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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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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징옥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인천, 호는 원봉이며 시호는 충강이다. 세종 때 김종서를 따라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 6진 개척에 기여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숭정대부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1453년 수양대군의 정변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황제를 칭했다. 정조 때 복권되었으나 순조 때 추탈되었고, 1908년 명예회복되었다. 변방의 수비와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지만, 수양대군에 의해 파면된 후 반란을 일으켜 실패하고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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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I Jingok
다른이름이징옥
본관인천(仁川)
원봉(圓峰)
시호충강(忠剛)
군호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
생애
출생?
출생지조선 경상도 양산군
사망일1453년 음력 10월 20일 (54세)
사망지조선 함길도 경원군 두만강 강변
묘지종성
가족
아버지알 수 없음
어머니알 수 없음
경력
복무조선군
복무 기간1414년 ~ 1453년
최종 계급종1품 숭정대부
근무지경원진, 영북진, 함길도 병마영
지휘경원진첨절제사
경원진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함길도도절제사
주요 참전 전투/전쟁여진족 토벌
4군 6진 개척
기타 이력판경흥도호부사
대금국 황제
정치
작위대금 황제
재위1453년
종교유교(성리학)

2. 이력

인천을 본관으로 하며, 호는 원봉(圓峰)이고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별명은 '''소년 절제사'''이다. 세종 때에 절재 김종서를 따라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북방지역의 4군과 6진을 개척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절제사와 변방의 외직에 있으면서 여진족 토벌과 변방을 수비 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1414년 갑사로 군관이 되었으며 1416년 무과에 급제하고 1418년에는 친시무과에 장원하여 사복시소윤이 되었다. 이후 경원진첨절제사, 경원진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변방의 수비, 여진족 토벌, 4군과 6진의 개척 등에 공을 세웠다.

1453년 수양대군(뒷날의 세조)의 정변에 반발하여 거병,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황제를 칭한(칭제건원) 인물이었다. 정조 때 복권되었으나 순조 때 추탈당했다가, 1907년(융희 1년)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융희 2년) 명예회복되었다. 경상남도 양산 출신이다.

1450년부터 1453년까지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역임했다. 김종서의 옛 부하로, 정치적 라이벌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에 의해 살해된 이징옥은 수양대군이 장악한 조정에 의해 소환되었고, 1453년 박호문(朴浩文)으로 교체하려 했다. 그러나 이징옥은 새로 임명된 박호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여진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금나라(大金) 황제를 자칭하며 여진족의 금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는 오국성(五國城)에 새로운 왕조의 수도를 건설하려 했지만, 두만강을 건너기 전에 그의 부하인 정종(鄭種)과 이행검(李行儉)에게 종성군에서 살해되었다.

3. 생애

이징옥은 1399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이며, 호는 원봉(圓峰), 시호는 충강이다. 세종김종서를 따라 여진족 토벌과 북방 지역의 4군과 6진 개척에 큰 공을 세워 '''소년 절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2]

1414년 갑사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1416년 무과에 급제, 1418년에는 친시무과에 장원하여 사복시 소윤이 되었다.[2] 이후 경원진첨절제사, 경원진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하며 함경도에서 변방 수비, 여진족 토벌, 4군과 6진 개척에 힘썼다.

1432년(세종 14년) 병조참판이 되었고, 1436년 회령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를 지냈다. 판경흥도호부사 재직 중 김종서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4군 개척과 성곽 수축에 힘썼다. 그는 용맹하고 청렴하여 여진족에게는 '어금니를 가진 큰 돼지'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백성에게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2]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윤봉의 무리한 공납 요구를 묵살하고, 잡은 매를 날려 보내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 일로 외교 문제가 발생했지만,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청하여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2]

1438년 모친상을 당해 잠시 관직을 떠났으나, 100일 만에 경상도 도절제사로 복귀했고, 이후 평안도 도절제사를 역임했다.[3] 1449년(세종 31년) 지중추원사에 승진했고, 1450년(문종 즉위년)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다시 북방으로 부임했다. 1452년(문종 2년) 숭정대부 판중추원사가 되었다.[2]

1453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징옥은 이에 반발하여 박호문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4] 그는 종성에서 '''대금황제'''라 칭하고 오국산성에 도읍을 정하려 했으나,[5] 여진족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고 군 내부의 분열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두만강을 건너기 전 종성에서 부하 정종과 이행검에게 습격당해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5]

훗날 채제공은 이징옥이 단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역모가 아니라고 주장했다.[7] 이징옥의 난 이후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었고, 이는 1467년 이시애의 난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3. 1. 생애 초반

이징옥은 1399년 경상남도 양산군(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서 이전생(李全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이다. 할아버지 이만영(李萬英)은 고려말에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 개국 후 보조공신에 추록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이전생은 조선에서 처음 벼슬을 하여 태조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거쳐 세종 초에 양산군(梁山君)에 봉해졌다가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로 퇴직하였으며,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형은 이징석(澄石)이고 아우는 이징규(澄珪)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직하고 무용이 뛰어났다고 한다.

1414년 갑사로 출사하여 1416년 부사직이 되었다. 이징옥과 그의 3형제는 모두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이 대단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징옥이 무예와 용맹, 재주가 가장 우수했다고 한다. 그는 유년 시절에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징옥은 평소 매우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유명했지만, 그의 형 이징석은 이와 대조적이었다. 이징석은 “청렴결백은 복 없는 사람의 별호”라고 말하며 지방에 나갈 때마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탈하여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았고, 아버지의 상중에 이징옥을 구타하여 비난을 받을 정도로 성질이 난폭했다고 전해진다.

3. 1. 1. 출생과 가계

이징옥은 1399년 경상남도 양산군(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서 이전생(李全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이다.

소성백 이허겸(李許謙)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이만영(李萬英)은 고려말에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 개국 후 보조공신에 추록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이전생은 조선에서 처음 벼슬을 하여 태조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거쳐 세종 초에 양산군(梁山君)에 봉해졌다가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로 퇴직하였으며,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형은 이징석(澄石)이고 아우는 이징규(澄珪)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직하고 무용이 뛰어났다고 한다.

3. 1. 2. 소년기와 군인 활동

1414년 갑사로 출사하여 1416년 부사직이 되었다. 이징옥과 그의 3형제는 모두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이 대단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징옥이 무예와 용맹, 재주가 가장 우수했다고 한다. 그는 유년 시절에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징옥은 평소 매우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유명했지만, 그의 형 징석은 이와 대조적이었다. 징석은 “청렴결백은 복 없는 사람의 별호”라고 말하며 지방에 나갈 때마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탈하여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았고, 아버지의 상중에 이징옥을 구타하여 비난을 받을 정도로 성질이 난폭했다고 전해진다.

3. 2. 관료 활동

1414년 이징옥은 갑사로 군관이 되었으며, 1416년 무과에 급제하고 1418년에는 친시무과에 장원하여 사복시소윤이 되었다. 이후 경원진첨절제사, 경원진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하며 함경도에서 변방 수비, 여진족 토벌, 4군과 6진 개척 등에 공을 세웠다.[2]

1432년(세종 14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433년 영북진 절제사가 되었다가 1436년 회령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를 지냈다. 판경흥도호부사 재직 중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의 부장으로 출정, 김종서와 함께 4진의 개척과 성곽 수축 등에 심혈을 기울여 2년 만에 그 방위를 형성하고 포치를 구축하였다. 이후 판회령부사가 되었다.[2]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엄격하면서도 청렴결백해 조선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한다. 또한 용맹하기가 범과 같아서 여진족들이 이징옥을 '어금니를 가진 큰 돼지'라 부르며 '큰 호랑이' 김종서만큼이나 두려워하여 감히 그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2]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윤봉이 무리한 공납을 요구하자, 이를 묵살하여 격분한 윤봉이 애궂은 역관과 수행하급관리들을 매질하고 공납으로 요구한 매를 잡아오자 이를 일부러 날려보내는 등, 사대외교상 명에게 매우 저자세일 수밖에 없는 조선의 관리로서 명 사신에 대한 이 같은 당당한 태도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일은 외교문제화되어 세종이 직접 나서 극형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나, 과도한 공물요구로 조선에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본국에서의 처벌을 두려워 한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청해옴으로서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2]

1435년 이후 조정에서 4진의 안정을 얻게 되면서부터 대여진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졌고, 1438년 모친상을 당하여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함경도를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상중인 100일 만에 기복되어[3] 다시 경상도 도절제사로 소환되었고, 이후 평안도 도절제사로 부임하였다.

1449년(세종 31년) 20여년 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성곽 수축, 여진의 토벌, 정복, 회유, 복속, 도적 소탕 등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고, 1450년(문종 즉위년) 여진족 야선(也先)의 침입에 대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다시 북방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지중추원사를 거쳐 1452년(문종 2년) 특명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2]

3. 2. 1. 무과 급제와 입조

1416년(태종 16) 부사직이 되었다. 같은 해 무과(武科)에 급제, 부거책장에 보임되었다. 1418년(태종 18년) 태종이 주관하는 친시 무과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사복시소윤(司僕侍少尹)으로 임명되고, 이후 약관의 나이에 영북진 첨절제사가 되어 '소년 절제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세종 즉위 초반 장군 김종서를 따라 평안도함경도 일대의 변방 수비에 참여하였고 이후 내직에 돌아와 사복시소윤(司僕侍少尹)이 되었다. 1423년(세종 5년) 황상 등의 천거로 경원진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고 되돌아왔다.

3. 2. 2. 변방 수비와 여진족 토벌

세종김종서를 따라 여진족 토벌과 북방 지역의 4군과 6진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절제사와 변방 외직에 있으면서 여진족 토벌과 변방 수비에 힘썼다.[2] 1418년(태종 18년) 태종이 주관하는 친시 무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사복시소윤(司僕侍少尹)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약관의 나이에 영북진 첨절제사가 되어 '소년 절제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세종 즉위 초반 김종서를 따라 평안도함경도 일대의 변방 수비에 참여하였고, 내직으로 돌아와 사복시소윤(司僕侍少尹)이 되었다. 1423년(세종 5년) 황상(黃象) 등의 천거로 경원진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했다.[2] 1424년 경원진 첨절제사로서 야인의 침략을 격퇴했고,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1436년 회령부판사로서 여진족 추장을 처형하였으며, 같은 해 경흥도호부판사의 직위에 올랐다. 이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2]

궁술에 능하여 화살을 항상 명중시켰고 기마술, 창던지기에도 능했다. 1430년까지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 노략질을 하고 도적이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등에 출몰할 때마다 변방 방비에 큰 공을 세워, 세종대왕이 특명을 내려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2]

3. 2. 3. 관료 생활

1414년 갑사로 군관이 되었으며 1416년 무과에 급제하고 1418년에는 친시무과에 장원하여 사복시소윤이 되었다. 이후 경원진첨절제사, 경원진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하며 함경도에서 변방 수비, 여진족 토벌, 4군과 6진 개척 등에 공을 세웠다.

1424년 경원진 첨절제사로서 야인의 침략을 격퇴했고,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1430년까지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 노략질을 하고 도적이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등에 출몰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큰 공을 세우자, 세종대왕이 특명을 내려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433년 영북진 절제사(寧北鎭節制使)가 되었다가 1436년 회령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를 지냈다. 판경흥도호부사 재직 중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의 부장으로 출정, 김종서와 함께 4진의 개척과 성곽 수축 등에 심혈을 기울여 2년 만에 그 방위를 형성하고 포치를 구축하였다. 이후 판회령부사가 되었다가 1436년 회령부판사로 재직 중 군사들을 이끌고 여진족의 소굴에 쳐들어가 여진족 추장을 사살하고 되돌아왔다.

그는 궁술에 능하여 화살을 항상 명중시켰고 기마술, 창던지기에도 능했다.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엄격하면서도 청렴결백해 조선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한다. 또한 용맹하기가 범과 같아서 여진족들이 이징옥을 '어금니를 가진 큰 돼지'라 부르며 '큰 호랑이' 김종서만큼이나 두려워하여 감히 그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윤봉이 무리한 공납을 요구하자, 이를 묵살하여 격분한 윤봉이 애궂은 역관과 수행하급관리들을 매질하고 공납으로 요구한 매를 잡아오자 이를 일부러 날려보내는 등, 사대외교상 명에게 매우 저자세일 수밖에 없는 조선의 관리로서 명 사신에 대한 이 같은 당당한 태도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일은 외교문제화되어 세종이 직접 나서 극형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나, 과도한 공물요구로 조선에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본국에서의 처벌을 두려워 한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청해옴으로서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2]

1435년 이후 조정에서 4진의 안정을 얻게 되면서부터 대여진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졌고, 1438년 모친상을 당하여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함경도를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상중인 100일 만에 기복되어[3] 다시 경상도 도절제사로 소환되었고, 이후 평안도 도절제사로 부임하였다.

1449년(세종 31년) 20여년 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성곽 수축, 여진의 토벌, 정복, 회유, 복속, 도적 소탕 등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고, 1450년(문종 즉위년) 여진족 야선(也先)의 침입에 대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다시 북방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지중추원사를 거쳐 1452년(문종 2년) 특명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

3. 3. 외모

그는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덩치를 견줄 만큼 상당한 거구였다고 한다. 여러 부의 야인(野人)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그를 '어금니가 있는 돼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진족은 김종서보다 이징옥을 더욱 두려워하였다.

3. 3. 1. 파면과 반발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으로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정권을 잡자, 김종서의 천거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부관인 이징옥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은밀히 박호문을 후임으로 보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도와 육진개척(六鎭開拓)에 공을 세운 이징옥이 김종서계 인물임을 꺼려 파직하고 박호문을 함길도에 보낸 것이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병력 약간을 거느리고 상경하던 중, 중앙에서 일어난 정변과 김종서의 암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회군, 박호문을 죽였다. 1453년(단종 1) 10월 병마를 이끌고 종성(鍾城)으로 가서 대금황제라 자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 지휘소를 오국산성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의 각 읍에 후원을 요청하였다. 일설에는 이징옥이 단종을 위해 거병을 꾀하였다는 설도 있다.

3. 4. 생애 후반

1453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김종서의 부하였던 이징옥은 이에 반발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추천으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을 파면하고 박호문을 임명했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상경하던 중, 정변 소식과 김종서의 암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회군, 박호문을 살해했다.[4]

1453년 10월, 이징옥은 병력을 이끌고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라 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5] 그는 군사 지휘소를 오국산성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 각 읍에 후원을 요청했다. 일설에는 단종을 위해 거병했다는 설도 있다.

이 난으로 형인 이징석, 아우인 이징규는 정난공신의 주청으로 한때 처형과 멸족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조의 극진한 대우로 그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높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이징옥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이징석은 한명회, 홍윤성, 양정 등의 편에 가담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협력하였다.

1450년부터 1453년까지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역임했다. 김종서의 옛 부하로, 정치적 라이벌인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된 이징옥은 수양대군이 장악한 조정에 의해 소환되었고, 박호문으로 교체하려 했다. 그러나 이징옥은 새로 임명된 박호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여진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금나라 황제를 자칭하며 여진족의 금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는 오국성에 새로운 왕조의 수도를 건설하려 했지만, 두만강을 건너기 전에 그의 부하인 정종과 이행검에게 종성에서 살해되었다.

3. 4. 1. 이징옥의 난

1453년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뒤,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한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박호문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였다. 이징옥의 난은 계유정난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평소 김종서를 도와 북방을 개척하는 데 힘을 쓴 것으로 보아 김종서 등과 각별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4] 박호문과 도절제사 자리를 교체할 때 이징옥은 한양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박호문이 이를 모두 누설하자, 이징옥은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박호문과 작별하고 떠나다가 60리쯤 가서 말을 멈추고, 한참 있다가 다시 돌아가 박호문과 그의 일행들을 습격해 참수하고 난을 일으켰다.[4]

그는 북방의 여진족과도 연락을 취했고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며 남만주의 오국산성(五國山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징옥의 지나친 무리수였다. 그의 고향은 경상도로 그의 세력이 기반되어 있는 곳도 아니었을 뿐더러, 주변의 여진족들은 이징옥을 '어금니를 가진 큰 돼지'라 부를 정도로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난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5] 또한 군부 내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그가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종성에 머물던 중, 반란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고 불안해 하던 종성부사 정종(鄭種)과 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이 변절하여 이징옥을 습격하는 바람에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5]

이 난으로 인해 그의 형인 이징석, 아우인 이징규는 정난공신의 주청으로 한때 처형과 멸족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조의 극진한 대우로 그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높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이징옥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그의 형제 이징석은 한명회, 홍윤성, 양정 등의 편에 가담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협력하였다.

훗날 채제공은 그가 단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역모는 아니라고 하였다.[7] 채제공에 의하면 이징옥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단종의 복위가 목적이며, 단종실록의 내용처럼 대금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7]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징옥은 정종(鄭種), 이행검 등의 술책에 빠져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이징옥의 난 이후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되었고, 이는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4. 2. 거병 실패와 암살

1453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김종서의 부하였던 이징옥은 이에 반발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추천으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을 파면하고 박호문을 임명했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상경하던 중, 정변 소식과 김종서의 암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회군, 박호문을 살해했다.[4]

1453년 10월, 이징옥은 병력을 이끌고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라 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5] 그는 군사 지휘소를 오국산성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 각 읍에 후원을 요청했다. 일설에는 단종을 위해 거병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징옥은 여진족에게 '어금니를 가진 큰 돼지'라고 불릴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고, 군부 내 자중지란까지 겹쳐 상황이 불리했다. 결국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종성에 머물던 중, 반란 실패를 예상한 종성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 등이 변절하여 이징옥을 습격,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5] 향년 55세였다.

이후 채제공은 이징옥이 단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역모가 아니라고 주장했다.[7]

3. 5. 사후

정종과 이행검 등이 이징옥이 두만강을 건너려 종성에 머물던 중 반란이 실패할 것이라 판단, 변절하여 이징옥을 습격했고, 이징옥은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5]

이 난으로 형 이징석, 동생 이징규는 정난공신의 주청으로 처형당하거나 멸족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세조는 이징옥과 반목하던 이징석, 이징규 형제를 극진히 대우하고 높은 벼슬을 내려 위기를 넘기게 했다.[6] 세조는 이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채제공은 단종 복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므로 이징옥의 거병은 역모가 아니라고 주장했다.[7]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했고, 이징옥은 정종, 이행검 등의 계략에 빠져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죽었다.

이징옥의 난 이후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었고, 이는 1467년 이시애의 난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연좌제로 장남 자원과 차남 윤원은 처형되거나 이징옥과 함께 살해되었고, 딸은 노비로 분배되었다. 8세였던 셋째 아들 연원은 유모가 구출하여 경상북도 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은거했다. 그는 본관을 초계라 칭하고 세계를 이어갔으며, 후손들은 순조(純祖) 때 세상에 나왔다.

이징옥은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과 강원도 영월군 장릉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 1698년(숙종 24) 《장릉지(莊陵誌)》에 신원상소(伸寃上疏)가 올려졌고, 여러 논의 끝에 1791년(정조 15년)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서인(西人) 집권 후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어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8] 대한민국 수립 후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 상삼수부락에 이징옥 3형제 사적비가 세워졌고, 199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고 있다.

4. 논란과 의혹

1453년 수양대군(뒷날의 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반발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황제를 칭한(칭제건원) 인물이었다. 정조 때 복권되었으나 순조 때 추탈당했다가, 1907년(융희 1년)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융희 2년) 명예회복되었다.[8]

수양대군김종서를 죽이고 집권하였으나, 김종서의 부관인 이징옥의 존재를 인식하고 역모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파면하고 은밀히 그 후임으로 박호문을 보냈다. 수양대군김종서를 도와 육진개척(六鎭開拓)에 공을 세운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서 이징옥을 파직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하여 함길도에 보낸 것이다.

이징옥은 일단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병력 약간을 거느리고 상경하였다. 그러나 가던 길에 중앙에서 일어난 정변의 소식과 김종서의 암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회군, 박호문을 죽인 후, 1453년(단종 1) 10월 병마를 이끌고 종성(鍾城)으로 가서 대금황제라 자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군사 지휘소를 오국산성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과 변방의 각 읍에 후원을 요청하였다.

4. 1. 칭제 건원 논란

이징옥의 난은 조선 전기 1402년(태종 3) 11월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서, 훗날 이시애 난의 선구가 되었다. 특히 이징옥은 당시 중국에 대한 사대 사상에 젖어있던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칭했다는 점 때문에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징옥이 황제를 자칭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재상 채제공에 따르면, 이징옥은 황제를 참칭한 적이 없다고 한다.[7] 채제공은 이징옥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단종을 위해서였으며, 《단종실록》의 내용처럼 대금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7] 그는 《단종실록》에 나타난 이징옥의 황제 칭제건원은 그를 모함한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조부이만영(李萬英)
조모순천 박씨(順天朴氏), 박숙정(朴叔貞)의 딸
아버지이전생(李全生, 1352년 ~ 1450년)
어머니밀양 박씨(密陽朴氏)
이징석(李澄石, 1395년 - 1461년)
형수김해 허씨(金海許氏), 허형(許衡)의 딸
조카이팔동(李八仝, 1414년 ~ 1479년)
동생이징규(李澄珪, 1403년 ~ 1468년)
제수한양 조씨(漢陽趙氏)
조카이석동(李碩仝, 1427년 ~ ?)
여동생심달서(沈逹瑞)에게 출가
여동생박기윤(朴基尹)에게 출가
벽진 이씨(碧珍李氏), 이신지(李愼之)의 딸
장남이자원(李滋源)
차남이윤원(李潤源)
삼남이연원(李淵源)


6. 평가

이징옥은 뛰어난 무장으로 김종서 등과 함께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변방의 수비, 여진족 토벌, 4군과 6진의 개척 등에 공을 세웠다.[9]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였고, 청렴결백하여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동북 변경 개척 초창기에 제일선에서 야인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큰 공로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9] 문종 때 함길도 도관찰사는 이징옥이 가산을 돌보지 않고 오랫동안 변방을 지켰는데, 살림이 가난하고 아내가 죽은 지 오래되어 옷바라지를 할 사람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문종은 이징옥에게 의복 3벌을 하사하고, 가을에는 겹옷을 주라고 하였다.[10]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발하여 정변을 기도했으나, 스스로 황제를 칭한 점 때문에 단종의 충신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단종실록의 기록은 세조와 그의 공신들의 시각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징옥의 난은 악의적으로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충강공 이징옥 장군 http://www.iclee.or.[...]
[2] 조선왕조실록 황희, 맹사성 등을 불러 이징옥이 매를 놓아준 죄에 대해 논하다 1432-11-18
[3] 문서 3년상을 마치지 않은 관리에게 특별히 관직을 허용하는 것
[4] 단종실록 1453-10-25
[5] 단종실록 1453-10-27
[6] 문종실록 1450-12-29
[7] 웹사이트 이징옥의 난 http://100.nate.com/[...]
[8] 순종실록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1908-04-30
[9] 웹인용 네이트 한국학 http://koreandb.nate[...] 2012-10-09
[10] 문종실록 1451-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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