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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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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패는 신분증명서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제도로, 고려 시대에 처음 도입되었고, 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의 호패법은 1413년(태종 13)에 16세 이상 남성에게 의무화되었으나 백성들의 반발로 여러 차례 폐지 및 재실시를 반복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료와 기재 내용이 달랐으며, 호패를 소지하지 않거나 위조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다. 호패 제도는 인구 이동 통제 및 군역, 요역의 기준을 정립하는 데 목적을 두었으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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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패
호패
호패
호패
개요
종류흑각패 (黑角牌)
황양목패 (黃楊木牌)
잡재목패 (雜材木牌)
역사
기원고려 시대
시행조선 태종 13년 (1413년)
폐지고종 31년 (1894년) 갑오개혁
목적인구 파악
세금 징수
요역 동원
사회 통제
재료 및 형태
재료상아


나무
형태목재: 버드나무 뿌리, 대추나무, 박달나무, 느릅나무, 뽕나무, 흑심목, 황양목
길이 9cm, 너비 5.5cm 정도의 크기
기록 내용
내용이름
생년
거주지
관직 (소지자의 신분에 따라 다름)

2. 연원

현재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호패는 원나라에서 기원했으며, 한국에서는 1354년(고려 공민왕 3)에 이 제도를 모방하여 수·육군정에 한해 실시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효과는 미미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전국적으로 호적법과 함께 시행되었다.[3]

1391년 특정 군 관계자들은 호패를 착용해야 했고,[3] 1398년부터 조선 정부는 지속적으로 호패 제도 시행을 제기했다.[3] 태종 1413년 16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호패 사용이 의무화되었으나,[1][3] 1416년 평민들의 반대로 폐지되었다.

세조는 1458년 이징옥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호패 제도를 부활시켰고,[4] 17세기 초 광해군에 의해 다시 부활되기도 하였다.[5]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색깔이 달랐는데, 양반은 노란색, 고위 관료는 상아색, 하위 계급은 사슴 뿔, 평민은 작은 나무 패, 노비는 큰 나무 패를 사용했다.[2]

2. 1. 호패법의 목적

호패는 오늘날의 신분증과 같은 것으로, 그 기원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354년(고려 공민왕 3)에 이 제도를 모방하여 수군과 육군의 군정(軍丁)에 한하여 실시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사용 범위가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호적법(戶籍法)의 보조 역할로 시행되었다.[3]

호패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 호구(戶口)를 명확히 하여 민정(民丁)의 수를 파악한다.
  • 직업과 계급을 분명히 한다.
  • 신분을 증명한다.


그러나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의 기준을 밝혀 백성의 유동과 호적 편성상의 누락·허위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3. 조선의 호패법

조선1413년(태종 13년)부터 호패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군역 등 국역(國役)을 져야 했기 때문에 호패 받기를 꺼려했고, 이로 인해 호패법은 여러 차례 시행과 폐지를 반복했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사용하였으며, 신분에 따라 재료와 기재 내용이 달랐다.[3] 조관부터 서민, 공사천(公私賤)까지 모두 사용 대상이었다.

태종 때 규정에 따르면, 호패의 모양은 길이 3치 7푼, 폭 1치 3푼, 두께 2푼이었다. 2품 이상은 관직과 성명을, 3품 이하의 조관·성중관(成衆官)·유음자제(有蔭子弟)는 관직·성명·거주지를 기재했다. 서인은 얼굴빛·수염 유무, 5품 이하 군관(軍官)은 소속 부대·신장, 잡색인(雜色人)은 직역(職役)과 소속, 노비는 주인·연령·거주지·얼굴빛·신장·수염 유무를 기록했다.

호패는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관찰사(觀察使) 및 수령(守令)이 관할했으며, 이정(里正)·통수(統首)·관령(管領)·감고(監考) 등이 실제 사무를 담당했다. 2품 이상과 삼사(三司) 관원은 관청에서 호패를 만들어 지급했고, 그 외에는 각자 만들어 관청에서 단자와 대조 후 낙인(烙印)하여 지급했다.

속대전》에 따르면, 호패 미소지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받았고, 호패를 빌려준 자는 장(杖) 1백 대와 3년 도형(徒刑)에 처해졌다. 본인 사망 시에는 관가에 호패를 반납해야 했다.

현대 한국에서 도미노로 하는 한 게임이 호패에서 이름을 따왔다.[6]

3. 1. 호패법의 시행과 중단

1413년(태종 13년)부터 2년간 처음 시행된 호패법은 이후 여러 차례 중단과 시행을 반복했다. 1459년(세조 5년)부터 1470년(성종 1년)까지, 1610년(광해군 2년)부터 1612년(광해군 4년)까지, 1626년(인조 4년)부터 이듬해까지, 그리고 1675년(숙종 1년) 이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1][3][4]

백성들은 호패를 받으면 호적과 군적에 올라 군역이나 국역(國役)을 져야 했기 때문에 호패 받기를 꺼렸다.[3] 이 때문에 양반의 노비로 들어가거나 호패를 위조·교환하는 등 불법 행위가 늘어나 국가적 혼란이 심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패 위조범을 극형에 처하고, 호패 미소지자를 엄벌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세조는 호패청을 설치하여 사무를 전담하게 했고, 숙종은 종이로 만든 지패(紙牌)를 도입하여 간편성과 위조 방지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패법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회적 물의만 일으켰다.[3]

세종실록》에 따르면,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20%에 불과했다. 《성종실록》에는 호패를 소지한 남성 중 실제로 국방에 복무한 사람은 1~20%에 불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1391년에는 특정 군 관계자들이 호패를 착용해야 했고,[3] 이는 원나라의 유사한 관행을 모방한 것이었다.[4] 1398년부터 조선 정부는 지속적으로 호패 제도의 시행을 제기했다.[3] 결국 호패 사용은 태종 1413년에 16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의무화되었다.[1][3]

세조는 1458년에 다시 이 제도를 부활시켰는데, 이번에는 이징옥의 함길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구 이동을 통제하려는 것이었다.[4] 이 법은 12년 더 효력을 유지했다.

호패는 17세기 초 광해군에 의해 다시 부활되었다.[5]

3. 2. 호패법 중단의 원인

백성들은 호패를 받으면 호적과 군적에 올라 군정(軍丁)으로 뽑히거나 국역(國役)을 져야 했으므로, 이를 피하고자 했다. 양반의 노비로 들어가거나 호패를 위조·교환하는 등 불법 행위가 늘어나면서 국가적 혼란이 심해졌다.[3] 조정은 호패 위조자를 극형에 처하고, 호패를 차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하는 법을 마련했으나, 실제로는 효과가 없었고 사회적 물의만 일으켰다.[3]세종실록》에는 호패를 받은 사람이 전체 인구의 10~20%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3. 3. 호패법 강화를 위한 노력

조선 조정에서는 호패 위조자를 극형에 처하고, 호패를 차지 않은 자는 엄벌에 처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3] 세조 때는 호패청을 설치하여 호패 관련 사무를 전담하게 했으며, 숙종 때는 종이로 만든 지패(紙牌)를 도입하여 간편성과 위조 방지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패법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회적 물의만 야기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20%에 불과했다.[3]

호패 제도는 여러 차례 시행과 폐지를 반복했다. 1416년, 1461년, 1469년, 1550년, 1612년, 1627년에 폐지되었고, 1459년, 1469년, 1536년, 1610년, 1626년, 1675년에 다시 실시되었다.[3] 260년 동안 실제로 시행된 기간은 18년에 불과했으며,[3]성종실록》에는 호패 소지자 중 국방에 복무한 사람은 10~20%에 불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3]

세조는 1458년에 이징옥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호패 제도를 부활시켰고, 이 법은 12년간 유지되었다.[4] 17세기 초 광해군 때 다시 호패 제도가 부활했다.[5]

3. 4. 신분별 호패의 종류와 기재 내용

호패는 왕실, 조관부터 서민, 공사천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사용하였으며, 재료와 기재 내용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3]

신분별 호패의 종류
구분2품 이상3품 이하·잡과 합격자생원·진사잡직·서인·서리공사천(公私賤)
태종실록》의 규정상아 또는 녹각녹각 또는 황양목황양목 또는 자작목자작목잡목
속대전》의 규정아패(牙牌)각패(角牌)황양목패(黃楊木牌)소목방패(小木方牌)대목방패(大木方牌)



양반은 노란색 호패를 사용했고, 고위 양반 관료는 상아색, 하위 계급은 사슴 뿔로 만든 호패를 썼다. 평민은 작은 나무 패를, 노비는 큰 나무 패를 소지했다.[2]

3. 4. 1. 태종 때의 규정

1413년(태종 13) 태종 때의 규정에 따르면, 호패의 모양은 길이 3치 7푼, 폭 1치 3푼, 두께 2푼이었다. 신분별 기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2품 이상: 관직, 성명
  • 3품 이하 조관, 성중관(成衆官), 유음자제(有蔭子弟): 관직, 성명, 거주지
  • 5품 이하 군관(軍官): 소속 부대, 신장, 얼굴빛, 수염 유무
  • 잡색인(雜色人): 직역(職役), 소속, 얼굴빛, 수염 유무
  • 서인: 얼굴빛, 수염 유무
  • 노비: 주인, 연령, 거주지, 얼굴빛, 신장, 수염 유무


호패의 재료는 신분에 따라 달랐다.

  • 2품 이상: 상아(象牙) 또는 녹각(鹿角)
  • 4품 이상: 녹각 또는 황양목(黃楊木)
  • 5품 이상: 황양목 또는 자작목(資作木)
  • 서인 이하: 잡목(雜木)


신분별 호패의 재료와 기재 내용
신분재료기재 내용
2품 이상상아 또는 녹각관직, 성명
3품 이하 조관, 성중관, 유음자제녹각 또는 황양목관직, 성명, 거주지
5품 이하 군관황양목 또는 자작목소속 부대, 신장, 얼굴빛, 수염 유무
잡색인황양목 또는 자작목직역, 소속, 얼굴빛, 수염 유무
서인잡목얼굴빛, 수염 유무
노비잡목주인, 연령, 거주지, 얼굴빛, 신장, 수염 유무


3. 4. 2. 속대전의 규정

신분종류
2품 이상아패(牙牌)
3품 이하·잡과 합격자각패(角牌)
생원, 진사황양목패(黃楊木牌)
잡직·서인·서리소목방패(小木方牌)
공사천(公私賤)대목방패(大木方牌)


3. 4. 3. 호패의 발급 및 관리

호패는 서울에서는 한성부가, 지방에서는 관찰사 및 수령이 관할하였으며, 이정, 통수, 관령, 감고 등이 실제 사무를 담당하였다.[3] 2품 이상과 삼사의 관원은 관청에서 호패를 제작하여 지급하였고, 그 외에는 각자 호패를 제작한 후 관청에서 단자와 대조하여 낙인을 찍어 지급하였다.[3]

3. 4. 4. 호패 관련 처벌

《속대전》에 따르면, 호패를 차지 않은 사람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고, 호패를 빌려준 사람은 장(杖) 1백 대와 3년간 도형(徒刑)에 처했다. 본인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관가에 호패를 반납했다.[3]

4. 호패 제도의 영향

조선 시대에 호패 제도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제도는 신분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기재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이는 신분 간의 차별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2] 예를 들어, 양반은 노란색 호패를, 고위 관료는 상아색 호패를, 하위 관료는 사슴 뿔로 만든 호패를 착용했다. 반면 평민은 작은 나무 패를, 노비는 큰 나무 패를 소지해야 했다.[2]

또한, 호패 제도는 국가 재정 확보에도 기여했다. 군역과 요역의 기준을 명확히 함으로써 세금 징수를 보다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패 제도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과 불만도 상당했다. 많은 백성들이 호패 발급을 기피하거나 위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사회적 불만을 야기했다. 실제로 《성종실록》에는 호패를 소지한 남성 중 단 1~20%만이 실제로 국방에 복무했다는 기록이 있다.[3]

호패 제도는 여러 차례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면서 사회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1416년, 1461년, 1469년, 1550년, 1612년, 1627년에 폐지되었고, 1459년, 1469년, 1536년, 1610년, 1626년, 1675년에 다시 실시되었다.[3] 특히 세조는 1458년에 이징옥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호패 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4]

결과적으로 호패 제도는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현대 한국의 도미노 게임 중 하나는 호패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6]

참조

[1] 서적 Grayson 2002
[2]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Isolation, War, Despotism and Revival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3] 웹사이트 호패(號牌) Hopae https://encykorea.ak[...] 2023-09-09
[4] 서적 Duncan
[5] 서적 Hutt et al. 1999
[6] 서적 Hutt et al.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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