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마사노부 (15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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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다 마사노부(1538년)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다이묘, 정치가이다. 1538년 미카와 국에서 태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반역과 유랑 생활을 거쳐 이에야스의 참모로 활약했다. 오다와라 정벌 이후 사가미 다마나와 1만 석 영지를 받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활약했다. 에도 막부 개창 후에는 막정의 실질적인 주도자로 권력을 잡았으나, 무공파와의 갈등 속에서 다이로까지 올랐다. 1616년 사망했으며, 아들 마사즈미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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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마사노부 (153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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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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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혼다 마사노부 |
본명 | 혼다 마사노부 |
로마자 표기 | Honda Masanobu |
가명 | 야하치로 |
이명 | 마사유키 |
사망일 | 1616년 7월 20일 |
출생 | 1538년 |
출생지 | 미카와국 |
사망지 | 에도 |
묘소 | 불명 |
계명 | 선덕납회원 |
씨족 | 혼다 씨 |
관직 | |
관위 | 종오위하 |
직책 | 사도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 로주 |
가계 | |
아버지 | 혼다 도시마사 |
어머니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의 시녀? |
형제 | 혼다 마사노부, 마사시게, 아오노 시게사다, 쥬스케 |
배우자 | 수림니 |
자녀 | 마사즈미 , 마사시게, 다다즈미, 미우라 시게나리의 처, 오구리 시게카쓰의 측실 |
경력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마쓰나가 히사히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소속 | 도쿠가와 가문 도쿠가와 막부 |
봉록 | 사가미국다마나와 번주 |
주요 전투 | |
전투 목록 | 아즈키자카 전투 (156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4년) 우에다 성 공방전 (1600년) 오사카 전투 (1614년) |
기타 | |
후임 | 마쓰다이라 마사쓰나 |
다마나와 번 다이묘 | |
재임 시작 | 1590년 |
재임 종료 | 1616년 |
2. 생애
1538년(덴분 7년) 혼다 도시마사의 차남으로 미카와에서 태어나, 다카가리(매잡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다. 1563년(에이로쿠 6년) 미카와 잇코 잇키가 발생하자 동생 혼다 마사시게와 함께 잇키 측 무장으로 가담하여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였다.[1] 잇키가 진압되자 도쿠가와 가문을 떠나 야마토의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섬겼으나,[2] 곧 히사히데를 떠나 전국을 유랑하였다. 유랑 시기에 마사노부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가가에서 이시야마 혼간지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설이 유력하다(《번한보》(藩翰譜)).[3] 전국을 유랑한 끝에 안면이 있던 오쿠보 다다요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다시 섬길 것을 탄원하였고, 다다요의 중재로 도쿠가와 가문에 복귀하였다.[4] 복귀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빠르면 아네가와 전투 무렵, 늦으면 혼노지의 변 직전으로 보인다.[5]
1582년(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당시 사카이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가를 넘어 본국으로 탈출했는데, 이때 마사노부가 동행했다.[5] 이후 이에야스는 옛 다케다 영지를 병합했고, 마사노부는 부교(奉行)로 임명되어 가이・시나노의 실질적인 통치를 담당했다.
1586년(덴쇼 1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의 중신들이 관직에 임명될 때 마사노부도 종오위하 사도노카미(佐渡守)에 임명되었다.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 후, 이에야스가 간토로 옮겨가자 사가미 다마나와(相模玉縄)에 1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1598년(게이초 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마사노부는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했는데, 1599년(게이초 4년) 마에다 도시나가 모반 혐의 모략 등 이에야스가 패권을 쥐는 과정에서 벌어진 모략의 대부분을 마사노부가 계획했다고 한다.[1]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막료로 종군했으나, 시나노 우에다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가 잘 싸우는 바람에 제때 참여하지 못했다. 마사노부는 히데타다에게 우에다 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진언했으나 거부당했다.[1]
1601년(게이초 6년)부터 마사노부는 이에야스의 쇼군 취임을 위해 조정(朝廷)과의 교섭에 힘썼다.[1] 당시 혼간지(本願寺)에서는 전 법주(法主) 고뇨와 현 법주 준뇨 형제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마사노부는 이를 이용하여 혼간지를 분열시키고,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혼간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계책을 이에야스에게 올렸다.[1] 1603년(게이초 8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설치하자, 마사노부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서 막부 정치를 주도했다.[1] 1605년(게이초 10년) 이에야스가 은거하여 오고쇼가 되고 히데타다가 제2대 쇼군이 되자, 마사노부는 에도에서 히데타다의 고문으로 막부 정치를 이끌었으며, 1607년(게이초 12년)부터 히데타다에 의해 도시요리(年寄, 이후 로주)에 임명되었다.[1]
그러나 마사노부의 권력 획득은 혼다 다다카쓰, 오쿠보 다다치카 등 무공파(武功派)의 불만을 샀고, 막부 내에서 마사노부의 관료파와 다다카쓰의 무공파 사이에 권력 다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1] 하지만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변함없이 신임했고, 1610년(게이초 15년)에는 여러 도시요리 중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는 다이로(大老)까지 오르게 된다.[1] 1612년(게이초 17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으로 잠시 무공파의 공격을 받았지만, 1613년(게이초 18년)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을 통해 오쿠보 나가야스 일당을 실각시켰다.[1] 1614년(게이초 19년)에는 최대 정적인 오쿠보 다다치카마저 실각시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1]
1614년 (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에서도 이에야스에게 많은 책략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고령으로 만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걷는 것조차 어려웠다. 1616년 (겐나 2년) 4월에 이에야스가 사망하자 적남인 마사즈미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여 일체의 공무에서 물러났다.[7][8] 그 해 6월 7일에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매장묘)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정토진종에서는 다른 종파에 비해 묘소나 유골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않다는 점을 배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8] 중세 진종 교단 중에는 묘탑 건립을 부정적으로 보는 생각도 있었고, 근세 이후에는 혼산 납골 등의 납골 의례가 성행했다.[9] 유골(일부)은 도쿄 아사쿠사의 도쿠혼지 (도쿄도 다이토구)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10] 또한, 연고가 있는 혼쇼지 (아이치현 안조시)에는 에도 시대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마사노부의 공양탑이 있으며,[8] 이것이 "묘"로 소개되기도 한다.[10] 혼쇼지 주지인 코야마 코엔은 "묘가 없다는 것이 진종 문도다운 마사노부 같다"라고 언급했다.[8]
2. 1. 반역과 유랑
1538년(덴분 7년) 혼다 도시마사의 차남으로 미카와에서 태어나, 다카가리(鷹匠, 매잡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다. 1563년(에이로쿠 6년) 미카와 잇코 잇키가 발생하자 동생 혼다 마사시게와 함께 잇키 측 무장으로 가담하여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였다.[1] 잇키가 진압되자 도쿠가와 가문을 떠나 야마토의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섬겼으나,[2] 곧 히사히데를 떠나 전국을 유랑하였다. 유랑 시기에 마사노부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가가에서 이시야마 혼간지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설이 유력하다(《번한보》(藩翰譜)).[3] 전국을 유랑한 끝에 안면이 있던 오쿠보 다다요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다시 섬길 것을 탄원하였고, 다다요의 중재로 도쿠가와 가문에 복귀하였다.[4] 복귀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빠르면 아네가와 전투 무렵, 늦으면 혼노지의 변 직전으로 보인다.[5]2. 2. 이에야스의 참모
1598년(게이초 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혼다 마사노부는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했는데, 1599년(게이초 4년) 마에다 도시나가 모반 혐의 모략 등 이에야스가 패권을 쥐는 과정에서 벌어진 모략의 대부분을 마사노부가 계획했다고 한다.[1]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막료로 종군했으나, 시나노 우에다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가 잘 싸우는 바람에 제때 참여하지 못했다. 마사노부는 히데타다에게 우에다 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진언했으나 거부당했다.[1]1601년(게이초 6년)부터 마사노부는 이에야스의 쇼군 취임을 위해 조정(朝廷)과의 교섭에 힘썼다.[1] 당시 혼간지(本願寺)에서는 전 법주(法主) 고뇨와 현 법주 준뇨 형제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마사노부는 이를 이용하여 혼간지를 분열시키고,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혼간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계책을 이에야스에게 올렸다.[1] 1603년(게이초 8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설치하자, 마사노부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서 막부 정치를 주도했다.[1] 1605년(게이초 10년) 이에야스가 은거하여 오고쇼가 되고 히데타다가 제2대 쇼군이 되자, 마사노부는 에도에서 히데타다의 고문으로 막부 정치를 이끌었으며, 1607년(게이초 12년)부터 히데타다에 의해 도시요리(年寄, 이후 로주)에 임명되었다.[1]
그러나 마사노부의 권력 획득은 혼다 다다카쓰, 오쿠보 다다치카 등 무공파(武功派)의 불만을 샀고, 막부 내에서 마사노부의 관료파와 다다카쓰의 무공파 사이에 권력 다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1] 하지만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변함없이 신임했고, 1610년(게이초 15년)에는 여러 도시요리 중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는 다이로(大老)까지 오르게 된다.[1] 1612년(게이초 17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으로 잠시 무공파의 공격을 받았지만, 1613년(게이초 18년)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을 통해 오쿠보 나가야스 일당을 실각시켰다.[1] 1614년(게이초 19년)에는 최대 정적인 오쿠보 다다치카마저 실각시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1]
2. 3. 막부 정치 주도
1582년(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당시 사카이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가를 넘어 본국으로 탈출했는데, 이때 마사노부가 동행했다.[5] 이후 이에야스는 옛 다케다 영지를 병합했고, 마사노부는 부교(奉行)로 임명되어 가이・시나노의 실질적인 통치를 담당했다.1586년(덴쇼 1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의 중신들이 관직에 임명될 때 마사노부도 종오위하 사도노카미(佐渡守)에 임명되었다.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 후, 이에야스가 간토로 옮겨가자 사가미 다마나와(相模玉縄)에 1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부터 이에야스의 참모로서 활약하며, 1599년(게이초 4년) 마에다 도시나가 모반 혐의 모략 등 이에야스의 모략 대부분을 획책했다고 한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막료로 종군했으나, 사나다 마사유키의 선전으로 전투에 늦게 참여했다. 이때 마사노부는 히데타다에게 우에다성 공격 중지를 진언했지만 거부당했다.[5]
1601년(게이초 6년)부터 이에야스의 쇼군 취임을 위한 조정과의 교섭에 힘썼다. 당시 혼간지(本願寺)의 고뇨와 준뇨 형제의 대립을 이용하여 혼간지 분열을 획책하는 것을 이에야스에게 건의하여, 한때 자신이 투신했던 혼간지 세력을 약화시켰다.
1603년(게이초 8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설치하자, 이에야스의 측근으로서 막정(幕政)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1605년(게이초 10년) 이에야스가 은거하고 히데타다가 제2대 쇼군이 되자, 마사노부는 에도에서 히데타다의 고문으로 막정을 주도했으며, 1607년(게이초 12년)부터 히데타다에 의해 도시요리(年寄, 이후 로주)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마사노부의 권력 획득은 혼다 다다카쓰, 오쿠보 다다치카 등 무공파(武功派)의 불만을 샀고, 막부 내에서 관료파와 무공파의 권력 쟁투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고, 1610년(게이초 15년)에는 다이로(大老)까지 오르게 된다. 1612년(게이초 17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으로 일시적인 공격을 받았지만, 1613년(게이초 18년)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을 통해 오쿠보 나가야스 일당을 실각시켰다. 1614년(게이초 19년)에는 오쿠보 다다치카마저 실각시켜 최대 권력을 쥐게 된다.[6]
2. 4. 말년
1614년 (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에서도 이에야스에게 많은 책략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고령으로 만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걷는 것조차 어려웠다. 1616년 (겐나 2년) 4월에 이에야스가 사망하자 적남인 마사즈미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여 일체의 공무에서 물러났다.[7][8] 그 해 6월 7일에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묘소(매장묘)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정토진종에서는 다른 종파에 비해 묘소나 유골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않다는 점을 배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8] 중세 진종 교단 중에는 묘탑 건립을 부정적으로 보는 생각도 있었고, 근세 이후에는 혼산 납골 등의 납골 의례가 성행했다.[9]
유골(일부)은 도쿄 아사쿠사의 도쿠혼지 (도쿄도 다이토구)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10] 또한, 연고가 있는 혼쇼지 (아이치현 안조시)에는 에도 시대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마사노부의 공양탑이 있으며,[8] 이것이 "묘"로 소개되기도 한다.[10] 혼쇼지 주지인 코야마 코엔은 "묘가 없다는 것이 진종 문도다운 마사노부 같다"라고 언급했다.[8]
3. 평가 및 일화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마사노부에 대해 "도쿠가와 가문의 무사들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대부분은 용맹함만 앞세우는 자들이다. 그러나 오직 마사노부만이 강하지도 않고, 유약하지도 않으며, 비굴하지도 않은, 비범한 그릇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참모로 중용하며 "벗"이라 불렀다.[11]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가토 요시아키 등 7장에게 습격당했을 때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미쓰나리의 아들 시게이에의 처우를 결정할 때 마사노부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들였다.[12][13]
한번은 이에야스가 측근들을 꾸짖자, 마사노부가 나타나 이에야스보다 더 크게 화를 내며 측근들을 호통쳤다. 이에야스는 어이없어했지만, 마사노부는 측근들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야스의 마음을 헤아려 한 행동이라고 설명하며, 부하들을 격려하여 이에야스의 화를 풀었다고 한다. ( 사나다 조요의 『메이료코한』)[13]
마사노부는 아들 마사즈미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무야 쇼쿠단』)
- "무가는 군법을 근본으로 삼는다. 군법은 군사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갖추어야 할 대비이다. 좋은 정치는 이기고, 나쁜 정치는 진다. 승부의 근본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있다."
- "나무 뿌리에 흙을 잘 덮어주고 깊게 하여 키우면 크게 성장하고, 손질을 잘하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도 많아지며, 조금 가지를 쳐내도 상하지 않는다. 그 마음으로 천하 국가의 근본으로 삼는 대법을 잃지 않도록 하라. 사농공상은 천하의 4민이다. 선비로서 섬기는 집안의 노직을 맡은 자는, 농공상을 나무의 뿌리로 삼고 소중히 길러, 자애롭게 하라. 여러 선비들은 나무와 같고, 합전하는 방식은 가지와 잎과 같다. 승부는 꽃과 열매와 같으니, 그 근본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근본은 충성과 신의를 다하는 것이고, 여러 일은 생겨나는 것이다."
마사즈미는 아버지 사후, 유지를 어기고 우츠노미야 15만 5,000석의 봉토를 얻었지만, 후에 개역되었다.
3. 1. 이에야스와의 관계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급사하자, 당시 사카이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가 넘기를 결의했다. 이때 마사노부도 함께 했다고도 전해지나(『반한보』), 이가 넘기에 동행한 34명의 수행원 중에 마사노부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덴쇼 임오의 난을 평정한 이에야스가 구 다케다 영토를 병합하자, 마사노부는 봉행으로 임명되어 가이·시나노의 실무를 담당하며 다케다 가신단을 도쿠가와 가신단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덴쇼 14년 (1586년)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자, 히데요시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의 중신들도 관직을 받았고, 마사노부도 종5위하 사도노카미(佐渡守)에 임명되었다. 덴쇼 18년 (1590년) 오다와라 정벌 후,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사가미국 타마나와에 1만 석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분로쿠 2년 (1593년) 3월 7일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속해 시나노 우에다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고전하며, 강의 범람까지 겹쳐 본대에 지각했다. 마사노부는 히데타다에게 우에다 성 공격 중지를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쿠보 가문 유서』에 따르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의 군의에서 이에야스의 후계자를 논의할 때, 이이 나오마사는 사위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를, 오쿠보 다다치카는 히데타다를 지지했다. 반면 마사노부는 장남 마사즈미와 함께 유키 히데야스를 지지했다고 한다.[5]
게이초 6년부터 이에야스의 쇼군 취임을 위한 조정 교섭에 힘썼다. 이 무렵 혼간지의 내분(교뇨와 준뇨의 대립)을 이용하여, 혼간지 세력 약화를 이에야스에게 건의했다. 게이초 8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개창하자, 마사노부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서 막부 운영을 주도했다. 게이초 10년 이에야스가 오고쇼가 되고 히데타다가 2대 쇼군이 되자, 마사노부는 에도에서 히데타다를 보좌하며 막정에 참여했고, 게이초 12년부터는 히데타다 측의 토시요리(로주)가 되었다.
게이초 17년 아들 마사즈미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의 주사인 위조 사건(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이 발생했다. 게이초 18년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 게이초 19년 오쿠보 다다치카 실각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지만, 마사노부 주도를 보여주는 동시대 사료는 없다.
게이초 18년 휴가를 받아 슨푸에서 에도로 돌아올 때, 이에야스로부터 만병환 200알과 팔미환 100알을 받았다(『슨푸기』).[6]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참모로 중용하며 "벗"이라 불렀다고 한다.[11]
마에다 도시이에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가 가토 요시아키 등 7장에게 습격당해 이에야스에게 의지했을 때, 마사노부는 심야에 이에야스를 찾아가 미쓰나리의 처우를 물었다. 이에야스는 "지금 생각 중"이라고만 답했고, 마사노부는 그 말만으로 이에야스의 의중을 파악하고 안심하고 물러났다고 한다.[12][13]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이에야스는 미쓰나리의 아들 시게이에의 처우를 고민했다. 마사노부는 시게이에를 사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쓰나리가 서국 다이묘를 규합해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킨 덕분에 도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얻게 되었으니, 이는 미쓰나리의 공"이라고 설득했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시게이에를 사면했다.[12][13]
한번은 이에야스가 측근들을 꾸짖자, 마사노부가 나타나 이에야스보다 더 크게 화를 내며 측근들을 호통쳤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의 행동에 어이없어했지만, 마사노부는 측근들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야스의 마음을 헤아려 한 행동이라고 설명하며, 부하들을 격려하여 이에야스의 화를 풀었다고 한다( 사나다 조요의 『메이료코한』).[13]
오쿠보 다다요의 『미카와 이야기』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타다의 우에다 성 공격 당시 마사노부가 공격 중지를 진언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미카와 이야기』에서는 마사노부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다요는 다다치카 개역에 마사노부가 관여했다는 이야기는 날조라고 언급했다.
3. 2. 정치적 성향
혼다 마사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에도 막부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다음과 같다.- 실리주의: 무다 가신단을 받아들이기 위해 본령 안도를 조건으로 도쿠가와 가신단으로의 참집을 호소하는 등 실리적인 판단을 중시했다.[5]
- 권모술수: 본원사의 분열을 촉진하기 위해 이에야스에게 헌책하는 등 권모술수에 능했다.[5]
- 이에야스의 측근: 에도 막부 개설 이후 이에야스의 측근으로서 막정을 주도했으며, 오고쇼가 된 이에야스와 제2대 쇼군 히데타다 밑에서 막정에 참여했다.[5]
- 히데타다와의 관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타다에게 우에다성 공격 중지를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카와 이야기』에서는 마사노부가 악역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 히데타다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5]
3. 3. 아들 마사즈미에게 남긴 교훈
혼다 마사노부는 늘 아들 마사즈미에게 "내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증지를 받을 것이다. 3만 석까지는 혼다 가문에 하사하는 분으로 받도록 하여라. 하지만 그 이상은 결코 받아서는 안 된다. 만약 사퇴하지 않으면 화가 반드시 닥칠 것이다."라고 설교했다.[14] 또한 마사노부는 히데타다에게 "만약 지금까지 정신의 봉공을 잊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자손이 이어지기를 생각하신다면, 적남 우에노노스케(마사즈미)의 소령은 지금 그대로 하고, 이보다 더 늘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고 한다.[14]그 외에도 마사노부는 마사즈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무야 쇼쿠단』)
- "무가는 군법을 여러 도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군법이란 군사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군법은 항상 갖추어야 할 대비이다. 좋은 정치는 이기고, 나쁜 정치는 진다. 승부의 근본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있다."
- "예를 들어 나무인데, 뿌리에 흙을 잘 덮어주고 뿌리를 깊게 하여 키우면 크게 성장하고, 손질을 잘하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도 많아지며, 조금 가지를 쳐내도 상하지 않는다. 그 마음으로 천하 국가의 근본으로 삼는 대법을 잃지 않도록 하라. 사농공상은 천하의 4민이다. 선비로서 섬기는 집안의 노직을 맡은 자는, 농공상을 나무의 뿌리로 삼고 소중히 길러, 이것을 자애롭게 하라. 여러 선비들은 나무와 같고, 합전하는 방식은 가지와 잎과 같다. 승부는 꽃과 열매와 같으니, 그 근본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근본은 충성과 신의를 다하는 것이고, 여러 일은 생겨나는 것이다."
마사즈미는 아버지의 사후, 그 유지를 어기고 우츠노미야 15만 5,000석의 봉토를 얻었지만, 후에 개역되었다.
4. 등장 작품
- 피의 창 사카자키 (1959년, 니혼 TV, 배우: 나쓰카와 다이지로)
- 봄의 언덕길 (1971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이와가네 시로)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배우: 미쿠니 렌타로)
- 여인 태합기 (1981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고야마 시게)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나이토 타케토시)
- 노푸의 피리 (1987년, 니혼 TV, 배우: 이노우에 아키후미)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8년, TBS, 배우: 이부키 고)
- 카스가노츠보네 (1989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하야사키 분지)
- 풍운! 사나다 유키무라 (1989년, TV 도쿄, 배우: 스게 칸타로)
- 히데요시 (1996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시시도 죠)
- 그림자 무사 도쿠가와 이에야스 (1998년, TV 아사히, 배우: 나고야 아키라)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고야마 시게)
- 토시이에와 마츠 ~카가 백만 석 이야기~ (2002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나카네 토오루)
- 텐치진 (2009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마쓰야마 마사미치)
- 고 ~ 공주들의 전국 ~ (2011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쿠사카리 마사오)
- 그림자 무사 도쿠가와 이에야스 (2014년, TV 도쿄, 배우: 메구로 유키)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곤도 마사오미)
- 온나 조슈 나오토라 (2017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롯카쿠 세이지)
-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 (2023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마쓰야마 켄이치)
- 이에야스와 미츠나리의 스마트폰 (2023년, NHK, 배우: 롯카쿠 세이지)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Politics in the Tokugawa Bakufu, 1600-1843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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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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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結城秀康について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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徳川家康―その政治と文化・芸能―
宮帯出版社
[7]
트윗
三河一向一揆で本願寺側にて功績あった【本多佐渡守正信公の墓所】を探しています。
2022-11-29
[8]
웹사이트
本多正信の供養塔
https://blog.goo.ne.[...]
2023-02-09
[9]
간행물
「無墓制」と真宗の墓制
[10]
웹사이트
あらためて本證寺の魅力体験ツアー
https://www.city.anj[...]
安城市教育委員会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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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藩翰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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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将言行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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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人物逸話大事典
角川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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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都宮藩・高徳藩
現代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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