(洞州)이며,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4]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자주 만나다가 통정하게 되었는데, 성종은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만남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헌애왕후는 자신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김치양을 비밀리에 자주 만났고,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켰다. 결국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는데, 이는 헌정왕후의 사통 사건과 함께 왕실의 권위에 타격을 주었다.[4]2. 4. 태후로서의 섭정과 정치 활동
성종이 죽은 후 아들 왕송(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고, 천추궁에서 살았기에 스스로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렀다.[5] 섭정을 시작하면서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여 합문사인(閤門舍人)으로 삼았다.[5] 이후 김치양은 헌애왕후의 후원으로 상서우복야 겸 삼사사(三司使, 재정권과 인사권을 담당)에 임명되는 등 막대한 권력을 누렸다.[5] 천추태후는 자신의 본거지인 서경(西京)을 우대하고, 김치양의 출신지인 동주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는 등 곳곳에 도관과 사원을 건립했다.[5]1003년(혹은 그 이전),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자, 이 아이로 병든 목종의 후사를 이으려 했다.[5] 이를 위해 즉위에 걸림돌이 되던 대량원군 왕순(大良院君 王詢, 훗날 현종)을 제거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5]
헌애왕후는 외가 친척인 김치양과 사통하였는데, 이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중에 혼란이 일었다.[5]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냈으나, 목종이 즉위하고 섭정이 되자 헌애왕후는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였다.[5] 헌애왕후의 후원으로 김치양은 우복야 겸 삼사사(三司使) 등 요직에 오르며 권력을 행사했다.[5]
헌애왕후는 서경을 우대하고, 김치양의 출신지인 서흥에 성수사를 짓는 등 각지에 도관과 사찰을 건설했다.[5]
1003년,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5]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과 그 아들은 처형되었고, 헌애왕후는 유배되었다.[5] 목종은 폐위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 강조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5] 이로써 헌애왕후는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했다.[5]
2. 5. 대량원군 (현종)과의 갈등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왕후는 섭정을 시작하며 스스로를 천추태후(千秋太后)라 칭했다. 헌애왕후는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여 합문사인으로 삼았고, 이후 김치양은 헌애왕후의 후원에 힘입어 상서우복야 겸 삼사사(재정권과 인사권을 동시에 담당)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며 막대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13] 헌애왕후는 자신의 본거지인 서경(西京)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김치양의 출신지인 동주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는 등 곳곳에 도관과 사원을 건립했다.1003년(혹은 그 이전),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5]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이 아들을 병약한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13] 이들은 왕위를 위협하는 대량원군 왕순(王詢)을 제거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대량원군 순은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와 숙부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헌애왕후에게는 조카였다.[13] 비록 출생 과정에 논란은 있었지만, 아버지 왕욱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었기에 왕위 계승 명분에서 헌애왕후와 김치양에게는 걸림돌이었다.[13]
왕순은 성종의 보호 아래 성장했지만, 헌애왕후가 섭정을 시작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헌애왕후는 왕순을 강제로 출가시키고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했으나, 신혈사 승려들의 도움으로 번번이 실패했다.[13]
2. 6. 강조의 정변과 몰락
강조의 정변으로 김치양과 그 아들은 처형되고, 헌애왕후는 유배되었다.[6] 목종은 폐위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 강조의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이로 인해 헌애왕후는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했다. 강조 등은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옹립했다.[7]유배에서 풀려난 헌애왕후는 황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현종 20년 (1029년)에 왕궁으로 돌아와 개경 숭덕궁에서 66세로 훙거했다.[6] 묘소는 유릉이다.[7]
3. 평가
고려사 등의 사서에서는 헌애왕후를 김치양과 사통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하고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에 기초해 이루어진 왜곡된 평가라는 비판도 있다. 최근에는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의 정치이념을 강조했던 성종에 맞서 전통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로 재평가하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은 사대주의, 전통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4. 가계
964년 대종과 선의왕후의 딸로 태어났다. 경종의 세번째 왕비이자 목종의 어머니이며, 성종의 누이동생이고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의 언니이다.[1]
오빠인 성종과는 달리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부모의 성인 왕씨(王氏)나 유씨(柳氏)가 아니라, 왕실의 풍습규율에 따라 할머니인 태조의 네번째 왕비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성을 따랐다. 경종과는 사촌지간이었다.[1]
아버지 대종과 어머니 선의왕후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머니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1]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조부 | 태조 | 877년 - 943년 | 고려 제1대 왕 |
조모 | 신정왕후 황보씨 | ? - 983년 | |
아버지 | 대종 (추존) | ? - 969년 | |
어머니 | 선의왕후 유씨 | 생몰년 미상 | |
오빠 | 효덕태자 | 생몰년 미상 | |
오빠 | 성종 | 960년 - 997년 | 고려 제6대 왕 |
올케 | 문덕왕후 유씨 | 생몰년 미상 | 광종과 대목왕후의 딸, 성종의 제1비 |
올케 | 문화왕후 김씨 | 생몰년 미상 | 김원숭과 화의군대부인 왕씨의 딸, 성종의 제2비 |
오빠 | 경장태자 | 생몰년 미상 | |
여동생 | 헌정왕후 황보씨 | 965년 - 992년 | |
조카 | 현종 | 992년 - 1031년 | 고려 제8대 왕 |
조카 며느리 | 원성왕후 김씨 | ? - 1028년 | 김은부의 딸, 현종의 제3비 |
남편 | 경종 | 955년 - 981년 | 고려 제5대 왕 |
장남 | 목종 | 980년 - 1009년 | 고려 제7대 왕 |
며느리 | 선정왕후 유씨 | 생몰년 미상 | 태조의 손자 홍덕원군과 문덕왕후 유씨의 딸 |
사통 | 김치양 | ? - 1009년 | |
아들 | 미상 |
5. 헌애왕후가 등장한 작품
2009년 KBS2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채시라, 김소은이 헌애왕후를 연기했고, 2023년부터 2024년까지 방영된 KBS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이민영이 연기했다.[8][9]
5. 1. TV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최충의 찬
http://db.history.go[...]
2021-08-05
[2]
웹사이트
Seongjong of Goryeo/Family
https://science-trai[...]
[3]
웹사이트
현종 총서
http://db.history.go[...]
2021-08-05
[4]
웹사이트
김치양(金致陽)
https://encykorea.ak[...]
2024-02-24
[5]
웹사이트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http://db.history.go[...]
2021-08-05
[6]
웹사이트
천추태후가 죽다
http://db.history.go[...]
2021-08-05
[7]
서적
韓國女性關係資料集: 中世篇(中)
https://books.google[...]
Ehwa Womans University Publisher
1985
[8]
뉴스
'천추태후' 채시라, 변치 않는 카리스마 작렬
https://news.v.daum.[...]
Osen (newspaper)
2021-10-22
[9]
웹사이트
리틀 채시라 '김소은' 애 낳았다
http://m.ilyoweekly.[...]
2021-10-22
[10]
문서
「献哀王太后皇甫氏, 戴宗之女, 生穆宗. 穆宗即位, 冊上尊號曰, 應天啓聖静徳王太后. 穆宗年已十八, 太后攝政, 居千秋殿, 世號千秋太后. 與金致陽通而生子, 欲以其子, 嗣王位. 時顕宗為大良院君, 太后忌之, 強令出家, 寓居三角山神穴寺, 時稱神穴小君. 太后屡遣人謀害. 一日, 使内人遺以酒餅, 皆和毒薬. 内人到寺, 求見小君, 欲親勸食, 寺有僧, 輒匿小君於地穴中, 詒之曰, “小君出遊山中, 安知去處耶?” 及内人還, 散之庭中, 烏雀食而即斃. 凡忠臣義士, 尤所忌憚, 多以非罪陷之, 穆宗不能禁. 十二年正月, 千秋殿災, 太后入長生殿後, 康兆殺致陽父子, 流太后親属于海島, 又使人弑穆宗. 於是, 太后歸居黄州者二十一年, 顕宗二十年正月, 薨于崇徳宮, 寿六十六, 葬幽陵」(『[[高麗史]]』卷八十八 列傳 卷第一)
[11]
문서
《고려사》권88 〈세가〉권1 후비열전 - 헌애왕태후 세수에 의한 생년 추산
[12]
문서
《고려사》권5 〈세가〉 권5 - 현종 20년 1월 계사(癸巳) 기사
[13]
뉴스
헌애·헌정 자매의 싸움… 고려 王씨 왕조가 김씨 왕조가 될 뻔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9-19
[14]
간행물
네이버 전문정보 - 《천추태후의 실체와 서경 세력》
http://academic.nave[...]
호남사학회
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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