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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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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준은 조위의 장군으로, 호분과 호열의 아버지이다. 장기에게 발탁되어 벼슬을 시작했으며, 흉노 토벌, 제갈량의 북벌 방어, 공손연 토벌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252년 동흥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관구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여 위장군으로 승진했다. 256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거기장군·음밀후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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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준
인물 정보
이름호준
로마자 표기Hu Zun
칭호 및 직책위장군
생애
출생생년 미상
출신지옹주안정군임경현
사망감로 원년 7월 5일 (256년8월 12일)
사망지미상
상세 정보
미상
시호미상
묘호미상
별명미상
섬긴 군주조예→조방→조모
특기 사항미상

2. 생애

호준은 정남대장군 왕창, 진남장군 제갈탄과 함께 '삼정(三征)'이라 불렸다.

252년 정월, 방현령의 『진서』 세종 경기기에서는 사마사가 위의 대장군이 되어 선정을 펼치고 인재가 갖춰졌다고 칭찬했다. 그중 사방을 도독한 인물로 제갈탄, 관구검, 왕창, 진태와 함께 호준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같은 해 4월, 오나라 황제 손권이 붕어하자, 왕창, 관구검과 함께 상소문을 올려 오나라를 토벌할 것을 청원했다.[7] 오나라 공격이 실패한 뒤, 위나라 조정에서는 여러 장수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사마사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며 책임을 묻지 않았다.[9]

아들은 7명이었다.[1] 서진의 진군대장군과 상서복야가 된 호분 외에, 호광, 호열, 호기가 고관에 올라 사서에 이름을 남겼다.[2]

2. 1. 초기 생애와 흉노 토벌

220년부터 223년 사이에 옹주자사 등을 역임한 장기에게 발탁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장기가 초빙한 인물로는 양부, 방육 등 모두 명성과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3]

233년 9월, 안정군 국경지대 수비를 맡고 있던 흉노의 우두머리 호박거자직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의의 명을 받아 호박거자직을 토벌하고 항복시켰다.[4]

234년, 제갈량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침공하자 곽회와 함께 양주를 방어해 제갈량의 진격을 막았다.

238년, 요동 지방의 군벌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의가 직접 토벌에 나섰을 때 우금과 함께 종군해 비연 등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6]

2. 2. 제갈량의 북벌 방어

234년, 제갈량(諸葛亮)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촉한(촉)을 침공하자 곽회(郭淮)와 함께 제갈량의 제5차 북벌을 요격했다(오장원 전투).[5] 이때 호준은 양주를 방어해 제갈량의 진격을 막았다.

2. 3. 공손연 토벌

238년, 요동 지방의 군벌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의가 직접 토벌에 나섰고, 이때 호준은 우금과 함께 종군하여 비연 등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6]

2. 4. 오나라와의 전투와 동흥 전투 패배

252년, 정동장군이었던 호준은 왕창, 관구검, 제갈탄과 함께 오나라를 공격했다. 호준은 제갈탄과 함께 동흥에 제방을 쌓은 제갈각을 공격했으나, 12월에 제갈각의 군사에게 한종, 환가 등이 전사하는 등 패배했다. (동흥 전투)[8]

2. 5. 관구검의 반란 진압과 죽음

255년,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사의 명을 받아 청주와 서주의 제군을 지휘해 초, 송 사이로 출병해 관구검군의 귀로를 끊는 역할을 맡았다.[10] 반란 진압 후 4월에는 위장군으로 승진했다.[11]

256년 7월 5일(8월 12일)에 위장군 재직 중 사망했다.[11] 봉작이나 관위 추증에 대해서는 사서에 보이지 않지만, 『진서』 호분전에는 호준에 대해 '''거기장군·음밀후'''라고 기록하고 있다.

3. 가족 관계

호준에게는 아들이 7명 있었다.[1] 그 중 호분서진에서 진군대장군과 상서복야를 지냈으며, 호광, 호열, 호기도 고관을 역임하여 사서에 이름이 기록되었다.[2]

참조

[1] 서적 晋書 胡奮伝
[2] 서적 三国志 鍾会伝注 晋諸公賛
[3] 서적 三国志 魏書 張既伝
[4] 서적 三国志 魏書 明帝紀
[5] 서적 晋書 高祖宣帝紀
[6] 서적 三国志 魏書 公孫度伝付 公孫淵伝
[7] 서적 三国志 魏書 傅嘏伝注 戦略
[8] 서적 三国志 呉書 諸葛恪伝
[9] 서적 三国志 魏書 斉王紀注 漢晋春秋
[10] 서적 晋書 世宗景帝紀
[11] 서적 三国志 魏書 高貴郷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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